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차에서 내리자 주해찬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선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주해찬은 사실 그녀에게 전화할 때부터 이미 여기에 있었다.“마침 근처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그러더니 강하리에게 따듯한 밀크티 한잔을 건넸다.“이 밀크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샀어.”강하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주해찬의 미소가 더 부드러워졌다.“취향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는데.”강하리가 웃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신정에 본가에 안 내려간 거예요?”“갔지. 오늘 올라온 거야.”사실 이번 회의에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이번에 온 사람은 외교부 수장이었다. 주해찬은 외교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긴 했지만 이런 회의에 참석하기엔 경력이 부족했다.하지만 저번에 강하리가 돌아설 때 그녀의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아 보였던 게 생각났다.주해찬은 돌아가자마자 알아봤다.그리고 곧 구승훈이 대외로 강하리가 여자 친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모자라 구승준 옆엔 아직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은 첫사랑도 있었다.이 소식을 들은 주해찬은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게 좋은 여자를 왜 아껴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12월 31일 그날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려놓았다. 그러다 마침 오늘 이 핑계를 빌어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솔직히 말해서 그냥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였다.주해찬은 자료를 강하리에게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자료를 받더니 가로등 불빛을 빌어 확인했다.주해찬은 가로등 아래에 선 강하리를 조용히 바라봤다.불빛이 깔끔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비췄고 그 모습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다.주해찬은 순간 학창 시절에도 가로등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하리야, 구승훈을 떠날 생각은 없어?”자료를 보던 강하리는 뜬금없이 들어온 주해찬의
강하리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내 그 남자는 강하리의 입을 틀어막았다.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는 왜 질러?”순간 강하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노려봤다.“승훈 씨, 미쳤어요? 늦었는데 안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해요?”구승훈이 콧방귀를 끼더니 그녀의 허리를 힘껏 꼬집었다.“내가 들어가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어떻게 들어가? 문 따고 들어갈까?”강하리가 멈칫했다. 구승훈에게 열쇠를 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미안해요. 깜빡했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불을 켜자 구승훈의 눈에 들어온 건 강하리의 손에 들린 밀크티였다. 구승훈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심드렁해서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갈아신었다.슬리퍼로 바꿔 신으면서도 강하리는 밀크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구승훈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밀크티를 빼앗아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뭐 하는 거예요?”강하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구승훈은 차가워진 눈빛으로 물었다.“감기 다 나은 거야?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데이트나 하고?”강하리가 입을 오므렸다. 주해찬과 있는 걸 본 게 틀림없었다.“선배는 그냥 자료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내일 오전에 회의 있거든요.”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선배는 무슨. 호칭이 스윗한데? 그 사람은 이름 없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구 대표님, 나랑 선배는 진짜 눈곱만치도 이상해할 거 없는 그냥 친구예요.”구승훈은 실눈을 뜨고는 콧방귀를 꼈다.“그래야 할 거야. 강하리, 다른 남자한테 선을 긋는 건 네 의무야. 내가 이렇게 경고하기 전에 잘해.”강하리는 원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송동혁을 보자 바닥을 쳤다. 게다가 아까 크게 놀라기까지 하니 뭘 하든 심드렁했다.하여 지금 이 남자와 이렇게 사소한 일로 다툴 힘이 전혀 없었다.“구 대표님, 나한테 순수하지 못한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구승훈은 송유라 꿈을 이루는 걸 당연히 막을 리 없었다.막지 않을뿐더러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그게 아니면 송유라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에비뉴 주얼리 광고를 줄 리가 없었다.결국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송유라와 비길 수 없는 존재였다.그녀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구승훈에게 강하리는 꿈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구승훈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강하리의 말에 그도 마음이 착잡해졌기 때문이다.사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구승훈은 자신의 여인이 얌전하게 그의 옆에 붙어있기를 바랐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구승훈이 강하리에게 많이 잘못한 것처럼 보였다.방 안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강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자료에 몰두했다.구승훈은 자지도 않았고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는 침대에 앉아 담배를 문 채 강하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분명 이렇게 여려 보이는데 왜 이렇게 고집이 센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우스운 건 요즘 구승훈도 이 여자를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오늘 주해찬 옆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혼자서 조금 화가 났을 뿐이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다.그러더니 담요를 가져와 강하리 옆에 던져줬다.“써. 병들면 힘든 건 너야.”강하리가 하던 동작을 멈추더니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고는 말했다.“고마워요.”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승훈을 쳐다봤다.“구 대표님, 혹시 나 좀 도와줄래요?”구승훈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강 부장, 내 원칙은 잘 알고 있잖아. 도움을 받으려면 자세가 나와야지.”강하리는 당연히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구승훈은 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더 맹렬하게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서야 구승훈
