“그냥, 자꾸 신세지는 게 싫어서요.”신세를 지다보면 점점 갚아야 할 게 많아지고.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 하는 법.뭔가를 양보해야 할 때까지 신세를 키우고 싶지 않은 강하리였다.“알았어요. 사람 필요하면 전화해요.”“네. 고맙습니다.”문가에 서서 두 사람의 통화를 들은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냥... 신세를 지기 싫어서 그런 거였어?냉소를 지은 구승훈이 외투를 벗어놓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송유라 쪽에 사람 더 보내서 24시간 밀착 감시해.”핸드폰 너머 승재가 흠칫했다.“응?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구승훈이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룸서비스로 차려진 음식들이 꽤 먹음직스러웠지만, 구승훈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건너와서 같이 밥 먹어.”결국 강하리에게 전화했다.-배 안 고프다니까요.“신세 지기 싫다며. 당장 건너와.”-...네.얼마 못 가 구승훈 앞에 나타난 강하리.테이블에는 강하리가 시킨 음식 외에 디저트 몇 접시가 더 놓여있었다.강하리가 구승훈 맞은켠에 앉았고, 그렇게 조용하기 짝이 없는 식사가 시작되었다.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씻는 거 좀 도와줘.”식사를 마친 뒤, 구승훈의 뻔뻔한 음성에 강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건 안될 것 같네요. 알아서 해결하세요.”가차없는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의 낯색이 또 어두워졌지만, 군소리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한참 후, 씻고 나온 구승훈. 팔에 감긴 붕대 한 귀퉁이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강하리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팔이 부러져서 완전히 못 쓰게 된 것도 아니고!“일부러 이러시는 거에요?”“돌봐주겠다며. 인내심이 이것밖에 안 돼?”구승훈이 픽 웃는다.강하리는 치가 떨렸지만 꾹 참고, 구급상자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이리 와요. 붕대 바꿔줄게요.”얌전히 다가와 옆에 앉는 구승훈.막 욕실에서 나온 터라, 몸에는 목욕가운 한 벌밖에 걸친 게 없었다.그걸 구승훈은 활짝 열어졎혀, 윗통을 완전히 드러냈다.
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손을 쳐냈다.“약부터 드세요. 연락처 차단 해제했으니까 일 있으면 전화하고요.”구승훈이 다시 강하리의 손을 부여잡으려는 찰나.핸드폰이 울리며 액정에 발신인이 떴다.[송유라 간호인]동시에 두 사람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잠시 후, 강하리가 한 번 웃고는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구승훈은 수신 거부를 눌러버리고는 강유라를 붙잡았다.“대답부터 좀.”핸드폰이 재촉하듯 또 울려댔다.“전화부터 받으세요.”“...오늘 일은 네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강하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믿을 수 있으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지.구승훈이 그걸 눈치챘는지 미간을 좁힌다.“못 믿겠다는 거야?”“믿고 말고를 떠나서, 아무튼,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대답을 피하는 강하리.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하지만 자꾸 울려대는 핸드폰을 놔둘 수는 없는 노릇.구승훈이 통화 수락을 눌렀다.“대표님! 유라 아가씨가... 발작한 환자가 휘드르는 칼에 찔려 응급실로 실려갔어요!”구승훈이 흠칫했다. 저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지극히 무의식적인 행동.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강하리를 돌아보니 역시나,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핸드폰 저 편에서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강하리가 못 들을 리 없었다.“여보세요? 대표님? 제 말 들리세요?”영문도 모른 채 다그치는 핸드폰 저 편 간병인.“날붙이를 금지하라고 몇 번을 당부했는데, 대체 일을 어떻게 해먹는 거야!”구승훈의 언성이 삽시간에 높아졌다.그 노기충천한 목소리에 얼어붙었는지, 한참을 말이 없던 간병인이 꺽꺽거리며 말을 이었다.“그, 그게... 오늘 방문 공연이 있단 걸 들으시고 가 보겠다고 하도 떼를 쓰셔서 모셔갔는데, 마침 거기 한 간병인이 환자에게 과일을 깎아주고 있어서요...”강하리가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승훈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집게손가락으로 꾹 집었다.그 뒤에 간병인의 말은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흐지부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준호 씨.”