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Chapter 231 - Chapter 240

525 Chapters

제231화

계속 울리던 전화가 갑자기 멈췄다.순간, 공기 중에는 가스레인지 불소리와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이 가까운 거리에서 숨결이 뒤섞이고 나는 진정우의 눈 속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뭔가 일어나겠는데?’강한 예감이 들었다.똑똑.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우야! 우리 집 물이 잘 안 나오네. 좀 와서 봐줄 수 있어?"아래층 유씨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밀착해 있던 그의 몸이 한순간 살짝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잠시 후, 진정우는 부엌에서 나와 아줌마를 따라갔다."바로 내려갈게요.""그래, 그래."아줌마는 문 너머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미안, 정우를 잠깐만 빌려 갈게."‘하하... 빌려 간다니.’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빌려 가시는 건 좋은데 빨리 돌려주세요. 오래 빌리시면 안 돼요."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답했다."알겠어, 알겠어."진정우는 아줌마를 따라 나갔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수박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그가 다시 날 부르러 왔을 때는 약 30분이 지난 뒤였다.시간이 지나니 아까의 어색함은 이미 사라졌다."해결했어요?"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수도꼭지가 물때 때문에 막혔더라고요. 새 걸로 바꿨더니 괜찮아졌어요.”그 말을 듣고 이곳의 재개발 이야기가 떠올랐다."이 동네 곧 철거되는 거 아시죠?"“네.”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겠죠. 어차피 임대로 살고 있으니 떠나야 하잖아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디로 갈 건데요?""아직 생각 중이에요."나는 집을 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저녁, 그의 요리는 여전히 훌륭했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언젠가 이 사람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면, 아마 어떤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거야.’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함
Read more

제232화

강유형도 이곳에 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오늘은 조명 테스트가 있는 날이고 그는 이 놀이공원의 대주주로서 미리 와서 확인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시선이 마주치는 찰나, 강유형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그 순간, 내 손이 따뜻해졌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은 것이다.솔직히 말하자면, 내 남자 친구 역할을 맡은 그는 이런 상황에서 꽤 노련했다. 강유형만 등장하면, 그의 태도는 마치 주권을 선언하려는 듯한 강렬함으로 즉시 변하곤 했다.강유형의 시선이 우리 손에 잠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특별히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심지어 그의 목소리도 평온했다.“언제 시작하죠?”그의 질문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조명 테스트를 보러 온 것이다.“10분 뒤요.”진정우가 답했다.“관측 지점은 어디죠?”강유형이 다시 물었다.진정우의 손이 내 손을 살짝 더 꽉 잡았다. 나는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진정우가 이곳에서 이미 수없이 테스트를 봤을 텐데 관측 지점을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내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구역마다 관측 지점이 다르고 표시도 되어 있어요. 전체적으로 관측하기 가장 좋은 곳은 관람차죠.”나는 공식적인 대답을 했다.강유형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진정우를 향해 물었다.“두 분은 어디서 관측하실 건가요?”그 말의 뜻은 우리와 동행하겠다는 건가?그는 이 상황이 불편하지 않은 걸까?아니, 그럴 리 없다. 이미 그는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고 과거를 다 내려놓았을 텐데.“저희는 우선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려고요. 그리고...”진정우가 잠시 멈추고 말했다.“오늘은 공식적인 테스트가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조명 상태를 지원 씨에게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강유형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그러나 그는 차분히 “그래요.”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그 ‘그래요’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Read more

제233화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말라왔다. 우리 셋이 같은 관람차 칸에 타자는 뜻일까?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진정우는 내 손을 잡아 다른 관람차 칸으로 이끌었다.“같이 안 타나요?”뒤에서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불편해서요.”진정우는 단호히 말하며 자연스럽게 나를 칸 안으로 올려주었다.그리고 그는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칸 안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강유형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그의 시선은 차갑고 무거웠으며 화난 게 분명했다.“일부러 그런 거죠?” 나는 진정우를 보며 물었다.“네.”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같이 타고 싶지 않아서요.”그 말은 솔직했고 어딘가 뻔뻔하면서도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진정우는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있고 따뜻하고 세심한 면도 있지만 지금처럼 귀엽고 엉뚱할 때도 있다.“정우 씨.”“네?”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관람차 안의 은은한 조명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귀여워요.”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관람차 안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타이밍 참 절묘하네.“뭐라고요?”그는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내 말을 믿기 힘들었던 건지 되물었다.나는 웃음으로 넘기며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놀이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워터슬라이드,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놀이공원 전체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과 도시의 불빛들까지 어우러져 있었다.조명이 화려하게 바뀌자 시선이 다시 놀이공원으로 돌아갔다.놀이공원 안쪽의 따뜻한 분위기와는 달리, 밖에서 보는 놀이공원의 조명은 도시를 빛내는 상징 같았다.이곳은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같은 존재였다.“지원아, 이 놀이공원 마음에 들어? 내가 준 선물이잖아.”갑자기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강유형이 이 놀이공원의 설계도를 내게 내밀며 했던 말이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날 사랑한다
Read more

