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해본 적 있잖아. 전과자라니까.”진정우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이 사람, 자기가 아는 거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굳이 말로 꺼내야 해?진짜 눈치 없네.“지원아.”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그렇게 대담하게 나쁜 짓을 해놓고 끝나고는 겁쟁이가 되는 건 여전하네. 어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나는 반박하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쁜 짓이라면... 설마...’어젯밤 내가 잠옷 입고 문 연 걸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 게 아니라 일부러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세상에 너무 창피해!나는 손에 쥔 차 열쇠를 꽉 쥐었다.그리고 속상함에 목소리를 높였다.“누가 나쁜 짓 했다는 거야? 잘못한 건 정우 씨잖아! 당신이야말로...”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을 막아버렸다.아침 운동을 막 마친 그의 입술은 약간 차가웠지만 몹시 부드러웠다.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눈을 감은 그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그의 높고 곧은 콧대와 선명한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나는 순간 멍해졌다.키스가 끝나고 그는 천천히 몸을 뗐다. 하지만 두 손은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앞으로 그런 나쁜 짓은 내가 할게.”그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고 이제는 목까지 빨개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리영 씨 만나러 가는 거 진짜 별일 아니지?”그가 다시 묻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강유형과 사귈 때는 사람들 앞에서 종종 놀림을 받아도 웃으며 넘겼다.그가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가끔 볼에 뽀뽀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왜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에도 숨이 막힐 것처럼 부끄럽고 어색한 걸까?진짜... 왜 이러는 거야.“원래는 너 주려고 토마토스
“왜 그래?”“정우 씨!”나와 진정우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오늘 떠난다고 했지? 어디 가는 거야?”나는 그에게 뛰어가면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그는 내가 갑자기 차에서 뛰어나온 것에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내 말을 듣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왜. 내가 도망갈까 봐?”그의 농담에 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다.“진짜 어디 가냐니까?”“일단 안 가기로 했어.”진정우의 답변은 내 질문과는 거리가 멀었다.“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원래는 떠나려고 했어. 여기 일도 끝났고 미련 같은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지.”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약간 숙였다.“왜냐하면 이제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그의 말이 내 심장을 쿵 하고 울리게 했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기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하지만 내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다음 순간 나는 그의 품 안으로 강하게 끌려갔다.그는 턱을 내 머리 위에 얹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그냥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떠나야 한다면 꼭 너한테 말하고 네가 허락해야 떠날 거야.”내 심장은 이미 두근거림을 넘어 폭발 직전처럼 뛰고 있었고 온몸이 화끈거렸다.이른 아침부터 이런 강렬한 느낌은 정말이지 너무 버거운 존재였다.뭔가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어머나, 이게 뭐야!”놀란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그의 품에서 급히 빠져나왔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볼 사람은 다 봤고 뒤이어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이렇게 아침부터 껴안고 있는가 했더니 우리 지원이랑 정우였네?”“아줌마...”나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이웃들 눈에는 이미 나와 진정우가 공식 커플로 보이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친밀한 장면까지 목격되다니 정말 부끄러웠다.“이른 아침부터 나오셨네요.”진정
예전에 조태혁이 나를 오해했던 게 떠오르자 나는 이번 기회에 복수나 해보자고 생각하며 말했다.“손 좀 놓지? 안 그러면 널 성희롱으로 신고한다.”“참!”조태혁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신고해 봐.”그의 겁먹지 않는 태도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이런 뻔뻔한 사람과 더 엮이기 싫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누나, 오랜만이야. 더... 예뻐진 거 같네.”“꺼져!”내가 손을 빼려고 다시 힘을 줬지만 그는 손을 더 꼭 잡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누나의 화끈한 성격도 여전하네.”조태혁은 정말로 뻔뻔한 자식이었다.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태혁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어디 여자나 꼬실 시간이 있어? 빨리 와!”아까 그렇게 급하게 뛰어온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는 전혀 급한 기색도 없이 내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누나, 요즘 솔로라며? 내가 한번 대시해봐도 돼?”그 말이 내 속을 뒤집었다.내가 싱글?그게 누구 때문인데?바로 네 누나 때문이라고!네 누나가 내 약혼자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동생이 나한테 대시하겠다고?정말 참 대단한 집안이네.그들에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서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근데 네 누나한테 먼저 물어봐. 허락하면 한번 생각해 볼게.”“정말?”그의 눈이 반짝거렸고 그 순간 나는 움찔했다.설마 이 녀석이 진심인 건가?지금 나는 이미 진정우와 사귀고 있으니 절대 다른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니 화가 치밀었고 나는 바로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세게 밟았다.“으악!”그러자 조태혁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손을 놓고 발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돌았다.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그를 매섭게 노려본 뒤 자리를 떠났다.“누나! 난 진짜 누나를 원해! 이런 누나 같은 여자가 너무 좋아!”그는 아픈 발을 부여잡고도 병원 로비에서 그렇게 소리쳤고
