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요. 지금은 괜찮나요?”“응, 많이 좋아졌어.”강하리는 대답하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사무실 안에 들어선 그녀는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제 신 비서가 그녀에게 귀띔해 줬지만, 눈앞의 여자를 보고 여전히 조금 놀랐다.장서연.장진영의 조카이자 송유라의 사촌인 이 여자는 어릴 적 송유라와 같이 강하리를 적잖이 괴롭혔다.장서연을 발견한 안예서의 얼굴에도 불만이 가득했다.“구 대표님 관계로 들어 온 낙하산이잖아요. 소문에 의하면 그 송유라 친척이라 하데요. 그래서 여기로 배정된 거라고 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엉뚱한 일만 시키지 않나 또 맨날 부하에게 화내지 않나. 부서에 여러 명이 사직했어요. ”안예서는 강하리 귓가에 속삭였다.강하리는 안예서를 먼저 내보내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통화 중이던 장서연은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하고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언니, 지금 여기 누가 왔는지 알아?”상대방이 뭐라고 몇 마디 하자 장서연은 더 크게 웃은 뒤 전화를 끊고 비아냥거렸다.“난 또 누구라고. 첩이 낳은 내연녀네.”강하리는 굳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내색 하지 않고 맞받아쳤다.“장서연, 송유라에게 어제 왜 맞았는지는 물어봤어?” 비웃던 장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송유라가 어제 맞은 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구승훈은 그 일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강하리, 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올라. 너는 그냥 첩이 낳은 딸이야. 그냥 남이 놀다 버린 장난감이라고,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주제는 모르겠고 그건 알겠네. 내가 돌아왔으니까 넌 이제 여기서 꺼져야 하는 건 알겠어.”순간 장서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그녀가 들어올 때 송유라는 분명히 마케팅부장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대리 부장이었다.몇 번이고 송유라를 찔러봤지만, 알겠다는 대답만 돌아오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장서연은 나중에 구승훈을 찾아갔지만, 매번 그의 비서에게 제지당했다. “꿈 깨! 어디서 내연녀가 나한테 나가라 마라야!”
강하리는 구승훈의 사무실 앞에서 심호흡 한번 하고 노크를 했다.“들어오세요.”구승훈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구 대표님, 부르셨나요?”“강 부장은 일을 크게 만드는 사람이네.”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일은 구 대표님이 크게 만드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오늘 출근하는 걸 뻔히 아시면서 왜 인사팀을 시켜서 장서연 씨랑 얘기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그래서 이렇게 막 나가는 건가?”강하리는 이해 안 되는 듯 물었다.“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하나요?”구승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나를 찾아올 생각은 안 했나 봐?”“구 대표님을 찾아오면, 저 대신 나서주시나요?”송유라의 괴롭힘을 못 이기고 구승훈을 찾아갔을 때 그가 강하리에게 못하겠으면 나가라고 했던 그 말이 그녀는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송유라가 넘버원이고 그녀는 영원히 뒷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사서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자신의 힘으로 해야 했다.마치 강하리의 머릿속을 읽은 듯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강 부장은 내가 미덥지 못한가 봐.”강하리는 웃음이 나왔다. ‘우리 사이에 아직 믿음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그녀는 구승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대답했다.“구 대표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요. 제가 주제를 좀 알아서요.”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이리 와.”구승훈이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강하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강하리.”강하리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결국 다가갔다.남자의 손아귀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강하리,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인가? 경고하는데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그는 강하리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몸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 남자의 속을 긁었다가는 자신한테 무슨 짓이든 하리라는 것을. 아마 회사도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것
“승훈 씨, 마케팅팀은 내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에요!”강하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래서?”“그래서 그 장서연한테 양보할 수 없어요!”강하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그러면 강 부장, 부탁하는 태도를 보여줬어야지.”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강하리는 그런 그를 몇 초 바라보다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구 대표님, 저 마케팅팀 떠나기 싫어요. 부탁이에요.”누그러진 그녀를 보면서 구승훈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인사팀에서 장서연을 부서 이동시킬 거야. 유라 광고 건도 부하에게 시켜. 그러면 앞으로 유라하고 부딪히는 일도 없을 거야.”“네, 고마워요. 대표님.” 강하리는 쓴웃음 지으며 대답했다.구승훈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녀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강하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는 한참 키스하고 나서야 화가 풀리는 듯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앞으로 좀 착하게 굴어. 