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확실해?”강하리의 안색은 아직도 조금 창백했다.“네, 확실해요.”앞서 두 번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진짜 착각이 아니었다.“언제부터야?”“요 며칠요.”구승훈이 실눈을 뜨고는 긴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턱을 들어 올렸다.“전에 어머니와 원수 진 사람 아니야?”강하리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그런가 봐요.”사실 그녀도 확정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송동혁과 장진영을 빼고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노진우 붙여줄게.”노진우는 구승훈의 곁을 지키는 수행 보디가드였다.강하리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의 강하리의 볼을 꼬집더니 말했다.“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하리는 아직도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과 강하리가 가고 까만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운전자는 진용철, 얼굴에 칼을 맞은 흉터가 나 있는 자였다. 구승현은 누구에게 맞은 듯 얼굴이 찢어져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송유라였다.송유라는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내가 빨리 움직이라고 했죠. 뭉그적거리더니 이제 어떡할 거예요? 병신같이 납치하기도 전에 들켜요?”진용철이 험악하게 말했다.“말은 쉽게 하시는데, 벌건 대낮에 사람 납치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그렇게 쉬우면 직접 하시든지요.”송유라가 오만하게 말했다.“어디서 언성을 높여요?”송유라는 망나니 주제에 자기 앞에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구승현이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유라 씨, 그만해요. 이 일은 유라 씨가 먼저 우리를 찾아와 도모한 거잖아요. 직접 나섰다가 승훈이 형한테는 들킬까 봐 무서우면서 우리는 말 잘 듣는 개가 되어줬으면 하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우리를 찾아왔으면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요. 저 여자가 죽기를 바란다면서요. 제가 어떻게든 성공하면 되죠.”송유라는 구승현을 노려보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야 할 거예요.”이렇게 말하더니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렸다.송유라가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무슨 일이야?”“엄마가 위급하대요.”강하리는 말투는 차분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구승훈의 안색도 따라서 굳어졌다.“데려다줄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서 도착해보니 정서원은 아직도 응급 처치 중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며 서류를 건네주었다.강하리는 서류에 사인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구승훈이 옆에서 손을 잡아줘서야 그녀는 간신히 이름 석 자를 적었다.서류를 다시 의사에게 건네주고 강하리는 붉어진 눈시울로 옆에 앉아 있었다.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이 하얬다.그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익숙한 벨소리에 강하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왔다.“유라가 사생팬 때문에 다쳤대. 가봐야 할 것 같아.”강하리는 주먹을 꼭 쥐었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흐르지 않게 참으며 물었다.“꼭 가야 해요?”구승훈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진우한테 지금 바로 오라고 할게. 얌전히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아무 미련 없이 밖으로 걸어갔다.강하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가슴을 가득 메운 씁쓸함을 겨우 삼키며 눈길을 돌려 그가 사라진 쪽을 외면했다.그 뒤로 한 시간, 그녀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많은 생각을 한 것 같지만 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야 그녀는 정서원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중환자실로 옮겨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는 힘이 쏙 빠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몸을 가누지 못해 살짝 비틀거리는데 누군가 옆에서 잡아줬다.그녀는 그제야 노진우가 어느새 도착했음을 알았다.“
강하리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 사람들이 그쪽으로 쫓아갔다.앞장선 사람은 진용철이었는데 얼굴에 난 칼자국 흉터가 너무 흉측했다.강하리는 허둥지둥 112에 신고했다.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그런지 잠시 기다려달라는 안내음만 들렸다.강하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끊고 구승훈에게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절망적이었다.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인 건 구승재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강 부장님,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시죠?”“승재 씨, 살려주세요. 명인 병원 밖인데 누가... 아악!”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따라온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미친년이 달리기는 잘하네.”그러더니 바로 손을 들어 강하리의 뺨을 후려쳤다.“왜 더 달려보지? 어? 더 달려보라고!”강하리는 갑자기 들어온 싸대기에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래도 태연한 척 한마디 했다.“이미 신고했어. 곧 경찰들이 몰려올 거야. 지금 나를 놓아준다면 책임을 묻지는 않을게.”그러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질질 끌더니 길가에 세워진 밴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온 힘을 다해 차 문을 잡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차에 앉은 누군가가 호통쳤다.“뭐 해? 뜯어내지 않고.”강하리는 그제야 차에 앉은 사람이 구승현임을 발견했다.“뭐 하자는 거예요?”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저는 구승현 씨와 원수진 거 없는 거 같은데.”구승현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저랑은 원수진 거 없지만 당신이 따르는 남자가 나한테 원수졌거든. 일단 손발 묶고 입에 테이프 붙여. 그리고 사진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줘.”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구승훈을 협박할 방법이 저예요? 쓸모