일찍 쉬라는 당부를 남긴 심준호가 떠났다.달콤하고 고소한 케이크 덕분이었을까, 또 잠이 안 올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강하리는 누운 지 얼마 안 가 바로 단잠에 빠졌다.이틑날 아침.박근형의 전화가 들어왔다.“가해자 공직 박탈과 채용 금지가 공지될 거라고 하더라. 대외적으론 품행 문제로 알려질 거고. 이해해 주려무나.”“그럼요 교수님.”“그리고 진 부장이 사적 관계를 좀 동용해서, 너 괴롭힌 자들을 보경시에서 쫓아냈다고 하더구나.”강하리가 움찔했다.진태형 부장이 그렇게까지나 힘을 써 줬다고?“사실 이번 회의 총괄을 하리 너에게 맡긴 데에도 진 부장이 힘 많이 썼어. 하리야, 열심히 해야 한다?”박 교수의 타이름에 강하리가 저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통화를 마친 한참 뒤까지도 강하리는 실감이 되지 않았다.진 부장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힘써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한참을 생각해도 감이 잡히질 않자, 강하리는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하려고 진태형에게 전화했다.웬걸, 전화를 받은 진태형은 온통 강하리를 위로하는 말 뿐이었다.‘이게 아닌데.’고맙다는 말은 뻥긋도 못 한 채, 강하리는 몸둘 바를 몰랐다.과분한 애정인 것 같아 그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다.“고맙습니다 부장님. 다음번에 올 때 꼭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하하!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리 양.”통화를 마친 강하리는 바로 연성으로 돌아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연성시 공항 터미널.비행모드를 끄자마자 간병인 아줌마의 전화가 들어왔다.설마? 엄마가 위독해진 거?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강하리. 급급히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어머님이 깨어나셨어요! 어서 와 보세요!”기쁨에 떨리는 아줌마의 목소리였다.강하리의 머릿속이 웅 울렸다.문득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싶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엄마가 계신 병실 문 앞이었다.떨리는 손으로 강하리가 문 손잡이를 돌렸다.아늑한 병실. 그리고 조금은 멍한 얼굴로
구승훈에게 한 번, 힐끔 눈길을 준 강하리가 병실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녀를 급급히 붙잡는 구승훈.“하리야! 송유라가-.”“죽었어요?”강하리의 물음에 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의 얼굴이 시퍼래졌다.“...다 나으면 외국에 보낼 거야.”“아, 고작 외국이었어요? 난 또 천국에라도 보내는 줄.”강하리가 픽 웃었다.구승훈의 이마에 핏줄이 푸뜰 뛰었다.“아, 아니지. 사탄도 울고 갈 애가 천국에 어떻게 가.”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강하리가 구승훈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알아서들 하세요.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까.”“강하리!”구승훈이 쓴 맛이 감도는 침을 삼켰다.“송유라와 더이상 엮이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냥... 죽는 걸 놔둘 수가 없어서-.”“그러면 지금 여기 계실 게 아니라, 송유라 곁에 가 지켜주셔야죠.”구승훈은 왠지 어깨가 점점 처지는 기분이었다. 힘이 점점 더 빠지는 것만 같았다.보경시까지 쫄래쫄래 따라가 명예도 지켜주고 심지어는 칼까지 막아줬는데.송유라가 죽는 걸 방관할 수가 없는 것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된단 말인가.“야 강하리, 너는 양심도 없냐?”구승훈의 입에서 앙탈 비슷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없는 걸로 쳐요. 전 괜찮으니까.”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강하리의 표정에 구승훈이 벙어리가 되었다.한 참이 지나서야.“어머니 깨셨다면서. 축하해.”겨우 한 마디 꺼낸 구승훈.“네. 감사합니다.”짤막한 강하리의 대답.“온 김에 한 번 뵐 수-.”“없어요.”한 수 더 친 구승훈의 말에 더 짧게 끊어버리는 강하리.이 양아치가 몇 년 간의 약값이 어디서 온 건지 떠벌이기라도 할까 봐서였다.말을 마친 강하리는 바로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또 혼자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가슴이 답답해났고 짜증이 솟구쳤다.정신없이 달려가는 강하리를 쫓아왔고.유리창 너머로 정신없이 펑펑 우는 강하리를 지켜보기도 했다.하지만 그 결과는 병실 문도 못 들어서는 신세.어젯밤
