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배가 고팠던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그 식사 자리가 너무 불편해 별로 먹지 못하였고 오늘도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일어나, 나가서 밥 먹자.”“움직이기 싫어요. 그냥 주문해서 먹어요.”그녀의 말에 구승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자고도 아직 회복이 안 돼?”“오랫동안 일했으니까요.”그가 웃으며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었다.“일어나서 운동 좀 해.” 옷을 입혀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강 부장도 보경대학 나왔다고 했지? 나 구경 좀 시켜줘.”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갑자기 보경대학은 왜요?”“강 부장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서.”그녀는 거절할 수가 없었고 거절한다고 해도 이 남자한테는 소용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시큰거리는 허리를 펴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두 사람은 밥을 먹고 난 뒤, 보경대학으로 향했고 날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보경대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캠퍼스에는 각양각색의 커플들이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구승훈과 함께 캠퍼스를 걸어 다니면서 문득 그녀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그녀도 캠퍼스 어딘가에서 이 남자를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말이 안 되는 우연한 만남을 위해 가장 먼 길을 돌아 매일 수업을 들으러 가기도 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상황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승훈 씨는 어디서 대학 다녔어요?”그녀는 갑자기 물었다.“강주에서.”그 말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렸다. 구승훈은 외국에서 대학을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그가 강주에서 대학에 다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그 작은 어촌 마을이 바로 강주에 있었다.“왜... 왜 강주예요?”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하듯 담담해 보였다.“그냥, 가고 싶어서.”아주 짤막한 대답이
사실 이 질문은 좀 갑작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이었으니까.그래서 그의 물음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예의 바르게 되물었다.“우리 어머니에 관해 궁금한 게 뭔가요?”“하리 씨 어머니의 연세, 직장 그리고 성함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나한테 말해줄 수 있을까요?”정서원을 생각하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훌륭한 여자였다. 예쁘고 성격도 온화하고 춤이든 그림이든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을 잘못 만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바람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한 남자 때문에 이 꼴이 된 것이다. 그녀는 아픈 마음을 가다듬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우리 엄마는 정 씨예요. 3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그녀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정서원의 나이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모른다. 그 당시 기억을 잃은 정서원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신분증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지금의 서류들은 모두 후에 송동혁이 대신 발급받아 준 것이었다. 그래서 나이든 생일이든 강하리는 사실 정확히 몰랐다. 한편, 심준호는 강하리의 어머니의 성을 들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이 정 씨였군. 그럼 아니라는 거잖아.’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큰 교통사고였나요?”그는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아주 심했죠. 지금까지도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거든요.”그녀의 말에 심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눈앞의 어린 여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누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여자라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이 안 좋았다.“미안해요.”진작에 익숙해진 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심준호는 예의상 더는 묻지 않고 말길을 돌렸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핸드폰 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강하리에게 연락처를 남겨주었다.“기회가 되면 자주 연락해요. 승훈이 신경 쓰지 말고.”강하리는 심준호의 번호를 받아적었고 심준호는 웃는 얼굴로 구승훈을 쳐다보았다.한편,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구승훈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심준호가 떠난 뒤에도 구승훈은 카페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 앞에는 따뜻한 물 한 잔이 놓여있었다. 그는 예술품을 다루듯이 유리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대표님, 안 가요?”그녀의 말에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왜? 심준호가 가면 우리도 가야 하는 거야?”그의 말투에서 그녀는 그가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아마도 자신이 심준호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대인관계가 있지 않는가?“가고 싶지 않으면 여기 좀 더 있어요.”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갑자기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준호 같은 스타일 좋아해?”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 한 쌍의 커플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여자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문뜩 곧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 말은 곧 있으면 구승훈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니요, 심준호 씨는 내 스타일 아니에요.”“그럼, 강 부장은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당신이 짝사랑하는 그 남자는 어떤 스타일인 거야?”그녀는 맞은편의 남자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좋아하는 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을 이미 충분히 좋아할 만큼 좋아했었다.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녀는 아마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 구승훈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대답이 이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좋다는 얘기인가?”“그렇게까지는 못하죠. 하지만 날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강하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왜?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아니요. 그냥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라서요.”그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강 부장이 그 사람한테 많이 다쳤나 보군.”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그녀의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더욱 세게 잡았다. “아직도 못 잊은 거야?”“그냥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불편할 뿐이에요.”