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에게 한 번, 힐끔 눈길을 준 강하리가 병실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녀를 급급히 붙잡는 구승훈.“하리야! 송유라가-.”“죽었어요?”강하리의 물음에 말문이 꺽 막힌 구승훈의 얼굴이 시퍼래졌다.“...다 나으면 외국에 보낼 거야.”“아, 고작 외국이었어요? 난 또 천국에라도 보내는 줄.”강하리가 픽 웃었다.구승훈의 이마에 핏줄이 푸뜰 뛰었다.“아, 아니지. 사탄도 울고 갈 애가 천국에 어떻게 가.”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강하리가 구승훈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알아서들 하세요.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까.”“강하리!”구승훈이 쓴 맛이 감도는 침을 삼켰다.“송유라와 더이상 엮이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냥... 죽는 걸 놔둘 수가 없어서-.”“그러면 지금 여기 계실 게 아니라, 송유라 곁에 가 지켜주셔야죠.”구승훈은 왠지 어깨가 점점 처지는 기분이었다. 힘이 점점 더 빠지는 것만 같았다.보경시까지 쫄래쫄래 따라가 명예도 지켜주고 심지어는 칼까지 막아줬는데.송유라가 죽는 걸 방관할 수가 없는 것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된단 말인가.“야 강하리, 너는 양심도 없냐?”구승훈의 입에서 앙탈 비슷한 말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없는 걸로 쳐요. 전 괜찮으니까.”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강하리의 표정에 구승훈이 벙어리가 되었다.한 참이 지나서야.“어머니 깨셨다면서. 축하해.”겨우 한 마디 꺼낸 구승훈.“네. 감사합니다.”짤막한 강하리의 대답.“온 김에 한 번 뵐 수-.”“없어요.”한 수 더 친 구승훈의 말에 더 짧게 끊어버리는 강하리.이 양아치가 몇 년 간의 약값이 어디서 온 건지 떠벌이기라도 할까 봐서였다.말을 마친 강하리는 바로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또 혼자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구승훈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가슴이 답답해났고 짜증이 솟구쳤다.정신없이 달려가는 강하리를 쫓아왔고.유리창 너머로 정신없이 펑펑 우는 강하리를 지켜보기도 했다.하지만 그 결과는 병실 문도 못 들어서는 신세.어젯밤
“... 아의야.”“네, 엄마.”“가... 하, 의.”“네 엄마. 저 여깄어요.”병실 안.강하리가 굳은 엄마의 손가락을 꼭꼭 눌러주고 있었다.정서원의 눈길은 그런 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이따금씩 딸을 불러보려 입을 열었지만, 하도 오래 쓰지 않은 혀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엄마가 깨어났는데.따뜻하게 웃으며 이렇게 부를 수도 있는데.강하리는 엄마의 부름소리가 들릴 때마다 또랑또랑 대답해 주었다.문득, 엄마가 반대쪽 손을 들어 병실문 유리창에 비치는 뒷모습을 가리켰다.강하리는 문득 코끝이 찡해났다.엄마 옆에 기대앉아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아직 안 간 건 진작부터 알고있었다.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송유라가 일이 생기기만 하면 둘의 관계에 깊은 골짜기가 쩍쩍 파이는데.정승처럼 병실 문앞을 지키고있는 구승훈.그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구승훈을 보고는 흠칫했다.늦게나마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를 제치고 부랴부랴 달려온 손연지였다.“안녕하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이 송유라를 정신병원에 보낸 걸 알고있는지라, 모처럼 구승훈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는 손연지.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이 없었다.왜 안 들어가냐고 물으려다가 꾹 참은 손연지가 구승훈을 에돌아 병실 문을 떼고 들어섰다.닫히는 문틈으로 강하리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아마 네가 어떻게 왔냐고 묻는 말일 거다.이윽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구승훈은 꿈쩍도 않고, 병실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형! 역시 여기 있었네.”승재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송유라가 또 날뛰고 있어. 형 만나겠다면서 병실 안을 다 뒤집어놨어.”“송씨 집안 그 메디컬사 자금 지원 끊어버려.”구승훈이 서늘한 목소리로 분부를 내렸다.강하리에게 진 빚을 송유라가 갚지 못한다면, 그 집안이라도 대신 갚아 줘야지.누군가는 갚아야 하는 거니까.승재가 멈칫했다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형, 그러잖아도