그 순간 나의 눈꺼풀이 두 번 크게 떨렸다.‘왼쪽 눈이 떨리면 돈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들었는데...’나는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난 아무 대책도 없이 나설 순 없었다.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신지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태 오빠, 나 지금 용준호 만나러 가. 혹시 모르니까 좀 챙겨줘.”메시지를 보낸 후 바로 답장은 없는 걸 봐서는 아마 지금 훈련 중일 것이다.그래. 훈련 중일 거야. 게으름 피우며 자고 있을 리는 없지. 신지태는 곧 있을 대회를 위해 연습과 체력 훈련에 매진 중이었다.답장이 없더라도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면 분명 메시지를 확인할 테고 어차피 용준호를 만나러 가기까지 시간이 있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가속 페달을 밟아 세상 요양원으로 향했다.네가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용준호의 거대한 랜드로버는 이미 요양원 입구에 주차되어 있었다.멀리서 보니 그는 팔을 휘저으며 체조인지 태극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운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폼만 잡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우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아마 내가 늦었다는 걸 이렇게 은근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나는 차에서 내려 빠르게 걸어가며 예의를 차렸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그는 동작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아깝지 않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그는 갑자기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들어가려고?”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야 말았다.‘아차, 빈손으로 왔네.’하지만 솔직히 말할 순 없어서 난 핑계를 적당히 둘러댔다.“죄송해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꽃집이 문을 안 열었어요.”그는 피식 웃으며 짧게 웃었다.“하! 정말 그럴싸한 변명
용준호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그는 웃으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나는 그 말에 멍해졌지만 이내 비웃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아침부터 이런 농담은 좀 아니지 않나요? 게다가 대표님도 잘 알잖아요.”용준호는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농담 아니야. 내 여자 친구가 돼야 우리 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그의 말에 나는 굳어버렸다.이건 분명히 여자 친구라는 명목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거였다.이래서 아까 떨리던 눈꺼풀이 그냥 떨린 게 아니었구나.용준호는 자세히 설명했다.“아마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평생 의심이 많으신 분이야. 아무도 믿지 않지. 특히 지금은 위치가 다르니까 더 그래. 아버지에게 접근하려는 사람 중에 진심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시간 낭비를 막으려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안 만나.”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비웃었다.이건 핑계에 불과했다.“그리고 말이야.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나야 이름값처럼 이런저런 연애를 많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다 장난이었어.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도 절대 허락 안 하셨을 거야.”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정직하고 단아해 보이는 사람이야. 딱 집안 살림 잘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그런 사람 같아. 그래서 너를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 눈빛은 뜻밖에도 진심처럼 느껴졌다.어제는 재벌 2세가 나를 쫓아다니겠다더니 오늘은 바람둥이가 진지하게 고백이라니.나에게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몰리는 걸까?하지만 나는 이미 진정우과 사귀고 있었다.이 모든 일이 진정우의 존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대표님의 진심은 잘 알겠어요. 고맙기도 하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요.”나는 그의 직접 거절했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너무 뻔한 핑계 아니야? 지난번에 지태
“네 생각에는?”용준호가 또다시 내게 되물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볼게요.”그러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에게 돌려주려 했다.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받는 시늉을 하더니 꽃잎 하나를 떼어 코끝에 가져가며 향을 맡았다.“이야기해 봐. 대체 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는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아버지에게 보여줄 물건 때문에 찾아온 줄 알더니 이제는 내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이제 와서 더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았다.내 말을 들은 용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나는 그러는 용준호가 뭔가 이상했다.“왜요?”“네가 그 일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는 거라면 만나도 소용없어. 우리 아버지는 절대 너한테 알려 주지 않을 거야.”그의 말투는 마치 아버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하지만 정말 문제가 없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대답하지 않겠다는 건 결국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만나야 하고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만약 제가 끝까지 만나겠다고 한다면요? 대표님께서 말하지 못할 비밀이 없을지도 모르잖아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용준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고집 세네. 꼭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아픈 줄 알겠어? 그래. 그럼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허락하면 널 안으로 데려가 줄게.”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고 스피커폰을 켰다.“무슨 일이냐.”전화 너머로 들려온 용 회장의 목소리는 굵고 단호했다.“별건 아니고 사람 하나 데려가려고요. 여자예요.”용준호는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말을 아꼈다.“쓸데없는 여자 좀 데리고 오지 말라고 몇 번 말했잖아!”용진표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그러자 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버지, 그런 여자는
