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처를 삭제한 그는 계속 강하리를 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자신의 손을 빼며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전 신경 안 쓴다고 했어요.”구승훈이 웃으며 대답했다.“응,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냥 네 손을 빌렸을 뿐이야.”강하리는 입꼬리를 오므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정주현과 정양철을 만났다.정주현은 구승훈을 보고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이 왜 여기 계세요? 구 대표님 첫사랑인 송유라 씨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왜 보러 가시지 않고...”구승훈의 눈빛이 살짝 번뜩였다. 그는 강하리를 본 후 굳은 표정으로 정주현을 바라보았다.“소식이 빠르시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신이 유라를 짝사랑하는 줄 알겠어요.”정주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제가 누구를 짝사랑하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구승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 대표님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정주현은 순간 이 남자의 뻔뻔함에 탄복했다.구승훈, 구 대표, 구 씨 집안의 권력자, 이 대단한 남자가 여기서 몇 마디로 질투까지 하다니.강하리는 두 사람의 말다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양철만 쳐다보았다.“정 이사님은 어디 아프세요?”정양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불편할 수밖에 없죠.”“방금 검사를 받았는데 큰 문제는 없고 모두 작은 병이래요.”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주현이 바로 옆에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나이가 들수록 더 엄살이 심해서 그래요.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검사해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정양철은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정주현은 웃으며 그를 피해 강하리에게 다가와 말했다.“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상의할 일이 있어요.”강하리는 생각 하지도 않고 승낙했다.구승훈의 안색이 변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간단히 이야기하고 헤어졌다.강하리와 구승훈은 병원 보안실로 향했
하지만 그는 이 말을 강하리에게 하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강하리는 또 자신이 송유라를 보호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누가 CCTV에 손을 댔나요?”강하리가 옆에서 물었다.구승훈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최대한 회복할 수 있도록 할게. 회복이 안 되더라도 은행 쪽에 물어보면 돼. 두 사람이 병원에서 은행으로 가는 길에 CCTV가 많이 있을 거야. 다 망가뜨렸을 리 없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위로 됐다.“고마워요.”구승훈은 웃더니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두 사람의 자세는 순식간에 애매해졌다.그의 호흡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어떻게 감사해야 하지?”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리를 들어 그의 발을 밟았다.“이렇게요.”구승훈은 아파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 목표를 달성했으니 이젠 됐다, 이거야?”“대표님께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강하리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그녀를 차로 끌고 가며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말하다가 가는 잠깐 멈칫했다.“걱정 마, 병원에 데려다주고 갈게. 유라를 보러 가지 않을 거야. 하리야, 나랑 유라는 정말...”송유라 얘기를 꺼내자 강하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설명할 필요 없어요.”어쩌면 구승훈이 말했듯이, 그는 송하리와 사랑에 빠진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그녀도 구승훈이 이제 송유라를 귀찮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송유라가 죽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그리고 송유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언제든 송유라가 죽기 살기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그는 항상 나타날 것이었다.어쩌면 구승훈은 진심으로 강하리와 화해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송유라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자리는 아무도 흔들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의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강하리가 고개를 들자 속이 메스꺼워 났다.안현우가 그녀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강하리는 바로 그를 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안현우는 다시 한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강하리 씨, 제가 정말 그렇게 별로예요?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강하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안 대표님, 잘 아시네요.”안현우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하지만 저는 오히려 하리 씨에게 관심이 있어요, 어떡하죠?”강하리는 구역질을 참으며 비켜섰다.“안 대표님은 정말 변함없이 재수 없으시네요.”안현우는 그녀가 얼마나 듣기 싫어하든지 개의치 않았다.여자는 성질이 강할수록 사람을 흥분시키기 때문이었다.강하리는 그의 모든 욕구를 일으키는 그런 여자였다.“하리 씨, 아직도 구승훈이 하리 씨랑 화해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죠?”강하리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갔다.안현우는 뒤에서 웃었다.“하리 씨도 봤겠지만, 비록 승훈이가 앞에서는 유라에게 심하게 대해도 결국 유라를 놓지 못해요. 유라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하리 씨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제3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강하리가 멈칫하면서 물었다.“안현우 씨, 재밌어요? 이렇게 도발하는 거.”“설마 송유라 씨가 다친 게 안현우 씨가 꾸민 건 아니겠죠? 송유라 씨랑 그렇게 친하신데 그녀를 위해서 이 정도는 하실 수 있잖아요?”안현우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입은 함부로 말하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강하리 씨, 말조심하세요.”강하리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의 표정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안현우의 얼굴에는 옹졸함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안현우는 그녀의 시선 때문에 마음이 점점 조여왔다.안현수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위해 송유라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원래 계획은 강하리가 구승훈을 떠난 후 틈을 타서 강하리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안예서 이 입방정!'