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변해갔다.“강 부장이 이렇게 사랑에 목매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강하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런 그녀를 한참 쳐다보고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당신이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야?”“좋은 사람이었어요. 예전에 나한테 잘해줬거든요.”그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잘해줬는데 당신을 떠난 건가? 그건 당신의 감정을 가지고 논 나쁜 놈인 거잖아.”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그 사람이 날 잊어버렸어요.”“잊어버렸다고? 어떻게? 어디 다친 거야? 기억이라도 잃어버린 건가? 아니면 당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잊어버린 거야?”“나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날 잊어버렸더라고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녀의 눈에 비친 슬픔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눈빛이 어두워진 그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그 후에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언제?”“없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또다시 물었다.“그 사람 보고 싶어?”그녀는 자신을 감정을 가다듬고는 그를 향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그 사람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 사람도 아닌데. 그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웃고 있지만 눈빛이 슬퍼 보이는 그녀를 보며 구승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이런 그녀의 모습보다 진심 어린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이 더
안예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새해 홍보 영상은 지금쯤 나왔어야 했는데 송유라가 아직도 찍지 않아 진행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심지어 송유라는 이틀 전에 보경시까지 갔었거든요. 돌아오자마자 제가 촬영을 빨리 진행해달라고 했더니 제 뺨을 때렸어요.”강하리는 자기 때문에 안예서가 힘들어진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이번에 그녀는 송유라와 보경시에서 조금 불쾌한 일들이 있었다.송유라는 구승훈의 앞에서는 그녀를 어떻게 하지 못했지만 돌아와서 그 화를 안예서에게 푼 것 같았다.“예서 씨, 미안해.”강하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안예서는 입술을 삐쭉였다.“왜 부장님이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강하리는 더 설명하지 않고 그저 물었다.“송유라는? 아직 회사에 있어?”안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습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휴게실로 가서 얼음찜질하고 있어. 내가 올라가 볼 테니까.”최상층에 강하리가 도착했을 때 송유라는 마침 비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당신들은 커피 하나 제도로 못 타요?”비서가 재빨리 송유라에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송유라 씨. 입맛에 안 맞으셨다면 제가 다시 타 오겠습니다.”송유라의 화는 점점 더 커졌고 폭발하려는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차가운 비웃음을 터트리더니 입을 열었다.“됐어요. 강 부장님이 워낙 똑똑하고 손재주가 좋으니까 비서님보다 더 커피를 잘 탈 것 같은데.”강하리는 송유라가 앞을 막아서자 발걸음을 멈칫했다.“강 부장님이 커피 좀 타 줘요.”강하리의 표정이 구겨졌다.“미안한데 지금 그럴 시간이 없네요.””강하리 씨!”송유라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강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표님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았고 비서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구 대표님은 아래층 회의실에 계십니다.”송유라가 미소를 지었다.“왜요? 승훈 오빠가 있으면 강 부장님 편이라도 들어줄 것 같아요?”강하리는 구승훈이 그녀를 도와줄 거라는
비서는 옆에서 강하리가 송유라에게 커피를 붓는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고서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강하리의 앞에 다가왔다.“강 부장님, 좀 참지 그랬어요?”비서의 뜻은 어떤 것들은 잠시 참을 수 있다면 참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송유라는 매일 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동안 송유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 여기로 오면 매번 그들을 힘들게 했다. 비서실 전체가 송유라의 횡포를 견디고 있었는데 하필 오늘 강하리가 참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이 커피 한 잔도 또 어떤 화를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이 커피를 붓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혼날 텐데 차라리 커피를 뿌리는 게 속이라도 시원하지 않겠어요?”“하지만....”강하리가 웃었다.“괜찮아요.”사실 그녀는 더 이상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구승훈이 화를 내든 분노하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송유라는 아래층에 도착한 뒤 노크도 하지 않은 채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이에 회의실 안에서 진행하고 있던 신제품 설명회가 중단되었고 구승훈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송유라에 눈썹을 치켜떴다.그러더니 엉망이 된 그녀의 옷을 보는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무슨 일이야?”그의 질문에 송유라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구승훈의 표정은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워졌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미 예측한 것 같았다.전체 회사에서 송유라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강하리일 것이다.그는 고개를 돌려 앞에서 신제품 설명회를 진행하고 있던 직원을 바라보았다.“회의는 먼저 여기서 끝내죠.”그의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직원들은 서둘러 물건들을 챙겨 신속하게 회의실을 떠났다. 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를 쳐다보지도 못했다.모두가 떠난 후 구승훈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강하리가 뿌렸어?”송유라는 여전히 입을 열지
구승훈은 그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송유라는 억울함을 참으며 비서가 건네주는 옷을 챙긴 후 갈아입으러 떠났다.구승훈은 그제야 물었다.“강하리는 어디 있습니까?”“세트장에 갔습니다.”구승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네요.”비서는 2초 정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사실 커피는 송유라가 씨가 스스로 자기 몸에 부은 겁니다. 그런 다음 강 부장님이 또 한 잔을 뿌렸습니다.”구승훈의 눈빛은 어두웠고 그의 감정을 하나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비서는 긴장감에 옆에 내려놓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그래서요?”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구승훈이 다시 물었고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이 일은 전부 강 부장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강하리는 비웃음을 날렸다.“그래서 강하리 씨가 커피를 뿌리지 않았나요?”비서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뿌렸습니다.”구승훈은 차갑게 웃었다.“그러니까요. 지금 비서님이 말하는 강 부장의 탓을 할 수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말해줄래요?”비서는 순간 등줄기가 얼어붙었다.마침내 구승훈이 말했다.“가서 사직서 쓰세요.”강하리는 계속 구승훈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비서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줄은 몰랐다. 그 순간 강하리는 비서가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세트장 쪽의 업무 지시를 마친 뒤 서둘러 회사로 돌아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니 마침 비서가 짐을 싸고 있었다. 비서의 눈가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강하리는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미안해요.”비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강 부장님 잘못이 아니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비서는 강하리 보다 나이가 어렸고 사실 강하리에게서 어느 정도 일을 배웠었기에 제자라고 할 수도 있었다.처음 강하리가 회사에 입사했을 때 그녀는 구승훈의 비서로 일했었다. 나중에 마케팅팀에 합류했고 당시 그녀의 자리