마침 그런 생각이 스치던 순간 내 핸드폰이 울렸다.정말이지 어색함의 끝판왕이었다.용준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 씨,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날 그렇게 못 믿으면서 왜 굳이 이곳으로 온 거야?"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그러자 용준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덤덤히 말했다.“앞으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그렇게 말하고는 차에 올라타더니 한순간에 떠나버렸다.불어오는 바람이 내 옷자락을 흔들고 머리를 흐트러뜨렸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마음이 바뀌는 속도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십 분 전만 해도 나한테 고백하고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했던 사람이 단지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이렇게 태도를 바꾸다니.하지만 난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더 이상 그가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속이 편해졌다.용준호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요양원의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면서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삼촌이 오늘의 중요한 손님일까?그 생각에 나는 망설이다가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한테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 무슨 일이세요?”“같이 점심 먹으려고. 전에 자주 가던 일품 레스토랑으로 와줄래? 11시에 맞춰 오면 돼.”아줌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약속을 잡아버렸다.나는 일단 거절하지 않고 대화의 흐름에 따라 아줌마에게 물었다.“삼촌도 오세요?”“아니. 네 삼촌은 오늘 외출했어. 아마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거야.”아줌마의 말에 나는 의심이 들었다.삼촌은 회사 업무를 강유형에게 넘긴 뒤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분이었다.“먼 곳으로 가신 거예요?”“아니. 그냥 옛 친구 만나러 가셨어. 매번 만나면 꼭 차 마시고 바둑 두시곤 해.”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손으로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아마도 내 짐작이 맞은 것 같았다. 삼촌이 바로 오늘 용진표가 말했던
나는 결국 가기로 했다.어쩌면 아줌마에게서 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나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줌마와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그래서 나는 회사로 향했다.“좋은 아침입니다. 윤 부장님!”허진호가 활짝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마치 내가 보기만 해도 그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허 부대표님.”“윤 부장님,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연애라도 시작하신 건가요?”그의 농담 섞인 질문에 문득 어제 진정우와 있었던 달콤한 순간들이 떠올라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허 부대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내 연애사를 굳이 밝힐 이유는 없었다.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러나자 나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오늘은 월요일이라 부서 주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회의 중 각자 지난주의 성과를 보고하던 중 직원 중 한 명인 이한석이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윤 부장님, 이번에 새로 협의한 조명 업체와의 계약서입니다. 신생 회사인데 현재 우리 기술 지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계약 세부 사항 한 번 검토해 주세요.”내가 계약서를 펼쳐 보니 회사가 설립된 지 채 한 달도 안 됐다.“설립한 지 한 달도 안 됐네요?”“네. 아주 신생 회사입니다.”이한석은 눈치 보며 답했다.신생 회사와의 협업은 3년 이상 운영된 회사와 비교했을 때 리스크가 훨씬 컸다.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기 때문이다.내가 반대할까 봐 이한석은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협의하면서 서비스 비용을 미리 조정했어요. 계약금 50%를 선불로 지급하고 협업이 절반 진행될 때 25%를 추가 지급하고 나머지는 프로젝트 완료 후에 정산받기로 했습니다.”그의 말을 듣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진짜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가 보네요.”“맞아요. 진심으로 의욕을 보이더라고요. 제가 거절하면 오히려 미안할
“누나!” 조태혁이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고 난 그 표정이 정말 얄미웠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이곳에서 조태혁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또 무슨 사고 쳤어?”조태혁이 사고를 안 치면 평소에 여길 올 일도 없을 것이다.조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맞아. 무면허 운전.”그 말에 나는 문득 그가 생일 초대했던 일이 떠올랐다.아직 미성년자인데 말이다.“축하해.”나는 어이가 없어 험한 말이 나갔다.“고마워!”그는 여전히 뻔뻔하게 받아쳤다.나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자료를 찾고 있던 경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고 자료가 너무 오래된 건지 경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못 찾은 듯했다.“누나, 여기엔 왜 온 거야?”조태혁이 옆으로 다가오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볼일 좀 보러.”