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준호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그는 웃으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나는 그 말에 멍해졌지만 이내 비웃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아침부터 이런 농담은 좀 아니지 않나요? 게다가 대표님도 잘 알잖아요.”용준호는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농담 아니야. 내 여자 친구가 돼야 우리 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그의 말에 나는 굳어버렸다.이건 분명히 여자 친구라는 명목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거였다.이래서 아까 떨리던 눈꺼풀이 그냥 떨린 게 아니었구나.용준호는 자세히 설명했다.“아마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평생 의심이 많으신 분이야. 아무도 믿지 않지. 특히 지금은 위치가 다르니까 더 그래. 아버지에게 접근하려는 사람 중에 진심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시간 낭비를 막으려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안 만나.”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비웃었다.이건 핑계에 불과했다.“그리고 말이야.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나야 이름값처럼 이런저런 연애를 많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다 장난이었어.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도 절대 허락 안 하셨을 거야.”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정직하고 단아해 보이는 사람이야. 딱 집안 살림 잘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그런 사람 같아. 그래서 너를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 눈빛은 뜻밖에도 진심처럼 느껴졌다.어제는 재벌 2세가 나를 쫓아다니겠다더니 오늘은 바람둥이가 진지하게 고백이라니.나에게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몰리는 걸까?하지만 나는 이미 진정우과 사귀고 있었다.이 모든 일이 진정우의 존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대표님의 진심은 잘 알겠어요. 고맙기도 하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요.”나는 그의 직접 거절했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너무 뻔한 핑계 아니야? 지난번에 지태
“네 생각에는?”용준호가 또다시 내게 되물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볼게요.”그러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에게 돌려주려 했다.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받는 시늉을 하더니 꽃잎 하나를 떼어 코끝에 가져가며 향을 맡았다.“이야기해 봐. 대체 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는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아버지에게 보여줄 물건 때문에 찾아온 줄 알더니 이제는 내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이제 와서 더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았다.내 말을 들은 용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나는 그러는 용준호가 뭔가 이상했다.“왜요?”“네가 그 일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는 거라면 만나도 소용없어. 우리 아버지는 절대 너한테 알려 주지 않을 거야.”그의 말투는 마치 아버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하지만 정말 문제가 없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대답하지 않겠다는 건 결국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만나야 하고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만약 제가 끝까지 만나겠다고 한다면요? 대표님께서 말하지 못할 비밀이 없을지도 모르잖아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용준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고집 세네. 꼭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아픈 줄 알겠어? 그래. 그럼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허락하면 널 안으로 데려가 줄게.”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고 스피커폰을 켰다.“무슨 일이냐.”전화 너머로 들려온 용 회장의 목소리는 굵고 단호했다.“별건 아니고 사람 하나 데려가려고요. 여자예요.”용준호는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말을 아꼈다.“쓸데없는 여자 좀 데리고 오지 말라고 몇 번 말했잖아!”용진표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그러자 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버지, 그런 여자는
마침 그런 생각이 스치던 순간 내 핸드폰이 울렸다.정말이지 어색함의 끝판왕이었다.용준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 씨,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날 그렇게 못 믿으면서 왜 굳이 이곳으로 온 거야?"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그러자 용준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덤덤히 말했다.“앞으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그렇게 말하고는 차에 올라타더니 한순간에 떠나버렸다.불어오는 바람이 내 옷자락을 흔들고 머리를 흐트러뜨렸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마음이 바뀌는 속도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십 분 전만 해도 나한테 고백하고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했던 사람이 단지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이렇게 태도를 바꾸다니.하지만 난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더 이상 그가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속이 편해졌다.용준호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요양원의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면서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삼촌이 오늘의 중요한 손님일까?그 생각에 나는 망설이다가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한테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 무슨 일이세요?”“같이 점심 먹으려고. 전에 자주 가던 일품 레스토랑으로 와줄래? 11시에 맞춰 오면 돼.”아줌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약속을 잡아버렸다.나는 일단 거절하지 않고 대화의 흐름에 따라 아줌마에게 물었다.“삼촌도 오세요?”“아니. 네 삼촌은 오늘 외출했어. 아마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거야.”아줌마의 말에 나는 의심이 들었다.삼촌은 회사 업무를 강유형에게 넘긴 뒤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분이었다.“먼 곳으로 가신 거예요?”“아니. 그냥 옛 친구 만나러 가셨어. 매번 만나면 꼭 차 마시고 바둑 두시곤 해.”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손으로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아마도 내 짐작이 맞은 것 같았다. 삼촌이 바로 오늘 용진표가 말했던