구승훈은 그녀의 대답을 들고서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 말도 더하지 않고 강하리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앞으로 이런 일 생기면 송유라한테 대들지 말고 직접 날 찾아 와.”강하리는 묻고 싶었다.‘내가 당신을 찾아오면 당신이 날 도와줄 건가요?’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이 좋았다.“알겠어요.”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구승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가 봐. 너무 무리하지 말고.”말을 마친 뒤 그는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에는 집에 돌아가서 밥 못 먹어.”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첫사랑을 위로하러 간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제는 이미 익숙해졌기에 그녀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사무실을 나갔다.밖에 있는 비서에게 말을 전한 뒤 그는 다시 업무를 보러 떠났다.퇴근 후 강하리는 바로 정서원의 병원으로 향했다. 한동안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서원은 여전히 병실 침대에 아주 조용하게 누워 있었다.강하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결국 그녀는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엄마, 빨리 일어나면 안 돼요?”간호사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빨개졌다.사실 의사가 이미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이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하리 씨 그동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자기 몸부터 잘 챙겨야 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주머니.”말을 마친 뒤 그녀는 멈칫했다.“최근에 강찬수가 다녀간 적이 있나요?”지난번 병원으로 강찬수가 그녀를 찾아온 이후로 구승훈은 그녀에게 대신 강찬수를 상대해 주겠다고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
B시 대양그룹.정양철이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미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강하리 검색어는 어떻게 된 거야?”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대양그룹 명의로 매수한 것인데 아마도 회장님을 시험하려는 의도 같습니다.”정 회장이 강하리를 아낀다면 이 일을 거론할 것이고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든 말든 넘어가겠지.정양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고 그가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주현이 통해 강하리에게 연락해서 대양그룹이 JM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라고 해.”말을 마친 그가 멈칫했다.“집사람이 물어보면 강하리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고.”비서의 눈이 번뜩이더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정주현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지난번 구승훈과 함께 대양그룹 입찰을 뺏은 이후 정양철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정양철이 무슨 꿍꿍이로 합작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지금은 정양철을 상대로 놀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정주현 씨, 대양그룹에서 마음만 먹으면 파트너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죠?”정주현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강하리 씨,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강하리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B시에 언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협업 안 해도 오랜만에 얼굴 한번 봐요. 우리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알았어요, 그럼 가면 연락할게요.”정주현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연미숙의 모습이 보였다.“엄마, 여기서 뭐 해?”연미숙이 웃었다.“우리가 강하리랑 같이 일해?”정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구씨 집안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밖으로 사업을 넓히려는 것 같아.”연미숙은 인상을 찌푸렸다. “꼭 강하리여야만 대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야?”정주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가 왜?”연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두 사람이 차 안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리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화사한 아침 햇살 같은 그 미소가 구승훈은 왠지 모르게 눈에 거슬렸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구승훈의 차가 보였다.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지만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 주해찬은 차에서 내려 구승훈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창문을 살며시 두드리자 구승훈이 창문을 내렸다.“구 대표님 시간 있으세요? 얘기 좀 할까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주해찬 씨는 남의 연애에 참견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구승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주해찬은 계속 웃기만 했다.“구승훈 씨, 당신과 하리가 잘 지낸다면 나도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당신은 하리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긴 한가요?”그의 말에 구승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말을 시작했다.“주해찬 씨, 행복하든 아니든 그건 다 나와 강하리 사이의 일이지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주해찬은 조롱 섞인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웃었다. “구승훈 씨, 내가 하리 데려간다고 했죠. 이번엔 말한 대로 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다시 차로 향했다.구승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완전히 사라진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보았다.그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면서 결국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그 자식이랑 떠날 거야?]강하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냥 대화창을 닫아버렸다.구승훈은 전송된 메시지에 답장이 오지 않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입안의 쓴맛을 삼키고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구승재의 전화가 걸려 왔다.“형, 큰어머니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