그녀는 바로 구승훈을 피하며 말했다.“구 대표님 같은 운전기사를 제가 어떻게 감히...”구승훈은 얼른 차에서 내려 그녀를 붙잡았다.“공짜야.”강하리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구승훈 씨, 한가하세요?”“응.”구승훈이 대답했다.그가 원하기만 하면 그 정도의 시간은 어떻게든 짜낼 수 있었다.기껏해야 밤에 잠을 좀 덜 잘 뿐이었다.강하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에비뉴의 업무가 얼마나 바쁜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당신이 운전기사를 해줄 필요도 없고 당신에게 어울리지도 않아요.”당당한 구씨 집안의 권력자가 그녀의 운전기사를 해준다니. 그녀는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았다.구승훈도 그녀가 거절할 것을 예상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운전기사야. 그리고 나중에 내가 한 명 알아봐 줄게, 어때? 밖에서 찾지 말고. 믿을 만한지도 모르는데.”강하리는 아랫입술을 오므렸다.구승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늘 밤은 내가 운전기사를 해주는 걸로.”그는 강하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끌고 차 쪽으로 갔다.식당에 도착하자 강하리가 내리려고 했다.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나도 밥 안 먹었어.”“...”“같이 먹자.”그의 말은 완전히 통보였다. 그녀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바로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걸어갔다.정주현이 예약한 식당은 레스토랑이었다.입구에 도착한 강하리의 발걸음이 잠깐 멈추었다.“만약 마음에 안 드시면 먼저 가보셔도 돼요. 저는 택시를 타고 가면 되니까요.”구승훈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장 식당으로 들어갔다.강하리는 밖에서 몇 초 서 있다가 따라 들어갔다.구승훈을 보자마자 정주현은 얼굴에 싫다는 기색이 가득했다.“구 대표님은 지금 정말 한가하시네요. 다른 사람이 밥을 먹는데 얻어먹으러 오시다니, 구씨 집안이 파산한 줄 알겠어요.”구승훈은 냉소를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강하리의
정주현은 대사님을 찾아 개업식 날짜를 잡았고 다음 달 초로 정했다.강하리는 회사의 책임자로서 많은 일을 결정해야 했다.그녀는 정주현과 계속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구승훈은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옆에 앉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대양 그룹은 북쪽 교외의 땅을 원하나요?”강하리가 멈칫했다.대양 그룹은 확실히 북쪽 교외의 그 땅을 원하지만 그 땅은 줄곧 최씨 가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최씨 가문은 김주한의 일 때문에 강하리와 불화가 있어서 지금 최씨 가문을 불러내려고 해도 만날 수 없었다.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강하리를 쳐다보았다.“하리야, 최씨 가문은 내가 약속 잡아줄 수 있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쳐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이번에는 어떤 조건을 원하십니까?”구승훈의 눈빛이 반짝였다.“앞으로 매일 드레싱을 도와주면 돼.”정주현은 속으로 구승훈을 진짜 짐승이라고 욕했다.그는 이미 대양 그룹의 현재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을 것이었다. 강하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그녀를 도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도와주는 대신에 강하리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을 하나 더 제시하는 것이었다.‘정말 뻔뻔하군.'이건 남이 급한 틈을 타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필요 없어요!”정주현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하지만 강하리가 잠시 후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정주현은 어리둥절해서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리 씨, 우리도 굳이 그 땅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강하리가 웃으며 대꾸했다.“정주현 씨, 회사 업무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정주현은 그녀가 정양철과 서명한 그 도박 계약서의 존재를 몰랐다. 그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다.정주현이 울분을 토했다.구승훈은 오히려 그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강하리는 식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갔다.그녀는 가능한 한 정서원과 같이 있으려고 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병원
강하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말할 수 없어요. 구승훈 씨, 우리 관계는 우리 엄마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아요.”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입을 열었다.“그래서 나를 완전히 지워버린 거야?”“말하시지 않는 게 안전하니까요. 조심히 돌아가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다만 그녀는 구승훈이 따라 들어올 줄은 몰랐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녀는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다.“구승훈 씨, 뭐 하시는 거예요?”구승훈은 그녀를 무시한 채 정서원의 침대로 향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하리 친구입니다.”간병인이 옆에서 말했다.“하리 어머님, 승훈 씨는 우리 하리를 좋아하는 분이세요. 엄청 쫓아다녔어요.”정서원이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엄마, 저는 이 사람 마음에 안 들어요.”구승훈이 옆에서 웃었다.“지금 싫다고 나중에도 싫은 게 아니잖아요, 아주머니. 안 그래요?”정서원은 넋을 잃고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이미 구승훈을 밖으로 밀어냈다구승훈도 억지로 붙잡지 않고 강하리를 쳐다볼 뿐이었다.“하리야, 나중에는 아주머니 앞에 당당하게 나타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강하리는 얼떨떨해져서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구승훈을 떠나보내고 강하리는 그제서야 병실로 돌아왔다.그 이후로 그녀는 다시는 구승훈에 대해 얘기 하지 않았다.하지만 정서원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구, 구,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찡해졌다. 그녀는 정서원이 구승훈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그 사람이에요.”정서원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강하리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강하리는 병원에서 정서원과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안예서의 전화를 받았다.“운전기사님 찾았어요. 오늘 직접 데리러 가실 거예요.”그녀는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구승훈 씨는 아니죠?”안예
