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비열하군.”강유형이 낮게 으르렁대며 진정우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이 급히 다가가려는 순간, 진정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강 대표가 말하는 비열함이란 당신이 지원이에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한 적이 없어서겠죠.”강유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진정우, 네가 이런 유치한 쇼로 지원이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지원이는 이런 환상 따위 좋아하지 않아. 알겠어?”내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맞다, 한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우리가 막 연인이 되었던 첫 밸런타인데이에 그는 나에게 어떤 선물도, 심지어 저녁 한 끼도 준비하지 않았다.다음 날 신지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신지태가 우리 첫 밸런타인데이를 어떻게 보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그 후, 강유형이 내게 사과하며 그저 깜빡 잊었다고 말했고 나는 억지로 “난 이런 거 안 좋아해”라며 넘어갔다.하지만 세상에 꽃과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그는 그저 주지 않았을 뿐이다.“지금도 지원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진정우의 낮고 단호한 물음에 강유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그는 분명히 봤을 것이다.그리고 그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 것이다.진정우가 AI로 부모님을 재현해 낸 감동, 그로 인해 솟구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그를 향한 감동의 눈물이었다.진정우의 사랑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빛났다.정성스러운 한 끼의 식사,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것, 나만을 위해 준비한 조명 쇼까지...강유형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시선을 돌리고 진정우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지원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우린 10년을 함께했고 지원이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어.”진정우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강유형은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믿기 어렵겠지? 지원이 왼손 중지에 있는 작은 흉터를 봤어? 그게 증거야
진정우의 반응에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왜 그래? 혹시 싫어진 거야? 아니면...”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깊고 강렬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내 입술을 살포시 누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좋아.”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고 얼굴이 뜨거워졌다.그 역시 마찬가지였다.피부가 까만 편이라 그의 얼굴에서는 티가 덜 났지만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안고 서 있었다.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떨어질 수 없었다.그저 이렇게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부끄러운 순간.조금 더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망설여지는 마음.‘이러다 밤새도록 이렇게 서 있는 거 아닐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해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저기...”“그럼...”우리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고 그 순간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마침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내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나를 살짝 놓아주었고 나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화면에는 안리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이런 타이밍에 전화를 다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저기, 나 전화 좀 받을게.”나는 그에게 말하며 손짓으로 내 방을 가리켰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잘 자.”“응, 잘 자.”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이미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음 연애를 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안리영의 전화를 받았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 설마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안리영은 늘 내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곤 했다.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웃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 있어. 듣고 싶어?”“좋은 소식? 내가 맞춰볼까?”안리영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설마, 너랑 진정우, 드디어 사귀기로 한
용준호가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나는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용진표를 만나러 가는 건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메시지를 보내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지금 답장을 보내면 그가 다른 조건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고, 거절하면 용진표에게 내 뒷말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가장 현명한 선택은 역시 무시하는 것이었다. 어젯밤처럼 말이다.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안리영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용준호의 메시지에 잠시 신경이 쏠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놓쳤다.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둘이 관계 정했으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아직 아니야?”“다음 단계? 무슨 다음 단계?”나는 여전히 용준호 때문에 머릿속이 어수선했다.“남녀가 사귀면 당연히 그거지. 뭘 또 물어.”안리영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그거라니? 아니야. 정우는 진짜 점잖은 사람이야.”“점잖은 사람이면 그런 욕구도 없는 거야? 사람이면 당연히 있지.”안리영은 마치 나를 놀리는 듯 이어서 말했다.“참, 강유형도 엄청 점잖은 사람이었지.”그 말을 듣자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안리영도 눈치챘는지 바로 해명을 시작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단지 말이야, 사랑하면 도파민이 나와서 사람의 호르몬과 본능을 자극한다고.”“쉽게 말해서, 정말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너한테 끌리고,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만약 그렇지 않거나, 너무 자제하는 것 같다면 그건 사랑이 깊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어.”안리영은 자신의 논리를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하며 이야기했다.그녀의 말을 들으니 과거 강유형과의 관계가 떠올랐다.그와 10년을 함께했지만, 우리가 가장 친밀했던 순간은 손을 잡거나 가끔 포옹하는 정도였다.그때는 그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런 줄 알았고 내 자신이 매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리영의 말을 듣고 보니, 강유형이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며 메시지가 왔다.