구승훈이 냉소를 머금었다.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아예 강하리와 완전히 갈라서라는 건가?“아닐 거야 형. 누군가가 연지 씨한테 덤터기 씌운 게 분명해.”승재가 급급히 덧붙였다.구승훈은 말없이 꾹 닫힌 병실문을 바라보다가, 한쪽 켠으로 멀어져갔다.“저 두 사람 나와 보라고 해.”구승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승재가 병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유리창으로 승재를 본 강하리가 문을 열었다.“승재 씨? 어쩐 일이에요?”의아한 강하리의 얼굴. 승재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강 부장, 잠시 나와볼 수 있을까요?”거절하려던 강하리가 승재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와 문을 닫으려는 순간.“연지 씨도 함께요.”강하리가 멈칫했다. 연지는 왜?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급습했다.“뭐가 잘못된 거예요?”“일단 같이 저 쪽으로 가서 천천히 얘기해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지를 불렀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서 근처 한 카페에 들어갔다.구석진 자리에 한없이 어둡기만 한 얼굴을 한 구승훈이 보이자, 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이번에는 수작질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승재를 돌아보자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승재.그제야 강하리는 손연지를 이끌고 구승훈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무슨 일이죠?”구승훈 옆에 앉은 승재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손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무슨 그런 미친! 내가 왜 돈까지 들여가며 그 싸구려 년을 죽여야 해요? 정신병원에 처박혀서 찌그러지는 걸 보는 게 더 후련한데?”승재의 미간이 꿈틀했고, 강하리는 구승훈을 돌아보았다.손연지는 어젯저녁에 보경시에서 있었던 일을 몰랐다.때문에 자연스레 송유라의 말로가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하지만 강하리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지옥 끝에서라도 수작질을 꾸밀 송유라란 걸.타이밍 역시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어제 구승훈과 그런 얘기를 하기 바쁘게 단서들이 손연지를 향하다니.
썩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손연지의 “내가 한 거 아니에요”로 마무리되었다.“가 보셔도 좋습니다, 연지 씨.”구승훈의 무거운 음성이 떨어지자 바람으로, 승재가 구승훈을 한 번, 강하리를 한 번 보고는 손연지를 이끌고 도망치듯 나갔다.“아닛, 이거 좀 놔 봐요! 하리! 하리는요?”“강 부장은 남아서 어떻게 해결할지 형이랑 상의해야 할 거예요.”손연지의 다급한 목소리에 승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구 대표님이 하리를 정말 믿을까요?”“안 믿었으면 이렇게 조용히 대화할 게 아니라, 바로 경찰 불렀겠죠.”“하긴. 쓰레기가 일말의 양심은 있나 보네.”“...잠시만, 지금 그거 우리 형 얘기예요?”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손연지의 말에 흰자를 까뒤집는 승재.“왜요. 하리 그렇게 대해 놓고는 쓰레기가 약과지.”“...”할 말이 없다 없어....“그래서, 할 얘기가 뭐예요?”손연지가 승재와 떠난 뒤,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넌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손연지는 혐의를 벗을 수가 없는 상황이야.”“연지가 그런 애 아니란 거 잘 아시잖...”강하리의 외침이 뚝 끊겼다.생각해 보니, 구승훈이 손연지에 대해 잘 알 리 만무했기 때문.게다가 구승훈과 송유라를 볼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던 손연지기도 했다.“내가 본 손연지 씨는 착한 사람이었어.”구승훈이 입을 다시 열었다.“하지만!”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지는 구승훈의 음성.“성격이 불 같은 데다가, 송유라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기도 하지.”“그래서 지금, 연지가 송유라 같은 년 때문에 손 더럽히기라도 한다는 뜻인가요?”강하리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구승훈을 쏘아보았다.“혐의가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부인할 수 있어?”구승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내가 제대로 조사해 낼 거예요!”“어떻게?”구승훈의 외마디 물음에 말문이 막힌 강하리.울화가 치밀어 가슴이 들썩였지만, 아직 그럴만 한 인맥과 세력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내가
