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전화를 다 받은 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일이 있어서 오늘 저녁에는 함께 못 있을 것 같아. 혼자 괜찮겠어?”“네, 괜찮아요.”강하리는 바로 대답했다.“그래,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그리고 퇴원하자.”“네.”구승훈은 병원을 나왔고 우연히 안현우를 만났다.안현우는 요즘 회사에 강하리를 닮은 인턴이 들어와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오늘 그 인턴이 몸이 안 좋다며 병원에 꼭 같이 와달라고 해서 그는 함께 병원으로 왔다.이것이 그가 점심에 레스토랑에서 강하리를 마주친 이유였다.사실 강하리를 마주치기 전까지 그는 인턴과 재밌게 즐기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점심 강하리를 마주친 순간 그 인턴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떨어졌다.아우라도 강하리에게 비교할 수가 없었고 생김새도 강하리와 닮지 않은 것 같았다. 유일하게 비슷한 점이 강하리와 비슷한 키였다.강하리의 매력은 역시 일개 인턴과 비교할 수 없었다.안현우는 순간 마음이 심각하게 간질거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강하리 이 여자는 꽤 능력이 있었다. 계속해서 구승훈의 옆에 남아있었다.“승훈아?”안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안현우는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점심에 그 사진들 봤어?”구승훈은 그를 바라보았다.“안 대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 해.”안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더러운 여자를 계속 옆에 두는 게 재밌어?”구승훈의 발걸음조차 멈추지 않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대표도 알다시피 난 내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묻는 거 안 좋아해.”안현우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그도 당연히 알고 있다. 구승훈이 사적인 일은 아무리 구승재라고 해도 묻기 어려웠다.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여자 때문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돈을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여자였기에 안현우는 구승훈이 이 일 때문에 자기에게 화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구승훈도 안현우가 일부러 그를 오해하게 만들려고 사진을 보냈다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강하리에 대한 안현우의 욕망
구승훈의 얼굴은 계속 굳어 있었다.안현우가 강하리를 언급한 이후로 그의 마음속에는 또 짜증이 몰려왔다.그는 항상 안현우가 그에게 강하리를 언급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결국, 그도 강하리와 어떠한 관계도 맺을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쨌든 계약이 만료되면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이 관계는 단지 돈을 주고 잠자리를 가진 거래였고 그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랬기에 그의 주변 사람들이 강하리에게 호감을 표시하더라도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오직 강하리만 자기의 신분을 똑똑히 알고 계약 기간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안현우가 이렇게 계속 그의 앞에서 강하리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니 그도 조금 짜증이 났다.그는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더니 바로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형?”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안현우에게 귀찮은 일 좀 만들어 줘.”“뭐?”그는 심지어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안현우는 구승훈과 함께 자란 친구였다. 두 가문도 사이가 좋았다고 안현우와 구승훈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갑자기 안현우에게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라니?“내 말 못 알아듣겠어? 안현우를 골치 아프게 만들어 주란 말이야.”구승훈은 정말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구승재는 멈칫했다.“왜 그래 형? 무슨 일 있었어?”“아니.”구승훈은 짜증을 참으며 말했다.“그럼 왜 갑자기 현우 형한테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라는 거야? 만약 현우 형이 알게 된다면 이다음에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딸칵 소리를 냈다.라이터의 약한 불꽃이 남자의 차가운 옆 모습을 비추어 그림자 때문에 더욱 어두워 보였다.“못하겠어? 못하겠으면 다른 사람 시킬 거야.’구승재는 조금 두려웠다.그는 자기 형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어느 정도로 하면 되는데?”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결국,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낸 친구이기 때문에 지난번 김주한을 상대하
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평소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안 대표님 이런 걸 저한테 보낸 이유가 뭐죠? 능력이 있으시다면 구승훈이 절 포기하게 만드세요.”안현우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승훈이도 남자야. 아무 때나 잠자리를 가질 수 있는 여자를 왜 포기하겠어. 오히려 문제는 강 부장이야. 이렇게 구승훈 옆에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강하리는 비웃음을 날렸다.“의미가 있건 없건 모두 저의 개인적인 일이죠. 안 대표님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난 강 부장과의 잠자리를 기다리고 있어.”강하리는 이를 악물었다.“안현우, 다른 여자하고 놀아. 난 당신 같은 남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니까. 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고 구승훈의 말을 몰래 녹음해서 나한테 보내면서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거 너무 비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안현우는 이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비열하면 뭐 어때? 비열하지 않은 남자도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강 부장 나하고 딱 한 번만 자는 거야. 딱 한 번만. 승훈이한테는 말하지 않을게. 그런 다음에는 절대 질척거리지 않을게. 어때?”“꺼져!”강하리는 분노하며 욕설을 뱉은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녀는 한참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사실 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하고 싶었다.그에게 왜 한편으로는 계속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만약 그가 정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말 한마디를 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인지 궁금했다.만약 신경 쓴다면 왜 안현우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구승훈에게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 이런 질문을 할 용기조차 잃었다.더욱 불쾌한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정말로 모욕당하고 싶진 않았다.손연지가 퇴근한 뒤 그녀의 병실로 왔다
