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 사람들이 그쪽으로 쫓아갔다.앞장선 사람은 진용철이었는데 얼굴에 난 칼자국 흉터가 너무 흉측했다.강하리는 허둥지둥 112에 신고했다.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그런지 잠시 기다려달라는 안내음만 들렸다.강하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끊고 구승훈에게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절망적이었다.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인 건 구승재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었다.“강 부장님,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시죠?”“승재 씨, 살려주세요. 명인 병원 밖인데 누가... 아악!”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따라온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미친년이 달리기는 잘하네.”그러더니 바로 손을 들어 강하리의 뺨을 후려쳤다.“왜 더 달려보지? 어? 더 달려보라고!”강하리는 갑자기 들어온 싸대기에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래도 태연한 척 한마디 했다.“이미 신고했어. 곧 경찰들이 몰려올 거야. 지금 나를 놓아준다면 책임을 묻지는 않을게.”그러나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질질 끌더니 길가에 세워진 밴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온 힘을 다해 차 문을 잡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차에 앉은 누군가가 호통쳤다.“뭐 해? 뜯어내지 않고.”강하리는 그제야 차에 앉은 사람이 구승현임을 발견했다.“뭐 하자는 거예요?”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저는 구승현 씨와 원수진 거 없는 거 같은데.”구승현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저랑은 원수진 거 없지만 당신이 따르는 남자가 나한테 원수졌거든. 일단 손발 묶고 입에 테이프 붙여. 그리고 사진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줘.”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구승훈을 협박할 방법이 저예요? 쓸모
“미쳤어? 뒤에 따라오는 차 정계 고위직 전용 차량인 거 안 보여? 산 아래로 떨어트려? 이제 다 살았다 이거지?”진용철은 그런 건 아예 몰랐다. 그저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다.하지만 구승현은 너무 잘 알았다.어릴 때부터 날라리로 소문났지만 정계에 일어나는 일은 꿰고 있었다.저 정도 차량이면 발만 굴러도 전국이 흔들릴만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다.그저 구승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손발이 단단히 묶인 여자를 힐끔 쳐다봤다.‘이 여자가 저런 인물을 어떻게 아는 거지?“그럼 어떡할까요?”진용철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뒤에 차를 따돌리는 건 영 현실성이 떨어졌다.구승현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벼랑 끝에 도착하면 저 여자 바로 던져버려.”강하리는 충혈된 눈으로 구승현을 바라봤다. 눈빛으로 구걸하고 있었다.죽고 싶지 않았다.정말 살고 싶었다.그녀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인생을 마음껏 즐겨보지도, 정서원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그래서 너무 살고 싶었다.하지만 구승현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벼랑 끝에 도착해 차를 세우더니 강하리를 그대로 던져버렸다.강하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절망, 또는 해탈이었을 것이다.이런 생각까지 들었다.아, 이제 더는 구승훈과 엮일 일은 없어서 좋네.실망할 필요도,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구승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눈을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졌다....구승현과 진용철은 강하리를 던져버리고는 얼른 차를 타고 도망갔다.주해찬과 진태영은 벼랑 끝에 차를 세웠다.뒤따라온 차가 한 대 더 있었다.구승재가 창백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강 부장님은요?”주해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아래로 던져졌어요.”구승재가 멈칫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아래는 바다에요. 내려가서 찾으면, 찾으면 분
어두운 아우라가 구승훈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는 심지어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부재중 전화 기록까지 확인했다. 그러다 강하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보고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강하리의 전화는 구승현이 보낸 사진보다 몇 분 정도 일찍 와 있었다. 즉 강하리는 납치를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그는 핸드폰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꽉 주었다.바로 이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무거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형, 강 부장님한테 문제가 생겼어.”구승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면서 두 눈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기운을 숨겼다.“지금 상황은 어때?”구승재는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지금으로서는 생사가 불분명해.”“뭐라고?”순간적으로 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고 심지어 자기 귀를 의심했다.“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누구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거야? 구승재 너 똑바로 말해.”“형, 그놈들이 강 부장님을 절벽에서 떨어트렸어. 우리가 지금 찾고는 있는데 강 부장님이 살아있을지 모르겠어...”아직 찾고는 있었지만 구승재는 더 이상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강하리의 양손은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어 있는 채로 떨어졌다. 이렇게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즉사하지 않았더라도 익사했을 가능성이 컸다.구승훈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구승훈은 구승현이 기껏해야 그를 협박하기 위해 강하리를 납치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구승훈은 자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강하리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그러나 지금...구승훈은 핸드폰이 부서질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머릿속에 있던 마지막 한줄기 선이 갑자기 끊어지는 것처럼 온몸이 극도로 경직되었다.그 뒤로 구승재가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거의 듣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구승훈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밖으
