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가 허진호와 함께 있다니? 그럼 진정우가 대표님인가? 마침 성도 진 씨인데 말이야.’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전에 이미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의심은 했었지만 그때마다 둘 다 아무렇지 않게 부인했었다.그런데 이렇게 딱 걸리니 이제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해졌다.“정우 씨!”내가 그를 불렀다.걸음을 멈춘 진정우와 허진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나는 물고기 연못 옆에 반쯤 웅크리고 있었고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바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허진호가 진정우를 툭 치며 말했다.“누가 우리를 부르네요? 근데 이 목소리는...”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정우가 빠르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위험해요.”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그런데 그는 내 손을 잡는 대신 팔을 뻗어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연못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놨다.“식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나를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그는 이곳이 식당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내가 식사하러 왔을 거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그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몇 초 후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넌... 허진호 씨랑... 아는 사이야?”“응.”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알게 됐어.”그 순간 허진호도 다가왔다.“보니까 윤 부장님 남자 친구가 정우 씨였군요. 정우 씨가 면접 때 말했던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윤 부장님이었나요?”그제야 진정우와 허진호가 같이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진정우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굉장히 빨랐다.믿기지 않아 그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다만 목소리는 살짝 낮췄다.“내 여자 친구를 노리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서 옆에서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나는 말문이 막혔다.그의 낮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허진호는 그 말을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윤 부장님, 새 동료를 환영해야 하지 않겠어요?”진정우가 벌써 채용됐다는 건가?그가 실력이 뛰어난 건 알지만 이렇게 빨
강유형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나연아, 네 말이 뭔 뜻인지는 알아. 우리 엄마가 널 싫어하는 건 네가 뭘 해도 안 바뀔 거야.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들어지니까.”조나연은 한참 고민한 끝에 그런 결론을 내린 듯했다.하지만 강유형의 사과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였다.솔직히 오나연도 딱히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없었다.굳이 꼽자면 너무 사랑한 죄밖에 없었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런 굴욕까지 견디고 있으니 말이다.“내가 힘든 건 상관없어. 내 선택이니까. 근데 너까지 이렇게 힘들 필요는 없어.”강유형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짜증이 섞여 있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조나연은 여전히 연약한 모습을 보였고 강유형 앞에서는 그 모습이 더 심해졌다.그녀가 정말로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이며 동정을 얻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조태혁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강유형의 입에서 조태혁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깨달았다.“태혁이? 뭐가 어쨌다는 건데? 또 사고 쳐서 네가 뒷수습이라도 해야 해?”조나연은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그러자 강유형이 비웃으며 말했다.“너 진짜 몰라?”“몰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조나연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조태혁이 윤지원을 쫓아다니고 있어.”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 순간 진정우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난 뭐라도 말하려던 참에 조나연이 급히 말했다.“그럴 리 없어.”강유형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윤지원 사무실로 꽃까지 보냈대.”조나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아마 그냥 장난쳤겠지. 태혁이는 원래 그런 애잖아. 그리고 전에 윤지원이 태혁이한테 이상한 짓 했다면서...”“뭐?”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그 일은 이미 끝났고 경찰 조사 결과도 조태혁의 거짓말로 밝
“좀 지나갈게요. 두 분 비켜주시겠어요?”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강유형은 미동도 없이 나를 응시했고 조나연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그녀가 강유형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내가 그를 데려가 버릴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지원아, 어서 와서 먹자.”내가 룸에 들어서자 아줌마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나는 자리에 앉으며 일부러 물었다.“아줌마, 우리 둘만 남은 거예요?”“원래부터 우리 둘만 있는 자리였지. 근데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들이 문제야.”아줌마의 말엔 조나연과 강유형에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줌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줌마와 아들 사이가 더 멀어질지도 몰라요.”사실 나도 이들을 감싸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삼촌과 아줌마가 나를 얼마나 아껴줬는지 알기에 그들이 화목하길 바랄 뿐이었다.“그건 자기가 자초한 짓이지.”아줌마는 여전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였고 더 이상 끼어들지 않고 눈앞에 있는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근데 화장실 간다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정우 씨를 만났어요.”내가 솔직히 대답하자 아줌마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혹시 내가 널 데려갈까 봐 쫓아온 거 아니야?”“아니에요. 회사 대표님이랑 같이 식사하러 왔더라고요.”나는 간단히 설명했다.아줌마는 식탁을 돌리며 맛있는 음식을 내 앞으로 가져오며 말했다.“지원아, 진정우는 사람도 좋고 조건도 괜찮아서 나랑 네 삼촌도 마음이 놓여. 그런데 말이야...”말끝을 흐리는 아줌마의 의도를 금방 알아챘다.“아줌마는 진정우의 집안이 조금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그렇지. 아줌마랑 삼촌은 네가 힘들게 사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돈 없고 집안이 어려우면 정말 고생스러운 삶을 살게 돼.”아줌마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말에는 아줌마가 젊은 시절에 겪은 고생이 담겨 있었다. 강유형의 말에 의하면 삼촌과 아줌마는