강 부장. 나를 자꾸 화나게 하지 말고.”“네.”“점심 뭐 먹고 싶어? ”구승훈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예서랑 구내식당에서 같이 먹기로 했어요.”“좀 많이 먹어. 너무 말랐어.”“네.”강하리는 낮게 대답하였다.“나가봐.”구승훈은 그녀에게 짧게 입맞추고 말했다.그녀가 입구로 가는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뛰어들었고 뒤에는 구승재도 보였다. 비서는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말했다.“구 대표님, 죄송해요. 도저히 저의 힘으로 말려지지 않아서...”구승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들어온 남자의 시선은 강하리에게 잠시 머물다가 이내 구승훈에게 향하면서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형을 만나기 참 어렵네.”구승훈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구승재를 보고 말했다.“먼저 강 부장이랑 나가 있어.”구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하리를 데리고 나갔다.사무실에서 빠져나온 구승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아까 그 사람 둘째 형이거든요. 얼마 전에 손
“난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실수였다고. 설마 다들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장서연의 얼굴에는 점차 웃음기가 사라지고 불안함과 두려움에 잔뜩 질려있는 가련한 표정이 가득 어렸다.장서연의 모습을 본 강하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장서연, 송유라 누가 사촌지간 아니랄까봐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강하리는 점점 눈물이 차오르며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장서연의 눈시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그녀는 모두가 쳐다보는 앞에서 천천히 장서연에게 걸어가더니 나온지 얼마 안 된 뜨거운 죽그릇을 들어 장서연에게 부어버렸다.“어머, 죄송해요. 저도 실수였어요. 이해해줄 거죠?”순식간에 끈적하고 뜨거운 죽을 온몸에 뒤집어쓴 장서연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이 미친년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너도 하는 실수인데, 내가 못 할 건 또 뭐야?”말을 마친 그녀는 손에 들려있던 죽그릇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수도꼭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분노에 가득 차 이를 꽉 깨문 장서연은 강하리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넌 잘 하고 있던 남의 연애 풍비박산 내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강하리 넌 그냥 내연녀잖아! 세상사람들! 다들 똑똑히 봐두세요! 이게 당신들이 알고있던 그 강부장의 실체니까! 내연녀 주제에 뻔뻔하게 고개 들고 다니는 거 좀 보시라고요!”장서연의 발언에 강하리가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물로 팔에 묻은 죽을 씻어내러 수도꼭지 쪽으로 걸어가던 강하리가 몸을 돌려 장서연을 쳐다보았다.“장서연 씨, 허위사실 유포는 범죄인 거 몰라요? 내가 경고 하나 하는데,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지?”강하리의 발언에 장서연이 비웃으며 말했다.“왜? 진짜 내연녀라고 하니까 인정하긴 쪽팔린가 보지?”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강하리가 천천히 또각또각 장서연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보다 훨씬 아담한 장서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내연녀라니, 증거 있어요? 내가 누구 내연녀인데요? 내가
안예서의 대답에 강하리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안예서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그래도 믿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겁니다. 보스, 이거 이대로 가만둘 건 아니죠?”강하리는 시선을 밑으로 옮겨 자신의 팔 위로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가만두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할 수가 있는데?그녀 대신 발 벗고 나서서 강하리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강하리는 체념한 듯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송유라는 고사하고 구승훈도 나서줄 리가 없었다.수도꼭지를 돌려 잠근 강하리가 낮게 말했다.“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일일이 신경 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냥 나만 행동거지 조심하면 돼.”...회사 직원들 모두가 모여있는 점심시간의 구내식당에서 벌어진 소란에 회사 내에서는 강하리에 관한 소문이 끊임없이 퍼져가고 있었다.원래부터 예쁘기로 소문났던 강하리였기에 입사한 3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아왔다.누군가는 사랑이었고 또 누군가는 질투였다.그런 그녀의 소문이 사내로 쭉 퍼져나가자 모두가 잔뜩 흥분한 채 강하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누군가는 강하리가 정말 누군가의 내연녀 노릇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했고,또 누군가는 질투심에 눈이 먼 장서연이 지어낸 루머라고 했다.하지만 결국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하지만 소문의 중심에 있던 강하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모아 업무 계획을 짜고 지시사항을 전달할 뿐이었다.마치 일에만 집중한 채 바쁜 일상을 보냄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소문과 이러저러한 잡다한 것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온 그녀는 안예서와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다.모든 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니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하지만 계속 옆에서 강하리를 지켜본 안예서는 여전히 그녀가 걱정되었다.점심시간