회의는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강하리가 통역실에서 나오자 주해찬이 그쪽으로 다가갔다.“내가 그랬잖아. 너는 문제 없을 거라고. 박 교수님도 오전 내내 칭찬하셨어.”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하는 내내 손에 진땀이 나더라고요. 무슨 문제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그냥 오래 쉬어서 그래. 그 대단한 실력이 묻힌 거지.”강하리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웃었다.“오래 쉰 건 맞아요. 다행히 지금 다시 시작했잖아요. 시작만 하면 어느 때든 늦지 않아요.”주해찬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말했다.“그래, 맞아. 실력이 있으니까 언제 시작해도 늦은 건 아니야.”둘은 나란히 밖으로 향했다.대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마침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강하리는 예의상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강하리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했다.얼마 전 새로 부임한 외교부 장관 진태형이었다.강하리가 우러러보는 사람이기도 했다.진태형은 날카롭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 강하리는 그런 눈빛이 어딘가 부담스러웠다.주해찬이 나서서 소개했다.“장관님, 이분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강하리 씨입니다.”진태형은 강하리를 아래위로 훑었다.하지만 그 눈은 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강하리 씨,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혹시 심미현 씨를 아시나요?”강하리는 이 물음에 잠깐 멍해졌다.그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죄송합니다. 처음 듣는 분입니다.”진태형은 왠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주해찬 씨 말로는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던데요?”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그냥 좋아할 뿐입니다.”진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여전히 그리움이 느껴졌다.“앞으로 주해찬 씨를 따라 외교부에 와서 자주 관람해도 됩니다.”강하리가 고개를
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확실해?”강하리의 안색은 아직도 조금 창백했다.“네, 확실해요.”앞서 두 번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진짜 착각이 아니었다.“언제부터야?”“요 며칠요.”구승훈이 실눈을 뜨고는 긴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턱을 들어 올렸다.“전에 어머니와 원수 진 사람 아니야?”강하리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그런가 봐요.”사실 그녀도 확정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송동혁과 장진영을 빼고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노진우 붙여줄게.”노진우는 구승훈의 곁을 지키는 수행 보디가드였다.강하리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강하리의 볼을 꼬집더니 말했다.“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하리는 아직도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과 강하리가 가고 까만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운전자는 진용철, 얼굴에 칼을 맞은 흉터가 나 있는 자였다. 구승현은 누구에게 맞은 듯 얼굴이 찢어져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송유라였다.송유라는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내가 빨리 움직이라고 했죠. 뭉그적거리더니 이제 어떡할 거예요? 병신같이 납치하기도 전에 들켜요?”진용철이 험악하게 말했다.“말은 쉽게 하시는데, 벌건 대낮에 사람 납치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그렇게 쉬우면 직접 하시든지요.”송유라가 오만하게 말했다.“어디서 언성을 높여요?”송유라는 망나니 주제에 자기 앞에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구승현이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유라 씨, 그만해요. 이 일은 유라 씨가 먼저 우리를 찾아와 도모한 거잖아요. 직접 나섰다가 승훈이 형한테는 들킬까 봐 무서우면서 우리는 말 잘 듣는 개가 되어줬으면 하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우리를 찾아왔으면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요. 저 여자가 죽기를 바란다면서요. 제가 어떻게든 성공하면 되죠.”송유라는 구승현을 노려보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야 할 거예요.”이렇게 말하더니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렸다.송유라가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무슨 일이야?”“엄마가 위급하대요.”강하리는 말투는 차분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구승훈의 안색도 따라서 굳어졌다.“데려다줄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서 도착해보니 정서원은 아직도 응급 처치 중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며 서류를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서류에 사인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구승훈이 옆에서 손을 잡아줘서야 그녀는 간신히 이름 석 자를 적었다.서류를 다시 의사에게 건네주고 강하리는 붉어진 눈시울로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이 하얬다.그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익숙한 벨소리에 강하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왔다.“유라가 사생팬 때문에 다쳤대. 가봐야 할 것 같아.”강하리는 주먹을 꼭 쥐었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흐르지 않게 참으며 물었다.“꼭 가야 해요?”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진우한테 지금 바로 오라고 할게. 얌전히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아무 미련 없이 밖으로 걸어갔다.강하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가슴을 가득 메운 씁쓸함을 겨우 삼키며 눈길을 돌려 그가 사라진 쪽을 외면했다.그 뒤로 한 시간, 그녀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많은 생각을 한 것 같지만 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야 그녀는 정서원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중환자실로 옮겨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는 힘이 쏙 빠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몸을 가누지 못해 살짝 비틀거리는데 누군가 옆에서 잡아줬다.그녀는 그제야 노진우가 어느새 도착했음을 알았다.“