난 자신이 딸로서 정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사실만 알았지만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자 아줌마는 살짝 굳은 표정을 짓고 내 손목을 꼭 잡으며 말했다.“지원아, 우리 이 얘기하지 않기로 했잖니? 다 지난 일이야.”“아줌마, 저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감당할 수 있어요. 그냥 말씀해 주세요.”내가 아줌마의 손을 반대로 꼭 잡자 아줌마의 손이 약간 떨렸다.“이미 지난 일이야. 왜 굳이 이걸 다시 꺼내는 거야?”몇 초간 침묵한 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 부모님이에요. 이 세상에서 제게 유일한 가족이잖아요.”나의 부모님은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 나도 고아가 되었다.아마도 내가 했던 말이 아줌마를 자극한 것 같았다.아줌마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나랑 네 삼촌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땐 네 엄마는 이미 숨이 멎어 있었고 네 아빠는 겨우 숨만 붙어 있었어. 네 아빠는 네 삼촌 손을 붙잡고 네 이름만 되뇌었지...”아줌마는 목소리가 떨렸고 하던 말을 멈췄고 내 마음도 그녀의 말에 아프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그건 정말 끔찍한 상처였다.아줌마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아줌마는 내가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했다.“우린 네 아빠가 줄곧 널 걱정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우리에게 널 부탁한 거겠지.”아줌마가 낮게 속삭였다.아줌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난 마음이 더욱 쓰렸다.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단순히 슬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나는 가슴속의 고통을 꾹 참으며 나는 다시 물었다.“그 사고가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나요? 다른 차와 부딪힌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아줌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차가 대형 탱크로리 트럭을 들이박았어.”아줌마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그런 사고 영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숨
아줌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그래. 당시 계약서에 곧 서명할 예정이었어.”바로 아버지의 노트북에서 발견한 그 계약서였다.“그럼 사고 때문에 서명하지 못한 건가요?”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숨이 턱 막히고 가슴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아줌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계약은 네 아빠와 네 삼촌이 함께 사업하면서 맺는 첫 번째 계약이었어.”‘뭐라고? 그 계약서는 원래 삼촌의 몫도 포함된 것이었단 말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네.’“네 아빠랑 네 삼촌이 광화 그룹의 용진표랑 계약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같이 낚시도 하고 레이싱도 하고 심지어는 용진표가 미친 듯이 제안한 스카이다이빙도 따라갔어.”아줌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용진표는 원래 조폭 출신이라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잘했어. 그런데 네 아빠랑 네 삼촌은 사업을 위해 용진표를 잡아야만 했기에 목숨 걸고 그와 어울렸지. 한 번은 용진표가 네 아빠와 네 삼촌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낚시를 했는데 갑작스럽게 태풍을 만났어. 배에는 구명조끼가 두 개밖에 없었고 네 아빠와 네 삼촌이 서로 자신이 입지 않겠다고 다투며 용진표와 상대방에게 줬어. 그 일이 있고 난 뒤, 용진표는 더 이상 네 아빠와 삼촌을 괴롭히지 않고 계약을 주기로 했어. 계약서를 받은 후 네 삼촌이 네 아빠더러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살피라고 했어. 네 아빠가 뜻밖으로 정말 계약서의 이상한 내용을 발견한 거야. 그래서 용진표는 내용을 수정해 다시 계약서를 우리한테 주었고 네 아빠와 네 삼촌이 서명하러 가는 길에 네 아빠가 사고를 당한 거야.”아줌마는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말해주며 당시 상황을 되짚어 주었다.‘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이었구나. 내가 두려워했던 그런 일은 아니었네.’그러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내가 두려워했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삼촌과 아줌마는 내가 내 부모님처럼 여길 정도로
이렇게 친근한 모습의 그는 나의 상사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느껴졌다.나는 웃으며 허진호를 바라보다가 진정우에게 물었다.“정우 씨, 허진호 씨랑 엄청 잘 통하는 것 같네. 나는 면접 끝나자마자 대표님이랑 밥 먹는 사람 처음 봐.”내가 이 말을 한 건 예전에 신지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허진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성이 진 씨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나는 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허 대표님이 나랑 밥을 같이 먹는 건 나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거죠. 결국...”진정우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연봉 6억이라는 금액이 작은 건 아니니까.”나는 깜짝 놀랐다.‘연봉이 그렇게 높다고?’나는 진정우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왜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그가 솔직하게 묻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그리고 이어 물었다. “그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얼마 받았어?”