나는 결국 가기로 했다.어쩌면 아줌마에게서 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나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줌마와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그래서 나는 회사로 향했다.“좋은 아침입니다. 윤 부장님!”허진호가 활짝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마치 내가 보기만 해도 그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허 부대표님.”“윤 부장님,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연애라도 시작하신 건가요?”그의 농담 섞인 질문에 문득 어제 진정우와 있었던 달콤한 순간들이 떠올라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허 부대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내 연애사를 굳이 밝힐 이유는 없었다.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러나자 나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오늘은 월요일이라 부서 주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회의 중 각자 지난주의 성과를 보고하던 중 직원 중 한 명인 이한석이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윤 부장님, 이번에 새로 협의한 조명 업체와의 계약서입니다. 신생 회사인데 현재 우리 기술 지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계약 세부 사항 한 번 검토해 주세요.”내가 계약서를 펼쳐 보니 회사가 설립된 지 채 한 달도 안 됐다.“설립한 지 한 달도 안 됐네요?”“네. 아주 신생 회사입니다.”이한석은 눈치 보며 답했다.신생 회사와의 협업은 3년 이상 운영된 회사와 비교했을 때 리스크가 훨씬 컸다.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기 때문이다.내가 반대할까 봐 이한석은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협의하면서 서비스 비용을 미리 조정했어요. 계약금 50%를 선불로 지급하고 협업이 절반 진행될 때 25%를 추가 지급하고 나머지는 프로젝트 완료 후에 정산받기로 했습니다.”그의 말을 듣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진짜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가 보네요.”“맞아요. 진심으로 의욕을 보이더라고요. 제가 거절하면 오히려 미안할
허진호는 전화를 끊고 깊게 숨을 내쉰 후,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앉으세요, 윤 부장님.”그가 손짓하며 권했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그러자 허진호는 또 한숨을 쉬며 말했다.“요즘 고급 인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드네요.”아까 통화 내용을 얼핏 들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물었다.“우리 회사 기술 인력이 많이 부족한가요?”“네, 어제 기술팀 엔지니어 한 명이 퇴사를 얘기했어요. 원래도 기술 인력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정말 답이 없죠.”허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보기 드물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평소 늘 여유롭고 낙천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그였기에 이런 모습은 낯설었다.나는 요즘의 인력 시장 문제를 자연스럽게 언급했다.“요즘 국내 인력 시장이 많이 양극화되고 있잖아요. 고학력 인재는 넘치는데 실전 경험이 풍부한 고급 기술 인재는 부족하고 단순 노동자는 많지만 현장에 들어가 진짜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든 상황이에요.”허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확합니다! 윤 부장님은 업무 능력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 보는 눈도 있으시네요. 다재다능하시네요.”그의 과장된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향이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이 회사 자료를 검토해 봤는데 신생 회사임에도 경영진 구조나 향후 발전 가능성이 괜찮아 보입니다. 게다가 협력 의지도 확실히 느껴지고요.”허진호는 계약서를 받아 들여다보며 말했다.“좋아요. 제가 한 번 살펴본 뒤 결정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아줌마와의 약속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말했다.“허 대표님, 오늘 점심에 잠시 외출할 일이 있어서 오후에 조금 늦게 들어올 것 같습니다.”허진호는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윤 부장님, 그런 건 굳이 보고 안 하셔도 돼요. 알아서 하세요.”“감사합니다.”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허진호가 다시 나를 불렀다.“윤 부장님, 아까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인재 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던데 혹시 기술 분야의 인재를 아시거나 추천해 주실 만한 분이 있으면
“윤지원 씨, 물건 확인하고 사인 부탁드립니다.”퀵서비스 직원이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건넸다.순백의 장미!내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나의 꽃 취향을 아는 건 나와 친한 사람 몇 명뿐이다.처음 떠오른 건 역시 강유형이었다.매년 내 생일마다 그는 순백의 장미를, 평소에는 흰 장미를 보내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 꽃을 보낸 걸까?잠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퀵서비스 직원은 꽃을 다시 내게 건넸다.주문이 밀려 보이는 그가 헐떡이며 기다리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꽃을 받았다.“누가 보낸 거예요? 혹시 남자 친구?”언제나처럼 참견을 놓치지 않는 허진호가 뒤에서 물었다.부정하려는 순간, 꽃다발 속에 꽂혀 있던 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허진호가 번쩍 허리를 굽혀 카드를 주워 건네며 말했다.“여기요.”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누나, 굿모닝. 좋은 하루!”이 ‘누나’라는 단어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건 조태혁, 그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도대체 어떻게 이 녀석이 내가 장미를 좋아하는 걸 알았을까?잠깐 고민하다가 금세 답이 나왔다. 분명 조나연이 알려준 것이다.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정말 이 남매, 대단하다.조나연은 내 약혼자를 빼앗더니, 이번엔 동생을 시켜 나를 유혹하려고? 이러다 내가 정말 받아주면 조나연은 더 기분 나빠지겠지?“누가 보낸 건가요?”허진호가 끈질기게 물었다.나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웃으며 말했다.“저를 좋아하는 연하남이요.”“네?”허진호는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부장님, 남자 친구가 보낸 거예요? 정말 예쁘네요!”“부장님은 역시 특별해요. 흰색 장미를 좋아하시다니!”...동료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장난을 쳤다.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평범하거나 눈치 없는 사람이면 어떻게 여러분과 함께 일할 수 있었겠어요?”이 한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고 모두를 일하러 돌려보냈다.나는