나는 대충 둘러댔다.“무슨 일이야? 잘 안 풀리면 내가 사람 찾아서 도와줄게.”조태혁이 멋진 남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나는 비웃으며 말했다.“네 일을 해결할 사람을 먼저 찾아보는 게 어때?”무면허 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만약 그랬다면 여기서 꽤 고생했을 거다.“난 이미 해결됐어.”조태혁은 아주 뻔뻔하게 말했다.그 말을 듣자 아까 강유형이 여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역시 그가 도와줬을 것이다.다음 순간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조태혁이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우리 매형이 여기 국장이랑 아주 친하거든.”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하지만 그가 말한 매형이라는 표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이 녀석이 일부러 나를 짜증 나게 하려고 작정했네.’“필요 없어!”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괜찮아. 가족끼린데 뭘. 내가 가서 바로 얘기할게.”조태혁은 고집을 부리며 나설 기세였다.역시 조나연의 친동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가족 같은 사랑을 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랑이 혹시나 한낱 웃음거리가 될까봐 두려웠다.하지만 용진표의 말은 믿어도 되는 걸까?내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어떻게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지원아, 너 아직 모르고 있을 텐데 강 대표한테 작은 비밀 금고가 하나 있어.”용진표가 말을 꺼내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허허.”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강 대표랑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니야.”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용진표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구나.’인터넷에서는 그가 부인과 애인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다.하지만 그런 소문에도 그는 자식이 딱 하나 용준호만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삼촌과 아줌마는 사이가 정말 좋으세요.”용진표는 다시 한번 웃었지만 난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더니 그는 말을 이었다.“강 대표의 비밀 금고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야. 당시 그 계약의 모든 수익과 그 이후의 배당금이 들어있지.”그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지원아, 그 금고는 너희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그 돈은 너희 아버지 몫이라는 거지.”나는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나는 KS 그룹에 이렇게 오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삼촌은 나에게 이 일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강 대표는 그 돈이 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얻은 돈이라 자기는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 돈을 쓰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며 그 프로젝트의 모든 수익을 네 아버지 이름으로 돌려놓았지. 그리고 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그 돈을 네 부모님이 너에게 남겨준 결혼 자금이라고 준다고 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이 찌르는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정말 잘해주셨고 나도 그들을 진심으로 내 부모처럼 여겼다.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계약서를 발견한 이후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항상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이제 그걸 풀어내고 싶다. 나도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용진표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넌 네 아버지를 똑 닮았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그는 아까 분명히 내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제야 알았다. 그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나는 숨을 깊게 쉬며 손끝으로 내 손바닥을 쥐었다.그때 용진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강 대표가 자주 언급했어. 아니면 내가 어떻게 10년도 더 된 사람을 기억하겠어?”내 목이 조여오며 말했다.“삼촌이 제 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죠?”그러자 용진표가 일어섰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왔지만 용진표는 손짓으로 그를 멈추게 하고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가 풀밭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생각해? 네가 강 대표라면 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아?”역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사람을 다루는 게 정말 능숙했다.나는 삼촌이 무슨 말을 했을지 전혀 모르겠고 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그래서 나는 일어나 그를 따라가서 그의 옆에 섰다.“삼촌은 제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예요.”용진표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나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넓은 풀밭, 초록색으로 가득한 풍경이 시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이 풍경은 갑자기 아버지와 함께 갔던 큰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는 그렇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매년 여행을 떠났다.그들은 큰 도시보다는 자연을 선호했고 그 덕분에 나는 초원이나 사막, 바다와 같은 광활한 자연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눈앞의 초록 풀밭은 불현듯 나를 몽골 대초원으로 데려갔고 아버지와 함께 몽골 텐트에서 자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삼촌이 용진표처럼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나는 언제나 생각이 많았기에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여기 앉아.”