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훈 씨, 마케팅팀은 내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강하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래서?”“그래서 그 장서연한테 양보할 수 없어요!”강하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그러면 강 부장, 부탁하는 태도를 보여줬어야지.”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강하리는 그런 그를 몇 초 바라보다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구 대표님, 저 마케팅팀 떠나기 싫어요. 부탁이에요.”누그러진 그녀를 보면서 구승훈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인사팀에서 장서연을 부서 이동시킬 거야. 유라 광고 건도 부하에게 시켜. 그러면 앞으로 유라하고 부딪히는 일도 없을 거야.”“네, 고마워요. 대표님.” 강하리는 쓴웃음 지으며 대답했다.구승훈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녀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강하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는 한참 키스하고 나서야 화가 풀리는 듯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앞으로 좀 착하게 굴어. 강 부장. 나를 자꾸 화나게 하지 말고.”“네.”“점심 뭐 먹고 싶어? ”구승훈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예서랑 구내식당에서 같이 먹기로 했어요.”“좀 많이 먹어. 너무 말랐어.”“네.”강하리는 낮게 대답하였다.“나가봐.”구승훈은 그녀에게 짧게 입맞추고 말했다.그녀가 입구로 가는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뛰어들었고 뒤에는 구승재도 보였다. 비서는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말했다.“구 대표님, 죄송해요. 도저히 저의 힘으로 말려지지 않아서...”구승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들어온 남자의 시선은 강하리에게 잠시 머물다가 이내 구승훈에게 향하면서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형을 만나기 참 어렵네.”구승훈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구승재를 보고 말했다.“먼저 강 부장이랑 나가 있어.”구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하리를 데리고 나갔다.사무실에서 빠져나온 구승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아까 그 사람 둘째 형이거든요. 얼마 전에 손
“난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실수였다고. 설마 다들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장서연의 얼굴에는 점차 웃음기가 사라지고 불안함과 두려움에 잔뜩 질려있는 가련한 표정이 가득 어렸다.장서연의 모습을 본 강하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장서연, 송유라 누가 사촌지간 아니랄까봐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강하리는 점점 눈물이 차오르며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장서연의 눈시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그녀는 모두가 쳐다보는 앞에서 천천히 장서연에게 걸어가더니 나온지 얼마 안 된 뜨거운 죽그릇을 들어 장서연에게 부어버렸다.“어머, 죄송해요. 저도 실수였어요. 이해해줄 거죠?”순식간에 끈적하고 뜨거운 죽을 온몸에 뒤집어쓴 장서연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이 미친년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너도 하는 실수인데, 내가 못 할 건 또 뭐야?”말을 마친 그녀는 손에 들려있던 죽그릇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수도꼭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분노에 가득 차 이를 꽉 깨문 장서연은 강하리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넌 잘 하고 있던 남의 연애 풍비박산 내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강하리 넌 그냥 내연녀잖아! 세상사람들! 다들 똑똑히 봐두세요! 이게 당신들이 알고있던 그 강부장의 실체니까! 내연녀 주제에 뻔뻔하게 고개 들고 다니는 거 좀 보시라고요!”장서연의 발언에 강하리가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물로 팔에 묻은 죽을 씻어내러 수도꼭지 쪽으로 걸어가던 강하리가 몸을 돌려 장서연을 쳐다보았다.“장서연 씨, 허위사실 유포는 범죄인 거 몰라요? 내가 경고 하나 하는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지?”강하리의 발언에 장서연이 비웃으며 말했다.“왜? 진짜 내연녀라고 하니까 인정하긴 쪽팔린가 보지?”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강하리가 천천히 또각또각 장서연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보다 훨씬 아담한 장서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내연녀라니, 증거 있어요? 내가 누구 내연녀인데요? 내가
안예서의 대답에 강하리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안예서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겁니다. 보스, 이거 이대로 가만둘 건 아니죠?”강하리는 시선을 밑으로 옮겨 자신의 팔 위로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가만두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할 수가 있는데?그녀 대신 발 벗고 나서서 강하리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강하리는 체념한 듯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송유라는 고사하고 구승훈도 나서줄 리가 없었다.수도꼭지를 돌려 잠근 강하리가 낮게 말했다.“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일일이 신경 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냥 나만 행동거지 조심하면 돼.”...회사 직원들 모두가 모여있는 점심시간의 구내식당에서 벌어진 소란에 회사 내에서는 강하리에 관한 소문이 끊임없이 퍼져가고 있었다.원래부터 예쁘기로 소문났던 강하리였기에 입사한 3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아왔다.누군가는 사랑이었고 또 누군가는 질투였다.그런 그녀의 소문이 사내로 쭉 퍼져나가자 모두가 잔뜩 흥분한 채 강하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누군가는 강하리가 정말 누군가의 내연녀 노릇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했고,또 누군가는 질투심에 눈이 먼 장서연이 지어낸 루머라고 했다.하지만 결국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하지만 소문의 중심에 있던 강하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모아 업무 계획을 짜고 지시사항을 전달할 뿐이었다.마치 일에만 집중한 채 바쁜 일상을 보냄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소문과 이러저러한 잡다한 것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온 그녀는 안예서와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다.모든 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니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하지만 계속 옆에서 강하리를 지켜본 안예서는 여전히 그녀가 걱정되었다.점심시간