병원 청소부가 대걸레질을 하다가 잊고 간 양동이였다.대걸레를 빨고 그 대로 놓아둔.눈길을 걸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남긴 시커먼 발자국을 닦던 대걸레였고.그걸 빤 양동이의 물은 거의 흙탕물 수준.그 오수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병실 안, 송유라의 온 몸에 끼얹어졌다.시간이 정지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은 송유라.거뭇거뭇한 액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송유라 옆에 있다가 같이 봉변을 당한 장진영의 멍해진 얼굴에서도 흘러내렸다.병실 안 모든 사람의 얼빠진 눈길이 씩씩거리는 손연지에게 쏠렸다.“야 이 염통 썩어 빠진 썅년아! 엄한 사람 갈구는 게 재밌니? 사람 해치는 게 취미야? 니 부모님은 대체 똥을 얼마나 쳐 드셨길래 너 같은 희대의 악녀를 낳았냐? 너 같은 걸 그나마 사람 취급해 주는 구승훈이 부처님으로 다 보인다 야!”손연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다발총 연사로 쏟아져 나왔다.온갖 방면으로 골고루 두드려 패는 욕설에 송유라의 동공에 9급 대지진이 일어났다.“이... 이 천박한 년이...”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송유라.“이 미친 년이 감히... 물을 끼얹어? 이...벌레 같은 년이?”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안면이 푸들푸들 떨리기까지 했다.“끼얹고 보니 물이 아깝네! 요강 들고올 걸 그랬나?”한 술 더 뜨는 손연지.병실 안에 있던 노민우가 헤 벌어진 입을 황급히 닫았다.뭐지? 여건달? 산적 여두목?한 손으로 옆구리를 척 짚은 채 세상 들어본 적 없는 욕설을 퍼붓는, 전투력 만렙 손연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맺혔다.“끼아아아악!”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장진영이 비명을 내질렀고, 날카로운 그 소리에 병실 안 일동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병실 밖에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던 강하리가 부랴부랴 병실에 들어섰다. “참, 대단하네요. 강 경리 친구분.”강하리를 본 안현우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미소가 어렸다.강하리는 말 없이 손연지를 끌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병실 문에 기대 선 구승훈을 지나 병실을
“하, 하리야, 미안해. 내가 참았어야 하는 건데.”병원 입구에서 고개를 푹 떨구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손연지.저지르고 보니 후회막심인 손연지였다.송유라 혼자만 있었다면 모를까, 하필이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송유라를 막 대하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그 독사 같은 여자한테 꼬투리가 잡힌 게 걱정이었다.자신에게든 강하리에게든 독니를 박을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 되니까.“나 생각해 줘서 그런 거 다 알아. 하지만 다신 그러지 마, 응?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유라’잖아.”강하리의 말에 손연지가 흠칫 몸을 떨었다.강하리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음모궤계를 퍼부은 송유라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지라,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나고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그런 손연지의 모습에 강하리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걱정 마. 네가 나 지켜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 지켜줄 거야.”“미안해. 나 때문에.”“네가 뭐가 미안해. 오히려 미안한 건 나지. 걱정 말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널 놔두고 어떻게 가.”송유라의 병실에 모여든 사람들, 그 사람들의 타깃은 누가 봐도 강하리였다.“괜찮아. 나는-.”바로 그때 그들 앞에 멈춰선 차 한 대.유리창이 내려갔고, 담배를 문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걱정 마. 구승훈이 있잖아.”딱 봐도 자신을 데리러 온 구승훈이었다.정말이지 엮이기가 싫지만, 앞서 한 약속에 묶인 몸이었다.“언제 돌아와?”손연지의 걱정스런 말투.“음, 엄마 돌봐드리느라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손연지는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간병인 아줌마에게 꼭 귀띔해 줘라느니, 자기 전 문을 꼭 걸어 잠그라느니 부탁을 한가득 늘여놓으면서 떠났다.손연지가 떠나간 뒤, 강하리가 구승훈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CCTV 보러 가자.”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구승훈의 음성이었다.그제야 강하리는 구승훈이 언제 갈아입었는지, 말끔한 정장 차림이란 걸 발견했다.은은한 우드향 향수 냄새까지 풍
