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했지만 그래도 평소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안 대표님 이런 걸 저한테 보낸 이유가 뭐죠? 능력이 있으시다면 구승훈이 절 포기하게 만드세요.”안현우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승훈이도 남자야. 아무 때나 잠자리를 가질 수 있는 여자를 왜 포기하겠어. 오히려 문제는 강 부장이야. 이렇게 구승훈 옆에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강하리는 비웃음을 날렸다.“의미가 있건 없건 모두 저의 개인적인 일이죠. 안 대표님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난 강 부장과의 잠자리를 기다리고 있어.”강하리는 이를 악물었다.“안현우, 다른 여자하고 놀아. 난 당신 같은 남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니까. 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구승훈에게 보내고 구승훈의 말을 몰래 녹음해서 나한테 보내면서 중간에서 이간질하는 거 너무 비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안현우는 이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비열하면 뭐 어때? 비열하지 않은 남자도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강 부장 나하고 딱 한 번만 자는 거야. 딱 한 번만. 승훈이한테는 말하지 않을게. 그런 다음에는 절대 질척거리지 않을게. 어때?”“꺼져!”강하리는 분노하며 욕설을 뱉은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녀는 한참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사실 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하고 싶었다.그에게 왜 한편으로는 계속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만약 그가 정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말 한마디를 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인지 궁금했다.만약 신경 쓴다면 왜 안현우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구승훈에게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 이런 질문을 할 용기조차 잃었다.더욱 불쾌한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정말로 모욕당하고 싶진 않았다.손연지가 퇴근한 뒤 그녀의 병실로 왔다
순간 강하리는 완전히 절망감을 느꼈다.그녀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윽.”그녀는 있는 힘껏 그 사람의 입술을 깨물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나야!”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순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몇 초 뒤 반응했고 순간 갑자기 불안해졌다.“승훈 씨 미쳤어요?”구승훈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웃음소리에서 약간의 기쁨이 들려왔다.“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강 부장이 해명해야 하는 걸까? 나인 줄도 모른 거야?”강하리는 숨이 막혔다.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두려움만이 느껴졌다.그녀는 심지어 구승훈일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그는 떠날 때 분명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다.“미안해요. 정말 몰랐어요.”“그럼 벌을 받아야지.”구승훈은 말을 마친 뒤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강하리의 몸은 다시 긴장했다. 현재 그녀의 몸 상태로는 구승훈이 뭔가를 더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승훈 씨, 나 몸이... 읍...”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도대체 어디에서 자극받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원한다면 아무리 그녀가 거부해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구승훈은 그런 욕구가 정말 강한 편이었다.강하리는 평소에 그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그녀가 생리하는 기간이 아닌 이상 그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심지어 하루에 3, 4번을 할 때도 있었다. 그동안은 그녀가 유산으로 인해 몸이 좋지 않았기에 구승훈은 아마도 많이 참았을 것이다.게다가 이제 그녀는 그의 몸이 반응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몸은 또다시 긴장했다.구승훈이 그녀를 잠깐 놓아준 틈에 물었다.“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그러나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기분은 좋아졌다.방에는 불도 켜지 않았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구승훈은 여전히 벨트를 풀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조금 급해 하며 핑크빛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키스했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을 큰손으로 잡고서는 벨트를 함께 풀었다.강하리를 만난 뒤로 그는 손으로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강하리가 손으로 해주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손보다는 그녀의 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다.하지만 오늘 밤에는 그도 만족감을 받았다.구승훈은 침대에 기대며 강하리를 가슴에 기대게 했다.“강 부장, 오늘 밤은 아주 표현이 좋았어.”그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묻어났다.