“설마 구 대표님과 화해하려고 하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무슨 헛소리예요?”“제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요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이 멍청한 척하는 거예요?”강하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주현 씨, 제가 말했잖아요. 그냥 친구 사이라고요.”정주현은 웃으며 말했다.“뭐 어때요? 구승훈이 쓰레기라는 사실에도 하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에 아무 영향도 없잖아요? 하리 씨, 예전에 그 사람이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좀 잘해 준다고 해서 다시 넘어가면 안 돼요.”강하리는 그를 피했다.“저 정신 말짱합니다.”“그래요, 그럼 됐어요.”정주현은 별다른 말 없이 커피 한 잔 건넸다.강하리는 그를 쳐다보더니 대답했다.“고마워요.”정주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강하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정주현이 소란을 피우자 그녀는 갑자기 구승훈의 드레싱을 도와줘야 한다는 일이 생각났다.그녀는 구승훈이 먼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감감무소식이었다.퇴근이 가까워질 때까지 구승훈은 연락이 없었고 되려 구승재에게서 전화가 왔다.“강 부장님, 그 할머니를 찾았는데 시간 있으세요?”강하리는 얼른 승낙했다.구승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양 그룹 아래층에 도착했다.강하리가 내려갈 때 그는 차 옆에 서서 전화를 하고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하리를 보자마자 그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어떻게 됐어요, 구승재 씨?”구승재가 대답했다.“할머니를 찾았고 본인이 손연지 씨를 찾은 것도 맞다고 인정했지만 누가 시켰는지는 말하지 않았어요.”“병원에 가서 손연지 씨를 찾으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손연지 씨더러 돈을 송금하라고 하는 전화 말이에요."“돈을 보내지 않거나 송금한 사람이 손연지 씨가 아니면 딸이 위험하다고 했대요.”강하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전화한 사람은 못 찾
구승훈은 사무실에 앉아 신임 마케팅팀장이 여름 기획 프로젝트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한참 동안 듣던 중 갑자기 손을 들어 멈추라는 제스처를 보내고 휴대폰을 확인했다.이윽고 남자의 눈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저녁 같이 먹을래? 거즈도 바꾸고.]강하리는 조용히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답장했다.[그래요.]구승훈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신입 마케팅팀장은 경악에 찬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구 대표님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차가운 염라대왕도 이럴 때가 있다니.구승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가져가서 다시 하세요. 올해 여름 시장 테마에 대해 알아봤어요? 시장 조사는 해보셨나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전에 있던 팀장에게 물어봐요.”마케팅팀장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대답하며 기획안을 들고 사장실을 나섰다.강하리는 구승훈의 전화가 왔을 때 아직 퇴근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아래층에서 기다릴게.”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가고 안예서가 불러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부장님, 누구 생각하시는 데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강하리는 그녀를 힐끗 보고 대답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퇴근이나 해.”안예서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가요?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요. 부장님 혹시 연애하세요?”강하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아니.”안예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안예서는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부장님 내일 경기장 가는 거 잊지 마세요.”강하리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녀가 내려왔을 때 구승훈은 팔짱을 낀 채 차 옆에 기대어 있었다.남자는 짙은 회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유난히 잘생기고 반듯해 보였다.“뭐 먹고 싶어?”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아무거나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그럼 프랑스 음식 먹으러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
강하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야 구승훈은 다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익살스러운 미소가 남아 있지 않았다.“여진 쪽은 어떻게 됐어?”그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준봉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출시일이 확정됐습니다. 에비뉴보다 하루 빠릅니다.”구승훈은 손에 불경스러운 듯 염주를 굴리며 냉소를 지었다.“승재와 천아름 쪽에 협조 잘하라고 전해.”“네.”준봉이 재빨리 대답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 사실 이 일은 사모님께도 일부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용히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준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은 항상 그랬다. 강하리를 도와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다.‘정말 답답해.’여진 주얼리는 지난 몇 년간 에비뉴와 계속해서 대립해 왔다.겉보기에는 구씨 가문이나 강하리와 아무 관련 없는 작은 회사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은 회사들이 대형 브랜드의 모조품을 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하지만 여진 주얼리는 단순한 모조품에 만족하지 않았다.작년에 해외에서 에비뉴 주얼리의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배후에는 여진 주얼리가 있었다.그 사건으로 여진 주얼리는 큰 이득을 봤고 에비뉴는 큰 타격을 입었다.그 후 여진 주얼리는 더욱 탐욕스러워졌다.사람이란 달콤한 맛을 보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여진 주얼리는 에비뉴에게 항상 위험 요소였다.구승훈은 에비뉴를 강하리에게 넘긴 이상 그녀에게 어떤 위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대표님, 상대방의 배후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놓고 에비뉴를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구승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뭐? 지금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준봉은 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강하리가 때린 따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강렬했다.그러자 구승훈의 뺨에는 순식간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천아름은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이내 강하리를 향해 천천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잘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맞아야 해. 제대로 한 대쯤은 맞아 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지. 