말을 꺼낸 강하리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달리 온화하고 순했다.어찌 보면 그 목소리 안에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부탁이 담겨있기도 했다.구승훈은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그는 고개를 들어 강하리의 눈을 마주치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강 부장은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사람들한테 제가 내연녀가 아니라고 얘기만 해주세요. 저 대신 해명만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온종일 신경 쓰지 않는 척 행동했지만, 신경이 안 쓰인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오해를 받고 괄시를 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했다.따뜻한 손길로 연고를 발라주는 눈앞의 남자에 강하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든 것이다.지금 강하리를 도와 이 모든 게 다 헛소리고 루머라고 얘기해줄 사람은 구승훈 뿐이었다.강하리의 말에 연고를 발라주던 구승훈의 손길이 멈췄다.강하리의 눈을 바라보던 구승훈이 물었다.“강 부장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대처방법이라고 생각해?”구승훈의 뼈가 있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정신을 차렸다.구승훈의 말처럼 이렇게 하는 게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구승훈이 대체 어떤 신분으로, 또 어떤 입장에서 강하리를 위해 진실을 밝혀줄 수 있을까?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둘은 스스로 자신들의 관계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둘의 사이를 인정해버리면 송유라는 어떻게 될까? 송유라를 내연녀로 만들어버려야 하나?이건 구승훈이 원하지 않을 거다.강하리가 체념한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이 송유라를 포기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강하리를 도와줄 리가 없었다.“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게 행동했어요.”잔뜩 주눅 든 강하리의 목소리에 구승훈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휴지를 뽑아 손에 묻은 연고를 닦아내며 말했다.“장서연은 조만간 해고할 거야. 회사 내에서도 이
책상 위에 놓은 자료들을 두어 번 대충 훑어보던 구승훈이 펜을 들어 결재 서류 위로 사인을 휘갈겼다.사인을 마친 구승훈은 결재 서류를 강하리에게 넘겨주는 대신 고개를 들어 강하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팔은, 좀 괜찮아?”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많이 괜찮아졌습니다.”여전히 강하리를 바라보던 구승훈이 또다시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습니다.”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일도 할 수 있을 만큼만 해.”“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물었다.“구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조용히 강하리를 바라보던 구승훈이 물었다.“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자꾸 가려고 안달이실까.”딱히 부정은 하지 않은 강하리가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서요.”눈을 가늘게 뜬 구승훈이 강하리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이번 주 주말에 동창회 한다며?”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시간 안 되시면, 굳이 참석 안 하셔도 됩니다.”구승훈이 그녀의 동창회에 같이 나가주겠다고 말한 뒤로 강하리 역시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남자친구 행세 역시 가짜인 건 알고 있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불과 이틀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어버린 후부터는 그 일말의 기대 역시 사라져 버렸다.구승훈을 남자친구라고 데려가봤자 달라지는 게 있을까?어차피 가짜인데, 다 거짓말인데.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지키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이미 강 부장이 부탁했던 일 아닌가, 같이 가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구승훈의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제가 동창회에서 누구 만날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걔 안 와요.”다시 한번 가늘게 실눈을 뜬 구승
몇 초 동안의 정적을 깬 강하리가 말했다.“구 대표님께서 제 동창회에 같이 가줄 수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구승훈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돌아갈 테니까 저녁밥 준비해 놔.”“네.”이대로 끊기엔 아쉬웠는지 구승훈이 다시 한번 물었다.“뭐, 다른 일은 없나?”“없습니다.”“그래, 그럼.”말을 마치는 순간 남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강하리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해 까다롭던 탓에 뭐든 당일에 사 온 신선한 재료로만 요리를 해왔던 게 문제였다.게다가 요 며칠 강하리 역시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계속 룸서비스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탓에 냉장고에 뭐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어찌 됐든 구승훈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에 저녁밥을 차려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장서연이 동창회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는 강하리 역시 알 수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참석한 이상 장서연이 멋대로 날뛰는 일은 없으리라.