강하리는 눈에 떠오르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그녀는 그의 팔을 떼어내고서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나오니 그는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방에는 여전히 조명을 켜진 않았지만, 창가에 있는 그의 실루엣은 보였다.강하리는 시선을 옮겼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구승훈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아까 한순간 만약 안현우를 받아주면 구승훈이 정말 자기를 놓아줄지 생각했었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서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안현우 같은 남자에게 더욱 역겨움을 느꼈다.만약 언젠가 구승훈을 떠나게 된다면 그녀는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지금보다는 인생을 더 잘 살아가고 싶었다.마음을 전부 그에게 주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또 온 거예요?”창가에서 불꽃이 튀더니 구승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강 부장은 내가 온 게 싫어?”강하리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반대쪽 창가에 기댔다.“난 단지 구 대표님이 굳이 오실 필요는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필요는 없지만 오늘 밤은 꽤 괜찮았어.”강하리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
다음날.강하리가 깨어났을 때 구승훈은 이미 일어나 창가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슈트를 입고 가죽구두를 신은 그의 옆모습은 날카롭게 각진 모습이었다.움직임을 들은 구승훈은 전화를 끊은 뒤 고개를 돌려 강하리와 시선을 마주쳤다.“강 부장, 날 보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왜 아직 안 떠났어요?”“오늘 퇴원한다고 했잖아.”구승훈은 그녀의 옆에 와 앉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간 거야?”강하리의 표정은 순간 부자연스럽게 변했다.“잘못 본 거예요.”구승훈은 바로 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강 부장은 내가 정말 눈이 나쁜 줄 알아?”그는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내가 그렇게 잘생겼어?”강하리의 표정은 더욱 긴장했고 눈을 피했다.“아니요.”강승훈은 그녀를 놓아주며 웃었다.“좋으면 당당하게 봐. 내가 못 보게 한 것도 아니고.”강하리는 입술을 움찔하며 더 말하려고 했지만, 더 설명할수록 어색해질 것 같아 그저 하려던 말을 삼키며 입을 닫았다.구승훈이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하지 않고서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짐을 다 싸고 나니 손연지가 병실에 들어왔다.“이번에는 돌아가서 건강 잘 챙겨. 네 몸은 네 것이야. 알지?”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연지는 몇 마디 더 당부하더니 옆에 있는 구승훈에게 시선을 옮겼다.“구 대표님, 제가 전에 제안들인 거 다시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랄게요. 만약 하리를 도저히 보살펴주실 수 없다면 하리는 저희 집에서 지내도 괜찮아요.”구승훈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도 따라서 어두워졌다.강하리는 이 남자가 화나 났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챘다.그녀는 다급하게 손연지의 앞을 막아섰다.“괜찮아. 나 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야.”강하리도 손연지가 모두 자기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어린 소녀는 전에는 구승훈의 강한 아우라에 무서워했으면서 지금은 더는 무서워하지 않는 걸까?
게다가 구승훈이라는 남자는 자기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아마도 지난번에는 그녀가 금방 유산했기에 그냥 지나간 것일 수도 있었다.이번에는 그녀가 유산했다는 핑계도 그에게는 끝난 것 같았다.“연진아 너 바쁠 텐데 먼저 가 봐.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손연진은 그녀를 가슴 아픈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구승훈을 향해 흥하고 콧방귀를 뀐 뒤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방에는 강하리와 구승훈 두 사람만이 남았고 침묵 속에서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연지가 성격이 조금 급해요. 날 걱정해서 그런 거니까 화내지 말아 주세요.”구승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강 부장도 내가 못 해준다고 느껴?”강하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웃으며 말했다.“잘해주죠. 어떤 스폰서가 이렇게 직접 병실에 와서 애인을 돌봐주겠어요?”“구 대표님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저도 구 대표님에게 여자 친구나 아내를 대하는 것처럼 보살펴 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어요.”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색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눈을 마주 보게 만들었다. 한참이 지난 뒤 조롱하는 말을 뱉었다.“근데 강 부장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 그녀도 처량한 웃음을 터트렸다.“그럼 이제부터 구 대표님이 저한테 더 잘해주실래요?”구승훈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웃었다.“그건 앞으로 강 부장의 태도에 달렸어.”말을 마친 뒤 강하리를 놓아주었다.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은 제 태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세요?”“강 부장은 더 잘할 수 있잖아. 어젯밤처럼 말이야.”구승훈은 말하면서 격려하듯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난 강 부장 믿어.”강하리는 손가락이 뻣뻣해질 정도로 꽉 쥐었다.“제가 김 대표님에게 감사를 드려야죠.”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천만에.”
