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구 대표님. 잠깐 자리 좀 피해줄래요? 심 변호사님과 단둘이 얘기를 나눠야 해서요.”구승훈은 비웃음을 터트렸다.“왜? 내가 여기 있으면 얘기를 못 나눠?’심준호는 손에 든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당연히 가능하지. 단지 우리 구 대표님이 좀 진정해 주길 바랄 뿐이야.”일 얘기가 시작되자 심준호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예리함과 프로패셔널함만이 남아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저희 나가서 얘기 나눠요.”심준호는 구승훈을 한 번 쳐다보고서는 대답했다.“그래요.”구승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마침내 강하리가 몸을 일으키자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얘기 나눠.”말을 마친 뒤 그는 병실을 떠났다.병실의 문이 다시 닫히자 강하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준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아침 안 먹었어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배가 고프지 않아서요.”심준호는 동의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죠.”강하리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일 얘기를 꺼냈다.“변호사님 이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데 위약금을 좀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심준호는 강하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건네주었다.“밥 먹고 싶지 않으면 몰래 간식을 먹으면 되죠. 정말로 굶지는 말고요.”강하리는 심준호가 건넨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받았다.“감사합니다 변호사님.”심준호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하리 씨가 보여준 계약서는 하리 씨에게 많이 불리해요. 하지만 하리 씨가 반드시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승훈도 계약을 많이 어겼고요...”심준호는 강하리의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강하리에게 계약서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해 주었다.어느덧 두 시간을 훌쩍 넘어버렸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하리
”여기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고?”구승훈이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도와줄 생각인가?”“당연한 거 아니야?”심준호가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미리 말해주는 거지만, 강하리는 그쪽 대리비를 감당하기 힘들 거야.”심준호가 맡는 사안들은 건당 억대 대리비용이 지급되는 명문가 경제적 갈등이나 이혼소송 건이었다.구승훈의 냉소에 심준호가 미소로 대답했다.“뭐, 가끔씩은 공짜로 재능기부 하기도 해.”그러자 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재능기부로 포장된 흑심이 아니라?”“너, 지금 아무나 막 물고 늘어지는 미친개 같은 거 알아?”심준호의 표정 역시 서늘해졌다.“그럴 시간 있으면, 왜 너를 떠났는지 잘 돌이켜보고 뉘우치는 게 어때?”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한참 뒤,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뭐 하든 내 자유고.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맞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든 말든, 그것도 내 자유지. 나 알잖아. 일할 때는 공과 사 철저하게 구분하는 거.”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담배 한 대를 붙였다.한 모금 빨고 다시 입을 열었다.“성질 부리는 것 뿐이야. 좀 지나면 괜찮아져.”“성질 부린다고? 애 잃고 자기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게 고작 성질 부릴 일이라고?”심준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담배만 빨다가, 이윽고 한 마디 뱉었다.“아무튼 난 절대 안 놓아줄 거다.”그러고는 담배를 끄고 병실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여전히 침대맡에 몸을 걸치고 앉아있었다.옆에 놓인 음식들은 다치지도 않았다.구승훈은 점점 가슴이 더 답답해져 강하리를 바라만 보다가, 이윽고 픽 웃었다.“강하리, 3년이나 살 맞대고 지냈는데, 정말 아무 감정도 없어? 나한테?”강하리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이 없었다.하지만 눈 속에 복잡하고 씁쓸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참기 힘들었다. 막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겨우 웃음 한 줌을 짜냈다.“그냥 거래일 뿐이라고 한 건 그쪽 아닌가요?”그 말에 구승훈의 눈길에 고통스러움 한 결이 스쳤다가 사
힘없이 화장실 문 손잡이에 몸을 지탱하며 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음식 때문이 아니라 제가 컨디션이 좀…….”저쪽에 얼굴이 시커매진 구승훈이 보였다.“강하리, 언제까지 이러는지 두고 보자.”낮은 웃음소리로 화답하는 강하리.그제야 아줌마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의 불꽃이 튀고있단 걸 알아챘다.구승훈이 떠난 뒤, 아줌마가 강하리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아가씨. 이러시면 아가씨 몸만 망가지세요.”“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렇게 강하리는 사흘을 버텼다.구승훈의 강권에 저항하듯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그동안 구승훈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고.그러면서도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타협하지 않았다.총성 없는 사흘 간의 전쟁.“형, 강 부장은 요즘 좀 어때?”나흘째 되는 날, 얼굴색이 말이 아닌 형에게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꾸준히 고얀 짓 중이시다.”구승훈의 냉랭한 말투에 구승재가 멈칫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뭐야. 형이 먼저 잘못했다고 수그려 보는 건 어때?”“안 한 줄 아냐?”정말이지,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굽실댄 건 처음이다.물론 어디까지나 구승훈의 기준에서.다른 의미로는, 강하리만큼 고집 센 여자가 구승훈에겐 처음이다.구승재가 속으로 욕을 뱉었다.형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어떤 식으로 수그렸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내 말은, 윽박지르지만 말고 차근차근 잘 좀 달래 보라고. 강압적 포스남 컨셉이 모든 여자한테 먹히는 건 아니니까.” 구승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그 고집불통이 좋은 말로 달랜다고 퍽이나 잘 듣겠다.”“그건 형 추측일 뿐이잖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승재의 말에 구승훈의 눈에 살짝 광채가 감돌았다.그날 퇴근 후.구승훈은 액세서리 매장에 와 있었다.어렴풋하게나마, 강하리가 귀걸이는 안 좋아한다던 기억이 떠올랐다.꼼꼼히 둘러보며 고르고 골라, 목걸이 하나를 정교하게 포장했다.지이잉-!휴대폰이 울렸다.“대표님! 어디세요