“월급으로 600만 원.”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진호가 제시한 금액은 예전보다 10배나 많았다.“허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먼저 제안했지만 나도 허 대표님이 받아줄 줄은 몰랐어." 진정우가 설명을 덧붙였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이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시네.”그러면서 나는 감탄했다.“정우 씨는 참 대단하네. 그 정도 금액을 제시할 용기도 있다니.”심지어 우리 회사 삼촌 밑의 부대표급들도 연봉 6억을 받는 사람은 드물었다.“내 능력을 알아줄 뿐이야. 게다가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할 수 있잖아.”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내 시동을 걸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좀 이따 어디로 가? 내가 태워다줄게.”“넌?” 그가 되물었다.“정우 씨를 태워다주고 회사로 돌아가야지.”“허 대표님이 반나절 휴가를 주셨어.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말이야.”진정우의 말에 나는
‘큰일 났어 그걸 깜빡하다니.’하지만 별로 난 찔릴 건 없으니 바로 부인했다.“그런 추잡한 짓을 한 적은 없어. 누명이야.”“응?”진정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해주 길 바라는 듯했다.나는 조태혁을 우연히 넘어뜨렸고 그가 나를 무고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 더 덧붙였다.“그런 꼬맹이는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애야. 난 전혀 관심 없어.”“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해? 아저씨 같은 스타일? 아니면 성숙하고 조용한 사람?”진정우는 아주 솔직했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살짝 다가가며 말했다.“정우 씨처럼... 거칠고 단단한 사람이 좋아.”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정우의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나는 또 한 번 그를 놀려버렸다.다음 순간 나는 몸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단단한 걸 어떻게 알았어?”“...”그 순간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나는 진정우가 순수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 한마디로 그는 남자의 본성을 드러냈다.“얼굴은 왜 빨개 진 거야?”하필이면 진정우가 또 물었다.‘정우 씨도 만만치 않네. 내 장난에 바로 반격하다니 말이야.’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했다.“술 마셨어?”“아니!”내가 부인하자마자 그가 말했다.“차를 옆에 세워봐.”“왜?”나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가 멈추자마자 진정우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 얼굴을 돌려 잡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첫 반응은 그가 나를 키스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대낮인데... 그것도 길거리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면 우리가 사귀기로 해서 이제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정우 씨는 속으로 이런 사람인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길 한복판에서 키스하려고 할 수 있지?’비록 나는 강유형처럼 무미
나는 진정우의 붉어진 얼굴과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렸고 나는 더 이상 괜한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차를 몰았다.단단한 물건에 관한 질문 하나 때문에 둘 다 몇 분간 침묵했다.그러다가 나는 문득 아까 그가 말한 둘만의 시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어디 가려고?”“오후에 시간 있어?”“있어!”말이 떨어지자마자 난 자신이 너무 빨리 대답한 걸 깨달았다. 마치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너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내가 내비게이션을 설정할게. 그대로 따라가면 돼.”진정우의 내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외진 교외 지역이었다. 사방이 잡초로 덮인 황량한 땅이었지만 멀리서 맑고 반짝이는 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정우 씨, 여기서 뭐 하려는 거야? 설마 나랑 농사지을 계획은 아니겠지?”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는 멀리 강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그럴 생각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정우 씨는 농사보다 전기랑 조명 다루는 데 집중해서 6억 연봉이나 열심히 벌어!”진정우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풀숲에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꺅!”나는 비명을 질렀다.진정우는 나와 두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내 비명을 듣자마자 재빨리 뛰어왔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높이뛰기 하나 제대로 못 했지만 이번엔 완벽하게 뛰어들었다. 마치 착 달라붙은 흡반처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완벽할 정도였다.진정우도 재빨리 나를 단단히 받쳐주며 허리를 감싸안았다.“무슨 일이야?”“뱀이야. 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금 본 게 진짜 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이런 깊은 풀밭에서 뱀이 아니면