저녁 준비를 위해 간단히 장을 보고 왔더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강하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밥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다 된 밥과 반찬거리들을 식탁에 차려놓은 강하리가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디.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응답은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다시 한번 다이얼을 눌러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다급하게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은 구승훈과 눈이 마주쳤다.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채 현관에 서 있는 구승훈은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구승훈은 코트를 벗으며 현관을 벗어나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식탁 앞까지 걸어
강하리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입맛은 없었지만 직접 힘들게 차린 것들이니 다 버리기에도 아까웠다.이미 먹을 대로 많이 욱여넣은 강하리는 남은 음식들을 들어 쓰레기통에 옮겨 담았다.남은 음식들을 봉투에 잘 담은 강하리는 음식물 봉투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가 길고양이와 길강아지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는 길목에 갖다 놓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뒤, 내일 있을 동창회의 주소를 구승훈에게 보내주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오후, 손연지가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아, 진짜 짜증 나네!”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강하리가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왜 그래?”“장서연 저 망할 년이 진짜, 학교 단톡방에 뭐라고 올렸는지 알아? 네가 누구 내연녀 노릇이나 하고 다닌다고 떠드는데 내가 진짜 열이 뻗쳐서!”손연지의 말에 강하리가 가늘게 실눈을 떴다.학교 단톡방 알림은 이미 끄고 산 지 오래라 전혀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장서연이 그 단톡방에서 그런 불여우 같은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급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어 학교 단톡방을 확인해본 강하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이미 모두가 장서연의 말에 놀아났는지 단톡방에 있는 모두가 강하리에 대한 유언비어들을 퍼뜨리고 있었다.“그런 거 보지 마.”손연지가 급하게 강하리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뺏어 들려 했다.단톡방 내용은 정말 가관 그 자체였다. 본인이 아닌 손연지 마저 억울하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인데 강하리는 어떨까.손연지의 그런 행동에도 강하리는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았다.그녀의 표정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하지만 그러면서도 단톡방에서의 장서연의 모든 발언들을 일일이 캡처하고 있었다.화면 캡처를 끝낸 강하리는 바로 휴대폰 다이얼 창으로 넘어가 112를 눌렀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강하리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강하리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었다.순간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피가 차게 식는듯한 기분이 들었다.사람 자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절망이라는 감정에 절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얇게 입은 탓인지 휴대폰을 들고 있는 강하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당장이라도 구승훈에게 문자를 보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지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강하리는 구승훈과의 대화창에 단 한 글자도 입력하지 못했다.따진다고 뭐가 달라질까?기껏해야 마음만 조금 편해지려나?강하리도 알고 있었다. 구승훈은 송유라를 위해서라면 자신과의 약속 따위는 가볍게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 약속을 저버리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송유라라는 사실까지.그녀는 자학의 심정으로 송유라의 트위터 타임라인으로 들어가 보았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불과 3분 전에 올라온 그녀의 게시물이 보였다.게시물은 다름 아닌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그녀의 사진이었다.하지만 강하리는 그 사진 속에서 반만 찍힌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비록 반밖에 안 찍힌 사진이었지만 강하리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 뒷모습의 주인이 바로 구승훈이라는 것을.게다가 시사회에 참석한 구승훈이 입고 있던 옷은 바로 자신이 예전에 직접 구승훈에게 선물해 주었던 정장이었다.강하리는 자신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자부해왔던 사람이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가락은 사시나무 떨듯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트위터 앱에서 나온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억누르며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손연지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가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허리야, 무슨 일 있어?”“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먼저 가볼게.”강하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그녀는 홀로 동창회에서 장서연과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