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런 생각이 스치던 순간 내 핸드폰이 울렸다.정말이지 어색함의 끝판왕이었다.용준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 씨,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날 그렇게 못 믿으면서 왜 굳이 이곳으로 온 거야?"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그러자 용준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덤덤히 말했다.“앞으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그렇게 말하고는 차에 올라타더니 한순간에 떠나버렸다.불어오는 바람이 내 옷자락을 흔들고 머리를 흐트러뜨렸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마음이 바뀌는 속도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십 분 전만 해도 나한테 고백하고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했던 사람이 단지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이렇게 태도를 바꾸다니.하지만 난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더 이상 그가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속이 편해졌다.용준호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요양원의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면서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삼촌이 오늘의 중요한 손님일까?그 생각에 나는 망설이다가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한테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 무슨 일이세요?”“같이 점심 먹으려고. 전에 자주 가던 일품 레스토랑으로 와줄래? 11시에 맞춰 오면 돼.”아줌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약속을 잡아버렸다.나는 일단 거절하지 않고 대화의 흐름에 따라 아줌마에게 물었다.“삼촌도 오세요?”“아니. 네 삼촌은 오늘 외출했어. 아마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거야.”아줌마의 말에 나는 의심이 들었다.삼촌은 회사 업무를 강유형에게 넘긴 뒤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분이었다.“먼 곳으로 가신 거예요?”“아니. 그냥 옛 친구 만나러 가셨어. 매번 만나면 꼭 차 마시고 바둑 두시곤 해.”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손으로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아마도 내 짐작이 맞은 것 같았다. 삼촌이 바로 오늘 용진표가 말했던
나는 결국 가기로 했다.어쩌면 아줌마에게서 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나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줌마와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그래서 나는 회사로 향했다.“좋은 아침입니다. 윤 부장님!”허진호가 활짝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마치 내가 보기만 해도 그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허 부대표님.”“윤 부장님,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연애라도 시작하신 건가요?”그의 농담 섞인 질문에 문득 어제 진정우와 있었던 달콤한 순간들이 떠올라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허 부대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내 연애사를 굳이 밝힐 이유는 없었다.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러나자 나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오늘은 월요일이라 부서 주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회의 중 각자 지난주의 성과를 보고하던 중 직원 중 한 명인 이한석이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윤 부장님, 이번에 새로 협의한 조명 업체와의 계약서입니다. 신생 회사인데 현재 우리 기술 지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계약 세부 사항 한 번 검토해 주세요.”내가 계약서를 펼쳐 보니 회사가 설립된 지 채 한 달도 안 됐다.“설립한 지 한 달도 안 됐네요?”“네. 아주 신생 회사입니다.”이한석은 눈치 보며 답했다.신생 회사와의 협업은 3년 이상 운영된 회사와 비교했을 때 리스크가 훨씬 컸다.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기 때문이다.내가 반대할까 봐 이한석은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협의하면서 서비스 비용을 미리 조정했어요. 계약금 50%를 선불로 지급하고 협업이 절반 진행될 때 25%를 추가 지급하고 나머지는 프로젝트 완료 후에 정산받기로 했습니다.”그의 말을 듣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진짜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가 보네요.”“맞아요. 진심으로 의욕을 보이더라고요. 제가 거절하면 오히려 미안할
허진호는 전화를 끊고 깊게 숨을 내쉰 후,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앉으세요, 윤 부장님.”그가 손짓하며 권했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그러자 허진호는 또 한숨을 쉬며 말했다.“요즘 고급 인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드네요.”아까 통화 내용을 얼핏 들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물었다.“우리 회사 기술 인력이 많이 부족한가요?”“네, 어제 기술팀 엔지니어 한 명이 퇴사를 얘기했어요. 원래도 기술 인력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정말 답이 없죠.”허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보기 드물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평소 늘 여유롭고 낙천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그였기에 이런 모습은 낯설었다.나는 요즘의 인력 시장 문제를 자연스럽게 언급했다.“요즘 국내 인력 시장이 많이 양극화되고 있잖아요. 고학력 인재는 넘치는데 실전 경험이 풍부한 고급 기술 인재는 부족하고 단순 노동자는 많지만 현장에 들어가 진짜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든 상황이에요.”허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확합니다! 윤 부장님은 업무 능력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 보는 눈도 있으시네요. 다재다능하시네요.”그의 과장된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향이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이 회사 자료를 검토해 봤는데 신생 회사임에도 경영진 구조나 향후 발전 가능성이 괜찮아 보입니다. 게다가 협력 의지도 확실히 느껴지고요.”허진호는 계약서를 받아 들여다보며 말했다.“좋아요. 제가 한 번 살펴본 뒤 결정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아줌마와의 약속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말했다.“허 대표님, 오늘 점심에 잠시 외출할 일이 있어서 오후에 조금 늦게 들어올 것 같습니다.”허진호는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윤 부장님, 그런 건 굳이 보고 안 하셔도 돼요. 알아서 하세요.”“감사합니다.”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허진호가 다시 나를 불렀다.“윤 부장님, 아까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인재 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던데 혹시 기술 분야의 인재를 아시거나 추천해 주실 만한 분이 있으면