“미쳤어? 뒤에 따라오는 차 정계 고위직 전용 차량인 거 안 보여? 산 아래로 떨어트려? 이제 다 살았다 이거지?”진용철은 그런 건 아예 몰랐다.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하지만 구승현은 너무 잘 알았다.어릴 때부터 날라리로 소문났지만 정계에 일어나는 일은 꿰고 있었다.저 정도 차량이면 발만 굴러도 전국이 흔들릴만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그저 구승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손발이 단단히 묶인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이 여자가 저런 인물을 어떻게 아는 거지?“그럼 어떡할까요?”진용철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뒤에 차를 따돌리는 건 영 현실성이 떨어졌다.구승현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벼랑 끝에 도착하면 저 여자 바로 던져버려.”강하리는 충혈된 눈으로 구승현을 바라봤다. 눈빛으로 구걸하고 있었다.죽고 싶지 않았다.정말 살고 싶었다.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인생을 마음껏 즐겨보지도, 정서원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그래서 너무 살고 싶었다.하지만 구승현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벼랑 끝에 도착해 차를 세우더니 강하리를 그대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절망, 또는 해탈이었을 것이다.이런 생각까지 들었다.아, 이제 더는 구승훈과 엮일 일은 없어서 좋네.실망할 필요도,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구승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눈을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졌다....구승현과 진용철은 강하리를 던져버리고는 얼른 차를 타고 도망갔다.주해찬과 진태영은 벼랑 끝에 차를 세웠다.뒤따라온 차가 한 대 더 있었다.구승재가 창백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강 부장님은요?”주해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아래로 던져졌어요.”구승재가 멈칫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아래는 바다에요. 내려가서 찾으면, 찾으면 분
어두운 아우라가 구승훈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는 심지어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부재중 전화 기록까지 확인했다. 그러다 강하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보고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강하리의 전화는 구승현이 보낸 사진보다 몇 분 정도 일찍 와 있었다. 즉 강하리는 납치를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그는 핸드폰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꽉 주었다.바로 이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무거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형, 강 부장님한테 문제가 생겼어.”구승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면서 두 눈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기운을 숨겼다.“지금 상황은 어때?”구승재는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지금으로서는 생사가 불분명해.”“뭐라고?”순간적으로 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고 심지어 자기 귀를 의심했다.“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누구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거야? 구승재 너 똑바로 말해.”“형, 그놈들이 강 부장님을 절벽에서 떨어트렸어. 우리가 지금 찾고는 있는데 강 부장님이 살아있을지 모르겠어...”아직 찾고는 있었지만 구승재는 더 이상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강하리의 양손은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는 채로 떨어졌다. 이렇게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즉사하지 않았더라도 익사했을 가능성이 컸다.구승훈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구승훈은 구승현이 기껏해야 그를 협박하기 위해 강하리를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구승훈은 자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강하리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그러나 지금...구승훈은 핸드폰이 부서질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머릿속에 있던 마지막 한줄기 선이 갑자기 끊어지는 것처럼 온몸이 극도로 경직되었다.그 뒤로 구승재가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거의 듣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구승훈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밖으
수십 미터 떨어진 바위 위에 하얀 형체가 보였고 구승훈은 그쪽을 향해 헤엄쳐갔다. 가까이 도착한 그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바위 끝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한 구승훈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그런데 지금 호흡을 멈춘 듯 바다 한가운데 놓인 바위 끝에 누워있었다.구승훈은 줄곧 자기 자신을 칼날과 총알이 날아와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덜컥 겁이 났다.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그녀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는 바닷물에 젖어 떨어진 것 같았고 손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려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전부 마찰로 인한 상처로 덮여 있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안은 순간 갑자기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하리를 내려다보는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력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들어 올려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싸늘했다.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구승훈의 두 눈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강하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필사적으로 구조를 시작했다.잠시 뒤 도착한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다.구승재는 바닷물 속에서 지켜보며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사람들이 이제는 희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강하리가 갑자기 쿨럭하고 기침을 뱉어냈다.구승훈은 깜짝 놀라며 손을 들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강하리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아직도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무력감이 그녀를 덮쳤다. 어쩌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분명 그녀에게는 아직 아름다운 인생이 남아 있는데 이