말을 꺼낸 강하리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달리 온화하고 순했다.어찌 보면 그 목소리 안에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부탁이 담겨있기도 했다.구승훈은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그는 고개를 들어 강하리의 눈을 마주치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강 부장은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사람들한테 제가 내연녀가 아니라고 얘기만 해주세요. 저 대신 해명만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온종일 신경 쓰지 않는 척 행동했지만, 신경이 안 쓰인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오해를 받고 괄시를 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했다.따뜻한 손길로 연고를 발라주는 눈앞의 남자에 강하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든 것이다.지금 강하리를 도와 이 모든 게 다 헛소리고 루머라고 얘기해줄 사람은 구승훈 뿐이었다.강하리의 말에 연고를 발라주던 구승훈의 손길이 멈췄다.강하리의 눈을 바라보던 구승훈이 물었다.“강 부장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올바른 대처방법이라고 생각해?”구승훈의 뼈가 있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정신을 차렸다.구승훈의 말처럼 이렇게 하는 게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구승훈이 대체 어떤 신분으로, 또 어떤 입장에서 강하리를 위해 진실을 밝혀줄 수 있을까?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둘은 스스로 자신들의 관계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둘의 사이를 인정해버리면 송유라는 어떻게 될까? 송유라를 내연녀로 만들어버려야 하나?이건 구승훈이 원하지 않을 거다.강하리가 체념한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이 송유라를 포기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강하리를 도와줄 리가 없었다.“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게 행동했어요.”잔뜩 주눅 든 강하리의 목소리에 구승훈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휴지를 뽑아 손에 묻은 연고를 닦아내며 말했다.“장서연은 조만간 해고할 거야. 회사 내에서도 이
책상 위에 놓은 자료들을 두어 번 대충 훑어보던 구승훈이 펜을 들어 결재 서류 위로 사인을 휘갈겼다.사인을 마친 구승훈은 결재 서류를 강하리에게 넘겨주는 대신 고개를 들어 강하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팔은, 좀 괜찮아?”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하리가 입을 열었다.“많이 괜찮아졌습니다.”여전히 강하리를 바라보던 구승훈이 또다시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습니다.”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일도 할 수 있을 만큼만 해.”“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물었다.“구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조용히 강하리를 바라보던 구승훈이 물었다.“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자꾸 가려고 안달이실까.”딱히 부정은 하지 않은 강하리가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서요.”눈을 가늘게 뜬 구승훈이 강하리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이번 주 주말에 동창회 한다며?”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강하리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구 대표님 시간 안 되시면, 굳이 참석 안 하셔도 됩니다.”구승훈이 그녀의 동창회에 같이 나가주겠다고 말한 뒤로 강하리 역시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남자친구 행세 역시 가짜인 건 알고 있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불과 이틀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어버린 후부터는 그 일말의 기대 역시 사라져 버렸다.구승훈을 남자친구라고 데려가봤자 달라지는 게 있을까?어차피 가짜인데, 다 거짓말인데.강하리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지키던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이미 강 부장이 부탁했던 일 아닌가, 같이 가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구승훈의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눈을 바라보았다.“제가 동창회에서 누구 만날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걔 안 와요.”다시 한번 가늘게 실눈을 뜬 구승
몇 초 동안의 정적을 깬 강하리가 말했다.“구 대표님께서 제 동창회에 같이 가줄 수나 있을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구승훈은 어딘가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돌아갈 테니까 저녁밥 준비해 놔.”“네.”이대로 끊기엔 아쉬웠는지 구승훈이 다시 한번 물었다.“뭐, 다른 일은 없나?”“없습니다.”“그래, 그럼.”말을 마치는 순간 남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강하리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이 음식에 대해 까다롭던 탓에 뭐든 당일에 사 온 신선한 재료로만 요리를 해왔던 게 문제였다.게다가 요 며칠 강하리 역시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계속 룸서비스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탓에 냉장고에 뭐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어찌 됐든 구승훈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에 저녁밥을 차려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장서연이 동창회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는 강하리 역시 알 수 없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참석한 이상 장서연이 멋대로 날뛰는 일은 없으리라.