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초 동안의 정적을 깬 강하리가 말했다.“구 대표님께서 제 동창회에 같이 가줄 수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구승훈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돌아갈 테니까 저녁밥 준비해 놔.”“네.”이대로 끊기엔 아쉬웠는지 구승훈이 다시 한번 물었다.“뭐, 다른 일은 없나?”“없습니다.”“그래, 그럼.”말을 마치는 순간 남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강하리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해 까다롭던 탓에 뭐든 당일에 사 온 신선한 재료로만 요리를 해왔던 게 문제였다.게다가 요 며칠 강하리 역시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계속 룸서비스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탓에 냉장고에 뭐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어찌 됐든 구승훈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에 저녁밥을 차려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장서연이 동창회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는 강하리 역시 알 수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참석한 이상 장서연이 멋대로 날뛰는 일은 없으리라.저녁 준비를 위해 간단히 장을 보고 왔더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강하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밥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다 된 밥과 반찬거리들을 식탁에 차려놓은 강하리가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디.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응답은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다시 한번 다이얼을 눌러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다급하게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은 구승훈과 눈이 마주쳤다.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채 현관에 서 있는 구승훈은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구승훈은 코트를 벗으며 현관을 벗어나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식탁 앞까지 걸어
강하리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입맛은 없었지만 직접 힘들게 차린 것들이니 다 버리기에도 아까웠다.이미 먹을 대로 많이 욱여넣은 강하리는 남은 음식들을 들어 쓰레기통에 옮겨 담았다.남은 음식들을 봉투에 잘 담은 강하리는 음식물 봉투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가 길고양이와 길강아지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길목에 갖다 놓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뒤, 내일 있을 동창회의 주소를 구승훈에게 보내주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오후, 손연지가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아, 진짜 짜증 나네!”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강하리가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왜 그래?”“장서연 저 망할 년이 진짜, 학교 단톡방에 뭐라고 올렸는지 알아? 네가 누구 내연녀 노릇이나 하고 다닌다고 떠드는데 내가 진짜 열이 뻗쳐서!”손연지의 말에 강하리가 가늘게 실눈을 떴다.학교 단톡방 알림은 이미 끄고 산 지 오래라 전혀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장서연이 그 단톡방에서 그런 불여우 같은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어 학교 단톡방을 확인해본 강하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이미 모두가 장서연의 말에 놀아났는지 단톡방에 있는 모두가 강하리에 대한 유언비어들을 퍼뜨리고 있었다.“그런 거 보지 마.”손연지가 급하게 강하리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뺏어 들려 했다.단톡방 내용은 정말 가관 그 자체였다. 본인이 아닌 손연지 마저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인데 강하리는 어떨까.손연지의 그런 행동에도 강하리는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그녀의 표정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하지만 그러면서도 단톡방에서의 장서연의 모든 발언들을 일일이 캡처하고 있었다.화면 캡처를 끝낸 강하리는 바로 휴대폰 다이얼 창으로 넘어가 112를 눌렀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강하리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강하리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었다.순간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피가 차게 식는듯한 기분이 들었다.사람 자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절망이라는 감정에 절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얇게 입은 탓인지 휴대폰을 들고 있는 강하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당장이라도 구승훈에게 문자를 보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지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대화창에 단 한 글자도 입력하지 못했다.따진다고 뭐가 달라질까?기껏해야 마음만 조금 편해지려나?강하리도 알고 있었다. 구승훈은 송유라를 위해서라면 자신과의 약속 따위는 가볍게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 약속을 저버리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송유라라는 사실까지.그녀는 자학의 심정으로 송유라의 트위터 타임라인으로 들어가 보았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불과 3분 전에 올라온 그녀의 게시물이 보였다.게시물은 다름 아닌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그녀의 사진이었다.하지만 강하리는 그 사진 속에서 반만 찍힌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비록 반밖에 안 찍힌 사진이었지만 강하리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 뒷모습의 주인이 바로 구승훈이라는 것을.게다가 시사회에 참석한 구승훈이 입고 있던 옷은 바로 자신이 예전에 직접 구승훈에게 선물해 주었던 정장이었다.