강하리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 사람들이 그쪽으로 쫓아갔다.앞장선 사람은 진용철이었는데 얼굴에 난 칼자국 흉터가 너무 흉측했다.강하리는 허둥지둥 112에 신고했다.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그런지 잠시 기다려달라는 안내음만 들렸다.강하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끊고 구승훈에게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절망적이었다.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인 건 구승재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강 부장님,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시죠?”“승재 씨, 살려주세요. 명인 병원 밖인데 누가... 아악!”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따라온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미친년이 달리기는 잘하네.”그러더니 바로 손을 들어 강하리의 뺨을 후려쳤다.“왜 더 달려보지? 어? 더 달려보라고!”강하리는 갑자기 들어온 싸대기에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래도 태연한 척 한마디 했다.“이미 신고했어. 곧 경찰들이 몰려올 거야. 지금 나를 놓아준다면 책임을 묻지는 않을게.”그러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질질 끌더니 길가에 세워진 밴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온 힘을 다해 차 문을 잡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차에 앉은 누군가가 호통쳤다.“뭐 해? 뜯어내지 않고.”강하리는 그제야 차에 앉은 사람이 구승현임을 발견했다.“뭐 하자는 거예요?”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저는 구승현 씨와 원수진 거 없는 거 같은데.”구승현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저랑은 원수진 거 없지만 당신이 따르는 남자가 나한테 원수졌거든. 일단 손발 묶고 입에 테이프 붙여. 그리고 사진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줘.”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구승훈을 협박할 방법이 저예요? 쓸모
“미쳤어? 뒤에 따라오는 차 정계 고위직 전용 차량인 거 안 보여? 산 아래로 떨어트려? 이제 다 살았다 이거지?”진용철은 그런 건 아예 몰랐다.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하지만 구승현은 너무 잘 알았다.어릴 때부터 날라리로 소문났지만 정계에 일어나는 일은 꿰고 있었다.저 정도 차량이면 발만 굴러도 전국이 흔들릴만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그저 구승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손발이 단단히 묶인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이 여자가 저런 인물을 어떻게 아는 거지?“그럼 어떡할까요?”진용철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뒤에 차를 따돌리는 건 영 현실성이 떨어졌다.구승현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벼랑 끝에 도착하면 저 여자 바로 던져버려.”강하리는 충혈된 눈으로 구승현을 바라봤다. 눈빛으로 구걸하고 있었다.죽고 싶지 않았다.정말 살고 싶었다.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인생을 마음껏 즐겨보지도, 정서원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그래서 너무 살고 싶었다.하지만 구승현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벼랑 끝에 도착해 차를 세우더니 강하리를 그대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절망, 또는 해탈이었을 것이다.이런 생각까지 들었다.아, 이제 더는 구승훈과 엮일 일은 없어서 좋네.실망할 필요도,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구승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눈을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졌다....구승현과 진용철은 강하리를 던져버리고는 얼른 차를 타고 도망갔다.주해찬과 진태영은 벼랑 끝에 차를 세웠다.뒤따라온 차가 한 대 더 있었다.구승재가 창백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강 부장님은요?”주해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아래로 던져졌어요.”구승재가 멈칫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아래는 바다에요. 내려가서 찾으면, 찾으면 분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
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바의 어둡고 밝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깊게 가라앉았다.“최하영 씨에게 전화해서, 연성시에 있는 형수님을 잘 돌봐주라고 해. 필요하면 안현우에게 직접 손을 써도 돼.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구승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희주 씨는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은 비웃음을 띠며 눈을 내리깔았다.“임희주는 아직 시험하고 있어.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여초연이 임희주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주진 않을 거니까.”구승재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왜?”구승훈이 시선을 돌렸다.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방금 형수님이 이혼 서류를 서산 퍼스트 빌리지로 보냈어.”구승훈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정말 빠르네.”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폭탄을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구승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시 다물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의 정원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구승훈은 이곳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 정원에서 강하리와 함께 늙어갈 거라 믿었다.하지만 텅 빈 지금의 주택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약속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구승훈은 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자기야, 나 이혼하고 싶지 않아. 괜찮을까?”그러나 텅 빈 주택에는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다음 날, 드물게 햇살이 쨍쨍했다.강하리는 붉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화장을 했다.가정 법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도로 건너편에서 구승훈은 묵묵히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구승훈이 앉아 있는 바 카운터 앞에는 텅 빈 술잔이 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천아름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을 취소한 건 분명 구 대표님이면서 강하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구승훈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따라 마시며 말했다.“남자들에게 여자는 그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가 봐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구승훈에게 내밀었다.“결혼식 날, 우리 하리 사진이에요.”구승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메이크업실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강하리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천아름과 손연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사진 속 강하리는 이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그날, 하리는...”천아름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그날 하리는 구 대표님을 찾으러 갔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죠.”구승훈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천아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유라고 물어봅시다. 구 대표님이 여태 사랑했던 여자는 강하리뿐이었잖아요. 분명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게 빨아들인 후에야 대답했다.“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갑자기 재미없어져서, 결혼하기 싫어졌어요.”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어요. 지금이 재밌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하리 같은 여자는 아이가 있어도 구혼자가 줄을 설 걸요? 구 대표님, 후회하지나 말아요.”그녀는 의자에 걸쳐 둔 헬멧을 들고 구승훈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때마침 구승재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안은 채 나오는 천아름과 마주쳤다