저녁 준비를 위해 간단히 장을 보고 왔더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강하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녁밥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다 된 밥과 반찬거리들을 식탁에 차려놓은 강하리가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디.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응답은 딱딱한 기계음뿐이었다.잠시 멈칫한 강하리가 다시 한번 다이얼을 눌러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다급하게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은 구승훈과 눈이 마주쳤다.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채 현관에 서 있는 구승훈은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구승훈은 코트를 벗으며 현관을 벗어나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식탁 앞까지 걸어
석연란의 말에 사람들이 표정이 확 바뀌었다.아무도 이런 가십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심씨 가문의 손녀, 진태형의 딸이 스폰을 받았다고?심씨 가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람들은 믿지 못해도 저마다 좋지 않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다들 봤다시피 강하리의 외모는 아름다웠고 누군가 돈을 주고 취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경멸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돈 많은 사람일수록 원래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예전 같았으면 이 사람들이 강하리처럼 배경도 없고 뒷배도 없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겠지만 갑자기 심씨 가문의 조카이자 진태형의 딸이 되니 당연히 수많은 사람의 질투를 불러왔다.이제 석연란의 말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은 싸늘하게 조롱하기 시작했다.“심씨 가문의 손녀라고 해서 얼마나 고귀한가 했더니, 그런 물건이었어?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역겹네.”“어떻게 스폰까지 받지? 그러면 돈만 주면 아무 남자와 잔다는 말이잖아?”“모르지.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도 구 대표 몰래 남자를 찾은 거 아니겠어?”히죽거리는 사람들의 말 속엔 조롱만이 가득했고 석연란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기양양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심씨 가문이 지켜준다고 해서 정말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강하리를 철저히 망가뜨리겠다고 다짐했으니 반드시 해내리라.그때 누군가 석연란을 툭 쳤다.“또 어떤 정보가 있어요? 재밌는 일 있으면 공유 좀 하죠.”석연란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려는 순간 뒤돌아보니 진태형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곧 다시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다 사실만을 얘기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태형 씨, 방금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강하리랑 우리 해찬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구 대표가 그렇게 가요?”적나라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강하리가 주해찬과 낯 뜨거운 짓을 해서 구승훈이 화가 났다는 뜻이다.사람들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안긴 채 올라가 샤워를 한 뒤 깊은 잠에 빠졌다.구승훈은 조용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복잡하게 억눌린 감정이 가득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을 챙겨 그녀의 몸에 난 잇자국에 조금씩 발라주었다.하는 내내 구승훈의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이마에 툭 튀어나온 핏줄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약을 다 바른 뒤 그는 침대 옆 탁자 서랍에서 벨벳 상자를 꺼냈다.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강하리를 데려왔을 때 준비했던 반지인데 한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니 이젠 감히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구승훈은 반지를 꺼내 강하리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입맞춤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미안해.”그러고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둘러 도착한 구승재가 노민준에게 받은 진정 효과가 있는 주사를 구승훈에게 건넸고 구승훈은 망설임 없이 주사를 자기 팔에 꽂았다.구승재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형...”구승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구승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형, 우리 해외로 가자. 해외 연구소에 가자, 응?”입꼬리를 올리는 구승훈의 눈에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 민준이 형도 어쩔 수 없다면 해외로 가도 마찬가지야.”약을 다 밀어 넣은 그는 조심스레 주사기를 종이로 감쌋다.“여기서 잘 지켜보고 있다가 강하리가 깨어나면 같이 말동무나 해줘. 근데 해서는 안 될 말은 하지 마, 알았지?”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밖으로 나가서 주사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진씨 가문의 생일 파티에서 강하리와 함께 떠나는 구승훈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석미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더욱 시선을 끌었다.구승훈에게 맞은 주해찬은 얼굴과 입술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모든 과정을 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진태형은 사람을 시켜 현장을 정리하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방으로 들어갔다.