용진표가 내게 손짓을 하자 나는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옆의 아가씨들이 물을 따라줬고 서비스는 매우 세심했다.나는 이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지만 상황에 맞춰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결혼 안 했지?”용진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아니요.”“그럼 언제 강 대표네 집으로 시집갈 거야?”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이미 강유형과 헤어진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용준호가 나에게 그의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만나자고 했던 것도 어이가 없었다.지난번에 용준호의 말을 듣고 그랬다면 용진표는 어쩌면 화가 나서 터졌을 수도 있었다. “결혼 안 할 거예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진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어?”그의 말투가 자연스러웠고 내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미 내가 KS 그룹에서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그냥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나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사실 그가 이렇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작은 회사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 같았다.“어떤 남자 친구를 원해?”용진표가 내 사생활에 대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가 궁금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자 친구가 있어요.”“오.”용진표는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를 기억하시나요?”용진표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기억이 안 나네.”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파일 안에 있던 계약서를 꺼내 두 손으로 그에게
나는 원래 입구컷을 당할 줄 알았다.역시 강두식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는 용진표에게는 더욱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서 기운을 다스리며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눈에 들어왔다.‘저 사람이 바로 용진표야?’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지금 60세가 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그의 외모는 내가 가진 정보와 일치했지만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용진표라고 믿기 힘들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젊은 아가씨, 뭐 하러 날 찾으러 왔지?”용진표는 여전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며 나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가 바로 용진표였다.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그래. 알고 있었어.”용표는 여전히 태극권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조금 놀랐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용진표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혹시 용진표가 미리 말을 전해놨을까?’“옛날부터 강 대표님은 너를 많이 아꼈고 너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자주 나한테 자랑했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내가 찾는 이유도 아는 거겠지?’“그래.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뭐야?”그는 태극권을 계속 연습하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동작을 이어갔기에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10여 년 전에 윤동휘라는 분과 계약을 체결하셨던 것으로
“맞아. 그 자국이 정말 컸어. 딱 보니 진정우 씨 여자 친구는 폐활량도 대단하네.”“꼭 그런 건 아닐걸? 어쩌면 진정우 씨가 워낙 잘해서 여자 친구가 흥분한 거일 수도 있어.”나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이 두 여직원은 의외로 상식도 많고 생각보다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것 같았다.“정말 눈도 밝으시네요.”나는 억지로 웃어넘기려 했다.“우리가 눈이 밝은 게 아니에요. 진정우 씨가 일부러 보라고 한 거라니까요. 셔츠 목깃을 반쯤 풀고 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어요.”한 여직원이 말하며 옆 사람을 툭 치며 물었다.“그렇지?”“맞아요. 우리만 본 게 아니라 회사 모든 여직원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다 봤다니까요.”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이 얘기가 어쩌면 회사 전역을 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 씨는 평소에 정말 조용한 사람이잖아요. 회사 안에서는 거의 자리에만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고요.”“그러게. 설마 일부러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그럴 가능성 있어. 아니. 그냥 확실해. 아마도 우리더러 마음을 접으라고 일부러 그랬겠지.”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지금 시대 여자들의 감각과 눈치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진정우의 당돌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정우 씨는 진짜 철저하네. 자기 손으로 직접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들키면서 주변에서 치근덕대는 여자들을 다 잘라버리는 걸 보니 말이야.’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 이런 모습 보니까 더 좋아졌어.”“맞아. 너무 멋진 사람이야.”그들이 진정우를 향해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나는 살짝 웃으며 티 나지 않게 나왔다. 마음속으로는 무척 행복했다.내가 용준호가 보낸 위치 정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산업단지의 신영 투자 회사였다.밖에는 개업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하지만 막