강하리는 멍한 표정이었다.시종일관 한 마디도 없었다.소리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렸을 뿐.드디어 원하던 결말인가.하지만 하나도 안 기쁜 건 왜일까.온통 상처만 남긴 둘의 관계.아주 미약하게나마 섞여있는 달콤함도.이런 방식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구승훈이 질리면 조용히 사라져 주는 시나리오도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가 먼저 떠날 줄은 몰랐다.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눈물에 멈췄다. 저도 모르게 닦아주려고 손이 올라갔다.하지만 강하리가 고개를 돌려 비켜버렸다.구승훈의 손이 허공에 얼어붙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거둬들였다.“아줌마가 죽 보내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구승훈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약은 안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이지 않을게.”말을 마친 뒤, 뒤돌아 서서 아줌마가 가져온 죽을 그릇에 옯겨담았다.그릇을 든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올라와 있었다.다 뜨고 돌아서니, 강하리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구승훈이 급급히 그릇을 한쪽에 놓고 강하리를 부축해 일으켰다.강하리의 입술이 일 자로 꽉 다물어졌다. 소리 없이 옆에 놓인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와, 조용히 죽을 떠 먹기 시작했다.1인분이 채 안 되는 죽을 강하리는 30분동안이나 먹었다.구승훈은 조용히 서서 강하리가 죽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그릇을 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데?”“회사 다니면서 먹고 사는 거죠 뭐.”“회사는 다 나은 뒤에 나오는 걸로.”강하리가 멍해졌다가 곧 웃었다.“구 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에비뉴에서 이직하려고요.”“이유는?”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급적 그쪽이랑 직장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싶어서요.”“지금 나랑 생판 남남이 되겠다는 건가, 강 부장?”구승훈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끝낼 거면 깨끗이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의 얼굴
구승훈의 급발진에 강하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심준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지만.적어도 자신한테 악의가 없단 건 보아낼 수 있었다.“대표님 속은 얼마나 깨끗하시길래.”“적어도 여자 여럿 농락하는 찌질한 사람은 아니야. 약혼자도 여친도 없고. 여자랑 잔 것도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유라도 건드린 적 없어.”강하리의 입가가 실룩였다.갑자기 무슨 고백 같은 대답을 들으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이제 저 말의 진실 여부는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잘 알았으니까, 회사 나가는 대로 이직 신청할게요. 반려되면 법적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요.”감정적인 대화는 더이상 나누고 싶지 않았다.“아, 그리고 계약해지 확인 서류도 빠른 시일 내로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한 번 뱉은 말 번복이라도 할까 봐?”“꼭 그런 건 아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 정규 절차대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은 심란했다. 너무나.위약금 얘기도 사실 보내주기 싫어서 놓는 으름장 같은 거였다.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그녀를 일단 달랠 생각으로 감정 쪽으로는 타협했지만.어떤 식으로든 곁에 두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설득해 보려고 했다.하지만 강하리는 치밀했다.모든 요소를 다 고려한 빈틈 없는 계획으로 자신을 향해 가드를 올렸다.그게 구승훈을 미치게 만들었다.타협이고 뭐고 꽁꽁 묶어서 자신 곁에 붙들어 매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핼쓱한 얼굴을 보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계약 해지를 번복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해를 서슴지 않을 그녀였다.구승훈의 가슴속에 말 못할 울화가 치밀었다.이 여자한테 나약해지는 자신 때문일까.아니면, 이 독한 여자 때문일까.“일단 몸부터 챙겨.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돌봐주게 해 줘.”꾹꾹 눌러 참으며 다시 협상을 시도했지만.“몸은 나 스스로 알아서 챙겨요. 내일 오전 9시에 노을 카
”전 후회되는 일은 안 하거든요.”강하리의 결연한 대답이 돌아왔다.구승훈은 더 말 없이 강하리를 보고만 있다가, 강하리가 영양제를 다 맞은 후 그녀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죽도 먹고 영양제도 맞은 터라, 강하리는 힘이 좀 나기 시작했다.그래서 구승훈이 안아들려고 할 때 단 칼에 거절해 버렸다.돌아온 건 구승훈의 냉소.응급실을 나온 후, 구승훈이 지나치듯 한 마디 던졌다.“일단 집으로 가. 이 몸으로 밖에서 쓰러졌다가 나 탓하지 말고.”또 시작이다. 물고 늘어지기.이젠 웃기지도 않았다.“아니에요. 괜찮아요.”강하리는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 잡으러 가 버렸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승훈은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젠장, 거름밭 돌멩이처럼 고약하고 딱딱한 여자 같으니라고.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까지 들었다.미간 팍 찌푸린 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그제야 옆 시트 위에 놔둔, 곱게 포장된 선물꾸러미가 보였다.내가 미쳤지. 저런 여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선물을 다 사고.구승훈은 거칠게 선물꾸러미를 콘솔박스에 던져넣고는 시동을 걸어 떠났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길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기분이 착잡했다.