이 말을 들은 강하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그녀만을 원한다면서 송유라를 놓칠 수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구승훈 씨, 한 사람만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구승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원하는 것이고 유일하다는 의미였다.강하리는 그가 지금까지 원했던 유일한 여자였다. 이건 무슨 일이 생겨도 바꿀 수 없었다. 그는 송유라를 원한 적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가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는 건 단지 그 어린 시절의 작은 우정 때문이었다.그녀가 없었더라면 그가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좀 챙겨주는 것뿐이었다.“하리야, 나는 유라에게서 남녀 사이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강하리는 얼떨떨해졌다.남녀 사이의 정이 없었다고?“예전엔 연인이었잖아요.”구승훈의 눈빛에 냉기가 돌았다.“그때도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어. 나는 유라에게 마음을 가진 적이 없어.”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꽉 쥐었다.그녀는 구승훈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몰랐다.하지만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바로 그가 송유라를 놓지 못한다는 것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연지가 오늘 송유라에게 물을 뿌리는 건 단지 너무 화가 난 것 때문이지만 송유라가 저지른 일을 보면 물을 맞아도 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발 송유라를 잘 챙기세요. 그리고 연지에게 불리한 일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구승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친구 성격이 보통이 아니네.”강하리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녀는 손연지대신에 변명을 몇 마디 해주었다.“연지는 성격이 불같지만 무리하게 소란을 피운 적은 없어요. 연지가 오늘 이렇게 한 이유는 대표님께서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단지 다른 사람이 그녀를 이용해서 저를 모함하기 때문이에요.”구승훈은 잠시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누군가가 손연지를 이용해 강하리를
연락처를 삭제한 그는 계속 강하리를 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자신의 손을 빼며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전 신경 안 쓴다고 했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대답했다.“응,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냥 네 손을 빌렸을 뿐이야.”강하리는 입꼬리를 오므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정주현과 정양철을 만났다.정주현은 구승훈을 보고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이 왜 여기 계세요? 구 대표님 첫사랑인 송유라 씨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왜 보러 가시지 않고...”구승훈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다. 그는 강하리를 본 후 굳은 표정으로 정주현을 바라보았다.“소식이 빠르시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신이 유라를 짝사랑하는 줄 알겠어요.”정주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제가 누구를 짝사랑하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구승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 대표님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정주현은 순간 이 남자의 뻔뻔함에 탄복했다.구승훈, 구 대표, 구 씨 집안의 권력자, 이 대단한 남자가 여기서 몇 마디로 질투까지 하다니.강하리는 두 사람의 말다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양철만 쳐다보았다.“정 이사님은 어디 아프세요?”정양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불편할 수밖에 없죠.”“방금 검사를 받았는데 큰 문제는 없고 모두 작은 병이래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주현이 바로 옆에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나이가 들수록 더 엄살이 심해서 그래요.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검사해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정양철은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정주현은 웃으며 그를 피해 강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상의할 일이 있어요.”강하리는 생각 하지도 않고 승낙했다.구승훈의 안색이 변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간단히 이야기하고 헤어졌다.강하리와 구승훈은 병원 보안실로 향했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