순간 강하리는 완전히 절망감을 느꼈다.그녀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윽.”그녀는 있는 힘껏 그 사람의 입술을 깨물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나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몇 초 뒤 반응했고 순간 갑자기 불안해졌다.“승훈 씨 미쳤어요?”구승훈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웃음소리에서 약간의 기쁨이 들려왔다.“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강 부장이 해명해야 하는 걸까? 나인 줄도 모른 거야?”강하리는 숨이 막혔다.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두려움만이 느껴졌다.그녀는 심지어 구승훈일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그는 떠날 때 분명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다.“미안해요. 정말 몰랐어요.”“그럼 벌을 받아야지.”구승훈은 말을 마친 뒤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강하리의 몸은 다시 긴장했다. 현재 그녀의 몸 상태로는 구승훈이 뭔가를 더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승훈 씨, 나 몸이... 읍...”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도대체 어디에서 자극받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원한다면 아무리 그녀가 거부해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구승훈은 그런 욕구가 정말 강한 편이었다.강하리는 평소에 그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그녀가 생리하는 기간이 아닌 이상 그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심지어 하루에 3, 4번을 할 때도 있었다. 그동안은 그녀가 유산으로 인해 몸이 좋지 않았기에 구승훈은 아마도 많이 참았을 것이다.게다가 이제 그녀는 그의 몸이 반응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몸은 또다시 긴장했다.구승훈이 그녀를 잠깐 놓아준 틈에 물었다.“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그러나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기분은 좋아졌다.방에는 불도 켜지 않았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구승훈은 여전히 벨트를 풀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조금 급해 하며 핑크빛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키스했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을 큰손으로 잡고서는 벨트를 함께 풀었다.강하리를 만난 뒤로 그는 손으로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강하리가 손으로 해주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손보다는 그녀의 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다.하지만 오늘 밤에는 그도 만족감을 받았다.구승훈은 침대에 기대며 강하리를 가슴에 기대게 했다.“강 부장, 오늘 밤은 아주 표현이 좋았어.”그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묻어났다.강하리는 눈에 떠오르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그녀는 그의 팔을 떼어내고서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나오니 그는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방에는 여전히 조명을 켜진 않았지만, 창가에 있는 그의 실루엣은 보였다.강하리는 시선을 옮겼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구승훈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아까 한순간 만약 안현우를 받아주면 구승훈이 정말 자기를 놓아줄지 생각했었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서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안현우 같은 남자에게 더욱 역겨움을 느꼈다.만약 언젠가 구승훈을 떠나게 된다면 그녀는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지금보다는 인생을 더 잘 살아가고 싶었다.마음을 전부 그에게 주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또 온 거예요?”창가에서 불꽃이 튀더니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강 부장은 내가 온 게 싫어?”강하리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반대쪽 창가에 기댔다.“난 단지 구 대표님이 굳이 오실 필요는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필요는 없지만 오늘 밤은 꽤 괜찮았어.”강하리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
다음날.강하리가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이미 일어나 창가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슈트를 입고 가죽구두를 신은 그의 옆모습은 날카롭게 각진 모습이었다.움직임을 들은 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뒤 고개를 돌려 강하리와 시선을 마주쳤다.“강 부장, 날 보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왜 아직 안 떠났어요?”“오늘 퇴원한다고 했잖아.”구승훈은 그녀의 옆에 와 앉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간 거야?”강하리의 표정은 순간 부자연스럽게 변했다.“잘못 본 거예요.”구승훈은 바로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강 부장은 내가 정말 눈이 나쁜 줄 알아?”그는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내가 그렇게 잘생겼어?”강하리의 표정은 더욱 긴장했고 눈을 피했다.“아니요.”강승훈은 그녀를 놓아주며 웃었다.“좋으면 당당하게 봐. 내가 못 보게 한 것도 아니고.”강하리는 입술을 움찔하며 더 말하려고 했지만, 더 설명할수록 어색해질 것 같아 그저 하려던 말을 삼키며 입을 닫았다.구승훈이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하지 않고서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짐을 다 싸고 나니 손연지가 병실에 들어왔다.“이번에는 돌아가서 건강 잘 챙겨. 네 몸은 네 것이야. 알지?”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연지는 몇 마디 더 당부하더니 옆에 있는 구승훈에게 시선을 옮겼다.“구 대표님, 제가 전에 제안들인 거 다시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랄게요. 만약 하리를 도저히 보살펴주실 수 없다면 하리는 저희 집에서 지내도 괜찮아요.”구승훈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도 따라서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이 남자가 화나 났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챘다.그녀는 다급하게 손연지의 앞을 막아섰다.“괜찮아. 나 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야.”강하리도 손연지가 모두 자기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어린 소녀는 전에는 구승훈의 강한 아우라에 무서워했으면서 지금은 더는 무서워하지 않는 걸까?
