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차에서 내리자 주해찬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선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주해찬은 사실 그녀에게 전화할 때부터 이미 여기에 있었다.“마침 근처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러더니 강하리에게 따듯한 밀크티 한잔을 건넸다.“이 밀크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어.”강하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주해찬의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취향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는데.”강하리가 웃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신정에 본가에 안 내려간 거예요?”“갔지. 오늘 올라온 거야.”사실 이번 회의에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이번에 온 사람은 외교부 수장이었다. 주해찬은 외교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긴 했지만 이런 회의에 참석하기엔 경력이 부족했다.하지만 저번에 강하리가 돌아설 때 그녀의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아 보였던 게 생각났다.주해찬은 돌아가자마자 알아봤다.그리고 곧 구승훈이 대외로 강하리가 여자 친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모자라 구승준 옆엔 아직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첫사랑도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주해찬은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게 좋은 여자를 왜 아껴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12월 31일 그날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려놓았다. 그러다 마침 오늘 이 핑계를 빌어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주해찬은 자료를 강하리에게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자료를 받더니 가로등 불빛을 빌어 확인했다.주해찬은 가로등 아래에 선 강하리를 조용히 바라봤다.불빛이 깔끔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비췄고 그 모습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다.주해찬은 순간 학창 시절에도 가로등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야, 구승훈을 떠날 생각은 없어?”자료를 보던 강하리는 뜬금없이 들어온 주해찬의
강하리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그 남자는 강하리의 입을 틀어막았다.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는 왜 질러?”순간 강하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봤다.“승훈 씨, 미쳤어요? 늦었는데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해요?”구승훈이 콧방귀를 끼더니 그녀의 허리를 힘껏 꼬집었다.“내가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어떻게 들어가? 문 따고 들어갈까?”강하리가 멈칫했다. 구승훈에게 열쇠를 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미안해요. 깜빡했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불을 켜자 구승훈의 눈에 들어온 건 강하리의 손에 들린 밀크티였다. 구승훈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심드렁해서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갈아신었다.슬리퍼로 바꿔 신으면서도 강하리는 밀크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구승훈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밀크티를 빼앗아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뭐 하는 거예요?”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구승훈은 차가워진 눈빛으로 물었다.“감기 다 나은 거야?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데이트나 하고?”강하리가 입을 오므렸다. 주해찬과 있는 걸 본 게 틀림없었다.“선배는 그냥 자료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내일 오전에 회의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선배는 무슨. 호칭이 스윗한데? 그 사람은 이름 없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구 대표님, 나랑 선배는 진짜 눈곱만치도 이상해할 거 없는 그냥 친구예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는 콧방귀를 꼈다.“그래야 할 거야. 강하리, 다른 남자한테 선을 긋는 건 네 의무야. 내가 이렇게 경고하기 전에 잘해.”강하리는 원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송동혁을 보자 바닥을 쳤다. 게다가 아까 크게 놀라기까지 하니 뭘 하든 심드렁했다.하여 지금 이 남자와 이렇게 사소한 일로 다툴 힘이 전혀 없었다.“구 대표님, 나한테 순수하지 못한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송유라 꿈을 이루는 걸 당연히 막을 리 없었다.막지 않을뿐더러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그게 아니면 송유라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에비뉴 주얼리 광고를 줄 리가 없었다.결국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송유라와 비길 수 없는 존재였다.그녀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꿈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구승훈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강하리의 말에 그도 마음이 착잡해졌기 때문이다.사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구승훈은 자신의 여인이 얌전하게 그의 옆에 붙어있기를 바랐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많이 잘못한 것처럼 보였다.방 안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자료에 몰두했다.구승훈은 자지도 않았고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는 침대에 앉아 담배를 문 채 강하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분명 이렇게 여려 보이는데 왜 이렇게 고집이 센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우스운 건 요즘 구승훈도 이 여자를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오늘 주해찬 옆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혼자서 조금 화가 났을 뿐이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다.그러더니 담요를 가져와 강하리 옆에 던져줬다.“써. 병들면 힘든 건 너야.”강하리가 하던 동작을 멈추더니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고는 말했다.“고마워요.”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을 쳐다봤다.“구 대표님, 혹시 나 좀 도와줄래요?”구승훈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강 부장, 내 원칙은 잘 알고 있잖아. 도움을 받으려면 자세가 나와야지.”강하리는 당연히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구승훈은 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더 맹렬하게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서야 구승훈
