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꺼낸 강하리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달리 온화하고 순했다.어찌 보면 그 목소리 안에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부탁이 담겨있기도 했다.구승훈은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그는 고개를 들어 강하리의 눈을 마주치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강 부장은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사람들한테 제가 내연녀가 아니라고 얘기만 해주세요. 저 대신 해명만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온종일 신경 쓰지 않는 척 행동했지만, 신경이 안 쓰인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오해를 받고 괄시를 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했다.따뜻한 손길로 연고를 발라주는 눈앞의 남자에 강하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든 것이다.지금 강하리를 도와 이 모든 게 다 헛소리고 루머라고 얘기해줄 사람은 구승훈 뿐이었다.강하리의 말에 연고를 발라주던 구승훈의 손길이 멈췄다.강하리의 눈을 바라보던 구승훈이 물었다.“강 부장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대처방법이라고 생각해?”구승훈의 뼈가 있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정신을 차렸다.구승훈의 말처럼 이렇게 하는 게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구승훈이 대체 어떤 신분으로, 또 어떤 입장에서 강하리를 위해 진실을 밝혀줄 수 있을까?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둘은 스스로 자신들의 관계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둘의 사이를 인정해버리면 송유라는 어떻게 될까? 송유라를 내연녀로 만들어버려야 하나?이건 구승훈이 원하지 않을 거다.강하리가 체념한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이 송유라를 포기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강하리를 도와줄 리가 없었다.“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게 행동했어요.”잔뜩 주눅 든 강하리의 목소리에 구승훈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휴지를 뽑아 손에 묻은 연고를 닦아내며 말했다.“장서연은 조만간 해고할 거야. 회사 내에서도 이
책상 위에 놓은 자료들을 두어 번 대충 훑어보던 구승훈이 펜을 들어 결재 서류 위로 사인을 휘갈겼다.사인을 마친 구승훈은 결재 서류를 강하리에게 넘겨주는 대신 고개를 들어 강하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팔은, 좀 괜찮아?”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많이 괜찮아졌습니다.”여전히 강하리를 바라보던 구승훈이 또다시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습니다.”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일도 할 수 있을 만큼만 해.”“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물었다.“구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조용히 강하리를 바라보던 구승훈이 물었다.“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자꾸 가려고 안달이실까.”딱히 부정은 하지 않은 강하리가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서요.”눈을 가늘게 뜬 구승훈이 강하리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이번 주 주말에 동창회 한다며?”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시간 안 되시면, 굳이 참석 안 하셔도 됩니다.”구승훈이 그녀의 동창회에 같이 나가주겠다고 말한 뒤로 강하리 역시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남자친구 행세 역시 가짜인 건 알고 있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불과 이틀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어버린 후부터는 그 일말의 기대 역시 사라져 버렸다.구승훈을 남자친구라고 데려가봤자 달라지는 게 있을까?어차피 가짜인데, 다 거짓말인데.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지키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이미 강 부장이 부탁했던 일 아닌가, 같이 가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구승훈의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제가 동창회에서 누구 만날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걔 안 와요.”다시 한번 가늘게 실눈을 뜬 구승
몇 초 동안의 정적을 깬 강하리가 말했다.“구 대표님께서 제 동창회에 같이 가줄 수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구승훈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돌아갈 테니까 저녁밥 준비해 놔.”“네.”이대로 끊기엔 아쉬웠는지 구승훈이 다시 한번 물었다.“뭐, 다른 일은 없나?”“없습니다.”“그래, 그럼.”말을 마치는 순간 남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강하리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해 까다롭던 탓에 뭐든 당일에 사 온 신선한 재료로만 요리를 해왔던 게 문제였다.게다가 요 며칠 강하리 역시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계속 룸서비스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탓에 냉장고에 뭐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어찌 됐든 구승훈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에 저녁밥을 차려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장서연이 동창회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는 강하리 역시 알 수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참석한 이상 장서연이 멋대로 날뛰는 일은 없으리라.저녁 준비를 위해 간단히 장을 보고 왔더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강하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밥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다 된 밥과 반찬거리들을 식탁에 차려놓은 강하리가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디.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응답은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다시 한번 다이얼을 눌러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다급하게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은 구승훈과 눈이 마주쳤다.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채 현관에 서 있는 구승훈은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구승훈은 코트를 벗으며 현관을 벗어나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식탁 앞까지 걸어