게다가 구승훈이라는 남자는 자기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아마도 지난번에는 그녀가 금방 유산했기에 그냥 지나간 것일 수도 있었다.이번에는 그녀가 유산했다는 핑계도 그에게는 끝난 것 같았다.“연진아 너 바쁠 텐데 먼저 가 봐.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손연진은 그녀를 가슴 아픈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구승훈을 향해 흥하고 콧방귀를 뀐 뒤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방에는 강하리와 구승훈 두 사람만이 남았고 침묵 속에서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연지가 성격이 조금 급해요. 날 걱정해서 그런 거니까 화내지 말아 주세요.”구승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강 부장도 내가 못 해준다고 느껴?”강하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웃으며 말했다.“잘해주죠. 어떤 스폰서가 이렇게 직접 병실에 와서 애인을 돌봐주겠어요?”“구 대표님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저도 구 대표님에게 여자 친구나 아내를 대하는 것처럼 보살펴 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눈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한참이 지난 뒤 조롱하는 말을 뱉었다.“근데 강 부장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 그녀도 처량한 웃음을 터트렸다.“그럼 이제부터 구 대표님이 저한테 더 잘해주실래요?”구승훈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웃었다.“그건 앞으로 강 부장의 태도에 달렸어.”말을 마친 뒤 강하리를 놓아주었다.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은 제 태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세요?”“강 부장은 더 잘할 수 있잖아. 어젯밤처럼 말이야.”구승훈은 말하면서 격려하듯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난 강 부장 믿어.”강하리는 손가락이 뻣뻣해질 정도로 꽉 쥐었다.“제가 김 대표님에게 감사를 드려야죠.”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천만에.”
구승훈은 마치 바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너한테 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네 손에 쥐여줬겠어?”말하며 그는 강하리의 이마를 만져보았다.“강 부장 열이 너무 나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강하리가 웃었다.“구 대표님이 저한테 선물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요.”구승훈은 손을 거두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선물까지는 아니고 보상일 뿐이야.”강하리는 무슨 보상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상자를 열어보았다.상자를 열어본 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걸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기만 했던 귀걸이였다. 강하리는 손에 들린 귀걸이를 보며 경매에서 봤던 것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슷할 뿐 하나는 정품이었고 이건 이미테이션일 뿐이다.마치 그녀와 송유라처럼 말이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왜? 맘에 안 들어?”구승훈의 질문에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참 있다가 말했다.“아니요.”강하리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강 부장이 좋아하면 됐어.”강하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도 지금 마음속에 이 느낌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만약 평소에 구승훈이 귀걸이를 선물해 줬다면 그녀는 아마 엄청나게 기뻐했을 것이다. 그가 선물을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이 귀걸이가 두 번째였다.많이 기뻐해야 맞는 것인데 지금은 비교 대상이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기쁘지 않았다.역시 사람은 모두 탐욕적이다.강하리도 다른 여자에게 좋은 것을 준 뒤에 그녀에게 비슷한 걸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는 유일한 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불만조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이미테이션도 그의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이런 것이 동정심이라면 그녀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