회의는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강하리가 통역실에서 나오자 주해찬이 그쪽으로 다가갔다.“내가 그랬잖아. 너는 문제 없을 거라고. 박 교수님도 오전 내내 칭찬하셨어.”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하는 내내 손에 진땀이 나더라고요. 무슨 문제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그냥 오래 쉬어서 그래. 그 대단한 실력이 묻힌 거지.”강하리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웃었다.“오래 쉰 건 맞아요. 다행히 지금 다시 시작했잖아요. 시작만 하면 어느 때든 늦지 않아요.”주해찬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말했다.“그래, 맞아. 실력이 있으니까 언제 시작해도 늦은 건 아니야.”둘은 나란히 밖으로 향했다.대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마침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강하리는 예의상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강하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했다.얼마 전 새로 부임한 외교부 장관 진태형이었다.강하리가 우러러보는 사람이기도 했다.진태형은 날카롭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 강하리는 그런 눈빛이 어딘가 부담스러웠다.주해찬이 나서서 소개했다.“장관님, 이분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강하리 씨입니다.”진태형은 강하리를 아래위로 훑었다.하지만 그 눈은 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혹시 심미현 씨를 아시나요?”강하리는 이 물음에 잠깐 멍해졌다.그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분입니다.”진태형은 왠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주해찬 씨 말로는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그냥 좋아할 뿐입니다.”진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전히 그리움이 느껴졌다.“앞으로 주해찬 씨를 따라 외교부에 와서 자주 관람해도 됩니다.”강하리가 고개를
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확실해?”강하리의 안색은 아직도 조금 창백했다.“네, 확실해요.”앞서 두 번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진짜 착각이 아니었다.“언제부터야?”“요 며칠요.”구승훈이 실눈을 뜨고는 긴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턱을 들어 올렸다.“전에 어머니와 원수 진 사람 아니야?”강하리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그런가 봐요.”사실 그녀도 확정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송동혁과 장진영을 빼고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노진우 붙여줄게.”노진우는 구승훈의 곁을 지키는 수행 보디가드였다.강하리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강하리의 볼을 꼬집더니 말했다.“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하리는 아직도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과 강하리가 가고 까만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운전자는 진용철, 얼굴에 칼을 맞은 흉터가 나 있는 자였다. 구승현은 누구에게 맞은 듯 얼굴이 찢어져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송유라였다.송유라는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내가 빨리 움직이라고 했죠. 뭉그적거리더니 이제 어떡할 거예요? 병신같이 납치하기도 전에 들켜요?”진용철이 험악하게 말했다.“말은 쉽게 하시는데, 벌건 대낮에 사람 납치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그렇게 쉬우면 직접 하시든지요.”송유라가 오만하게 말했다.“어디서 언성을 높여요?”송유라는 망나니 주제에 자기 앞에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구승현이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유라 씨, 그만해요. 이 일은 유라 씨가 먼저 우리를 찾아와 도모한 거잖아요. 직접 나섰다가 승훈이 형한테는 들킬까 봐 무서우면서 우리는 말 잘 듣는 개가 되어줬으면 하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우리를 찾아왔으면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요. 저 여자가 죽기를 바란다면서요. 제가 어떻게든 성공하면 되죠.”송유라는 구승현을 노려보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야 할 거예요.”이렇게 말하더니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렸다.송유라가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무슨 일이야?”“엄마가 위급하대요.”강하리는 말투는 차분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구승훈의 안색도 따라서 굳어졌다.“데려다줄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서 도착해보니 정서원은 아직도 응급 처치 중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며 서류를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서류에 사인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구승훈이 옆에서 손을 잡아줘서야 그녀는 간신히 이름 석 자를 적었다.서류를 다시 의사에게 건네주고 강하리는 붉어진 눈시울로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이 하얬다.그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익숙한 벨소리에 강하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왔다.“유라가 사생팬 때문에 다쳤대. 가봐야 할 것 같아.”강하리는 주먹을 꼭 쥐었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흐르지 않게 참으며 물었다.“꼭 가야 해요?”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진우한테 지금 바로 오라고 할게. 얌전히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아무 미련 없이 밖으로 걸어갔다.강하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가슴을 가득 메운 씁쓸함을 겨우 삼키며 눈길을 돌려 그가 사라진 쪽을 외면했다.그 뒤로 한 시간, 그녀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많은 생각을 한 것 같지만 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야 그녀는 정서원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중환자실로 옮겨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는 힘이 쏙 빠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몸을 가누지 못해 살짝 비틀거리는데 누군가 옆에서 잡아줬다.그녀는 그제야 노진우가 어느새 도착했음을 알았다.“
강하리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 사람들이 그쪽으로 쫓아갔다.앞장선 사람은 진용철이었는데 얼굴에 난 칼자국 흉터가 너무 흉측했다.강하리는 허둥지둥 112에 신고했다.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그런지 잠시 기다려달라는 안내음만 들렸다.강하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끊고 구승훈에게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절망적이었다.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인 건 구승재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강 부장님,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시죠?”“승재 씨, 살려주세요. 명인 병원 밖인데 누가... 아악!”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따라온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미친년이 달리기는 잘하네.”그러더니 바로 손을 들어 강하리의 뺨을 후려쳤다.“왜 더 달려보지? 어? 더 달려보라고!”강하리는 갑자기 들어온 싸대기에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래도 태연한 척 한마디 했다.“이미 신고했어. 곧 경찰들이 몰려올 거야. 지금 나를 놓아준다면 책임을 묻지는 않을게.”그러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질질 끌더니 길가에 세워진 밴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온 힘을 다해 차 문을 잡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차에 앉은 누군가가 호통쳤다.“뭐 해? 뜯어내지 않고.”강하리는 그제야 차에 앉은 사람이 구승현임을 발견했다.“뭐 하자는 거예요?”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저는 구승현 씨와 원수진 거 없는 거 같은데.”구승현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저랑은 원수진 거 없지만 당신이 따르는 남자가 나한테 원수졌거든. 일단 손발 묶고 입에 테이프 붙여. 그리고 사진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줘.”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구승훈을 협박할 방법이 저예요? 쓸모