하지만 몸은 탈진한 듯 힘이 빠졌다.그저 질렸을 뿐이라니.강하리는 웃으며 눈가의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강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임명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요.”강하리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대리운전을 불러 차를 맡긴 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강하리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차가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졌다.강하리는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애초에 도박을 건 것은 자신이 아닌가?이제 패배를 인정할 때였다.하지만 가슴 한편이 텅 빈 듯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이 뼛속까지 얼어붙었다.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자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물은 투명한 이슬로 변했다.한편, 구승훈은 핸들을 부술 듯이 꽉 쥐고 천천히 움직였다.검은색 마이바흐는 그렇게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강하리의 뒤를 따라갔다.한참 뒤,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강하리’라는 이름 위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다른 번호를 눌렀다.“구승훈 씨, 전화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손연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가 난 듯 소리쳤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제가 잘못했어요.”“미안했다고 하면 다예요?”손연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결혼하기 싫었으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하리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해요?”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꾸짖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한참을 쏟아내던 손연지가 한숨을 내쉬고 조용해진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 데리러 와줘요.”손연지는 곧장 강하리에게 달려갔
강하리가 떠난 후,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창가에 서 있었고 손에 든 은은한 불꽃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다 봤어요?”임명우가 빙긋 웃으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참 우연이네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임 대표님의 취미가 남의 사생활 엿듣기였나?”임명우는 옆으로 다가와 낮게 웃으며 아래층 불빛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저는 단지 강 대표님과 구 대표님 사이의 일에 관심이 많을 뿐인데요.”그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아, 맞다. 구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강 대표님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항상 구 대표님만 바라보았고 저는 다가갈 틈조차 없었죠. 한때는 포기했어요. 강 대표님이 저를 싫어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기회를 주시다니,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스며 있었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임명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이듯 말했다.“설마 구 대표님, 정말로 강 대표님을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죠? 저는 혹시나 연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저는 당당하게 강 대표님에게 다가가도 되겠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날렵한 팔이 순식간에 움직였고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난 손가락이 임명우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쾅!순간,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임명우의 머리가 강화 유리에 부딪혔다.유리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금이 번지며 위태롭게 흔들렸고 구승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의 임명우를 바라보았다.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깊은 눈동자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무슨 수작을 부리든 상관없어. 하지만 강하리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넌 살아 있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임명우는
강하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임 대표님, 사회적 거리 두기, 모르세요?”임명우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아무 반응도 없네요?”“장난에 굳이 반응할 필요가 있나요?”강하리는 무심하게 답했고 임명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구승훈은 어떻게 생각할까요?”강하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이미 끝난 관계에 미련을 두는 게 아니었다.그가 그녀를 결혼식장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 그 순간부터, 모든 건 끝났으니까.“혹시 나중에 찾아와서 주먹이라도 날릴까요?”임명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하리는 조용히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임 대표님, 계속 장난칠 생각이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임명우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곧장 태도를 바꿔 다음 회의 내용을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고 손에 쥔 젓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죄송하지만, 술 좀 주세요.”강하리는 갑자기 임명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임명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음을 지었다.“어이구, 강 대표님이 술 마시고 싶었나 봐요?”강하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임명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종업원을 불렀다.곧 레드 와인 한 병이 테이블에 놓였고 강하리는 잔을 들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마셨다.그러나 와인 한 잔은 금세 다 비워졌고 술이 들어가자 강하리의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멀리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고 눈앞의 세상은 희미하게 번져갔다.구승훈은 자주 강하리를 냉정하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구승훈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 있을까?구승훈은 지금도 저쪽에