“... 아의야.”“네, 엄마.”“가... 하, 의.”“네 엄마. 저 여깄어요.”병실 안.강하리가 굳은 엄마의 손가락을 꼭꼭 눌러주고 있었다.정서원의 눈길은 그런 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이따금씩 딸을 불러보려 입을 열었지만, 하도 오래 쓰지 않은 혀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엄마가 깨어났는데.따뜻하게 웃으며 이렇게 부를 수도 있는데.강하리는 엄마의 부름소리가 들릴 때마다 또랑또랑 대답해 주었다.문득, 엄마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병실문 유리창에 비치는 뒷모습을 가리켰다.강하리는 문득 코끝이 찡해났다.엄마 옆에 기대앉아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아직 안 간 건 진작부터 알고있었다.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송유라가 일이 생기기만 하면 둘의 관계에 깊은 골짜기가 쩍쩍 파이는데.정승처럼 병실 문앞을 지키고있는 구승훈.그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구승훈을 보고는 흠칫했다.늦게나마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치고 부랴부랴 달려온 손연지였다.“안녕하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이 송유라를 정신병원에 보낸 걸 알고있는지라, 모처럼 구승훈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는 손연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이 없었다.왜 안 들어가냐고 물으려다가 꾹 참은 손연지가 구승훈을 에돌아 병실 문을 떼고 들어섰다.닫히는 문틈으로 강하리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아마 네가 어떻게 왔냐고 묻는 말일 거다.이윽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구승훈은 꿈쩍도 않고, 병실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형! 역시 여기 있었네.”승재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송유라가 또 날뛰고 있어. 형 만나겠다면서 병실 안을 다 뒤집어놨어.”“송씨 집안 그 메디컬사 자금 지원 끊어버려.”구승훈이 서늘한 목소리로 분부를 내렸다.강하리에게 진 빚을 송유라가 갚지 못한다면, 그 집안이라도 대신 갚아 줘야지.누군가는 갚아야 하는 거니까.승재가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형, 그러잖아도
구승훈이 냉소를 머금었다.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아예 강하리와 완전히 갈라서라는 건가?“아닐 거야 형. 누군가가 연지 씨한테 덤터기 씌운 게 분명해.”승재가 급급히 덧붙였다.구승훈은 말없이 꾹 닫힌 병실문을 바라보다가, 한쪽 켠으로 멀어져갔다.“저 두 사람 나와 보라고 해.”구승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승재가 병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유리창으로 승재를 본 강하리가 문을 열었다.“승재 씨? 어쩐 일이에요?”의아한 강하리의 얼굴. 승재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강 부장, 잠시 나와볼 수 있을까요?”거절하려던 강하리가 승재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와 문을 닫으려는 순간.“연지 씨도 함께요.”강하리가 멈칫했다. 연지는 왜?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급습했다.“뭐가 잘못된 거예요?”“일단 같이 저 쪽으로 가서 천천히 얘기해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지를 불렀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서 근처 한 카페에 들어갔다.구석진 자리에 한없이 어둡기만 한 얼굴을 한 구승훈이 보이자,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이번에는 수작질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승재를 돌아보자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승재.그제야 강하리는 손연지를 이끌고 구승훈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무슨 일이죠?”구승훈 옆에 앉은 승재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손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무슨 그런 미친! 내가 왜 돈까지 들여가며 그 싸구려 년을 죽여야 해요? 정신병원에 처박혀서 찌그러지는 걸 보는 게 더 후련한데?”승재의 미간이 꿈틀했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손연지는 어젯저녁에 보경시에서 있었던 일을 몰랐다.때문에 자연스레 송유라의 말로가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하지만 강하리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지옥 끝에서라도 수작질을 꾸밀 송유라란 걸.타이밍 역시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어제 구승훈과 그런 얘기를 하기 바쁘게 단서들이 손연지를 향하다니.