구승훈은 마치 바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너한테 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네 손에 쥐여줬겠어?”말하며 그는 강하리의 이마를 만져보았다.“강 부장 열이 너무 나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강하리가 웃었다.“구 대표님이 저한테 선물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요.”구승훈은 손을 거두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선물까지는 아니고 보상일 뿐이야.”강하리는 무슨 보상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상자를 열어보았다.상자를 열어본 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걸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기만 했던 귀걸이였다. 강하리는 손에 들린 귀걸이를 보며 경매에서 봤던 것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슷할 뿐 하나는 정품이었고 이건 이미테이션일 뿐이다.마치 그녀와 송유라처럼 말이다.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왜? 맘에 안 들어?”구승훈의 질문에 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참 있다가 말했다.“아니요.”강하리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강 부장이 좋아하면 됐어.”강하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도 지금 마음속에 이 느낌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만약 평소에 구승훈이 귀걸이를 선물해 줬다면 그녀는 아마 엄청나게 기뻐했을 것이다. 그가 선물을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이 귀걸이가 두 번째였다.많이 기뻐해야 맞는 것인데 지금은 비교 대상이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기쁘지 않았다.역시 사람은 모두 탐욕적이다.강하리도 다른 여자에게 좋은 것을 준 뒤에 그녀에게 비슷한 걸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는 유일한 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불만조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이미테이션도 그의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이런 것이 동정심이라면 그녀
“그동안은 매일 요리를 가져오라고 할게.”“네.”사실 식사를 가져오든 안 가져오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지금 몸이 안 좋긴 했지만, 식사를 차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의 말을 그녀는 귀찮아서 대꾸하지 않았다.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강하리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핸드폰을 보니 임정원이었다. 구승훈도 누군지 본 것 같았고 순간 표정이 안 좋아졌다.강하리가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구승훈은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은 뒤 냅킨을 식탁에 던져 놓았다.“강 부장 왜 안 받아?”그의 어두운 얼굴에 조금 분노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강하리는 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임정원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오히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다고 오해할 것 같아 전화를 받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구승훈이 핸드폰을 가져가 스피커폰으로 바꿨다.강하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 뭐 켕기는 거라도 있어?”“켕기는 거 없어요.”그녀는 구승훈 앞에서 임정훈의 전화를 받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사적인 전화 내용을 듣는다는 것이 불편했다.이미 전화를 받은 상태에서 임정원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네, 임 변호사님 안녕하세요.”“하리 씨 좀 괜찮아요?”“네 많이 좋아져서 퇴원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임정원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으면서도 유난히 다정하게 들렸다.“요즘 사건 회의가 여러 번 열릴 것 같아서요. 하리 씨 시간 있어요? 만약 시간 있으면 회의에 참석할래요? 사건에 대해 하리 씨가 사전에 이해해 두면 좋을 것 같은데.”강하리도 사건 분석 회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구승훈이 옆에 없었다면 그녀는 무조건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승훈이 옆에 있으니 또 어떤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몰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영통으로 참여해도 괜찮을까요?”“그래도 돼요.
강하리의 말이 끝나자 구승훈은 가볍게 웃었다. 그의 표정에는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강 부장은 자기가 나와 협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강하리는 눈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구 대표님이 얘기 나누자고 하셨잖아요? 말해도 되는 줄 알았죠.”구승훈의 시선은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귓볼로 향했다.분명 연약한 여지일 뿐이지만 여전히 이런 일로 그와 싸웠다.그는 그 모습에 가슴에서 분노가 치솟았다.강하리의 허리를 잡고 더 가까이 당겨 그녀의 귓볼을 세게 깨물었다. 강하리는 귀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고 이어 그의 목소리라 귓가에서 들려왔다.“나하고 협상한 뒤 또 그 임정원을 도와주겠다는 거야?”그의 목소리에서는 강한 한기가 느껴졌다.강하리는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인하지 않았다. 임정원을 돕고 싶은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정원에게 대답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돈과 그녀만의 커리어를 위해서였다.먼저 커리어는 제쳐두더라도 돈을 벌 기회를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 어머니의 병원비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기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구승훈도 매달 그녀에게 돈을 주지만 그녀는 이제 그를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미래의 계획들을 잘 세우는 것이 맞았다.“네, 나 돈 필요해요. 그리고 임 변호사님 쪽뿐만 아니라 앞으로 난 더 많은 아르바이트할 거예요. 만약 내가 회사 일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되면 바로 날 잘라요. 난 의견 없으니까.”구승훈이 비웃음을 날렸다.“강 부장 너무 좋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해서 100억에 달하는 위약금을 아끼겠다는 거야?”강하리의 입술이 움찔했다. 그것이 그녀의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구승훈이 그녀의 사직을 막는다면 그녀는 회사를 출근하면서 아르바이트할 수밖에 없었다.만약 구승훈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바로 그녀를 자르면 된다.구승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꼭 그렇게 해야겠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구 대표님은 사업가이시니까 신뢰가
“승훈아,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너만 원하면 내일 열 명이라도 보내줄게.”회의실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하며 늙은이들은 책상을 쾅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옆에서 지켜보는 준봉이 더 불안했지만 구승훈은 가만히 있었고 재밌는 연극이라도 치켜보는 듯 이따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두드렸다.“구승훈, 우리 말 듣고 있는 거야?”휴대폰 화면에 아내라는 글이 뜨자 구승훈의 눈빛이 단번에 부드러워지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퇴근했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하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답했다.“언제 퇴근해?”구승훈은 회의실에서 하나같이 격앙된 표정을 짓는 늙은이들을 훑어보았다.“곧.”“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회의실에 착석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고 방금 강하리의 전화를 받을 때 보였던 온화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싸늘함만 남았다.“얘기 다 끝났습니까?”한 마디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고 구승훈은 회의실 안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여씨 가문 조상의 묘 하나 파헤친 걸로 왜들 그리 흥분하세요?”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안타깝지만 그런 수작 나한텐 안 통합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이 회사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장 나가도 좋습니다. 정안에 차고 넘치는 게 주주들이라서요. 하지만 여기 남아서 나와 내 아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당신들 조상 무덤까지 파헤칠 겁니다. 회의 끝.”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준봉은 그의 뒤를 따르며 회의실에 있는 주주들을 바라보았다.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정안그룹이 과거 SH그룹보다 훨씬 대단했기에 주주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안의 지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늙은이들이 한 방 먹은 모습을 보니 준봉도 속이 시원했다.그동안 저 늙은이들이 뒤에서 남몰래 강하리