수십 미터 떨어진 바위 위에 하얀 형체가 보였고 구승훈은 그쪽을 향해 헤엄쳐갔다. 가까이 도착한 그는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바위 끝에 누워있는 여자를 발견한 구승훈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그런데 지금 호흡을 멈춘 듯 바다 한가운데 놓인 바위 끝에 누워있었다.구승훈은 줄곧 자기 자신을 칼날과 총알이 날아와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덜컥 겁이 났다.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꽉 안았다. 그녀의 입에 붙어 있던 테이프는 바닷물에 젖어 떨어진 것 같았고 손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려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전부 마찰로 인한 상처로 덮여 있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품에 안은 순간 갑자기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품에 안겨 있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하리를 내려다보는 구승훈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력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들어 올려 그녀의 호흡을 확인했다.싸늘했다.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구승훈의 두 눈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강하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필사적으로 구조를 시작했다.잠시 뒤 도착한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다.구승재는 바닷물 속에서 지켜보며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일분일초가 흘러갔고 사람들이 이제는 희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강하리가 갑자기 쿨럭하고 기침을 뱉어냈다.구승훈은 깜짝 놀라며 손을 들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강하리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아직도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무력감이 그녀를 덮쳤다. 어쩌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분명 그녀에게는 아직 아름다운 인생이 남아 있는데 이
“구승훈 씨 방금 못 봤어요? 하리는 당신이 만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구승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주해찬 씨,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강하리 이리 줘요.”주해찬은 여전히 강하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곧 싸울 것 같은 두 사람 때문에 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안을게.”말을 마친 뒤 진태형은 강하리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차에 올라탔다.잠시 멍하니 있던 구승훈은 정신을 차린 뒤 재빨리 차에 올랐고 주해찬도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다. 차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향했다.강하리는 주해찬에게 안긴 순간부터 다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구승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거기 담요 좀 줘요.”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주해찬은 다급하게 담요를 집어 그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담요를 받아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손목을 보고 그는 흠칫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왔다.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구승현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통이 몰려오는 동시에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자기 여자를 보호하는 건 모든 남자의 책임이죠. 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에 하는 후회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진태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침묵을 지키며 진태형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구승훈의 시선은 창백한 강하리의 얼굴에 머물렀고 단 일 초도 떨어지지 않았다.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다.구승훈은 진태형의 품에 있던 강하리를 안아 들고서는 곧바로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녀를 의사에게 맡긴 뒤에야 그는 이 장면이 뭔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구승훈 씨는 어디 있었죠? 왜 그때 하리의 옆에 없었어요?”갑자기 주해찬이 구승훈의 뒤에서 물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응급실 문만
사실 구승훈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그가 당시 작은 어촌 마을에 보내졌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생과 사를 경험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처음 몇 번은 그의 어머니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했고 그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어촌 마을에 오고 나서야 그는 조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 그 후로 이어지는 치료 때문에 그는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하양이’라는 이름은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그의 구원자였다.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송유라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지만 강하리가 이런 위험에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꽉 잡으며 창백하고 연약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는 아직도 바위 끝에 숨을 쉬지 않고 누워있던 강하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구승훈은 긴 손가락으로 촉촉한 그녀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리야, 무서워 하지 마. 나 여기 있어.”잠시 후 강하리는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구승훈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을 닦아주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탈골된 손목은 다시 붙였지만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구승훈은 그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손을 마저 닦아준 뒤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고 나오니 마침 구승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감으며 물었다.“둘째는 찾았어?”구승재는 고개를 저었다.“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이 정도로 간이 클 줄은 몰랐어.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만약 주해찬 씨와 진태형 장관님이 뒤를 따르지 않았다면 하리 씨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두 사람이 쫓아가지 않았다면 하리는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거야.”구승재는 깜짝 놀라며 잠시 구승훈의 뜻을 되짚어보았다.만약 주해