안리영의 메시지를 열어보니 욕실에서 갓 나온 여자가 섹시한 잠옷을 입고 유혹적인 포즈를 취한 GIF였다.그리고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런 거 한 번 해봐. 효과 좋을걸?]나는 바로 분노 이모티콘을 보냈다.‘안리영 참... 너무 나가는 거 아냐?’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방법이 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문제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만들어낼지였다.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이유를 궁리했다.‘용준호 얘기를 꺼내볼까? 하지만 그 얘기를 하면 진정우가 분명 막으려고 들겠지.’‘수도관이 고장 났다고 하면? 근데 지금 수도관은 멀쩡한데 억지로 망가뜨릴 수도 없잖아.’‘그럼 배가 고프다고 해서 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이 방법이 가장 자연스럽겠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서둘러 샤워를 끝냈다.그리고 평소엔 거의 꺼내지 않던 섹시한 잠옷을 골랐다.이 잠옷은 사실 예전에 강유형과 약혼했을 때 샀다.약혼 후 함께 살게 되면 입으려고 준비했던 거였는데 정작 강유형은 이 옷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지금은 진정우에게 이걸 입고 보여줄 줄이야.검은색 실크 소재의 잠옷은 내 몸매를 매끈하게 살려줬다.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이 강렬한 인상을 줬다.거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내가 봐도 꽤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진정우밖에 없었다.‘이 남자, 타이밍도 정말 기가 막히네.’굳이 핑계를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혹시 그도... 그런 생각을 하니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몇 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누구세요?”“나야. 연잎 죽 끓였어. 좀 먹어.”문 너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마지막으로 잠옷 어깨끈을 살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진정우를 떠보려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그가 반응하자 도리어 겁이 나고 말았다.나는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마저 떨렸다.“정우야...”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나는 숨이 막혀왔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자 그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나는 신발장 옆으로 몰렸고 여전히 우리는 함께 연잎 죽을 들고 있었다.놀라운 건, 그 와중에도 죽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내 심장은 이미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었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봤다.그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도대체 왜 그를 자극하려 했던 걸까?안리영의 부추김 때문이라지만 그녀도 남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한순간의 충동이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해지려 애썼다.지금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분명 내 자극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는 지금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드러난 핏줄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죽은 가져다줬으니 이제 돌아가.”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대답도 없었다.“정우야...”내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그가 낮고 쉰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깃털이 내 가슴을 스치는 것처럼 아찔했다.순간 온몸이 긴장했고 낯선 감각이 차올랐다.“응?”내 목소리마저 떨렸다. 어디선가 달콤한 기운이 섞인 듯했다.놀란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그는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눌러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그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뭐?”“움직이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나는 눈
과거에 강유형과의 실패가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정말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걸까?남자가 나를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유가 궁금했다.“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그리고 그의 등을 천천히 감싸안았다. 옷 너머로 손끝을 살짝 세워 그의 등을 눌렀다.그 순간, 진정우의 몸이 더욱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그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나는 그의 품에 더 바짝 다가갔다. 샤워 후 얇은 잠옷만 걸친 내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이 정도로 했는데도 진정우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정말 내가 매력이 없는 거겠지.“지원아.”그가 나를 다급히 부르더니, 나를 살짝 밀어냈다.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그의 목젖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떨리는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마치 방금 전까지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나는 그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동시에 대담해지기도 했다.“너무 늦었어.”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그 순간 내 마음은 싸늘해졌다.그리고 분노와 수치심, 실패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냥 간다고? 네가 못 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매력이 없어서?”그는 문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붉어진 눈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을 것이다.분명 분노와 부끄러움이 섞인 얼굴이었겠지.진정우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닫으며 다가왔다.그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며 나를 진하게 끌어안았다.나는 눈앞이 어두워졌고 이때 뜨거운 입술이 나를 덮쳤다.그 열기와 함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따뜻했고 강렬했다.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정이었다.“괜찮겠어?”그의 낮고 떨리는 목소리가
