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숙은 나의 머리를 강제로 돌려 배의 화물칸을 바라보게 하며 말했다.“하윤설, 이제 너와 나는 같은 배를 탄 거야. 내가 잡히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강현숙은 마치 악마처럼 내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선미를 바라볼 뿐이었다.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평소처럼 언니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러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자마자 언니가 먼저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리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그 여자가 지하실 사람들 상태 좀 확인하라고 해서 다녀왔어.”이 말은 절반은 진실이었고, 절반은 거짓이었다. 이에 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정현승의 판결은 아직 안 나왔지만, 이 일이 너무 커졌으니 몇 년은 피할 수 없을 거야.”“지금 이 상황에서 강현숙이 너한테 무슨 일을 시키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해. 알겠지?”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신경을 쓴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어차피 우리 여기서 나갈 수도 없잖아.”언니는 그 말을 듣고 일어서더니 손을 뻗었다.“윤설아, 무슨 일 있어?”나는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다가오지 마요!”언니는 내 반응에 화가 난 듯 말했다.“너, 왜 이러는 거야!”“그래, 나 미쳤어! 하지만 내가 미치든 말든 신경 쓰기나 했어?”“고아원에 있을 때도 늘 그랬잖아. 언제나 네 멋대로 생각하면서 날 언니 그림자로만 여겼잖아.”“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설명 안 하면서 내가 무조건 언니를 믿어주길 바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였어?”언니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억누르듯 침착하게 말했다.“윤설아, 난 네 언니야. 이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야. 네가 정말 내가 너를 해칠 거라고 생각해?”나는 언니의 불러온 배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누가 알아? 네가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짝! 언니는 내 말을 끊으며 손을 들어 내 뺨을 때렸다.
하지만 보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을 해치는 법이었다.언니가 임신 8개월이 되기 몇 날 전, 강현숙이 나를 불렀다.“내 비서가 말하길, 네가 최근 마무리 작업을 아주 잘했다고 하더라.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많이 줄었대.”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에요.”강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그래, 내가 기대한 대로구나.”“너희 언니가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래서 출산을 조금 당기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강현숙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와 언니가 사이가 나쁘기를 바라며 날 시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이에 나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뜻대로 하시면 돼요.”“네 언니가 수술대에서 죽어도 괜찮겠니?”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렇게 여러 번 낳고도 안 죽었는데, 이번에도 쉽게 죽진 않을 거예요. 만약 죽는다면, 그건 언니가 운이 없는 탓이겠죠.”“어차피 죽는 건 언니지, 제가 왜 걱정해야 하겠어요?”강현숙은 내가 무관심한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윤설아.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지.”“네 언니는 널 그저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네가 자기를 위해 길을 깔아주는 도구라고 여길 뿐이야.”“하지만 네가 말을 잘 듣는다면 절대 손해 보게 하진 않을게.”“네 언니는 아이만 낳으면 내가 보내줄 거니까.”강현숙은 마치 언니를 편안히 보내주겠다는 듯 말했지만, 그 보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디로 보내겠다는 건지,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언니의 비명이 들려왔다.아마도 잦은 유도 분만 탓에 언니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변화가 온 모양이었다. 이제 아이가 나오려는 듯했다.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현숙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그녀가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강현숙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밤이 찾아와 도
강현숙은 곧 자신이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내 손에 든 계약서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잽싸게 피하며 강현숙을 발로 차서 바닥에 쓰러뜨렸다.“하윤설! 네가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강현숙이 분노에 차서 소리치자, 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병이 나신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우리나라 제일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는 정신병원을 이미 예약해 두었으니까요.”그 말을 들은 그녀는 오히려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네가 감히?”나는 강현숙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발로 얼굴을 밟았다. 힘껏 밟아 대자, 그녀의 이가 부러져 나왔고 입에서 피가 흘렀다. 강현숙은 비명을 지르며 눈물과 침을 흘렸다. 얼굴엔 선명한 붉은 자국이 번졌다.“내가 당신의 더러운 일들을 맡으면서 당신에게 충성할 줄 알았나요?”“오히려 감사해요. 가장 기밀한 일들을 제 손에 쥐어주셨으니, 무언가 꾸미는 건 더 쉬웠죠.”강현숙은 얼굴을 감싸며 싸늘하게 웃었다.“그래서? 내가 멀쩡한 사람인데 정신병원에 보낸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니?”“쉿.” 나는 강현숙의 말을 막았다.“어머니, 제가 어떤 꼼수를 썼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병은 입으로 들어온다고 하잖아요?”“어머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보약들, 그중에서도 신경을 교란하는 약물들 어머니가 최근에 참 많이 드셨죠. 방금 드신 태반과 그 물에도 듬뿍 넣었답니다.”강현숙은 방금 마신 물을 바라보며 충격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이 모든 걸 계획한 거였어? 현승이 감옥에 간 것도 네 짓이었구나!”“맞아요.”강현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문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숙은 언니를 보자 순간적으로 동공이 확장되었고, 온몸이 떨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분명히 너를 처리하라고 했는데,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언니는 천천히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살아 있어야죠. 그래야 당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언니는 강