강하리는 여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구승훈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강하리가 깨어나면 어떤 태도일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결국 포기했다.하지만 강하리가 깨어난 뒤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강하리가 날이 어두워져서야 깨어났다. 눈을 뜬 그녀는 아직 조금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누군가 물었다.“깼어?”아주 익숙한 목소리지만 그녀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네.”강하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내가 가서 의사 불러올게.”강하리는 손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자 방금까지 구승훈이 계속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의사가 와서 진찰한 뒤 말했다.“깨어나긴 했지만 폐의 감염과 몸의 타박상들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요. 아직 휴식이 필요합니다.”강하리가 대답했다.“네 선생님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구승훈은 다시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조용히 그의 손을 피했다.구승훈의 얼굴은 바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도 그녀가 지금 화를 내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저 다정히 물을 뿐이었다.“아직 많이 아파?”강하리는 눈을 감으며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말했다.“괜찮아요.”사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난 뒤 다시 붙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아픔이나 괴로움은 이제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정말 괜찮아? 그럼 누가 꿈속에서 계속 아프다고 하면서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은 거지?”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그녀의 냉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하리야, 미안해.”강하리는 구승훈의 미안하다는 한마
구승훈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넌 끝낼 수 없다고. 구승현은 내가 처리할 거니까 넌 몸부터 챙겨. 소란 피우지 말고.”구승훈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인형처럼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구승훈 씨, 난 이제 정말 당신 옆에 있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엄마가 위독하셨을 때 당신은 나를 혼자 남겨뒀고 내 옆에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송유라를 찾으러 갔어요. 난 그 순간부터 당신과 그만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번에 납치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난 당신을 떠날 생각이었어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눈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 있는 연약한 여자를 바라보자 마음이 아팠다.“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널 떠날 수 없게 만들 방법이 많다는 걸 너도 알잖아.”강하리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맺혀있는 두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네. 나도 알아요. 당신 앞에서 나 강하리는 영원히 하찮은 존재라는 걸. 영원히 반항할 여지도 없다는걸. 당신한테 날 다시 돌아오게 만들 방법이야 많겠지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요.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 강요할 건데요? 위약금이요? 줄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약금 줄게요. 그것도 아니면 또 우리 엄마로 날 협박하려고요? 만약 구승훈 씨가 더 이상 우리 엄마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포기해야겠죠.”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제 구승훈 씨는 어떤 방법을 날 막으려고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종잇장보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대에 기대었다.구승훈은 관자놀이가 갑자기 지끈거렸다.그는 강하리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
늙은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사모님, 여씨 가문의 조상 묘에 대해서...”휴대폰을 잡은 여초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얼굴에 분노가 서린 듯했지만 잠시 후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걔가 서두르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집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초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집사가 그녀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자 여초연은 자연스럽게 숄로 몸을 감쌌다.나이를 지긋하게 먹었지만 여전히 40대처럼 보이는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테이블로 걸어갔고 테이블 위에는 매화로 만든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여초연이 가위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듬자 집사는 다소 초조한 듯 말했다.“그래도 조상님 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여초연은 멈칫하다가 이내 차갑게 웃었다.“우리가 가서 구씨 가문의 조상 무덤도 같이 파면 되잖아.”그렇게 말하던 중 갑자기 가위를 꽉 쥐었다.“그리고 구동근 그 늙은이도 언젠가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야.”...구동근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또 한 번 분노에 휩싸여 쓰러질 뻔했다.살면서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이 또 있을까.지난번엔 심문석의 체면 때문에 심씨 가문으로 갔고 당시 구승훈과는 물과 불같은 사이라 그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갔는데 백아영에게 뺨을 맞을 줄이야.그런데 이젠 심미현의 무덤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니.아무리 그래도 그가 웃어른인데 자존심을 굽힌다고 한들 심미현이 그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구동근은 기가 막혀 무슨 일이 있어도 B시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데리러 사람을 보낼 줄은 몰랐다.데리러 오는 것이라기엔 사실 납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경호원 몇 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구동근의 앞으로 다가와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고 그 순간 방 안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죽기 전까지 구씨 가문은 내 말에