강하리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입맛은 없었지만 직접 힘들게 차린 것들이니 다 버리기에도 아까웠다.이미 먹을 대로 많이 욱여넣은 강하리는 남은 음식들을 들어 쓰레기통에 옮겨 담았다.남은 음식들을 봉투에 잘 담은 강하리는 음식물 봉투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가 길고양이와 길강아지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길목에 갖다 놓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뒤, 내일 있을 동창회의 주소를 구승훈에게 보내주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오후, 손연지가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아, 진짜 짜증 나네!”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강하리가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왜 그래?”“장서연 저 망할 년이 진짜, 학교 단톡방에 뭐라고 올렸는지 알아? 네가 누구 내연녀 노릇이나 하고 다닌다고 떠드는데 내가 진짜 열이 뻗쳐서!”손연지의 말에 강하리가 가늘게 실눈을 떴다.학교 단톡방 알림은 이미 끄고 산 지 오래라 전혀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장서연이 그 단톡방에서 그런 불여우 같은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어 학교 단톡방을 확인해본 강하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이미 모두가 장서연의 말에 놀아났는지 단톡방에 있는 모두가 강하리에 대한 유언비어들을 퍼뜨리고 있었다.“그런 거 보지 마.”손연지가 급하게 강하리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뺏어 들려 했다.단톡방 내용은 정말 가관 그 자체였다. 본인이 아닌 손연지 마저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인데 강하리는 어떨까.손연지의 그런 행동에도 강하리는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그녀의 표정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하지만 그러면서도 단톡방에서의 장서연의 모든 발언들을 일일이 캡처하고 있었다.화면 캡처를 끝낸 강하리는 바로 휴대폰 다이얼 창으로 넘어가 112를 눌렀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강하리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강하리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었다.순간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피가 차게 식는듯한 기분이 들었다.사람 자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절망이라는 감정에 절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얇게 입은 탓인지 휴대폰을 들고 있는 강하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당장이라도 구승훈에게 문자를 보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지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대화창에 단 한 글자도 입력하지 못했다.따진다고 뭐가 달라질까?기껏해야 마음만 조금 편해지려나?강하리도 알고 있었다. 구승훈은 송유라를 위해서라면 자신과의 약속 따위는 가볍게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 약속을 저버리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송유라라는 사실까지.그녀는 자학의 심정으로 송유라의 트위터 타임라인으로 들어가 보았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불과 3분 전에 올라온 그녀의 게시물이 보였다.게시물은 다름 아닌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그녀의 사진이었다.하지만 강하리는 그 사진 속에서 반만 찍힌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비록 반밖에 안 찍힌 사진이었지만 강하리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 뒷모습의 주인이 바로 구승훈이라는 것을.게다가 시사회에 참석한 구승훈이 입고 있던 옷은 바로 자신이 예전에 직접 구승훈에게 선물해 주었던 정장이었다.강하리는 자신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자부해왔던 사람이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가락은 사시나무 떨듯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트위터 앱에서 나온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억누르며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손연지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가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허리야, 무슨 일 있어?”“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먼저 가볼게.”강하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그녀는 홀로 동창회에서 장서연과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하리의 휴대폰에 띄워진 녹음화면을 본 장서연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서연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당당하면 그 남친이라는 사람 좀 불러와 보지 그래? 지금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봐. 그럼 내가 다 인정하고 사과할 테니까.”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그이가 오든 말든, 언제 오든 그게 다 너랑 무슨 상관인데?”둘 사이의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는 게 육안으로도 보이자 반장을 포함한 몇 명의 남자들이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서연아, 너 먼저 들어가 있어.”다급해진 반장이 장서연에게 얘기했다.하지만 애인의 만류에도 장서연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반장은 미안한 듯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강하리, 미안한데 혹시 너 먼저 가고 싶으면...”“야, 강하리. 애인 있는 남자 먼저 꼬드겨놓고 소문 퍼지니까 동창들 만나긴 창피한가 보지? 이렇게 도망가시겠다?”반장의 말을 끊고 장서연이 큰 소리로 강하리에게 외쳤다.“남 사이에 끼어들고 남 연애 망치기나 하고, 그래 놓고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잖아. 남자들한테 몸이나 대주는 너덜너덜한 걸레년 주제에!”잔뜩 흥분한 장서연이 끊임없이 강하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장서연을 말리던 반장도 힘에 부쳤는지 많이 힘들어 보였다.강하리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게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장서연은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이고 뭐고 진작에 다 내다 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장서연 그만 좀 해!”참다못한 반장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갑자기 들려온 남성의 큰 고함소리에 놀란 장서연이 더욱 흥분해 악에 받쳐 얘기했다.“왜? 너도 저년한테 홀렸니? 그래,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방금 뭐라고 했더라? 병원 같이 가주겠다 그랬나? 저년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신경을 안 쓰는데 네가 왜 끼어들어서 지랄이냐고!”장서연의 언행은 점점 거칠어졌다.주위에서 장서연의 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남자 동창들도 점점 거칠어지는 워딩에 난감한