“쉿...”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냈다.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민감하고 약간의 쾌감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묘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점점 더 장난기가 심해지는 내 모습에 자신도 놀라웠다.나는 그의 반응을 끝으로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진정우는 내가 방금 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사무실로 돌아와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음이 나는지는 몰랐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마치 장난꾸러기 아이가 몰래 나쁜 장난을 치고 신나서 웃는 것처럼 정말 속이 후련하고 유쾌했다.그렇게 웃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하니 용준호였다.그가 보낸 건 한 장소의 주소였다.링크를 눌러보니 외곽에 있는 한 산업단지에 위치한 신영 투자회사라는 주소였다.나는 그가 왜 이 주소를 보내온 건지 의아했다.‘잘못 보낸 건가? 아니면 나를 일부러 놀리려는 건가?’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찰나 그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와.”‘용준호의 아버지, 용진표가 요양원을 떠났다고? 용준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략일까?’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못 믿겠으면 오지 마.”“대표님은 저더러 아버지를 찾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난다 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나는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지금 그는 또 나에게 주소를 보내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하는 게 참으로 수상했다.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히 대답했다.“맞아. 나는 네가 헛수고할 까봐 말렸던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너잖아?”그러더니 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못 본 척하면 되지.”그의 말투는 여전히 건
허진호의 말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긴급 출장이라도 가야 하나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정도 외근 나가야 할 것 같아요.”나는 조금 전 아침 회의를 마쳤지만 외근 관련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허진호가 방금 급히 잡은 일정인 듯했다.“어디로 무슨 일로 가야 하죠?” 나는 상황을 더 알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요.”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대표님의 지시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서둘러 현재 진행 중인 업무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오전 10시 반쯤에야 잠시 여유가 생긴 나는 컵을 들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티 룸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 두 명의 수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새로 온 진정우 씨는 보면 볼수록 멋있지 않아? 오늘 입은 작업복 바지 보니까 다리가 2미터처럼 느껴지더라니까!”“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너 요즘 진정우 씨한테 너무 빠졌구나. 근데 넌 예전엔 허진호 대표님 팬이었던 거 같은데?”“맞아, 예전엔 허 대표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우 씨가 오고 나서는...”여직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젠 허 대표님이 길거리 물건처럼 보일 정도야.”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직원들의 말이 참 매섭네.’“앞으로 내 마음속 아이돌은 진정우 씨야. 다른 누구도 못 따라올 거야!”그녀의 선언 같은 말이 끝날 즈음에 나는 티 룸으로 들어섰다.그들은 내가 들어오자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차 드실래요? 아니면 커피 드실래요?”나는 컵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진정우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그녀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네. 진정우 씨는 너무 멋있어요. 게다가 전직 군인이라면서요?”“그래요. 확실히 멋있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정우의 눈빛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아마 그는 지금 살짝 불안한 상태일 것이다.역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법이다.진정우의 긴장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앞에 섰다.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멈췄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망설이는 모양이었다.평소 직설적인 성격의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풉.”내 웃음소리에 그는 더 혼란스러운 듯 나를 보며 말했다.“지원아...”나는 그의 손에서 그가 준비해 둔 우유를 받아 들고 살짝 발돋움해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고마워.”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내 가방 챙겨 와.”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내 뒤를 따라오며 가방을 들고 있었다.아까의 긴장감은 없었고 그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차 앞에 도착해서는 이번엔 내가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으로 갔다.그리고 차 열쇠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정우 씨가 운전해.”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그가 데운 우유를 홀짝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전혀 예상치 못한 여유와 편안함에 나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회사가 가까워졌을 때 진정우가 갑자기 차를 도로변의 버스 정류장에 세웠다. “왜 멈춰?”나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네가 회사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모르게 하자며? 난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게. 괜히 소문나면 안 좋으니까.”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이 문제를 떠올렸다.솔직히 나는 그가 이 문제를 잊었으면 했다.그가 먼저 나서서 신경 써 준다는 게 어딘가 불편했다.순간, 어제 회사에서 여직원들이 그를 칭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러자 나는 괜히 마음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