“윤지원 씨, 물건 확인하고 사인 부탁드립니다.”퀵서비스 직원이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건넸다.순백의 장미!내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나의 꽃 취향을 아는 건 나와 친한 사람 몇 명뿐이다.처음 떠오른 건 역시 강유형이었다.매년 내 생일마다 그는 순백의 장미를, 평소에는 흰 장미를 보내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 꽃을 보낸 걸까?잠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퀵서비스 직원은 꽃을 다시 내게 건넸다.주문이 밀려 보이는 그가 헐떡이며 기다리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꽃을 받았다.“누가 보낸 거예요? 혹시 남자 친구?”언제나처럼 참견을 놓치지 않는 허진호가 뒤에서 물었다.부정하려는 순간, 꽃다발 속에 꽂혀 있던 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허진호가 번쩍 허리를 굽혀 카드를 주워 건네며 말했다.“여기요.”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누나, 굿모닝. 좋은 하루!”이 ‘누나’라는 단어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건 조태혁, 그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도대체 어떻게 이 녀석이 내가 장미를 좋아하는 걸 알았을까?잠깐 고민하다가 금세 답이 나왔다. 분명 조나연이 알려준 것이다.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정말 이 남매, 대단하다.조나연은 내 약혼자를 빼앗더니, 이번엔 동생을 시켜 나를 유혹하려고? 이러다 내가 정말 받아주면 조나연은 더 기분 나빠지겠지?“누가 보낸 건가요?”허진호가 끈질기게 물었다.나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웃으며 말했다.“저를 좋아하는 연하남이요.”“네?”허진호는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부장님, 남자 친구가 보낸 거예요? 정말 예쁘네요!”“부장님은 역시 특별해요. 흰색 장미를 좋아하시다니!”...동료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장난을 쳤다.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평범하거나 눈치 없는 사람이면 어떻게 여러분과 함께 일할 수 있었겠어요?”이 한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고 모두를 일하러 돌려보냈다.나는
‘연하남.’나는 연하남이 보낸 꽃이라고 콕 짚어 말했다.그리고 진정우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1초, 2초, 3초가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어라?이게 무슨 상황이지?혹시 화난 건가?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건가?답답한 마음에 다시 문자를 보내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그리고 썼던 글을 지웠다.‘다른 사람이 준 꽃에 화를 낸다면, 그건 강유형과 뭐가 다를까?’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회사에 다닐 때도 나를 좋아한다고 접근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그럴 때마다 강유형은 화를 냈고 심지어 나를 탓했다.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한다느니, 왜 사람들한테 오해 살 행동을 하냐느니.결국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남자들과 거리를 두곤 했다.그런 억울한 날들은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했다.그래서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휴대폰이 울렸다.메시지가 아닌 전화였다.나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왜?”“왜 문자 안 봐?”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다시 열어봤다.그가 보낸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솔직히 나 기분 안 좋아. 근데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뭐 다른 사람이 꽃 선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좋아하면 안 돼.][그리고 그런 말 하지 마. 나 불안하단 말이야.]문자를 읽고 나니, 그는 참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나는 문득 할 말을 잃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그가 다시 물었다.나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화난 건 아니야. 그냥...”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질투가 좀 나서.”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질투? 진정우가 질투한다니. 사진 찍어서 보여줘 봐.”그는 민망했던지 화제를 돌렸다.“점심 뭐 먹을 거야?”나와 함께 먹고 싶은 걸까? 아니면 도시락이라도 챙겨줄 생각인가?하지만 나는 이미 아줌마와 약속이 있었기에 그의 데이
아줌마는 오늘 식사 자리에 누가 참석할지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만약 미리 알았다면 나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겁이 나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과 마주치면 난 전혀 밥맛이 없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지원아, 드디어 왔구나.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아줌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나는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에게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살짝 돌려서 말했다.“아줌마, 저는 오늘 아줌마랑 단둘이 식사하는 줄 알았어요.”“원래는 우리 둘만 있는 자리였는데 말이야...”아줌마가 강유형과 조나연 쪽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우연히 만났어.”우연이라고?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냥 돌아서면 아줌마를 난처하게 만들 테고 내가 아직 미련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게 뻔했다.그래서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우연이네요.”