조태혁은 키가 180cm나 되는 큰 체구로 나를 거의 넘어뜨릴 뻔했다.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비틀거렸지만 뭐라 하기도 전에 조나연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그 순간 문득, 조나연이 정말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어떻게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아마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거겠지. 지금의 조나연은 내면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음이 추하니 얼굴까지 변한 것 같았다.“조태혁, 이리 와.”조나연은 동생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나, 살려줘!”조태혁은 내 뒤에 숨으며 어린애처럼 애원했다.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손 놔!”“누나, 제발 좀 살려줘.”조태혁은 끈질기게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이를 악물고 참다못한 나는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아!”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고 나는 그가 잡았던 팔을 재빨리 옷에 문질러 닦았다.그런데도 조나연이 내 앞을 막아섰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비켜주세요.”“지원 씨, 당신이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너무하네요.”조나연은 나를 향해 비난 섞인 목소리를 냈다.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세요.”“당신은 강유형이랑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도 왜 굳이 우리 가족을 망신 주고 날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어야 해요? 난 집에서 쫓겨났어요. 그래도 유형이가 다른 집을 마련해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긴 것도 아니죠.”조나연의 원망 섞인 말에 상황이 명확히 이해됐다.그녀가 집에서 쫓겨난 게 사실이었다.어제 아줌마가 조나연을 내쫓겠다고 했을 때, 내가 굳이 말렸던 것이 떠올랐다.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살벌한 눈빛에도 나는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열받으면 그걸로 됐어요.”그러자 조나연의 얼굴은
“누나!” 조태혁이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고 난 그 표정이 정말 얄미웠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이곳에서 조태혁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또 무슨 사고 쳤어?”조태혁이 사고를 안 치면 평소에 여길 올 일도 없을 것이다.조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맞아. 무면허 운전.”그 말에 나는 문득 그가 생일 초대했던 일이 떠올랐다.아직 미성년자인데 말이다.“축하해.”나는 어이가 없어 험한 말이 나갔다.“고마워!”그는 여전히 뻔뻔하게 받아쳤다.나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자료를 찾고 있던 경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고 자료가 너무 오래된 건지 경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못 찾은 듯했다.“누나, 여기엔 왜 온 거야?”조태혁이 옆으로 다가오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볼일 좀 보러.”나는 대충 둘러댔다.“무슨 일이야? 잘 안 풀리면 내가 사람 찾아서 도와줄게.”조태혁이 멋진 남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나는 비웃으며 말했다.“네 일을 해결할 사람을 먼저 찾아보는 게 어때?”무면허 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만약 그랬다면 여기서 꽤 고생했을 거다.“난 이미 해결됐어.”조태혁은 아주 뻔뻔하게 말했다.그 말을 듣자 아까 강유형이 여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역시 그가 도와줬을 것이다.다음 순간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조태혁이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우리 매형이 여기 국장이랑 아주 친하거든.”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하지만 그가 말한 매형이라는 표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이 녀석이 일부러 나를 짜증 나게 하려고 작정했네.’“필요 없어!”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괜찮아. 가족끼린데 뭘. 내가 가서 바로 얘기할게.”조태혁은 고집을 부리며 나설 기세였다.역시 조나연의 친동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가족 같은 사랑을 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랑이 혹시나 한낱 웃음거리가 될까봐 두려웠다.하지만 용진표의 말은 믿어도 되는 걸까?내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어떻게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지원아, 너 아직 모르고 있을 텐데 강 대표한테 작은 비밀 금고가 하나 있어.”용진표가 말을 꺼내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허허.”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강 대표랑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니야.”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용진표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구나.’인터넷에서는 그가 부인과 애인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다.하지만 그런 소문에도 그는 자식이 딱 하나 용준호만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삼촌과 아줌마는 사이가 정말 좋으세요.”용진표는 다시 한번 웃었지만 난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더니 그는 말을 이었다.“강 대표의 비밀 금고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야. 당시 그 계약의 모든 수익과 그 이후의 배당금이 들어있지.”그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지원아, 그 금고는 너희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그 돈은 너희 아버지 몫이라는 거지.”나는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나는 KS 그룹에 이렇게 오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삼촌은 나에게 이 일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강 대표는 그 돈이 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얻은 돈이라 자기는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 돈을 쓰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며 그 프로젝트의 모든 수익을 네 아버지 이름으로 돌려놓았지. 그리고 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그 돈을 네 부모님이 너에게 남겨준 결혼 자금이라고 준다고 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이 찌르는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정말 잘해주셨고 나도 그들을 진심으로 내 부모처럼 여겼다.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계약서를 발견한 이후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항상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이제 그걸 풀어내고 싶다. 