썩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손연지의 “내가 한 거 아니에요”로 마무리되었다.“가 보셔도 좋습니다, 연지 씨.”구승훈의 무거운 음성이 떨어지자 바람으로, 승재가 구승훈을 한 번, 강하리를 한 번 보고는 손연지를 이끌고 도망치듯 나갔다.“아닛, 이거 좀 놔 봐요! 하리! 하리는요?”“강 부장은 남아서 어떻게 해결할지 형이랑 상의해야 할 거예요.”손연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승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구 대표님이 하리를 정말 믿을까요?”“안 믿었으면 이렇게 조용히 대화할 게 아니라, 바로 경찰 불렀겠죠.”“하긴. 쓰레기가 일말의 양심은 있나 보네.”“...잠시만, 지금 그거 우리 형 얘기예요?”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손연지의 말에 흰자를 까뒤집는 승재.“왜요. 하리 그렇게 대해 놓고는 쓰레기가 약과지.”“...”할 말이 없다 없어....“그래서, 할 얘기가 뭐예요?”손연지가 승재와 떠난 뒤,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넌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손연지는 혐의를 벗을 수가 없는 상황이야.”“연지가 그런 애 아니란 거 잘 아시잖...”강하리의 외침이 뚝 끊겼다.생각해 보니, 구승훈이 손연지에 대해 잘 알 리 만무했기 때문.게다가 구승훈과 송유라를 볼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던 손연지기도 했다.“내가 본 손연지 씨는 착한 사람이었어.”구승훈이 입을 다시 열었다.“하지만!”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지는 구승훈의 음성.“성격이 불 같은 데다가, 송유라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기도 하지.”“그래서 지금, 연지가 송유라 같은 년 때문에 손 더럽히기라도 한다는 뜻인가요?”강하리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구승훈을 쏘아보았다.“혐의가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부인할 수 있어?”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내가 제대로 조사해 낼 거예요!”“어떻게?”구승훈의 외마디 물음에 말문이 막힌 강하리.울화가 치밀어 가슴이 들썩였지만, 아직 그럴만 한 인맥과 세력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내가
병원 청소부가 대걸레질을 하다가 잊고 간 양동이였다.대걸레를 빨고 그 대로 놓아둔.눈길을 걸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남긴 시커먼 발자국을 닦던 대걸레였고.그걸 빤 양동이의 물은 거의 흙탕물 수준.그 오수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병실 안, 송유라의 온 몸에 끼얹어졌다.시간이 정지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은 송유라.거뭇거뭇한 액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송유라 옆에 있다가 같이 봉변을 당한 장진영의 멍해진 얼굴에서도 흘러내렸다.병실 안 모든 사람의 얼빠진 눈길이 씩씩거리는 손연지에게 쏠렸다.“야 이 염통 썩어 빠진 썅년아! 엄한 사람 갈구는 게 재밌니? 사람 해치는 게 취미야? 니 부모님은 대체 똥을 얼마나 쳐 드셨길래 너 같은 희대의 악녀를 낳았냐? 너 같은 걸 그나마 사람 취급해 주는 구승훈이 부처님으로 다 보인다 야!”손연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다발총 연사로 쏟아져 나왔다.온갖 방면으로 골고루 두드려 패는 욕설에 송유라의 동공에 9급 대지진이 일어났다.“이... 이 천박한 년이...”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송유라.“이 미친 년이 감히... 물을 끼얹어? 이...벌레 같은 년이?”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안면이 푸들푸들 떨리기까지 했다.“끼얹고 보니 물이 아깝네! 요강 들고올 걸 그랬나?”한 술 더 뜨는 손연지.병실 안에 있던 노민우가 헤 벌어진 입을 황급히 닫았다.뭐지? 여건달? 산적 여두목?한 손으로 옆구리를 척 짚은 채 세상 들어본 적 없는 욕설을 퍼붓는, 전투력 만렙 손연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맺혔다.“끼아아아악!”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장진영이 비명을 내질렀고, 날카로운 그 소리에 병실 안 일동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병실 밖에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던 강하리가 부랴부랴 병실에 들어섰다. “참, 대단하네요. 강 경리 친구분.”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미소가 어렸다.강하리는 말 없이 손연지를 끌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병실 문에 기대 선 구승훈을 지나 병실을
여명주는 얼굴이 붉어지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노민우 오빠, 저 할 수 있어요.”노민우의 관자놀이가 뛰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조수석 문이 다시 열렸다.손연지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노민우는 그녀를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여명주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노민우 오빠, 이게 무슨 일이에요?”노민우는 갑자기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손연지가 술을 마셔서 내가 데려다 주려고요. 여명주 씨는 먼저 들어가세요.”말을 끝내고 그는 여명주를 밀어내며 손연지에게 다가갔다.손연지는 여전히 정신이 흐릿했지만 노민우가 다가오자 갑자기 그에게 한 대 때렸다.때리고 나서 잠시 얼떨떨해하던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비비며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노민우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어디 가는 거야?”손연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때 여명주가 갑자기 다가와 손연지의 얼굴에 가방을 던졌다.“이 여우 같은 여자. 노민우 오빠를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서 오빠를 때리기까지 하다니.”손연지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노민우는 급하게 말했다.“여명주 씨, 이제 그만해요!”여명주는 잠시 멈칫했다.“오빠, 정말 이런 여자 때문에 화내는 거에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돌아서 손연지를 안고 차로 향했다.여명주는 뒤에서 소리 지르며 따라갔지만 노민우는 손연지를 차에 태우고 바로 차를 몰았다.노민우는 손연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그녀의 이마 상처는 계속 피가 나고 있었고 손연지는 의자에 기대어 말없이 앉아 있었다.노민우는 손연지를 한 번 쳐다봤지만 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었다.노민우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예전에 손연지가 여명주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때나 그의 어머니가 손연지를 집으로 데려와 모욕했을 때도 그는 그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그런 상황은 그에게 그저 가볍게 알고 있는 일일 뿐이었다.그래서 그는 사실 손연지가 왜 그렇게 과격하게 반응했는지