강하리가 무심코 흘깃 쳐다보니 임희주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며 심문석 쪽으로 다가갔다.구승훈이 슬쩍 강하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심문석 옆에 자리를 잡고 웨딩 촬영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는 시선을 내린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 두 시 넘어서 임희주가 보낸 메시지도 그제야 눈앞에 나타났고 구승훈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메시지를 읽은 후 휴대폰을 도로 넣었다.강하리는 그의 행동을 못 본 척 심문석 옆에 앉아 애교를 부렸고 구승훈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이 떠나서야 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고 백아영은 강하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나 그녀를 불러서야 강하리는 마침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할머니, 왜 그래요?”백아영은 눈가에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강하리는 입술을 다물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백아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증조할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심각한 상태 아니야. 근데... 승훈이랑 싸웠니?”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지 구승훈을 걱정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가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굳이 끝까지 파고들 필요가 없으니까.한편 병원 밖으로 나온 구승훈의 표정도 살짝 어두워졌고 준봉이 병원 앞에 차를 세우자 구승훈은 곧바로 차에 올랐다.“대표님, 회사로 갈까요?”“정신과로 가.”임희주는 구승훈을 보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다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기분은 좀 어때요?”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선을 긋는 듯 차가운 아우라를 풍겼다.“사람이라도 보내 임 선생한테 적당한 거리가 뭔지 가르쳐 드려야 할까요?”임희주는 멈칫하다가 정신을 차렸다.“메시지 말하는 거예요? 죄송해요. 어젯밤 노민준 씨랑 두시까지 그쪽 병에 대해 연구
이정숙은 강하리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당황한 듯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강하리는 이미 의사 진료실로 걸어가고 있었다.진시연의 얼굴은 뺨을 맞아 두 개의 손자국이 남았고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에 담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강하리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저 협박이라는 건 알지만 괜스레 겁이 났다.이정숙과 진강석이 지켜주기에 그동안 선 넘는 짓을 수없이 했었다.진태형이 없어도 이정숙과 진강석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하지만 이 또한 그녀가 감옥에 가지 않게 하거나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며 강하리를 막을 순 없었다.지금의 강하리는 심씨 가문을 등에 업고 곁엔 구승훈이 지키고 있으니 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어떠한 고통을 선사하려고 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그동안 강하리가 나서지 않고 반격하지 않은 건 전부 진태형 때문이란 걸 안다.하지만 지금은...강하리가 떠난 것을 확인한 이정숙이 병동으로 들어가 따지려고 하는데 진시연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겼다.“할머니, 가지 마세요.”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일을 더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이정숙을 말린 진시연은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 씨, 이걸로 나도 오늘 벌을 받은 거니까 강하리 씨한테 나 좀 내버려두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가 강하리 씨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강하리 씨 곁엔 지켜주는 사람이 많고 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없는데...”“진시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가로챘다.“그쪽이랑 하리를 비교하지 마.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진시연의 얼굴이 또다시 하얗게 질리며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그리고 고작 뺨 두 대 맞은 걸로 벌을 받았다는 거야? 진시연,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어?”진시연의 입꼬리가 파들거렸다.“구승
강하리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알겠어요. 금방 갈게요.”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차 안에서 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창백한 얼굴의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걱정하지 마, 할아버지 괜찮을 거야.”강하리는 낮게 대답했지만 증조할아버지의 연세가 적은 것도 아니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심문석은 이미 병동에 입원한 뒤였고 노인의 초췌한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강하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할아버지.”강하리가 달려가 그의 손을 잡자 심문석이 웃으며 답했다.“울지 마. 할아버지 멀쩡하잖아.”하지만 강하리는 눈시울이 시큰거렸다.진시연의 일은 결국 그녀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죄송해요. 할아버지.”심문석은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네가 할아버지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사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 살았어. 