무거운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뒤돌아 주해찬에게 주먹을 날렸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주해찬에게 주먹을 연달아 내리꽂았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석미란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구승훈! 뭐 하는 거야! 감히 해찬이를 때려? 경찰 부를 거야, 신고할 거야!”구승훈이 비아냥거렸다.“그래요, 신고하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곧장 강하리를 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방을 나갔다.석미란이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주해찬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는 휠체어에 멍하니 앉아 강하리를 안고 떠나는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사실 그는 오늘 강하리에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얻고 싶었다.주먹질에 맞아도 싸다.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하리에게 빚을 졌다.이정숙에게 잡혀 발을 뺄 수 없었던 진태형이 서둘러 도착했을 땐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두 눈에 감출 수 없는 살기에 진태형이 구승훈의 팔을 붙잡았다.이대로 강하리를 해칠까 봐 두려웠는데 걸음을 멈춘 구승훈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저 하리 다치게 하지 않아요.”진태형은 잠시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고 구승훈의 차는 빠르게 달려 거의 순식간에 별장으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조수석에서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차를 세우고 문을 쾅 닫은 뒤 조수석에서 강하리를 안고 내려왔다.그녀를 안는 힘이 너무 셌던 탓인지 강하리가 갑자기 몸부림을 쳤고 구승훈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차 위로 밀어붙인 채 키스를 했다.거칠고 난폭했다.키스라고 하기엔 물고 뜯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깊은 욕망과 살기가 뒤섞인 눈빛은 당장이라도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그가 아프게 깨물자 강하리는 밀어내기 시작했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포박한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나 말고 주해찬이랑 키스하려고?”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했고 흐릿한 눈을 뜬 강하리는 구승훈의 분노로 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한 구승훈은 강하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옆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하지만 10분이 지나도 강하리가 인기척을 보이지 않자 심장이 철렁하며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의 휴대폰이 꺼졌다는 음성에 남자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며 곧장 발을 뻗어 화장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안에선 강하리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강하리는 머릿속이 어지럽고 몸에서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누군가 자신을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고 곧바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힘겹게 눈을 뜨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구승훈의 얼굴이 보였다.“구승훈...”강하리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갑자기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왜 나랑 결혼하지 않는 거야?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연정이한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구승훈, 한 달의 시간을 줄게. 나랑 결혼해 줘, 알았지?”그녀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주해찬의 눈이 번쩍 뜨였지만 강하리의 입에서 구승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는 차가운 얼음 동굴에 빠진 것 같았다.그랬구나.진시연은 강하리가 기꺼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그게 그를 구승훈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줄이야.그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하리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강하리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어? 구승훈, 얼마나 좋아해야 날 전적으로 믿어줄 거야?”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난 사실 당신이 항상 날 믿지 않는 게 무척 괴로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둘이 같이 짊어지고 싶은데 항상 날 빼놓잖아. 구승훈,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온전히 마음을 열어줄 건데?”주해찬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며 앞으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구승훈 사랑하지 마, 응?”강하리는 웃으며 그를 밀쳐냈다.그녀도 더 이상 구승훈을 사랑하고 싶지