임명우가 강하리와 약속한 장소는 펠리스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강하리는 임명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순간,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잠깐만요! 구승훈 씨, 빨리요!”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바로 그때, 임희주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강하리를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 대표님, 우연이네요.”강하리는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가볍게 웃었다.“결혼 증명서 받기 전까지는 저, 아직 구 대표님 아내예요.”짧은 한마디에 임희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이내 구승훈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강하리의 굳은 표정과 달리 구승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엘리베이터 문은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로 가득 찼다.임희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가볍게 웃었다.“구 대표님, 아내분께 인사 안 하세요?”강하리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단 네 글자. 그 짧은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 상처 난 마음을 다시 한번 깊숙이 베어냈다.강하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결혼식도 제멋대로 취소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1층에서 68층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었지만 강하리에게는 두 시간처럼 길고도 고통스러웠다.마침내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강하리는 주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임명우는 미소를 머금고 구승훈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강하리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우리도 나가요.”임희주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아무 변화도 없었고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짧게 입을 열었다.“가요.”임희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정말 병
구승훈은 여전히 아파트 건물 아래에 서 있었다.연성시의 겨울은 눈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목을 움직이며 대답했다.“알았어. 최대한 빨리 간다고 전해줘.”짧게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준봉은 끊긴 휴대폰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강하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강하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 없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한참 뒤, 강하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봉을 바라보았다.“부탁드려요. 주식 양도는 이미 공증을 마쳤고 그가 줬던 옷과 장신구도 모두 정리해서 보냈어요. 구씨 가문 할아버지가 주신 재산도 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연정이 양육권은 제가 가질 겁니다.”마치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강하리는 짧게 말을 끝맺고 방을 나섰다.준봉은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을 나선 강하리는 문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서 주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구승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듯했다.또한, 연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강하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강하리가 결혼 증명서를 바꾸자고 했을 때, 적어도 잠시라도 망설일 줄 알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냉정했다. 이성적인 태도 뒤에 감춰진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했다.강하리는 시들어버린 정원을 바라보았다.강하리는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하며 그녀가 원했던 건 단지 구성훈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바람조차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이뤄지지 않는 꿈이 되어 버렸다.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차고 쪽에서 연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심준호는 연정이를 안고 땅에 떨어진 참
강하리는 자신이 어떻게 호텔을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차를 몰고 나온 순간부터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까지, 모든 것이 흐릿했다.그저 추웠다.차 안의 에어컨을 최대로 올렸지만 차가운 공기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통화 중’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강하리는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현실을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포기했다.그에게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었든, 결국 그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그동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이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강하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뒤따라오던 심준호와 손연지도 급히 차를 세우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맨발로 차에서 내리는 강하리였다.운전하려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듯했지만 차가운 눈밭 위에서도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시들어 버린 꽃잎처럼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을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이제 그녀도 포기했다.그토록 오랫동안 얽매였던 남자를, 이제는 놓아주기로 했다.너무 지쳤고 더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녀를 떠난 건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남는 건 결국 상처뿐이었다.심준호는 다급히 코트를 벗어 강하리의 어깨에 덮어주었다.“걱정하지 마. 삼촌이 너를 위해 꼭 복수해 줄게.”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린 강하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삼촌, 너무 힘들어.”심준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저 심준호의 품에 기대어 쓰러질 듯 몸을 맡겼다.“하리야!”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