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지. 그래도 네 엄마 때처럼 네가 웨딩드레스 입은 걸 보고 싶었는데.”강하리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꼭 볼 수 있을 거예요.”심문석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는지 몇 마디를 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고 강하리는 눈시울이 붉게 물든 채 병실에서 나왔다.백아영이 그녀를 토닥이며 구승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12월 초에 좋은 날이 있다니까 별문제 없으면 그때 식을 올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강하리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백아영은 별다른 말 없이 곧장 병동으로 들어갔고 진시연도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증조할아버지는 좀 어떠세요?”그녀가 말하며 문을 열고 심문석의 병실로 들어가려는데 문을 열기도 전에 강하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하리, 뭐 하는 거야? 시연이 놔줘!” 이정숙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강하리는 시뻘게진 눈으로 기세등등
욕실에서 자정까지 구승훈에게 괴롭힘을 당한 강하리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이 개자식을 유혹하는 게 아닌데.평소였다면 그래도 자제를 했을 텐데 오늘은 정말 한계까지 몰아붙여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지쳐 있었다.그녀의 몸 위를 덮치고 있는 구승훈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모습이었다.강하리가 발로 차고 싶어도 다리를 들지 못하자 구승훈은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다리 주물러줄까?”말하며 그의 커다란 손이 강하리의 종아리를 잡았고 발목의 이빨 자국이 그의 손가락에 눌려 살짝 붉어졌다.구승훈이 이빨 자국에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종아리를 따라 연이어 입술을 갖다 대자 강하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구승훈!”구승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허벅지 안쪽에 또 다른 이빨 자국을 남겼다.“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며? 강 대표님은 약속 안 지킬 건가?”강하리는 화를 내며 그를 발로 찼고 구승훈은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더니 큰 손이 작은 배로 향했다.“그렇게 내걸 많이 먹었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납작해?”말하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에 강하리는 또다시 밖으로 무언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이제부터 콘돔 써!”강하리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흘렀어? 내가 닦아줄게.”강하리는 그를 발로 차며 무시했지만 구승훈은 휴지를 뽑아 정말로 닦아주었다.다행히 닦아주는 것 말고는 다른 짓을 하지 않았고 다 닦은 뒤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그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구승훈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미안해요. 앞으로는 사모님 만나지 않을게요. 하지만 정말 대표님을 위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니까 이런 일로 얼굴 붉힐 필요는 없어요.]메시지를 읽은 후 강하리는 졸음이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에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가 넘은 뒤였다.구승훈의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강하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었다.욕실에서 나온 구승훈은 침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마트까지 다녀와 한 상 가득 차렸는데 모두 구승훈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구승훈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후의 만찬은 아니지?”강하리가 눈을 흘겼다.“먹든 말든 맘대로 해.”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옆에서 해명했다.“사모님이 대표님께서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고 영양 보충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거예요. 대표님 입맛을 잘 아니까 앞으로 자주 요리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구승훈은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갔고 어느 틈에 그의 품에 안긴 강하리의 귓가에 한 마디가 들렸다.“강 대표님이 이러면 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지는데.”말하며 남자가 뒤에서 두 번 허리 짓까지 해대자 강하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고 가정부는 웃으며 연정이를 안은 채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강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구승훈을 홱 노려보았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지금 충분히 점잖은 거야. 아주머니와 연정이가 없었으면 넌 지금 여기서 덮쳐졌어.”구승훈은 그 말을 하고 나면 강하리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강하리가 뒤돌아서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조금만 참아. 오늘 밤엔 뭘 하든 다 들어줄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고 당황한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젠장, 이젠 정말 밥 생각이 사라졌다.손연지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돌아왔고 밥을 먹으며 강하리에게 일 얘기를 했다.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고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왠지 모르게 자신이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어린이 의자에 앉아 밥을 집어 먹는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이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참 부럽다.”연정이가 숟가락을 들고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손연지에게 건네며 입으로는 엄마라고 불렀다.손연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