그런데 갑자기 진태형에게 친딸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게 심씨 가문의 손녀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제 진시연의 처지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고 사람들은 진시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흩어졌다.진시연은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못 본 척 걸음을 옮겨 구승훈에게 다가갔다.“구승훈 씨, 오랜만이네요.”구승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와인 잔을 들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대답하지도 않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없어 보이자 진시연은 그의 옆에 서서 우울한 표정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구승훈 씨, 내가 F 대륙에서 야생동물에게 공격당했을 때 날 구해주고 밤새 업고 병원으로 가 치료받게 해준 거 기억나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땐 개나 소나 다 구해줬을 겁니다.”진시연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기억하고 있던 것이 구승훈의 입에서 개나 소나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울한 눈빛을 감춘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저한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에요. 구승훈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전 정말 그쪽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진시연 씨, 진심으로 살려줘서 고마우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 내 아내가 날 오해하는 건 싫으니까.”진시연은 당황했다.“아내요? 두 사람 결혼해요?”구승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진시연 씨, 멀리하라고요. 못 알아들어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가는데 진시연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뒤에서 소리쳤다.“구승훈 씨, 강하리가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쪽 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주해찬이랑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구승훈은 걸음을 멈추고 얼음같이 싸늘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진시연 씨, 멀쩡히 진씨 가문에 남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심씨 가문도, 나도 그쪽 무사히 B시에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진시연의 얼
강하리는 결국 구승훈이 보내준 드레스를 입었다.파란 드레스에 네크라인과 치맛단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오픈 숄더는 쇄골을 모두 드러냈고 새하얀 쇄골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강하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진태형의 딸, 심씨 가문의 손녀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B시에 몇이나 되겠나.게다가...허리를 굽혀 강하리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구승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구씨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모두가 안다.비록 구승훈이 구씨 가문을 처참히 무너뜨렸지만 그의 손에는 구씨 가문의 재산 90%와 B시 문씨 가문의 모든 재산이 있으니 기존 구씨 가문보다 그 세력이 더 대단했다.모두의 시선이 여기로 쏠렸지만 구승훈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자만 보였다.몸을 살짝 굽혀 강하리에게 손을 내밀자 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심준호가 선물한 드레스를 아무 말 없이 찢어버린 구승훈에게 조금 화가 났지만 개자식의 소유욕이 발동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다시 예전 구승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지며 강하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팔을 뻗었다.강하리는 그의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시선 아래 진씨 가문 저택으로 따라 들어갔다.“이게 우리 결혼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왠지 정말 결혼식 같지 않아?”구승훈이 강하리의 귀에 속삭이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나도 이게 우리 결혼식이었으면 좋겠어.”구승훈이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서두르지 마, 결혼식 할 거니까.”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태형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강하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아빠.”강하리가 낮은 소리로 부르고 곧이어 구승훈도 그를
“언제 왔어?” 강하리가 구승훈을 바라보며 그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지난 며칠 동안 구승훈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요 며칠 구승훈은 많이 바빴고 모임이 끊이질 않아 근처에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갔다.강하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지난 며칠 동안 잠은 잤어?”구승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았다.“잠을 못 자. 강 대표님이 와서 재워주면 안 돼?”강하리가 웃었다.“그래, 오늘 짐 챙겨서 그쪽으로 갈게.”구승훈은 멈칫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쉽게 승낙하니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원래 상처들은 거의 다 나았지만 그가 요즘 매일 복싱장으로 가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풀었기에 몸에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하리가 정말 오면 그는 괴롭기만 할 거다.아내가 옆에 있는 데도 안지 못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올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아?”강하리는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겨 허리를 굽히게 한 뒤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러면 방 청소나 하고 나랑 연정이가 갈 테니까 기다려.”말을 마친 그녀는 구승훈의 넥타이를 놓아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문에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강하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나온 강하리는 심플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가 나오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보낸 드레스는 어딨어?”강하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너무 더워서 시원한 걸로 바꿨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등 뒤로 훤히 뚫린 구멍을 바라봤다.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끌어올리자 뒤쪽의 아름다운 나비 모양의 뼈가 드러났다.허리까지 훤히 뚫린 디자인의 옷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