제234화

다채로운 세상이 그의 손바닥 아래 감춰지자 내 시야는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따뜻한 체온이 어떤 빛보다도 큰 안도감을 주었다.“소원을 빌어봐요. 앞으로 제가 지원 씨 곁에 있을 테니 바라는 건 뭐든 이뤄질 거예요.”진정우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마치 첼로 선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관람차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긴장으로 경직됐던 마음이 그의 말 한마디에 점차 풀려갔다.소원...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부모님이 떠나신 후,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강유형과 함께할 때도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건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바람일 뿐, 진지하게 소원을 빌어본 적은 없었다.지금이라도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결국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들의 죽음과 남겨진 진실.“우리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고 싶어.”나는 조용히 말했다.“그건 제가 밝혀낼게요.”진정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굳이 소원을 빌 필요도 없겠네. 그냥 말하면 해결해 줄 테니까.”진정우는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래서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죠.”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원래 이런 거 잘 안 믿어요.”나는 다시 놀이공원의 찬란한 조명으로 시선을 돌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더 이상 하느님 같은 건 믿지 않아요.”그는 이번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앞으로는 저를 믿어주세요.”그 말은 마치 내 삶의 수호자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 같았다.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걸.다시 조명이 빛을 발했다. 여기 조명들은 매 순간 변화해 같은 빛을 두 번 보는 일이 없었다.이 놀이공원의 조명 설계 비용은 전체 투자
Read more

제235화

파란 바다 위를 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했다.그녀는 물결 위에서 뛰놀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너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마치 현실에서 살아 있는 소녀가 물결 위를 달리고 있는 듯했다.나는 숨조차 멈추며 그 장면에 몰입했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그러다 갑자기 큰 파도가 일면서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났다.한 소년이었다.키가 훤칠한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소녀도 그를 바라보다가 몇 초 뒤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오빠, 난 다윤이라고 해. 오빠 이름은 뭐야?”그 말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물결 위에서 뛰놀던 그 소녀가 바로 나라는 걸 깨달았다.“오빠, 도망가지 마!”“오빠, 나 좀 기다려줘!”...소년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오빠, 나 힘들어. 업어줘.”“오빠, 좀 더 빨리 뛰어봐!”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둘이 물결 위를 함께 뛰었다.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이건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위해 어린 시절의 꿈을 조명으로 재현해 준 것이다.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라는 걸.“오빠, 다윤이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야.”“꼭 기다려줘야 해. 절대 잊으면 안 돼!”장면이 계속 바뀌면서 나는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진정우가 내 삶에 등장한 건 우연도 아니었고 의도도 아니었다.그건 그가 지켜온 오래된 약속 때문이었다.조명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고 동시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조명의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했다.그들은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윤아, 행복해야 해.”눈물이 언제 흘러내렸는지조차 몰랐다.단지 조명이 꺼질 때쯤에는 이미 목 놓아 울고 있었다.이때 진정우
Read more

제236화

“정말 비열하군.”강유형이 낮게 으르렁대며 진정우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이 급히 다가가려는 순간, 진정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강 대표가 말하는 비열함이란 당신이 지원이에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한 적이 없어서겠죠.”강유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진정우, 네가 이런 유치한 쇼로 지원이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지원이는 이런 환상 따위 좋아하지 않아. 알겠어?”내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맞다, 한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우리가 막 연인이 되었던 첫 밸런타인데이에 그는 나에게 어떤 선물도, 심지어 저녁 한 끼도 준비하지 않았다.다음 날 신지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신지태가 우리 첫 밸런타인데이를 어떻게 보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그 후, 강유형이 내게 사과하며 그저 깜빡 잊었다고 말했고 나는 억지로 “난 이런 거 안 좋아해”라며 넘어갔다.하지만 세상에 꽃과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그는 그저 주지 않았을 뿐이다.“지금도 지원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진정우의 낮고 단호한 물음에 강유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그는 분명히 봤을 것이다.그리고 그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 것이다.진정우가 AI로 부모님을 재현해 낸 감동, 그로 인해 솟구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그를 향한 감동의 눈물이었다.진정우의 사랑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빛났다.정성스러운 한 끼의 식사,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것, 나만을 위해 준비한 조명 쇼까지...강유형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시선을 돌리고 진정우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지원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우린 10년을 함께했고 지원이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어.”진정우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강유형은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믿기 어렵겠지? 지원이 왼손 중지에 있는 작은 흉터를 봤어? 그게 증거야
Read more