임희주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구승훈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사모님 찾아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의사인 제 말도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계속 이러시면 안 돼요.”“그건 임 선생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창문이 올라가고 검은색 마이바흐가 밤의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임희주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노민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차 안에서 준봉은 뒷좌석에 앉은 구승훈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차 밖의 불빛이 이따금 아른거리며 준봉은 상사의 안색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준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엔 임 선생님도 좋은 마음에 그런 건데 정말 서두르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말을 마친 준봉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임희주가 좋은 의도에서 그랬든 아니든 절대 강하리에게 찾아가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됐다.오늘 임희주와 강하리의 대화 내용은 구승훈이 일찌감치 카페의 카메라 영상을 도출해 알아냈다.누가 그에게 부담을 준다든지, 지나치게 강요한다든지, 이런 말을 어떻게 감히 강하리에게 하도록 내버려두겠나.준봉은 조용히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서산 퍼스트 빌리지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지만 무척 조용했고 준봉이 차를 세우자 별장 마당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불빛 아래 마당에서 연정이가 혼자서 강하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적으로 걷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도 강하리는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연정이가 강하리에게 몇 걸음 다가서더니 강하리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연정이를 안자 모녀의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내내 싸늘했던 구승훈의 표정이 마침내 부드럽게 바뀌었고 강하리가 연정이를 품에 안은 채
“승훈아,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너만 원하면 내일 열 명이라도 보내줄게.”회의실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하며 늙은이들은 책상을 쾅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옆에서 지켜보는 준봉이 더 불안했지만 구승훈은 가만히 있었고 재밌는 연극이라도 치켜보는 듯 이따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두드렸다.“구승훈, 우리 말 듣고 있는 거야?”휴대폰 화면에 아내라는 글이 뜨자 구승훈의 눈빛이 단번에 부드러워지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퇴근했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하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답했다.“언제 퇴근해?”구승훈은 회의실에서 하나같이 격앙된 표정을 짓는 늙은이들을 훑어보았다.“곧.”“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회의실에 착석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고 방금 강하리의 전화를 받을 때 보였던 온화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싸늘함만 남았다.“얘기 다 끝났습니까?”한 마디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고 구승훈은 회의실 안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여씨 가문 조상의 묘 하나 파헤친 걸로 왜들 그리 흥분하세요?”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안타깝지만 그런 수작 나한텐 안 통합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이 회사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장 나가도 좋습니다. 정안에 차고 넘치는 게 주주들이라서요. 하지만 여기 남아서 나와 내 아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당신들 조상 무덤까지 파헤칠 겁니다. 회의 끝.”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준봉은 그의 뒤를 따르며 회의실에 있는 주주들을 바라보았다.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정안그룹이 과거 SH그룹보다 훨씬 대단했기에 주주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안의 지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늙은이들이 한 방 먹은 모습을 보니 준봉도 속이 시원했다.그동안 저 늙은이들이 뒤에서 남몰래 강하리
제 자리에 멈춰 선 여명희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강하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진시연 또한 한번 들여보낸 이상 두 번을 못 할까.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심씨 가문으로 향했고 심준호는 여전히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오호, 시집갔다고 친정은 잊은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오지도 않았잖아.”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외숙모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최근에야 애당초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심준호의 결혼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준호 본인이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결국 이 결혼은 심준호가 심예진을 곁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반면 심예진은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만 받아들였고 심지어 외국에서 만나는 남자 친구까지 생겼기에 심준호는 강하리가 숙모 얘기를 꺼내자 눈썹이 들썩거렸다.“다 커서 이젠 팔이 밖으로 굽네?”강하리는 웃으며 옆으로 가서 심준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삼촌, 숙모 찾으러 안 갈 거예요?”심준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숙모는 어디로 도망 못 가.”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심준호에게 구승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이렇게 물었다.“삼촌한테는 얘기했어요?”심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승훈이가 말한 적은 없는데...”심준호는 문득 어렸을 때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승훈이는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어. 그리고 그 원인이 어머니였지.”심준호는 강하리에게 당시 본 장면에 관해 이야기했고 무표정하던 강하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심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도 정신과 치료로 받은 전기충격 치료 때문이었어. 그때 아마 9살 정도 됐겠네.”심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작은 꼬맹이가 한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