송유라가 올린 사진을 말하는 줄 알고 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봤어. 괜찮아, 연지야. 걱정하지 마. 나 이제 집에 거의 다 왔어.”손연지는 걱정으로 일순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하리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알았지? 그런 말은 보지도 말고, 상대하지도 말고 그들이 뭐라던 절대 신경 쓰지 마.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 없잖아. 알겠지?”말을 하던 손연지는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강하리가 너무 마음 아팠다. 구승훈 그 개 같은 남자는 뭐가 잘났다고 하리를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우리 하리가 그 자식보다 어디가 못났다고!손연지는 순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연지야, 대체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목이 메어 꺽꺽거리며 말했다.“하리야... 트위터... 못 봤어?”순간 손연지는 자기 혀를 꽉 깨물어 잘라버리고 싶었다.“나 먼저 끊을게.”강하리는 손연지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트위터를 열었다.[송유라의 연애사에 제삼자가 끼어든 정황 의심]인기 검색어 1위에 있는 검색어를 본 강하리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눌러서 들어가 보니 동영상 한 개가 있었고 얼마 전 그녀가 남자 옷 가게에서 송유라의 뺨을 때리던 장면이 담겨있었다.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라 소리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들을 수 없었지만 강하리가 송유라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동영상 밑에는 이미 선동하는 댓글이 수두룩했다.[요즘 불륜녀들은 다 이렇게 거만한가요? 감히 대놓고 진짜 여자 친구의 뺨을 때리다니.][불륜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같이 뻔뻔하네요.]불륜녀, 여우 같은 년, 뻔뻔하다는 글들이 댓글 창을 가득 채웠다.그리고 누군가가 한 팬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무릎을 꿇고 강하리에게 용서를 빌던 동영상을 올렸다.그 동영상을 본 강하리는 관자놀이가 툭툭 튀었다. 그녀는 그때 누군가 몰래 촬영
강하리는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정서원이 입원해 있는 병원.금방 호텔에서 나온 후 강하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여기로 왔다. 병원 앞에 도착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기 싫었다.병원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혹시라도 그녀를 알아보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병상에 누워있는 정서원까지 자신 때문에 체면이 깎일 것 같았다.강하리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불륜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도피라도 하듯 문 앞에 서서 더는 안으로 한 발도 내딛지 않았다.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쏟아져 내리고 가을밤의 차가운 바람이 차디찬 빗방울에 섞여 그녀의 몸을 적셨다.추운가?물론 춥겠지.하지만 강하리는 느낄 수 없었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정서원이 있는 층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비에 젖어버리고 희고 깨끗한 얼굴에 빗물이 흘러 내려와 그녀의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은 몹시 차분해 보였다. 오직 맑은 두 눈만이 끝없는 슬픔과 처량함으로 얼룩져 있었다.바로 노민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본 한 장면이었다.여자는 측면으로 그곳에 서있었고 빗방울이 불빛과 어우러져 떨어져 내리자,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특히 화려한 옷차림의 그녀는 비를 흠뻑 맞았지만 아름다움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처량하게 아름다웠다.노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그들 무리는 노는 게 지나칠 정도였고 안현우가 강하리에게 품은 욕망은 아주 노골적이었다.노민우도 예전에는 강하리에게 환상을 품은 적이 있었다.전에 진실게임을 할 때도 만약 구승훈만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결국 구승훈의 여자를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이런 강하리를 보니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움이 피어올랐다.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일들을 그는 낱낱이 보았다.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분명 누군가 뒤에서 부채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마트까지 다녀와 한 상 가득 차렸는데 모두 구승훈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구승훈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후의 만찬은 아니지?”강하리가 눈을 흘겼다.“먹든 말든 맘대로 해.”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옆에서 해명했다.“사모님이 대표님께서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고 영양 보충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거예요. 대표님 입맛을 잘 아니까 앞으로 자주 요리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구승훈은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갔고 어느 틈에 그의 품에 안긴 강하리의 귓가에 한 마디가 들렸다.“강 대표님이 이러면 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지는데.”말하며 남자가 뒤에서 두 번 허리 짓까지 해대자 강하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고 가정부는 웃으며 연정이를 안은 채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강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구승훈을 홱 노려보았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지금 충분히 점잖은 거야. 아주머니와 연정이가 없었으면 넌 지금 여기서 덮쳐졌어.”구승훈은 그 말을 하고 나면 강하리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강하리가 뒤돌아서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조금만 참아. 오늘 밤엔 뭘 하든 다 들어줄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고 당황한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젠장, 이젠 정말 밥 생각이 사라졌다.손연지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돌아왔고 밥을 먹으며 강하리에게 일 얘기를 했다.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고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왠지 모르게 자신이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어린이 의자에 앉아 밥을 집어 먹는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이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참 부럽다.”연정이가 숟가락을 들고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손연지에게 건네며 입으로는 엄마라고 불렀다.손연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