제237화

진정우의 반응에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왜 그래? 혹시 싫어진 거야? 아니면...”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깊고 강렬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내 입술을 살포시 누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좋아.”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고 얼굴이 뜨거워졌다.그 역시 마찬가지였다.피부가 까만 편이라 그의 얼굴에서는 티가 덜 났지만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안고 서 있었다.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떨어질 수 없었다.그저 이렇게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부끄러운 순간.조금 더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망설여지는 마음.‘이러다 밤새도록 이렇게 서 있는 거 아닐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해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저기...”“그럼...”우리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고 그 순간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마침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내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나를 살짝 놓아주었고 나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화면에는 안리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이런 타이밍에 전화를 다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저기, 나 전화 좀 받을게.”나는 그에게 말하며 손짓으로 내 방을 가리켰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잘 자.”“응, 잘 자.”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이미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음 연애를 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안리영의 전화를 받았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 설마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안리영은 늘 내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곤 했다.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웃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 있어. 듣고 싶어?”“좋은 소식? 내가 맞춰볼까?”안리영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설마, 너랑 진정우, 드디어 사귀기로 한
Read more

제238화

용준호가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나는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용진표를 만나러 가는 건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메시지를 보내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지금 답장을 보내면 그가 다른 조건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고, 거절하면 용진표에게 내 뒷말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가장 현명한 선택은 역시 무시하는 것이었다. 어젯밤처럼 말이다.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안리영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용준호의 메시지에 잠시 신경이 쏠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놓쳤다.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둘이 관계 정했으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아직 아니야?”“다음 단계? 무슨 다음 단계?”나는 여전히 용준호 때문에 머릿속이 어수선했다.“남녀가 사귀면 당연히 그거지. 뭘 또 물어.”안리영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그거라니? 아니야. 정우는 진짜 점잖은 사람이야.”“점잖은 사람이면 그런 욕구도 없는 거야? 사람이면 당연히 있지.”안리영은 마치 나를 놀리는 듯 이어서 말했다.“참, 강유형도 엄청 점잖은 사람이었지.”그 말을 듣자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안리영도 눈치챘는지 바로 해명을 시작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단지 말이야, 사랑하면 도파민이 나와서 사람의 호르몬과 본능을 자극한다고.”“쉽게 말해서, 정말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너한테 끌리고,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만약 그렇지 않거나, 너무 자제하는 것 같다면 그건 사랑이 깊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어.”안리영은 자신의 논리를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하며 이야기했다.그녀의 말을 들으니 과거 강유형과의 관계가 떠올랐다.그와 10년을 함께했지만, 우리가 가장 친밀했던 순간은 손을 잡거나 가끔 포옹하는 정도였다.그때는 그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런 줄 알았고 내 자신이 매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리영의 말을 듣고 보니, 강유형이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Read more

제239화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며 메시지가 왔다.안리영의 메시지를 열어보니 욕실에서 갓 나온 여자가 섹시한 잠옷을 입고 유혹적인 포즈를 취한 GIF였다.그리고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런 거 한 번 해봐. 효과 좋을걸?]나는 바로 분노 이모티콘을 보냈다.‘안리영 참... 너무 나가는 거 아냐?’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방법이 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문제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만들어낼지였다.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이유를 궁리했다.‘용준호 얘기를 꺼내볼까? 하지만 그 얘기를 하면 진정우가 분명 막으려고 들겠지.’‘수도관이 고장 났다고 하면? 근데 지금 수도관은 멀쩡한데 억지로 망가뜨릴 수도 없잖아.’‘그럼 배가 고프다고 해서 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이 방법이 가장 자연스럽겠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서둘러 샤워를 끝냈다.그리고 평소엔 거의 꺼내지 않던 섹시한 잠옷을 골랐다.이 잠옷은 사실 예전에 강유형과 약혼했을 때 샀다.약혼 후 함께 살게 되면 입으려고 준비했던 거였는데 정작 강유형은 이 옷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지금은 진정우에게 이걸 입고 보여줄 줄이야.검은색 실크 소재의 잠옷은 내 몸매를 매끈하게 살려줬다.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이 강렬한 인상을 줬다.거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내가 봐도 꽤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진정우밖에 없었다.‘이 남자, 타이밍도 정말 기가 막히네.’굳이 핑계를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혹시 그도... 그런 생각을 하니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몇 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누구세요?”“나야. 연잎 죽 끓였어. 좀 먹어.”문 너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마지막으로 잠옷 어깨끈을 살짝
Read more

제240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진정우를 떠보려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그가 반응하자 도리어 겁이 나고 말았다.나는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마저 떨렸다.“정우야...”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나는 숨이 막혀왔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자 그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나는 신발장 옆으로 몰렸고 여전히 우리는 함께 연잎 죽을 들고 있었다.놀라운 건, 그 와중에도 죽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내 심장은 이미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었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봤다.그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도대체 왜 그를 자극하려 했던 걸까?안리영의 부추김 때문이라지만 그녀도 남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한순간의 충동이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해지려 애썼다.지금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분명 내 자극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는 지금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드러난 핏줄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죽은 가져다줬으니 이제 돌아가.”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대답도 없었다.“정우야...”내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그가 낮고 쉰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깃털이 내 가슴을 스치는 것처럼 아찔했다.순간 온몸이 긴장했고 낯선 감각이 차올랐다.“응?”내 목소리마저 떨렸다. 어디선가 달콤한 기운이 섞인 듯했다.놀란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그는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눌러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그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뭐?”“움직이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나는 눈
Read more
PREV
1
...
2223242526
...
5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