“구승훈 씨 방금 못 봤어요? 하리는 당신이 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구승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주해찬 씨,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강하리 이리 줘요.”주해찬은 여전히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곧 싸울 것 같은 두 사람 때문에 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안을게.”말을 마친 뒤 진태형은 강하리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차에 올라탔다.잠시 멍하니 있던 구승훈은 정신을 차린 뒤 재빨리 차에 올랐고 주해찬도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다. 차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주해찬에게 안긴 순간부터 다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구승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거기 담요 좀 줘요.”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주해찬은 다급하게 담요를 집어 그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담요를 받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손목을 보고 그는 흠칫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왔다.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구승현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통이 몰려오는 동시에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자기 여자를 보호하는 건 모든 남자의 책임이죠. 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에 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침묵을 지키며 진태형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구승훈의 시선은 창백한 강하리의 얼굴에 머물렀고 단 일 초도 떨어지지 않았다.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구승훈은 진태형의 품에 있던 강하리를 안아 들고서는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맡긴 뒤에야 그는 이 장면이 뭔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구승훈 씨는 어디 있었죠? 왜 그때 하리의 옆에 없었어요?”갑자기 주해찬이 구승훈의 뒤에서 물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응급실 문만
사실 구승훈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그가 당시 작은 어촌 마을에 보내졌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생과 사를 경험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처음 몇 번은 그의 어머니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했고 그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어촌 마을에 오고 나서야 그는 조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 그 후로 이어지는 치료 때문에 그는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하양이’라는 이름은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그의 구원자였다.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송유라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지만 강하리가 이런 위험에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꽉 잡으며 창백하고 연약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는 아직도 바위 끝에 숨을 쉬지 않고 누워있던 강하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구승훈은 긴 손가락으로 촉촉한 그녀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 무서워 하지 마. 나 여기 있어.”잠시 후 강하리는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구승훈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을 닦아주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탈골된 손목은 다시 붙였지만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구승훈은 그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손을 마저 닦아준 뒤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나오니 마침 구승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감으며 물었다.“둘째는 찾았어?”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이 정도로 간이 클 줄은 몰랐어.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만약 주해찬 씨와 진태형 장관님이 뒤를 따르지 않았다면 하리 씨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두 사람이 쫓아가지 않았다면 하리는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거야.”구승재는 깜짝 놀라며 잠시 구승훈의 뜻을 되짚어보았다.만약 주해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
경찰서에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이 차 옆에 서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원래는 구승훈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려고 했는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그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은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어떻게 됐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의 질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별것 없었어. 일단 돌아가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마음이 불편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괜찮았다.이젠 더 이상 주해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진 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건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더 이상 구승훈에게 미안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구승훈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네 남편 질투해.”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앞으로 다른 여자 좀 그만 끌어들일래?”구승훈은 살짝 멈칫하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질투해?”강하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차에 탔다.구승훈은 시선을 내린 채 웃다가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흘끗 훑어보고는 노민준의 이름을 삭제한 뒤 강하리를 따라 차에 탔다.그대로 차를 몰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화려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정숙이 굳어진 얼굴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심씨 가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시연이 있었다.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이정숙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두 사람을 본 구승훈의 표정도 굳어지며 위로하듯 강하리의 손을 꽉 잡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