강하리는 자신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자부해왔던 사람이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가락은 사시나무 떨듯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트위터 앱에서 나온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억누르며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손연지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가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허리야, 무슨 일 있어?”“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먼저 가볼게.”강하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그녀는 홀로 동창회에서 장서연과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하리의 휴대폰에 띄워진 녹음화면을 본 장서연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서연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당당하면 그 남친이라는 사람 좀 불러와 보지 그래? 지금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봐. 그럼 내가 다 인정하고 사과할 테니까.”강하리의 표정이 점점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그이가 오든 말든, 언제 오든 그게 다 너랑 무슨 상관인데?”둘 사이의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는 게 육안으로도 보이자 반장을 포함한 몇 명의 남자들이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서연아, 너 먼저 들어가 있어.”다급해진 반장이 장서연에게 얘기했다.하지만 애인의 만류에도 장서연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반장은 미안한 듯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강하리, 미안한데 혹시 너 먼저 가고 싶으면...”“야, 강하리. 애인 있는 남자 먼저 꼬드겨놓고 소문 퍼지니까 동창들 만나긴 창피한가 보지? 이렇게 도망가시겠다?”반장의 말을 끊고 장서연이 큰 소리로 강하리에게 외쳤다.“남 사이에 끼어들고 남 연애 망치기나 하고, 그래 놓고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잖아. 남자들한테 몸이나 대주는 너덜너덜한 걸레년 주제에!”잔뜩 흥분한 장서연이 끊임없이 강하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장서연을 말리던 반장도 힘에 부쳤는지 많이 힘들어 보였다.강하리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게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장서연은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이고 뭐고 진작에 다 내다 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장서연 그만 좀 해!”참다못한 반장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갑자기 들려온 남성의 큰 고함소리에 놀란 장서연이 더욱 흥분해 악에 받쳐 얘기했다.“왜? 너도 저년한테 홀렸니? 그래,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방금 뭐라고 했더라? 병원 같이 가주겠다 그랬나? 저년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신경을 안 쓰는데 네가 왜 끼어들어서 지랄이냐고!”장서연의 언행은 점점 거칠어졌다.주위에서 장서연의 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던 남자 동창들도 점점 거칠어지는 워딩에 난감한
송유라가 올린 사진을 말하는 줄 알고 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봤어. 괜찮아, 연지야. 걱정하지 마. 나 이제 집에 거의 다 왔어.”손연지는 걱정으로 일순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하리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알았지? 그런 말은 보지도 말고, 상대하지도 말고 그들이 뭐라던 절대 신경 쓰지 마.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 없잖아. 알겠지?”말을 하던 손연지는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강하리가 너무 마음 아팠다. 구승훈 그 개 같은 남자는 뭐가 잘났다고 하리를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우리 하리가 그 자식보다 어디가 못났다고!손연지는 순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연지야, 대체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목이 메어 꺽꺽거리며 말했다.“하리야... 트위터... 못 봤어?”순간 손연지는 자기 혀를 꽉 깨물어 잘라버리고 싶었다.“나 먼저 끊을게.”강하리는 손연지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트위터를 열었다.[송유라의 연애사에 제삼자가 끼어든 정황 의심]인기 검색어 1위에 있는 검색어를 본 강하리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눌러서 들어가 보니 동영상 한 개가 있었고 얼마 전 그녀가 남자 옷 가게에서 송유라의 뺨을 때리던 장면이 담겨있었다.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라 소리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들을 수 없었지만 강하리가 송유라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동영상 밑에는 이미 선동하는 댓글이 수두룩했다.[요즘 불륜녀들은 다 이렇게 거만한가요? 감히 대놓고 진짜 여자 친구의 뺨을 때리다니.][불륜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같이 뻔뻔하네요.]불륜녀, 여우 같은 년, 뻔뻔하다는 글들이 댓글 창을 가득 채웠다.그리고 누군가가 한 팬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무릎을 꿇고 강하리에게 용서를 빌던 동영상을 올렸다.그 동영상을 본 강하리는 관자놀이가 툭툭 튀었다. 그녀는 그때 누군가 몰래 촬영