나도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용진표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넌 네 아버지를 똑 닮았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그는 아까 분명히 내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제야 알았다. 그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나는 숨을 깊게 쉬며 손끝으로 내 손바닥을 쥐었다.그때 용진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강 대표가 자주 언급했어. 아니면 내가 어떻게 10년도 더 된 사람을 기억하겠어?”내 목이 조여오며 말했다.“삼촌이 제 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죠?”그러자 용진표가 일어섰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왔지만 용진표는 손짓으로 그를 멈추게 하고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가 풀밭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생각해? 네가 강 대표라면 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아?”역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사람을 다루는 게 정말 능숙했다.나는 삼촌이 무슨 말을 했을지 전혀 모르겠고 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그래서 나는 일어나 그를 따라가서 그의 옆에 섰다.“삼촌은 제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예요.”용진표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나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넓은 풀밭, 초록색으로 가득한 풍경이 시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이 풍경은 갑자기 아버지와 함께 갔던 큰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는 그렇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매년 여행을 떠났다.그들은 큰 도시보다는 자연을 선호했고 그 덕분에 나는 초원이나 사막, 바다와 같은 광활한 자연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눈앞의 초록 풀밭은 불현듯 나를 몽골 대초원으로 데려갔고 아버지와 함께 몽골 텐트에서 자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삼촌이 용진표처럼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나는 언제나 생각이 많았기에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여기 앉아.”용진표가 내게 손짓을 하자 나는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옆의 아가씨들이 물을 따라줬고 서비스는 매우 세심했다.나는 이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지만 상황에 맞춰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결혼 안 했지?”용진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아니요.”“그럼 언제 강 대표네 집으로 시집갈 거야?”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이미 강유형과 헤어진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용준호가 나에게 그의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만나자고 했던 것도 어이가 없었다.지난번에 용준호의 말을 듣고 그랬다면 용진표는 어쩌면 화가 나서 터졌을 수도 있었다. “결혼 안 할 거예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진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어?”그의 말투가 자연스러웠고 내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미 내가 KS 그룹에서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그냥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나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사실 그가 이렇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작은 회사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 같았다.“어떤 남자 친구를 원해?”용진표가 내 사생활에 대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가 궁금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자 친구가 있어요.”“오.”용진표는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를 기억하시나요?”용진표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기억이 안 나네.”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파일 안에 있던 계약서를 꺼내 두 손으로 그에게
나는 원래 입구컷을 당할 줄 알았다.역시 강두식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는 용진표에게는 더욱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서 기운을 다스리며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눈에 들어왔다.‘저 사람이 바로 용진표야?’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지금 60세가 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그의 외모는 내가 가진 정보와 일치했지만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용진표라고 믿기 힘들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젊은 아가씨, 뭐 하러 날 찾으러 왔지?”용진표는 여전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며 나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가 바로 용진표였다.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그래. 알고 있었어.”용표는 여전히 태극권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조금 놀랐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용진표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혹시 용진표가 미리 말을 전해놨을까?’“옛날부터 강 대표님은 너를 많이 아꼈고 너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자주 나한테 자랑했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내가 찾는 이유도 아는 거겠지?’“그래.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뭐야?”그는 태극권을 계속 연습하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동작을 이어갔기에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10여 년 전에 윤동휘라는 분과 계약을 체결하셨던 것으로