“어때, 하윤설. 너도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고 싶은 거니!”강현숙의 말에 언니가 내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인신매매라니! 하윤설, 네가 나한테 숨긴 게 뭐야?”나는 잠자코 언니를 바라봤다. 사실 강현숙이 나를 협박한 내용은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언니를 도와주겠다고만 했을 뿐이다.나는 언니에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언니.”이 말은 곧 강현숙이 말한 내용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셈이었다.언니는 갑작스럽게 거칠게 숨을 내쉬며 지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커다란 상처와 고통이 묻어나 있었다.“사실 난 이미 사흘 전에 경찰에 자수했어. 모든 증거를 제공하고, 배의 행선지와 특성도 다 알렸어. 감옥에 가더라도 감형은 받을 거야.”언니의 눈동자는 슬픔과 고통으로 요동쳤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나는 언니를 품에 안았다. 마치 예전 언니가 정현승의 폭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며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를 꼭 안고 말하던 그때처럼.“괜찮아, 윤설아. 언니가 너를 지켜줄게.”나는 언니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정리해 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이제 내가 언니를 지켜줄 차례야.”강현숙은 내가 괴물이라도 되는 듯 충격에 차서 나를 바라보았다.“하윤설,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나 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거야!”나는 뒤돌아보며 강현숙에게 차분히 말했다.“걱정 마세요. 뒷일은 제가 다 준비해 뒀으니까요. 경찰에 신고한 순간, 당신의 공범들도 모두 체포될 거예요.”나는 목소리를 낮춰 강현숙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제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정신병원에는 예전에 당신 때문에 미쳐버린 여자아이들도 있어요.”“그리고 감옥에도 어머니 때문에 들어간 사람들이 꽤 있죠. 그들이 당신과 정현승을 가만히 놔둘까요?”“당신이 어디에 계시든 그들의 손길을 피해 갈 순 없을 거예요.”강현숙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운
산부인과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강현숙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나와 조심스럽게 강현숙에게 말했다.“산모가 난산입니다. 지금 당장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아이 아버지가 서명해야 합니다.”그 말을 들은 강현숙은 바로 화를 냈다.“제왕절개는 안 돼요! 혹시라도 태반이 손상되면 어쩌려고요?”그 말에 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난산이면 어떻고 말든 간에 아이 하나 낳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나요! 목숨이 무슨 상관이죠?”“어떻게든 태반은 온전하게 가져와야 하니까, 내 말 듣지 않으면 이 병원 계속 경영할 생각 하지 마세요.”강현숙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의사에게 달려가 절박하게 애원했다.“의사 선생님, 제발, 제 언니를 구해 주세요!”하지만 강현숙은 나를 붙잡아 단번에 뺨을 후려쳤다.“여기서 네가 나설 자리가 어디 있다고 난리야!”그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의 뺨을 후려쳤기에, 오른쪽 뺨이 뜨겁게 화끈거렸다. 뭔가 더 말하려고 하자, 강현숙은 나를 거칠게 발로 차서 쓰러뜨린 후, 높은 굽으로 내 손을 세차게 밟아 으스러뜨렸다. 손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온몸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이윽고 강현숙은 의사를 향해 말했다.“내일 출근하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잠시 망설이던 의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미친 듯이 응급실 쪽으로 기어가려 했지만, 강현숙이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내 머리채를 잡아채며 말했다.“넌 정말 은혜도 모르는 애네. 내가 아니었으면 너랑 네 언니는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 거야. 감사할 줄 모르는 것도 모자라 감히 나한테 대들어?”강현숙은 말하며 내 목을 움켜잡고 거칠게 내려치기 시작했다.“너 같은 못난 년, 네 언니가 그나마 쓸모가 있으니까 봐주고 있는 거야.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끝장이었어.”피가 코와 입에서 흘러내렸지만, 주변 사람들은 마치 늘 보던 광경
온몸의 통증을 참고 일어나 보니, 아이는 작고 마른 체구에 호흡조차 미약한 상태인 거로 보아 조산아였다. 강현숙은 임신 8개월의 태반이 가장 좋다고 굳게 믿었고, 임신이 8개월에 이르면 억지로라도 출산을 유도하곤 했다.내가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려는 순간,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이 와서 아이를 데려갔다. 그들은 항상 이랬다. 태어난 아이는 반드시 어딘가로 보내졌고, 그곳이 어딘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언니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 나는 언니 곁을 지켰다. 언니는 3년간 세 번의 출산을 했고, 이번이 세 번째 아이였다. 언니가 깨어나 내 얼굴에 난 상처를 보더니,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또 맞았어?” 언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러자 언니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곧 끝날 거야. 조금만 참아.”