이제라도 자기 잘못을 좀 깨달아야 해.’천아름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통쾌해했다.한편 구승훈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스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강하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눈엔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그는 목울대를 두 번 삼킨 뒤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를 봐서... 토한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지만 더는 이 남자 앞에서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아 애써 참고 있었다.“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요.” 강하리의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구승훈의 눈에는 오히려 그 말이 묘하게 따뜻하게 비쳤다.지금 이 순간 그는 마음속에...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들었다.‘적어도 하리 마음속에 아직 내가 있긴 한 거잖아. 미움이든 혐오든... 감정이 있는 한 아직 끝은 아니겠지.’그는 수트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강하리의 입가를 닦아주었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스치고는 가볍게 떠났다.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쓸쓸하게 웃었다.“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하리야, 미안하지만 다신 안 나타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그건 못 해.”그 말과 함께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갔다.순간, 화장실 안은 적막 속에 잠겼다.강하리는 다시금 구역질했고 천아름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밖에서 구승훈은 그녀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얼마 후, 급히 달려온 준봉의 목소리에 그가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두 채의 30층이 넘는 오피스 빌딩 사이에는 다섯 층마다 하나씩 연결하는 공중 회랑이 있었다.회랑 위에는 각종 카페와 음식점이 입점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강하리는 사실 정안 타워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심지어 구승훈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에도 여기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그녀보다 임희주가 더 자주 왔을지도 몰랐다.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는 입꼬리를 삐죽이며 말했다.“구승훈이야 뭐 인간쓰레기지만 그래도 통 큰 건 인정해야겠네. 이렇게 큰 회사를 그냥 덜컥 넘겨주다니. 에비뉴 주얼리잖아? 보석 업계에선 꽤 이름 있는 브랜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인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구승훈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너무도 멀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꼭 광고 모델 확정해야 해. 원래 계약하려던 사람이 며칠 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이유 알아봤어?”그러자 천아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유야 뻔하지. 뺏긴 거지 뭐.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누가 뺏어갔는데?”강하리가 조용히 물었다.천아름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며칠 만에 마주친 구승훈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해지는 그 특유의 냉기가 몸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강하리는 구승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구승훈 역시 이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지 평소 차가운 눈빛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의 시선은 곧장 강하리에게 꽂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얼굴빛은 생각보다 좋았다.홍조가 돌아 있었고 얼굴도 약간 도톰해진 듯했다.그는 기뻐해
항구에서 보경시로 돌아오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누군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어떻게 됐어?”그 말에 노진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리모컨부터 눌렀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TV가 켜지더니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화면 속에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여초천이 이성을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가구를 부수며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하더니 그럼에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았다.여초연의 이마는 이미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모습을 본 구승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됐어. 그만해.”노진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이렇게 끝내시겠다고요? 대표님께서 발작 났을 땐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제가 만든 약은 효과가 얼마 못 가거든요. 급하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대표님은 온 하루 동안 고통스러워하셨잖아요.”“게다가 대표님은 이 약 때문에 하리 씨 곁을 떠나야 했잖아요. 하리 씨가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다 이 약 때문인데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졌다고요?”구승훈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담배를 꺼내 거기에 불을 붙였다.“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야. 저런 꼴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그때 내 모습이 떠올라서...”“생각할 때마다 너무 후회돼. 하리를 혼자 예식장에 두고 떠났던 거 말이야. 내가 어떻게 잡았는데 또다시 놓쳐버리다니...”“그런데 또 여초연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내가 하리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하리가 내 저런 모습을 봐야 했을 수도 있잖아.”노진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제 책임도 좀 있어요. 제 대학 동기인 데다가 능력도 괜찮아 보여서 추천했었는데 배경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니까요.”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다.“임희주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었을 거야. 여초연이 날 가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까.”노진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하리 씨 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