“맞아. 그 자국이 정말 컸어. 딱 보니 진정우 씨 여자 친구는 폐활량도 대단하네.”“꼭 그런 건 아닐걸? 어쩌면 진정우 씨가 워낙 잘해서 여자 친구가 흥분한 거일 수도 있어.”나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이 두 여직원은 의외로 상식도 많고 생각보다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것 같았다.“정말 눈도 밝으시네요.”나는 억지로 웃어넘기려 했다.“우리가 눈이 밝은 게 아니에요. 진정우 씨가 일부러 보라고 한 거라니까요. 셔츠 목깃을 반쯤 풀고 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어요.”한 여직원이 말하며 옆 사람을 툭 치며 물었다.“그렇지?”“맞아요. 우리만 본 게 아니라 회사 모든 여직원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다 봤다니까요.”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이 얘기가 어쩌면 회사 전역을 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 씨는 평소에 정말 조용한 사람이잖아요. 회사 안에서는 거의 자리에만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고요.”“그러게. 설마 일부러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그럴 가능성 있어. 아니. 그냥 확실해. 아마도 우리더러 마음을 접으라고 일부러 그랬겠지.”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지금 시대 여자들의 감각과 눈치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진정우의 당돌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정우 씨는 진짜 철저하네. 자기 손으로 직접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들키면서 주변에서 치근덕대는 여자들을 다 잘라버리는 걸 보니 말이야.’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 이런 모습 보니까 더 좋아졌어.”“맞아. 너무 멋진 사람이야.”그들이 진정우를 향해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나는 살짝 웃으며 티 나지 않게 나왔다. 마음속으로는 무척 행복했다.내가 용준호가 보낸 위치 정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산업단지의 신영 투자 회사였다.밖에는 개업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하지만 막
“쉿...”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냈다.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민감하고 약간의 쾌감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묘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점점 더 장난기가 심해지는 내 모습에 자신도 놀라웠다.나는 그의 반응을 끝으로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진정우는 내가 방금 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사무실로 돌아와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음이 나는지는 몰랐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마치 장난꾸러기 아이가 몰래 나쁜 장난을 치고 신나서 웃는 것처럼 정말 속이 후련하고 유쾌했다.그렇게 웃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하니 용준호였다.그가 보낸 건 한 장소의 주소였다.링크를 눌러보니 외곽에 있는 한 산업단지에 위치한 신영 투자회사라는 주소였다.나는 그가 왜 이 주소를 보내온 건지 의아했다.‘잘못 보낸 건가? 아니면 나를 일부러 놀리려는 건가?’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찰나 그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와.”‘용준호의 아버지, 용진표가 요양원을 떠났다고? 용준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략일까?’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못 믿겠으면 오지 마.”“대표님은 저더러 아버지를 찾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난다 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나는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지금 그는 또 나에게 주소를 보내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하는 게 참으로 수상했다.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히 대답했다.“맞아. 나는 네가 헛수고할 까봐 말렸던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너잖아?”그러더니 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못 본 척하면 되지.”그의 말투는 여전히 건
허진호의 말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긴급 출장이라도 가야 하나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정도 외근 나가야 할 것 같아요.”나는 조금 전 아침 회의를 마쳤지만 외근 관련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허진호가 방금 급히 잡은 일정인 듯했다.“어디로 무슨 일로 가야 하죠?” 나는 상황을 더 알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요.”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대표님의 지시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서둘러 현재 진행 중인 업무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오전 10시 반쯤에야 잠시 여유가 생긴 나는 컵을 들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티 룸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 두 명의 수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새로 온 진정우 씨는 보면 볼수록 멋있지 않아? 오늘 입은 작업복 바지 보니까 다리가 2미터처럼 느껴지더라니까!”“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너 요즘 진정우 씨한테 너무 빠졌구나. 근데 넌 예전엔 허진호 대표님 팬이었던 거 같은데?”“맞아, 예전엔 허 대표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우 씨가 오고 나서는...”여직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젠 허 대표님이 길거리 물건처럼 보일 정도야.”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직원들의 말이 참 매섭네.’“앞으로 내 마음속 아이돌은 진정우 씨야. 다른 누구도 못 따라올 거야!”그녀의 선언 같은 말이 끝날 즈음에 나는 티 룸으로 들어섰다.그들은 내가 들어오자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차 드실래요? 아니면 커피 드실래요?”나는 컵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진정우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그녀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네. 진정우 씨는 너무 멋있어요. 게다가 전직 군인이라면서요?”“그래요. 확실히 멋있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