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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막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 무겁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그날 정현승에게 폭행당했던 여자, 서예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했고, 나를 향해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기세에 겁이 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예지는 주저 없이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아채며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하윤설, 넌 네 언니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무슨 이유로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누군가가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건 더 이상 이상할 것도 없었다.

예지는 내 입을 손으로 꽉 막고는 강한 힘으로 나를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셌다. 예지는 나를 부엌문 앞까지 끌고 간 뒤, 내 입을 테이프로 단단히 막았다.

부엌문을 여는 순간, 진한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집에는 가사도우미가 없었다. 현승과 강현숙은 이런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지하실에 갇혀 있었고, 강현숙도 오늘 외출한 터라 지금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예지는 부엌에서 칼을 하나 들고 나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입이 테이프로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눈으로 간절히 예지에게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지는 말없이 웃으며 속삭였다.

“하윤설, 사는 게 고통스럽지? 내가 너를 해방해 줄게.”

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목을 칼로 그었고, 그대로 피가 흘러나왔다. 극심한 통증에 얼굴 근육이 일그러졌다.

예지는 그것도 모자란 듯 내 바지를 벗기고는 종아리에도 칼을 휘둘러 깊은 상처를 내자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예지는 그런 나를 보며 오히려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아, 곧 편해질 거야.”

방 안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 차올랐고, 침과 콧물로 내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예지는 이미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더는 살 의지가 없었고, 단지 나를 함께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예지가 칼을 들어 내 목을 향해 내려치려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언니였다. 2층에서 꽃병을 던져 떨어뜨렸는데, 정확히 맞히지는 못했지만 예지의 주의를 돌리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 틈을 타 힘껏 예지를 밀쳤고, 그녀는 비틀거리며 주춤했다. 나는 부상당한 다리를 질질 끌며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렸다.

예지는 나를 따라오려고 했으나, 언니가 그녀를 막아섰다. 둘은 뒤엉켜 서로를 붙잡고 몸부림쳤다. 예지 손에 들려 있던 칼도 그 과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현승이 2층에서 내려왔다. 그는 다가가 예지를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예지는 현승을 보자마자 죽을힘을 다해 그를 붙잡았다. 현승이 어떻게 폭행해도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현승은 예지의 목을 조르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집어 들어, 그대로 예지의 가슴에 꽂았다. 그러자 예지는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

하지만 현승이 자리를 뜨려던 그 순간, 예지가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이 짐승 같은 놈아, 나랑 같이 지옥으로 가자!”

예지는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려 라이터를 부엌으로 던졌다.

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부엌이 불길에 휩싸였다. 부엌에 가장 가까웠던 현승은 폭발에 휘말려 공중으로 3미터나 튕겨 나갔다.

나는 언니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큰 피해는 보지 않았다. 폭발 직전, 나는 예지가 내게 무언가 입 모양으로 속삭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살아남아.”

예지의 눈빛은 맑고 분명했다. 조금도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언니를 돌아보았다. 언니의 눈에는 희미하지만 사악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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