제 자리에 멈춰 선 여명희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강하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진시연 또한 한번 들여보낸 이상 두 번을 못 할까.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심씨 가문으로 향했고 심준호는 여전히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오호, 시집갔다고 친정은 잊은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오지도 않았잖아.”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외숙모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최근에야 애당초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심준호의 결혼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준호 본인이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결국 이 결혼은 심준호가 심예진을 곁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반면 심예진은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만 받아들였고 심지어 외국에서 만나는 남자 친구까지 생겼기에 심준호는 강하리가 숙모 얘기를 꺼내자 눈썹이 들썩거렸다.“다 커서 이젠 팔이 밖으로 굽네?”강하리는 웃으며 옆으로 가서 심준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삼촌, 숙모 찾으러 안 갈 거예요?”심준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숙모는 어디로 도망 못 가.”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심준호에게 구승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이렇게 물었다.“삼촌한테는 얘기했어요?”심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승훈이가 말한 적은 없는데...”심준호는 문득 어렸을 때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승훈이는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어. 그리고 그 원인이 어머니였지.”심준호는 강하리에게 당시 본 장면에 관해 이야기했고 무표정하던 강하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심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도 정신과 치료로 받은 전기충격 치료 때문이었어. 그때 아마 9살 정도 됐겠네.”심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작은 꼬맹이가 한계까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
노민우는 식사를 마치고 손연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손연지가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노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의 모친이었다.노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연지를 바라봤지만 손연지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그녀는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기 전 한 마디만 남겼다.“난 쉴 거니까 넌 가.”노민우는 혀를 차고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뒤 손연지를 끌어당겼다.“손연지,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면 안 돼?”손연지가 눈을 흘겼다.“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얘기하다 내 기분 망치면 넌 끝장이야!”노민우가 손연지에게 다가왔다.“화내지 마.”손연지는 노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누구는 화내고 싶어서 내는 줄 알아?’“할 말 있으면 빨리 해.”노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손연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1년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집에서 정해준 약혼 해결할 테니까 우선 파혼하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로 지낼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응?”옷을 든 손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노민우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건데?”노민우는 사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혼했고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은 언젠가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차하면 승훈이처럼 인연 끊으면 되지.”손연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지.”“그래.”노민우는 손연지가 이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손연지에게 1년 더 기다리라고 하면 그를 한대 쥐어패기라도 할 줄 알았다.“정말 동의하는 거야?”손연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노민우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껴안았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내가 헛소리 한 거라고 생각해.”노민우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이 틈에 손연지와 가까워지려
입안의 술맛이 남자의 입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을 때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화 풀어, 응?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강하리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해봐.”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게 웃었다.“무릎을 꿇다 다리가 아프면 밤에 너 챙겨주지 못하잖아.”강하리는 웃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그를 밀어낸 뒤 식탁에 앉아 다시 한 잔을 따랐다.식당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강하리의 실크 가운은 구승훈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려가 불빛에 붉어진 그녀의 어깨가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순간 멈칫하며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어쩌다 이런 거야?”강하리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맞춰봐.”구승훈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전체가 드러나도록 했다.붉게 물든 어깨에는 물집까지 생겼다.“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왜 나한테 말...”말하던 구승훈은 이내 알아차리고 다소 무기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렇게 화났어? 다친 걸 얘기하지도 않을 만큼?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강하리는 어지러워 손가락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훑다가 한참 후 욕설을 뱉었다.“개자식, 그러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구승훈, 대체 언제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건데? 이 나쁜 놈! 망할 놈!”강하리의 욕설이 커졌고 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큰 별장에는 그렇게 적막이 감돌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하지만 강하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분명했다.그런 추하고 더러운 가족을 강하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미안해, 자기야.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응?”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안쓰러워 사실 더 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