노민우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손연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깊이 응답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애틋하고 끈적한 느낌으로 변했다.노민우는 손을 뻗어 손연지의 의자 등을 부드럽게 눕혔고 그 후 자신도 몸을 살짝 기울였다.“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노민우는 손연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손연지의 술버릇을 익히 알고 있었다.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손연지는 술에 취해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그는 오늘만큼은 꼭 물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게다가 최근 소영준이 손연지에 대해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손연지가 그 사람과 다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민우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고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잡고 힘껏 꼬집었다.“노민우, 너 진짜 이상해.”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나한테 말할 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없냐?”손연지는 짜증이 나서 그를 밀어냈고 노민우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비록 술을 마셨지만 손연지는 여전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움직이자 노민우는 조금 흥분을 느꼈다.노민우는 목을 몇 번 굴린 뒤 힘으로 그녀를 눌렀다.“움직이지 마!”“너 나한테 화내는 거야?”손연지는 갑자기 속상해 보였다.노민우는 당황했다.“...““아이고. 미안해. 제발 움직이지 마. 그럼 진짜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그 순간 손연지는 갑자기 그의 입술을 물었다.노민우는 이미 반응을 보였고 손연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손을 들어 손연지의 옷을 벗기고 입을 맞췄다.“해도 될까?”목소리를 낮추며 노민우는 손연지의 턱을 잡았다.“말하지 않으면 네가 동의한 걸로 간주할게.”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차 안은 어느새 숨소리와 낮은 신음 소리만 가득했다.노민우는 재빨리 벨트를 풀었지만 그가 다음
“우리 연애 하자고. 어떻게 생각해?”연애라는 두 글자가 노민우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손연지는 심장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사실 그녀는 노민우와 무언가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예전에 말했던 1년은 단지 자신과 노민우에게 시간을 주는 방식에 불과했다.결국 신분 차이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만약 노민우가 결혼을 취소한다고 해도 노씨 가문은 아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노민우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흔들리긴 해도 옳고 그름은 확실히 구별할 수 있었다.“너 약혼녀가 있는데 밖에서 여자친구를 사귀는 거 본 적 있어? 그럼 결국 너와 약혼녀가 결혼하고 나면 나는 네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거야? 너 나를 바보로 아냐?”손연지는 말하면서 그의 머리를 가볍게 쳤고 노민우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말했다.“그럼 결국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어쩔 거야?”“만약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어떡할 건데?”“그만둬. 사실 나랑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잖아 맞지?”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계단을 내려갔고 아래층 거실에서는 모두 준비가 끝나 있었다.손연지는 노연정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 뒤를 노민우가 따랐다.천아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강하리에게 말했다.“여씨 가문 사람들이 또 와서 문제를 일으킬 거예요. 강하리 씨가 바쁠 때는 말해주세요. 제가 손연지 씨와 함께 있을게요.”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웨딩사진 촬영은 사실 강하리가 특별히 복잡하게 찍을 생각은 없었다.할아버지가 꼭 이 절차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생략했을 것이다.하지만 사진을 찍고 나서 컴퓨터 화면에 찍힌 한 장 한 장을 보면서 강하리는 이것이 사실 구승훈과 함께 찍은 첫 번째 사진임을 깨달았다.그녀는 옆에서 노민우와 얘기하는 구승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손연지는 옆에서 혀를 찼다.“사실 나는 너희 둘이 결혼까지 갈
손연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노민우를 밀어냈다.“너 진짜 병 있는 거 아니야?”노민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문에 다시 밀어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넌 내가 병이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잖아?”손연지는 이를 악물며 갑자기 예전에 노민우가 뻔뻔하게 산부인과를 예약하고 다녔던 일이 떠올랐다.“아쉽네. 그럼 난 상종 안 하는데.”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그럼 내가 안 하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너 두세 달 동안 안 했던 거 아니야?”노민우는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이빨이 아픈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손연지의 두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재빨리 손연지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어 작은 전기충격기를 꺼냈다.그 물건을 보고 노민우는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예전에 그가 그녀의 스폰서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손연지는 노민우를 오랫동안 무시했다.후에 노민우가 손연지를 찾으러 갔을 때 전기충격기에 다쳤다.그때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맞고 두세 달 동안 문제가 생겼었는데 결국은 그의 형이 약을 처방해 주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그 일 때문에 형은 그에게 계속 영양제를 먹으라고 했었다.