“우리가 방해한 것 같네요.”조나연이 말에 끼어들었다.방해라고 느낀다면 제발 자리를 피했으면 좋겠는데 뻔뻔하게 앉아 있는 그녀가 참 신기할 따름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생긴 것처럼 순수한 사람인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얼마나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나는 그녀에게 굳이 체면을 세워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만약 당신들이 이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면 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내 말에 조나연의 표정이 굳었고 강유형의 얼굴도 어두워졌다.강유형은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이제 주문 좀 해도 될까?”그제야 아줌마가 나만 기다렸다는 말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런데 참 이상한 건 조나연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음식을 주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이 상황이 그녀에게 얼마나 굴욕적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럼 이제 음식 시켜. 초코 우유도 시켜줘.”아줌마가 내 손을 잡고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강유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음식을 주문했다.“지원아, 요
나는 굳이 손을 대지 않고 직원이 알아서 처리하길 기다렸다.그런데 직원이 움직이기도 전에 강유형이 초코 우유 두 잔을 집어 들었다.그는 한 잔을 내 앞에 놓고 다른 한 잔을 들고 아줌마를 향해 말했다.“엄마, 혈당이 높으시잖아요. 제가 땅콩 우유로 따로 준비해달라고 했어요.”아줌마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강유형은 이미 다른 잔을 조나연에게 건네고 있었다.조나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깨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그 모습은 정말 누가 봐도 연민을 자아낼 만했다.나조차도 한순간 흔들릴 뻔했으니 말이다.아줌마도 그런 모습을 보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후로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나온 음식들은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게다가 아줌마는 매번 내 접시에 음식을 올려주셨다.마치 내가 두 팔을 다 다쳐 스스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된 듯했다.그에 반해 강유형과 조나연은 그저 묵묵히 앉아 있는 인형처럼 멍하니 있었다.솔직히 나조차도 이 상황이 조금 불편했다.만약 내가 그들 입장이었다면 이 식사를 마친 뒤에는 속이 더부룩해져 병원에 갈지도 모르겠다.아줌마의 끊임없는 음식 권유에 결국 나는 더는 못 먹겠다고 하며 잠시 쉬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떠났다.그런데 화장실로 가는 길에 강유형이 따라 나왔다.“우리 엄마 너무 심하잖아.”그의 얼굴은 불만으로 굳어 있었다.나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아줌마께 직접 말씀드려.”그는 얼굴을 더 굳히며 말했다.“엄마가 네 편을 들어주는 거잖아. 너도 그건 알잖아?”“그럼 알지.”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넌 이미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왜 우리 엄마를 부추겨서 조나연을 괴롭히게 해? 내가 말했잖아. 조나연에 대한 모든 건 내 책임이고 엄마가 이렇게 하면 나만 더 죄책감을 느낄 뿐이라고.”강유형이 화가 난 듯 말하자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되받아쳤다.“강유형, 네가 내게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나?”그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
‘진정우가 허진호와 함께 있다니? 그럼 진정우가 대표님인가? 마침 성도 진 씨인데 말이야.’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전에 이미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의심은 했었지만 그때마다 둘 다 아무렇지 않게 부인했었다.그런데 이렇게 딱 걸리니 이제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해졌다.“정우 씨!”내가 그를 불렀다.걸음을 멈춘 진정우와 허진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나는 물고기 연못 옆에 반쯤 웅크리고 있었고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바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허진호가 진정우를 툭 치며 말했다.“누가 우리를 부르네요? 근데 이 목소리는...”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정우가 빠르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위험해요.”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그런데 그는 내 손을 잡는 대신 팔을 뻗어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연못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놨다.“식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나를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그는 이곳이 식당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내가 식사하러 왔을 거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그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몇 초 후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넌... 허진호 씨랑... 아는 사이야?”“응.”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알게 됐어.”그 순간 허진호도 다가왔다.“보니까 윤 부장님 남자 친구가 정우 씨였군요. 정우 씨가 면접 때 말했던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윤 부장님이었나요?”그제야 진정우와 허진호가 같이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진정우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굉장히 빨랐다.믿기지 않아 그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다만 목소리는 살짝 낮췄다.“내 여자 친구를 노리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서 옆에서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나는 말문이 막혔다.그의 낮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허진호는 그 말을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윤 부장님, 새 동료를 환영해야 하지 않겠어요?”진정우가 벌써 채용됐다는 건가?그가 실력이 뛰어난 건 알지만 이렇게 빨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