‘연하남.’나는 연하남이 보낸 꽃이라고 콕 짚어 말했다.그리고 진정우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1초, 2초, 3초가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어라?이게 무슨 상황이지?혹시 화난 건가?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건가?답답한 마음에 다시 문자를 보내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그리고 썼던 글을 지웠다.‘다른 사람이 준 꽃에 화를 낸다면, 그건 강유형과 뭐가 다를까?’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회사에 다닐 때도 나를 좋아한다고 접근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그럴 때마다 강유형은 화를 냈고 심지어 나를 탓했다.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한다느니, 왜 사람들한테 오해 살 행동을 하냐느니.결국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남자들과 거리를 두곤 했다.그런 억울한 날들은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했다.그래서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휴대폰이 울렸다.메시지가 아닌 전화였다.나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왜?”“왜 문자 안 봐?”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다시 열어봤다.그가 보낸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솔직히 나 기분 안 좋아. 근데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뭐 다른 사람이 꽃 선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좋아하면 안 돼.][그리고 그런 말 하지 마. 나 불안하단 말이야.]문자를 읽고 나니, 그는 참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나는 문득 할 말을 잃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그가 다시 물었다.나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화난 건 아니야. 그냥...”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질투가 좀 나서.”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질투? 진정우가 질투한다니. 사진 찍어서 보여줘 봐.”그는 민망했던지 화제를 돌렸다.“점심 뭐 먹을 거야?”나와 함께 먹고 싶은 걸까? 아니면 도시락이라도 챙겨줄 생각인가?하지만 나는 이미 아줌마와 약속이 있었기에 그의 데이
아줌마는 오늘 식사 자리에 누가 참석할지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만약 미리 알았다면 나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겁이 나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과 마주치면 난 전혀 밥맛이 없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지원아, 드디어 왔구나.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아줌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나는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에게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살짝 돌려서 말했다.“아줌마, 저는 오늘 아줌마랑 단둘이 식사하는 줄 알았어요.”“원래는 우리 둘만 있는 자리였는데 말이야...”아줌마가 강유형과 조나연 쪽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우연히 만났어.”우연이라고?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냥 돌아서면 아줌마를 난처하게 만들 테고 내가 아직 미련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게 뻔했다.그래서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우연이네요.”“우리가 방해한 것 같네요.”조나연이 말에 끼어들었다.방해라고 느낀다면 제발 자리를 피했으면 좋겠는데 뻔뻔하게 앉아 있는 그녀가 참 신기할 따름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생긴 것처럼 순수한 사람인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얼마나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나는 그녀에게 굳이 체면을 세워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만약 당신들이 이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면 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내 말에 조나연의 표정이 굳었고 강유형의 얼굴도 어두워졌다.강유형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이제 주문 좀 해도 될까?”그제야 아줌마가 나만 기다렸다는 말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런데 참 이상한 건 조나연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음식을 주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이 상황이 그녀에게 얼마나 굴욕적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럼 이제 음식 시켜. 초코 우유도 시켜줘.”아줌마가 내 손을 잡고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강유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음식을 주문했다.“지원아, 요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온몸이 이불에 휩싸인 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군인 출신인 진정우의 자제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했다.그는 단순히 나를 씻겨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냥 깨끗하게 씻겨준 것.이미 그의 능력을 확인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해 장난스럽게 말했다.“진정우, 너 혹시... 안 되는 거 아니야?”이 말은 남자에게 치명적인 모욕이다. 어지간한 남자는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없겠지만 진정우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얌전히 있어. 그리고 더 이상 애쓰지 마. 아무 소용 없으니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살짝 상처받았는데...”나는 일부러 힘없이 실망한 척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그러자 그가 이불을 살짝 당겨 내 얼굴을 드러내며 내 볼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내가 안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끌어당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단지, 내가 널 다치게 할까 봐 조금 더 기다리는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럼 내가 너랑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칠 것 같으면 너 평생 나한테 손도 안 댈 거야?”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응, 참아야겠지.”“...”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이불째 나를 품에 안았다.“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의 말에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는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조금만 쉬어. 나 샤워하고 올게.”분명 찬물 샤워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찬물 샤워하러 간다.”“...”정말 원칙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나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렀다.“진정우.”“응?”“너, 진짜 최고야.”그리고는 창피해서 혀를 쏙 내밀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러자 그가