[잘 자. 내 여자 친구!]반쯤 잠든 상태에서 진정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이 30분 동안 그는 뭐 했을까?혹시 소설 속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라도 한 걸까?아까 그 긴급한 상황을 떠올리니, 차마 답장할 수 없었다.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마 나도 냉수 샤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몸 안에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계속 올라왔다.욕망의 문은 한 번 열리면 메꾸기 어렵다는 말을 몸소 느끼게 된 날이었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아침 일찍 깼다.하지만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진정우보다는 늦었다.그는 이미 밖에서 아침 러닝을 하고 있었다.정말이지, 이 남자의 체력과 에너지는 끝도 없는 것 같다.그런데... 이런 그가, 그런 일에서도 체력이 대단하지 않을까?내 머릿속이 마치 저주에 걸린 듯, 자꾸 그쪽으로만 향했다.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다 안리영 때문이다.어젯밤 그 황당한 제안이 떠올랐다.화가 난 나는 지금 몇 시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배 안 고파? 나랑 아침 먹자.”어젯밤 진정우가 끓여준 죽은 먹었지만 밤새 생각이 많아서인지 배가 고팠다.평소 같았으면 진정우에게 말하면 아침을 준비해 줬겠지만 오늘만큼은 피하고 싶었다.어쩐지 나 자신이 괜히 이기적인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런 어색한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민망했다.다른 연인들도 이 ‘다음 단계’를 거치고 나면 나처럼 혼란스럽고 민망해질까?아, 왜 이리 한심한 생각만 드는지 모르겠다.문자를 보내고 난 뒤, 아직 손가락에서 휴대폰을 놓지도 않았는데 안리영의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어머, 보아하니 어젯밤은 별거 없었나 보네.”그녀는 통화 연결과 동시에 날 놀리기 시작했다.“다 너 때문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아침부터 배고파서 허둥댈 일도 없었잖아.”나는 먼저 그녀를 탓했다.안리영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병원 휴게실의 의자에 반쯤 누워있었다.
“전에 해본 적 있잖아. 전과자라니까.”진정우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이 사람, 자기가 아는 거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굳이 말로 꺼내야 해?진짜 눈치 없네.“지원아.”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그렇게 대담하게 나쁜 짓을 해놓고 끝나고는 겁쟁이가 되는 건 여전하네. 어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나는 반박하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쁜 짓이라면... 설마...’어젯밤 내가 잠옷 입고 문 연 걸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 게 아니라 일부러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세상에 너무 창피해!나는 손에 쥔 차 열쇠를 꽉 쥐었다.그리고 속상함에 목소리를 높였다.“누가 나쁜 짓 했다는 거야? 잘못한 건 정우 씨잖아! 당신이야말로...”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을 막아버렸다.아침 운동을 막 마친 그의 입술은 약간 차가웠지만 몹시 부드러웠다.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눈을 감은 그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그의 높고 곧은 콧대와 선명한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나는 순간 멍해졌다.키스가 끝나고 그는 천천히 몸을 뗐다. 하지만 두 손은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앞으로 그런 나쁜 짓은 내가 할게.”그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고 이제는 목까지 빨개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리영 씨 만나러 가는 거 진짜 별일 아니지?”그가 다시 묻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강유형과 사귈 때는 사람들 앞에서 종종 놀림을 받아도 웃으며 넘겼다.그가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가끔 볼에 뽀뽀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왜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에도 숨이 막힐 것처럼 부끄럽고 어색한 걸까?진짜... 왜 이러는 거야.“원래는 너 주려고 토마토스
강진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와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러자 삼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강진혁,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강진혁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기억하는 한, 유형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유형이를 감싸고 사랑했지만 저는 점점 배제됐죠. 그가 아기일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유형이와 함께 잤어요. 그때 나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홀로 두려움에 떨었죠. 늘 그렇게 말하셨잖아요.‘유형이는 아직 어리니까.’하지만 저는요? 저도 그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다고요. 유형이는 부모님의 사랑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장난감, 제 옷, 제 모든 것이 하나씩 그에게 넘어갔죠. 심지어 제 물건을 빼앗길 때마다, 아버지는 ‘넌 형이니까 양보해야지’라며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두 분은 늘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저를 세뇌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늘 유형이가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가져가 버리면 저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강진혁의 눈동자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억울함과 분노를 보았다.그가 품고 있던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지원이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나는 지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지원이는 유형이의 미래 아내’라고 못 박아버렸죠. 나는 또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면서도 티 내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 감정을 숨겨야 했어요.”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사랑이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된 감정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은 유형이에게 회사를 맡겼죠. 그러면서 저에게는 온갖 이유를 대며 칭찬
“아줌마,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배신해요. 강유형은 이미 저한테 신뢰를 잃었어요. 설령 제가 진혁 오빠를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유형이를 다시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의 부모님이 아직도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다시 잇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를 확실히 끊어놓을 필요가 있었다.“진혁이도 안 돼.”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말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줌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논의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삼촌, 요즘 세상에 연애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리고 아줌마랑 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진혁 오빠한테도 했어요?”나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러자 삼촌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지원아, 우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속 깊이 우리를 원망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못한 건 우리니까, 화가 나면 나한테 직접 풀어. 하지만 우리 아들들까지 싸우게 만들지는 마.”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삼촌, 너무 과대 해석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누구의 사이도 이간질할 생각 없어요. 그저 제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자신도 서글퍼질 만큼 씁쓸하게 웃었다.