사실, 언니가 말하는 곳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언니는 언제나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우리는 쌍둥이였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 언니는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보육원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 덕분에 강현숙이 언니를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언니가 강현숙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 나까지도 입양되었다.처음에는 언니와 함께 평범하게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환상은 단 1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그 일이 일어난 건 어느 날 새벽, 화장실에 가다가 언니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나는 언니 위에서 오르내리는 정현승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내가 낸 작은 소리에 현승은 곧 나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고, 몹시 흥분한 눈빛으로 내 옷을 벗기려 했다. 그 순간, 언니가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 언니는 정현승을 붙잡으며 말했다.“이 애한테서 뭘 기대해? 볼 것도 없는데.”그러면서 현승의 신경을 자극하는 듯 행동했다. 나는 언니가 보내는 눈빛을 보고서야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언
“제발 살려주세요. 다신 도망치지 않을게요.”그 말을 듣자, 정현승은 서예지를 거칠게 한 대 더 후려쳤다.“이 천한 년이, 잘 먹이고 잘 입혀 주는 걸 놔두고 굳이 스스로 고생길을 택하다니.”그는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나무 몽둥이를 다시 들어 올려 예지의 다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예지의 다리뼈는 부러져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러나 현승은 멈출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세게 구타했다. 그렇게 한참을 때린 뒤,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옆에 주저앉았다.그때, 그 예지가 나를 향해 기어 왔다. 얼굴에는 피가 뒤범벅되어 있었고, 힘없이 중얼거렸다.“살려줘! 제발, 살려줘.”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현승이 다가왔다. 그는 예지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며 나를 보며 비웃었다.“뭐야, 너도 도망가고 싶은 거야?”힘을 주자 뒤룩뒤룩 살이 찐 현승의 볼살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굴은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예지는 몇 주 전 새로 끌려온 여자였다. 끌려온 뒤로 계속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소리쳤던 그녀였는데, 이번에도 아마 도망치려다 다시 붙잡혀 온 모양이었다.나는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설마요, 제가 이렇게 어리석을 리가요.”“난 이미 당신의 사람이니까, 당신이 말하는 대로 따를 거예요.”언니는 집을 떠나기 전 나에게 당부했다. 절대로 현승을 자극하지 말라고.현승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내 앞에서 가시에 뒤덮인 나무 몽둥이를 집어 들고, 예지의 등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내 얼굴에까지 닿았고, 그 온기가 느껴졌다.현승은 여전히 나를 보며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다리를 끌어안은 채 온몸을 떨며 두려움에 떠는 척 연기했다. 그러자 현승은 내 반응에 만족한 듯했다.그런데 현승은 갑자기 흥미를 느낀 듯 예지의 옷을 벗기고
나는 막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 무겁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그날 정현승에게 폭행당했던 여자, 서예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했고, 나를 향해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기세에 겁이 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예지는 주저 없이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아채며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하윤설, 넌 네 언니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무슨 이유로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누군가가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건 더 이상 이상할 것도 없었다.예지는 내 입을 손으로 꽉 막고는 강한 힘으로 나를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셌다. 예지는 나를 부엌문 앞까지 끌고 간 뒤, 내 입을 테이프로 단단히 막았다.부엌문을 여는 순간, 진한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집에는 가사도우미가 없었다. 현승과 강현숙은 이런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지하실에 갇혀 있었고, 강현숙도 오늘 외출한 터라 지금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예지는 부엌에서 칼을 하나 들고 나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입이 테이프로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눈으로 간절히 예지에게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예지는 말없이 웃으며 속삭였다.“하윤설, 사는 게 고통스럽지? 내가 너를 해방해 줄게.”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목을 칼로 그었고, 그대로 피가 흘러나왔다. 극심한 통증에 얼굴 근육이 일그러졌다.예지는 그것도 모자란 듯 내 바지를 벗기고는 종아리에도 칼을 휘둘러 깊은 상처를 내자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예지는 그런 나를 보며 오히려 위로하듯 말했다.“괜찮아, 곧 편해질 거야.”방 안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 차올랐고, 침과 콧물로 내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예지는 이미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더는 살 의지가 없었고, 단지 나를 함께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예지가 칼을 들어 내 목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