진정우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내가 모든 원칙을 포기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자체로 깊은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꺼내지 않아도, 문장 하나하나가 사랑이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고 전을 먹으며 입안 가득 찬 상태로 웅얼거렸다.“진정우, 이리 와봐.”“왜?”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오라면 오라니까.”나는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멈췄고 내가 말했다.“네 어깨에 기대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진정우가 나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오늘 여기서 잘까, 아니면 네 방에서 잘까?”“여기서 잘래!”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득, 밤마다 푸쉬업을 하고 찬물 샤워를 하던 그가 떠올랐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근데 오늘 밤에는 푸쉬업 금지야.”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일부러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마.”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안 하면 안 꺼낼게.”진정우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장난치지 마.”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못 참겠어?”나는 한층 대담하게 물었다. 진정우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장난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를 더 자극하지 마.”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였다.“너도 원하고 있잖아.”나는 점점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원아...”그는 나의 손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이제 다 나았어.
이 상황, 얼마나 민망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진정우는 예외였다.“잠시만요.”진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천천히 물티슈를 꺼내 내 손을 닦아주었다.“천천히 먹어. 죽이 좀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문가에 서 있는 강진혁은 들어오기도, 물러서기도 난감해 보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나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내 말은 진정우에게 얼른 강진혁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정우는 자리를 뜨기 전에 모든 음식 포장을 풀고 식기를 내 앞에 정갈히 놓아주었다.문가에 서 있던 강진혁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애정 행위를 강제로 목격한 셈이었다.아마 나를 짝사랑하는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강 실장님, 무슨 일이 신가요?”진정우는 문가로 걸어가며 강진혁에게 물었다.강진혁은 병실 밖으로 나갔고 그가 진정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진정우는 약 3분 후에 돌아왔는데 그의 평온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래서 나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별일 아니야.”그의 대답은 꽤 건조했다. 아마도 그 자신도 느꼈는지 덧붙였다.“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더군.”“스카우트? 어디로? KS그룹?”강진혁은 아직 총괄 감독에 불과하다. 스카우트 같은 건 인사 부서나 그룹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닌가?혹시 이미 강유형의 자리를 대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아까 그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었을까?내게 심리적 준비를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걸까?“어디로 간다는 얘기는 없었고 그저 내 생각을 물어봤어.”진정우는 덤덤하게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죽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고려하지 않는다고 했어.”그의 대답은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너무 솔직하고 귀여워서.”칭찬을 듣자
“오빠, 강유형은 성인이에요. 본인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죠.”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강유형을 회사에서 내보내든, 관계를 끊든, 그건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나도 알아. 하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싸우는 걸 보니 속이 타더라. 그리고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에도 영향이 클 거야.”강진혁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있잖아요?”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지원아, 난 한 번도 회사를 관리할 생각을 해본 적 없어. 그러지 않을 거였으면 애초에 회사를 떠나지도 않았겠지.”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다만 내 생각을 덧붙였다.“회사의 일은 삼촌께서 알아서 계획하고 계실 거예요. 강유형이 떠난다고 해서 회사가 멈추는 건 아니죠.”나는 이성적으로 말하며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세상은 누구 없어도 돌아가게 돼 있어요.”강진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야.”“오빠, 아마 너무 걱정되니까 그런 거겠죠.”나는 그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덧붙였다.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네가 4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4년 전?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4년이라는 시간은 아이도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그걸 성장이라고 하죠.”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강진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맞아. 네가 정말 많이 컸다, 우리 꼬마 지원이.”그의 말에 가슴 한쪽이 찡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강가에 들어왔을 때, 강유형과 강진혁은 종종 나를 이렇게 부르며 장난스럽게, 때로는 애정을 담아 나를 놀리곤 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빠, 이런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세요. 너무 관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그의 ‘꼬마 지원이'라는 말에 잠시 감정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강진혁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