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했다.건너편 사옥에 새로 회사가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에비뉴와 정안 그룹일 줄은 몰랐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됐다.그렇지 않고서야 구승훈이 왜 회사 근처 식당에 나타났겠는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연성으로 안 돌아가?”구승훈의 눈동자는 온통 그녀로 가득 찼다.“너랑 아이가 어디 있으면 나도 함께 할 거야.”강하리가 구승훈의 시선을 마주했다.“나도 꼭 B시에 있을 필요는 없어. JM의 업무는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까.”어쨌든 연성은 구씨 가문의 영역이었고 연성에 깊게 뿌리 박은 구씨 가문은 B시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구승훈이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네가 다시는 가족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네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둘 다 가졌으면 좋겠어, 자기야.”두 사람 중에 적어도 한쪽은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강하리의 코끝이 갑자기 시큰해지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예물도 도착했는데 그러면 결혼할래, 구승훈?”멈칫한 구승훈은 씁쓸함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강 대표님, 그렇게 급한가?”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나랑 결혼할 거야?”구승훈의 눈에 머금었던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손가락이 강하리의 눈가에 닿았다.“자기야, 준비할 시간 좀 줘.” 강하리는 쓴웃음을 내뱉었다.“알았어, 기다릴게.”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복잡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회사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그가 돌아서서 길 건너편으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구승재는 진작 위에서 구승훈과 강하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화해했는지 확인하려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하지만 아래에 내려오자 형이 찌푸린 얼굴로 걸어올 줄이야.‘쯧... 아직 화해 못 했네.’“형, 하리 씨가 아직 용서 안 해준대?”구승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눈가에 억눌린 짜증을 내비
하지만 구승훈의 숨김과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강하리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구승훈은 강하리가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뒤 강하리를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제 아내, 강하리에요.”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자 구승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체면 좀 살려주면 안 돼, 여보?”강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더니 강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전 구승훈 씨 담당 정신과 의사, 여나경이라고 해요.”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의 불면증이 떠올라 그를 슬쩍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이 사람 상태 어때요?”구승훈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지고 여자는 눈치껏 웃으며 말했다.“복잡한 경우라 치료 과정도 번거로울 수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강하리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여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여자가 가고 구승훈은 힘껏 강하리의 허리를 꼬집었다.“정주현이랑 밥 맛있게 먹었어?”강하리는 곧장 그의 손을 떼어냈다.“다른 여자랑 밥 맛있게 먹었어?”구승훈이 웃었다.“그래도 강 대표님이랑 먹는 게 맛있지.”강하리는 능글맞게 웃는 남자를 보며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젯밤 혼자 발코니에 서 있을 때처럼 왠지 이 남자가 홀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구승훈, 당신 몸...”구승훈은 속으로 흠칫하며 조용히 강하리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 걱정하는 눈빛을 보니 다 나은 것 같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구승훈의 품에 기대어 안겼고 구승훈의 눈동자는 한층 어두워졌다.강하리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안다.예전 같았으면 걱정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날 듯이 기뻐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서는 강하리가 알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프러포즈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 약은 그에게 시한폭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