“저는 그저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요. 제게도 그런 가족이 있으면 좋겠어요.”“지원아, 만약 네가 정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아줌마가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게.”아줌마는 다급한 듯이 말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그럼 진혁 오빠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빠는 절 원하고 있어요. 제 마음속에 아직 진정우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요.”그 말이 끝나자 거실이 순간 얼어붙었다.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후, 아줌마는 마치 울고 싶은 듯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강진혁과 함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자, 강유형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아줌마는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했다. 오랜만에 나를 보자 그녀는 감격한 듯 눈물을 훔쳤다.“이제야 다시 보게 되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삼촌은 소파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나빠 보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기 때문일까?우리 사이의 벽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삼촌, 오랜만이에요.”나는 이미 이들과의 감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원한을 묻기로 했으니, 그들에게‘빚을 갚으라’는 듯한 태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삼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강유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잠깐 나와봐.”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는 강유형의 성격을 알기에,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진혁과 크게 한바탕 할 기세였다.아줌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입을 열려다 이내 망설였다.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지원아, 너랑 진혁이 요즘 많이 가까워졌니?”나는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오빠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아줌마와 삼촌은 동시에 굳어버렸다. 아줌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물었다.“그럼... 너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야?”그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예전에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졌을 때조차‘같은 집안사람인데 인연을 이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하더니, 지금은 확실히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아마도 이제는 단순한 집안 문제를 넘어, 그동안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겠지.“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빠가
나는 힘없이 웃었다. 허진호가 굳이 전화를 걸어 단순한 안부를 물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분명 내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작은 방울을 입술에 살짝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정우야, 네 친구가 널 대신해서 내 안부를 챙겨주고 있어.”해가 질 무렵, 나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진혁을 발견했다.붉게 물든 석양 아래 그의 실루엣이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선명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젊은 여자 직원들이 연신 뒤돌아보며 속삭였고 어떤 용기 있는 이는 대놓고 감탄하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어요!”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선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진혁 오빠, 인기 여전하네요?”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까지 장난치지 마.”나는 가벼운 농담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소희 소식은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아직이야. 하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었다.“뭐가 문제예요?”“그 사람, 빚이 많더라. 사채와 온라인 대출까지 뒤얽혀 있었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었어.”그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었을지도 몰랐다.“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체포됐어.”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면회 가능한가요?”“가능하지. 내가 알아볼게.”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 오르자 내 자리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화려한 장미가 아닌, 연보랏빛 라벤더와 안개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이건...?”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별을 따다 줄 순 없어서 대신 이걸 준비했어.”그의 말은 부드럽고 낭만적이었
“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용설아뿐만 아니라 허진호 역시 진정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가 겪었던 위험과 고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과거를 깊이 파고들 용기가 없었다.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마음이 아플 테고 그리움만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저는 믿을 수 없어요.”허진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나 역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진정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것뿐이라고.“그럼 정우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시다.”나는 손목에 걸린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에 마치 진정우가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야.’그가 남긴 이 작은 방울이, 나를 붙잡아 줄 마지막 선물 같았다. 그때, 허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원 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요.”“뭐죠?”“직접 보면 알 거예요.”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던 그가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에게도 진정우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허진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친구였다.그가 느낄 상실감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다.그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회사를 나와 이소희의 집으로 향했다.전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회사에 알아보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결국,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누구세요?”소희의 어머님인 박수미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