후련한 느낌도 있었다. 다신 그 남자와 송유라와 엮일 일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말 못할,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그게 뭔지 확인하기도 전, 손연지의 전화가 걸려왔다.“하리야, 어떻게 됐어?”손연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검진을 받을 때 강하리가 먹었던 약 성분이 모두 검출된 터였다.손연지는 강하리에게 약을 준 게 자신이란 걸 구승훈이 알게 될까 조마조마했다.화가 나면 구승훈에게 대들기도 하는 그녀지만.그렇다고 구승훈이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잘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야.”강하리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핸드폰 너머, 손연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진짜? 계약 해지하기로 한 거야?”“응.”손연지가 기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너무 잘됐다! 이따가 축하 파티라도
”그래. 밥 한 끼 같이 하자. 하리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주해찬이 거들었다.강하리가 시간을 확인했다.식사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사흘 동안이나 굶은 위장에 부담이라도 가지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었다.“네, 그러죠.”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선뜻 응낙하고 차에 탔다.언제 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과식만 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세 사람은 소문난 근처 맛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한 여인과 함께 나오는 안현우와 마주쳤다.강하리와 닮은 여인.강하리를 본 안현우가 멍해졌다.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왜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안현우였다.그냥 노리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 기분은 대체 뭘까.“강 부장, 잘 지냈어요?”예전 같으면 만나자마자 비아냥을 퍼부어댔을 안현우지만,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덕분에요.”짤막하게 대답하는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웠다.눈빛 속에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러고는 몹시 불편하다는 듯, 얼른 주해찬과 정주현을 따라 룸에 들어가 버렸다.닫히는 룸 문을 바라보며 안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 왜 저 여자만 보는 거야.”옆에 여인이 뾰루퉁해 불렀다.“그래서?”안현우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여인은 분했으나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웃다가도 다음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안현우의 괴랄한 성격을 잘 아니까.더군다나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분 잡친 게 분명했다.역시 안현우는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 있었다.강하리의 냉담한 태도에 짜증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순간 너무나도 성가시게 느껴졌다.“꺼져.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입금은 비서한테 시켜 놓을 테니까.”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차에 타 잠시 고민하다가 구승훈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아가씨는요?”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줌마가 홀로 집에 들어
구승훈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곧 냉소를 지었다.웃기는 여자네.계약 해지 서류를 받기도 전에 날 차단해?[보면 전화해.]톡을 보낸 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지만 회신이나 전화는 없었다.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대화창도 감감무소식 그 자체였다.구승훈은 또다시 열불이 치밀기 시작했다.누를래야 누를 길이 없었다.겨우 놓아주려고 마음먹었건만.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사실 강하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 쯤은 너무 쉬웠다.당장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그게 강하리에게는 구질구질하게 보일 게 뻔했다.알량한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참나, 그 여자 하나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그나저나 핸드폰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구승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그러나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구승훈은 강하리와의 톡 내역을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그제야 알 수 있었다.몇 줄 안되는 메시지들. 둘이 톡으로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비서를 통해 찾거나, 집에서 바로 용건만 전달하곤 했으니까.일상 토크 같은 건 해본 기억조차 없다.구승훈은 갑자기 기분이 확 잡쳤다.나랑 나눌 얘기가 이렇게도 없었나?다른 사람들과도 이런 식인 건가?아마 아닐 거다.친구와는 너무나도 즐겁게 수다 떨던 강하리다.문득,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하리가 한동안 톡을 자주 보내던 게 생각났다.외출했다가 귀엽게 생긴 구름 송이를 봤다고.맛있는 요리 조리법을 새로 배웠다고.이것저것 사진도 많이 보냈고, 그날 기분도 공유했었다.그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회신했던가?기억을 짜내 봤지만, 없었다.아마 안 했을 거다.구승훈의 시점에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잡담에 불과했으니까.심지어 이런 쓸데없는 건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구승훈은 깊은 주름이 만들어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었다.그러다 벌떡 일어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간 구승훈이 구승재에게 전화했다.“승혁이 쪽은 얼마나 알아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