임희주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구승훈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사모님 찾아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의사인 제 말도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계속 이러시면 안 돼요.”“그건 임 선생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창문이 올라가고 검은색 마이바흐가 밤의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임희주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노민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차 안에서 준봉은 뒷좌석에 앉은 구승훈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차 밖의 불빛이 이따금 아른거리며 준봉은 상사의 안색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준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엔 임 선생님도 좋은 마음에 그런 건데 정말 서두르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말을 마친 준봉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임희주가 좋은 의도에서 그랬든 아니든 절대 강하리에게 찾아가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됐다.오늘 임희주와 강하리의 대화 내용은 구승훈이 일찌감치 카페의 카메라 영상을 도출해 알아냈다.누가 그에게 부담을 준다든지, 지나치게 강요한다든지, 이런 말을 어떻게 감히 강하리에게 하도록 내버려두겠나.준봉은 조용히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서산 퍼스트 빌리지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지만 무척 조용했고 준봉이 차를 세우자 별장 마당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불빛 아래 마당에서 연정이가 혼자서 강하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적으로 걷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도 강하리는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연정이가 강하리에게 몇 걸음 다가서더니 강하리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연정이를 안자 모녀의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내내 싸늘했던 구승훈의 표정이 마침내 부드럽게 바뀌었고 강하리가 연정이를 품에 안은 채
“승훈아,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너만 원하면 내일 열 명이라도 보내줄게.”회의실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하며 늙은이들은 책상을 쾅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옆에서 지켜보는 준봉이 더 불안했지만 구승훈은 가만히 있었고 재밌는 연극이라도 치켜보는 듯 이따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두드렸다.“구승훈, 우리 말 듣고 있는 거야?”휴대폰 화면에 아내라는 글이 뜨자 구승훈의 눈빛이 단번에 부드러워지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퇴근했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하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답했다.“언제 퇴근해?”구승훈은 회의실에서 하나같이 격앙된 표정을 짓는 늙은이들을 훑어보았다.“곧.”“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회의실에 착석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고 방금 강하리의 전화를 받을 때 보였던 온화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싸늘함만 남았다.“얘기 다 끝났습니까?”한 마디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고 구승훈은 회의실 안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여씨 가문 조상의 묘 하나 파헤친 걸로 왜들 그리 흥분하세요?”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안타깝지만 그런 수작 나한텐 안 통합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이 회사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장 나가도 좋습니다. 정안에 차고 넘치는 게 주주들이라서요. 하지만 여기 남아서 나와 내 아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당신들 조상 무덤까지 파헤칠 겁니다. 회의 끝.”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준봉은 그의 뒤를 따르며 회의실에 있는 주주들을 바라보았다.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정안그룹이 과거 SH그룹보다 훨씬 대단했기에 주주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안의 지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늙은이들이 한 방 먹은 모습을 보니 준봉도 속이 시원했다.그동안 저 늙은이들이 뒤에서 남몰래 강하리
제 자리에 멈춰 선 여명희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강하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진시연 또한 한번 들여보낸 이상 두 번을 못 할까.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심씨 가문으로 향했고 심준호는 여전히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오호, 시집갔다고 친정은 잊은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오지도 않았잖아.”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외숙모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최근에야 애당초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심준호의 결혼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준호 본인이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결국 이 결혼은 심준호가 심예진을 곁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반면 심예진은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만 받아들였고 심지어 외국에서 만나는 남자 친구까지 생겼기에 심준호는 강하리가 숙모 얘기를 꺼내자 눈썹이 들썩거렸다.“다 커서 이젠 팔이 밖으로 굽네?”강하리는 웃으며 옆으로 가서 심준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삼촌, 숙모 찾으러 안 갈 거예요?”심준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숙모는 어디로 도망 못 가.”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심준호에게 구승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이렇게 물었다.“삼촌한테는 얘기했어요?”심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승훈이가 말한 적은 없는데...”심준호는 문득 어렸을 때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승훈이는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어. 그리고 그 원인이 어머니였지.”심준호는 강하리에게 당시 본 장면에 관해 이야기했고 무표정하던 강하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심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도 정신과 치료로 받은 전기충격 치료 때문이었어. 그때 아마 9살 정도 됐겠네.”심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작은 꼬맹이가 한계까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