“미쳤어? 뒤에 따라오는 차 정계 고위직 전용 차량인 거 안 보여? 산 아래로 떨어트려? 이제 다 살았다 이거지?”진용철은 그런 건 아예 몰랐다.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하지만 구승현은 너무 잘 알았다.어릴 때부터 날라리로 소문났지만 정계에 일어나는 일은 꿰고 있었다.저 정도 차량이면 발만 굴러도 전국이 흔들릴만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그저 구승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손발이 단단히 묶인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이 여자가 저런 인물을 어떻게 아는 거지?“그럼 어떡할까요?”진용철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뒤에 차를 따돌리는 건 영 현실성이 떨어졌다.구승현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벼랑 끝에 도착하면 저 여자 바로 던져버려.”강하리는 충혈된 눈으로 구승현을 바라봤다. 눈빛으로 구걸하고 있었다.죽고 싶지 않았다.정말 살고 싶었다.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인생을 마음껏 즐겨보지도, 정서원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그래서 너무 살고 싶었다.하지만 구승현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벼랑 끝에 도착해 차를 세우더니 강하리를 그대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절망, 또는 해탈이었을 것이다.이런 생각까지 들었다.아, 이제 더는 구승훈과 엮일 일은 없어서 좋네.실망할 필요도,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구승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눈을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졌다....구승현과 진용철은 강하리를 던져버리고는 얼른 차를 타고 도망갔다.주해찬과 진태영은 벼랑 끝에 차를 세웠다.뒤따라온 차가 한 대 더 있었다.구승재가 창백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강 부장님은요?”주해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아래로 던져졌어요.”구승재가 멈칫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아래는 바다에요. 내려가서 찾으면, 찾으면 분
강하리 얼굴에 약간 어색함이 스쳤다. 하지만 백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들어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이렇게 즐거워하신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역시 저 양반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시욱이 뿐인가봐.”강하리는 자연스럽게 백아영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할머니, 전 에비뉴 주얼리와 JM 그룹을 잘 운영하고 싶어요. 그리고 연정이도 잘 키우고 싶고요.”고요한 방 안이라서 그런지 강하리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하게 들렸다.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봤을 때, 마음 한편이 여전히 아파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강하리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아래층 거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고 설날이 다가오며 곳곳에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다.심씨 가문은 정말 오랜만에 모두 함께 모여서 화목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한편, 심준호는 팔짱을 끼고 별장 밖에 서서 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난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그때 심준호가 갑자기 다가와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너 대체 뭐 하는 짓이야?”그동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를 꾹꾹 참고 있었다.구승훈을 믿고 강하리를 맡겼는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심준호도 그를 감싸주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난 하리가 갑자기 뛰어내릴 줄 몰랐어.”그는 원래 조금만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노진우가 여초천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임희주가 죽든 말든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만약 노진우가 실패한다면
진태형은 병원에서 강하리 곁을 밤새 지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꽃다발을 안은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임명우와 마주치게 되었다.임명우는 진태형을 보고 살짝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었다.“진 장관님, 오랜만입니다.”진태형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임명우를 바라봤다.“하리를 보러 온 건가요?”임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강 대표님과는 업무적으로 조금 얽힌 부분이 있어서요. 입원하셨다는 말 듣고 병문안 왔습니다.”진태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렇군요. 하지만 임 대표님, 하리한테 마음을 두진 마셨으면 좋겠어요.”임명우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진 장관님,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랑 강 대표님은 정말 업무적인 관계예요. 그리고 시연 씨랑도 몇 년 전에 헤어졌고요. 제가 정말 강 대표님을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잖아요?”진태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리한테 마음 두지 마세요. 충고가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리한테 손을 대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미소를 짓고 있던 임명우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누구든 진태형 앞에서는 결국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장관님.”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임명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말이 맞았어요. 진 장관님은 시연 씨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강하리 씨랑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제 시연 씨 따위 필요 없어요.]문자를 보낸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M 국에 있는 진시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여 핸드폰을 그대로 던져버렸다.구승훈과 강하리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당장 귀국하려 했었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여초연이 그녀의 길을 막았다.하지만 진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임명우의 문자를 받고 당황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