강하리는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정서원이 입원해 있는 병원.금방 호텔에서 나온 후 강하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여기로 왔다. 병원 앞에 도착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기 싫었다.병원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혹시라도 그녀를 알아보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병상에 누워있는 정서원까지 자신 때문에 체면이 깎일 것 같았다.강하리는 자신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불륜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도피라도 하듯 문 앞에 서서 더는 안으로 한 발도 내딛지 않았다.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쏟아져 내리고 가을밤의 차가운 바람이 차디찬 빗방울에 섞여 그녀의 몸을 적셨다.추운가?물론 춥겠지.하지만 강하리는 느낄 수 없었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정서원이 있는 층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비에 젖어버리고 희고 깨끗한 얼굴에 빗물이 흘러 내려와 그녀의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은 몹시 차분해 보였다. 오직 맑은 두 눈만이 끝없는 슬픔과 처량함으로 얼룩져 있었다.바로 노민우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 본 한 장면이었다.여자는 측면으로 그곳에 서있었고 빗방울이 불빛과 어우러져 떨어져 내리자,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특히 화려한 옷차림의 그녀는 비를 흠뻑 맞았지만 아름다움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처량하게 아름다웠다.노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그들 무리는 노는 게 지나칠 정도였고 안현우가 강하리에게 품은 욕망은 아주 노골적이었다.노민우도 예전에는 강하리에게 환상을 품은 적이 있었다.전에 진실게임을 할 때도 만약 구승훈만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결국 구승훈의 여자를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이런 강하리를 보니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움이 피어올랐다.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일들을 그는 낱낱이 보았다.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분명 누군가 뒤에서 부채
시사회에서 노민우가 보내온 사진을 본 구승훈은 얼굴이 몹시 흉측하게 변했다.송유라가 구승훈의 옆에 서서 물었다.“강 부장님 지금 민우 씨랑 같이 있어요?”그녀는 싸늘하게 웃으며 야유했다.“강 부장 매력이 엄청나네요. 왼쪽에는 현우 씨, 오른쪽에는 민우 씨를 끼고. 인터넷에서는 그 여자에 대해 한창 떠들썩한데 아직도 데이트할 기분이 있나 봐요.”구승훈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송유라를 흘겨보며 말했다.“유라야, 어떤 일은 내가 눈 감아 줄 수 있어. 하지만 어떤 일은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송유라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째려보았다.“오빠, 그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일이 있어, 먼저 갈게.”송유라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시사회에 나랑 같이 있어 준다며?”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같이 있어 줬잖아. 이미 사진까지 올리지 않았어?”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뒤에 있는 송유라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일그러졌다....시사회에서 나온 구승훈은 바로 길옆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탔다.“제대로 알아봤어?”구승재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지금 모든 정황이 장서연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구승훈이 그를 쳐다보았다.“그래서 무슨 뜻이야?”“장서연이 강 부장님에게 원한이 있어봤자 얼마나 큰 원한이 있겠어? 강 부장님이 돌아와서 그 여자가 해고 됐다고 하지만 이렇게 소란을 피울 정도는 아니잖아?”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았다.“그 두 사람은 전부터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어.”구승훈이 한마디로 이 문제를 갈무리하자 구승재는 여전히 석연치 않았지만,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형이 대체 왜 송유라를 이렇게 싸고도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사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 일은 누가봐도 송유라의 짓이 분명한데, 그는 형처럼 똑똑한 사람이 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강하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손연지를 바라보았다.“연지야,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 대화할 사람조차 없었을 거야.”그녀의 말에 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나한테 계속 그런 헛소리 하면 진짜 화낼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알았어, 이제 안 할게.”“그래.” 손연지는 대답만 하고 더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강하리가 자신에게 기대게 내버려두었다.한참을 쉬고 나니 강하리의 안색이 드디어 좋아졌다. 그녀는 손연지의 팔을 툭툭 쳤다.“내가 입을 만한 옷 좀 찾아줘.”손연지는 눈썹을 찡그렸다.“오늘 밤엔 그냥 우리 집에서 자.”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하룻밤 숨어 있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언제든 돌아가야 할 텐데.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구승훈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손연지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 나중에 다시 전화 안 왔다며?”강하리는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다시 전화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가 자기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구승훈이 인터넷에 올라온 그 동영상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처리하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내버려뒀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하지만 그는 주동적으로 그녀를 도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와서 애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이 남자는 항상 이렇게 정확하게 그녀를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다. 강하리는 쓴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은 정말 냉혈한이다.그의 모든 다정함은 아마도 송유라에게 다 주어졌을 것이고 따라서 그가 강하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무관심뿐이었다.손연지는 강하리의 말을 듣고 다시 저주했다.“이 모든 일이 다 그놈 때문에 발생했는데, 왜 아직도 네가 그놈한테 부탁이나 해야 하는데?”강하리의 코끝이 또다시 시큰거렸다.“그는 권력도 영향력도 가지고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