“너 아직도 이거 갖고 있었어?”손연지는 그를 발로 차며 말했다.“다시 넣어둬.”노민우는 그걸 주머니에 넣으며 말끝을 흐렸다.“잠깐만 얘기 끝내고 돌려줄게.”“얘기할 것도 없어.”노민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조금만 얘기해 얘기 끝내고 손 좀 놔줄게. 그때 넌 날 때리지는 마.”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해봐.”노민우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지만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손연지는 그의 다리를 차버렸고 노민우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손연지, 약속을 어기는 거야?”“누가 먼저 안 지켰는데?”손연지는 발그레해진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고 노민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 손목을 살펴보며 물었다.“아파?”“당연하지. 네가 바바 안
“강하리, 오늘 웨딩 촬영하는 거 알고 있어?”강하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고 있던 잠옷을 끌어 올렸다.“잠시 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거야.”손연지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그래.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강하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곧 심예진이 도착했다.그녀와 함께 온 사람들은 천아름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온 일행이었다.강하리는 심예진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숙모 왔어요?”심예진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나 부르는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심예진은 맑은 눈으로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모라고 불러. 심준호 오빠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난 심호준 씨를 그냥 오빠라고 생각해.”강하리는 가볍게 웃었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메이크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강하리는 피부가 좋아서 가볍게 파우더만 발라도 충분했지만 목에 남은 흔적을 가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천아름은 강하리의 앞에 다가와서 혀를 차며 말했다.“진지하게 남편 바꿀 생각 없어요? 며칠 전엔 손목이더니 오늘은 목이네요. 너 남편 인성이 있긴 있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옆에서 노연정과 놀고 있던 손연지도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가끔은 하리가 구승훈 씨에게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예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설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손연지는 한숨을 쉬었다.“사람이 너무 외모에 홀리면 안 돼요. 그 나쁜 남자가 잘생기긴 했지만…”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 쪽에서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나보다 잘생기진 않았겠죠?”손연지는 몸을 굳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노민우가 있었다.그녀는 멍하니 노민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동자가 흔들렸다.노민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왜? 보고 넋이라도 나간 거야?”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손연지는 시선을 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들었지만 한 시간 전에 걸려 온 낯선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찌푸린 채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막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하리 씨,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하지만 구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며칠 전 결혼 준비로 바쁘다며 모든 치료를 중단하셨습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인데 이대로 멈추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발 구 대표님을 설득해 치료를 계속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강하리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손가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메시지에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지만 강하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임희주 외에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떨구고 메시지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정말로 모든 치료를 중단한 건가?’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임희주에게 문자를 보냈다.[구승훈 씨가 치료를 중단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임 선생님도 치료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시작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임희주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강하리 씨, 아직 저한테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면 구 대표님이 치료를 거부하는 게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강하리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버렸고 더 이상 임희주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말한 대로 구승훈을 믿었다.구승훈은 그녀와 노연정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 전체가 유난히 조용했고 창밖에는 정원의 희미한 가로등 몇 개만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은 깊은 밤보다 더 어두웠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구승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큰어머님의 집사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