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친근한 모습의 그는 나의 상사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느껴졌다.나는 웃으며 허진호를 바라보다가 진정우에게 물었다.“정우 씨, 허진호 씨랑 엄청 잘 통하는 것 같네. 나는 면접 끝나자마자 대표님이랑 밥 먹는 사람 처음 봐.”내가 이 말을 한 건 예전에 신지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허진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성이 진 씨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나는 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허 대표님이 나랑 밥을 같이 먹는 건 나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거죠. 결국...”진정우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연봉 6억이라는 금액이 작은 건 아니니까.”나는 깜짝 놀랐다.‘연봉이 그렇게 높다고?’나는 진정우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왜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그가 솔직하게 묻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그리고 이어 물었다. “그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얼마 받았어?”“월급으로 600만 원.”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진호가 제시한 금액은 예전보다 10배나 많았다.“허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먼저 제안했지만 나도 허 대표님이 받아줄 줄은 몰랐어." 진정우가 설명을 덧붙였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이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시네.”그러면서 나는 감탄했다.“정우 씨는 참 대단하네. 그 정도 금액을 제시할 용기도 있다니.”심지어 우리 회사 삼촌 밑의 부대표급들도 연봉 6억을 받는 사람은 드물었다.“내 능력을 알아줄 뿐이야. 게다가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할 수 있잖아.”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내 시동을 걸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좀 이따 어디로 가? 내가 태워다줄게.”“넌?” 그가 되물었다.“정우 씨를 태워다주고 회사로 돌아가야지.”“허 대표님이 반나절 휴가를 주셨어.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말이야.”진정우의 말에 나는
‘큰일 났어 그걸 깜빡하다니.’하지만 별로 난 찔릴 건 없으니 바로 부인했다.“그런 추잡한 짓을 한 적은 없어. 누명이야.”“응?”진정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해주 길 바라는 듯했다.나는 조태혁을 우연히 넘어뜨렸고 그가 나를 무고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 더 덧붙였다.“그런 꼬맹이는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애야. 난 전혀 관심 없어.”“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해? 아저씨 같은 스타일? 아니면 성숙하고 조용한 사람?”진정우는 아주 솔직했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살짝 다가가며 말했다.“정우 씨처럼... 거칠고 단단한 사람이 좋아.”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정우의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나는 또 한 번 그를 놀려버렸다.다음 순간 나는 몸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단단한 걸 어떻게 알았어?”“...”그 순간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나는 진정우가 순수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 한마디로 그는 남자의 본성을 드러냈다.“얼굴은 왜 빨개 진 거야?”하필이면 진정우가 또 물었다.‘정우 씨도 만만치 않네. 내 장난에 바로 반격하다니 말이야.’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했다.“술 마셨어?”“아니!”내가 부인하자마자 그가 말했다.“차를 옆에 세워봐.”“왜?”나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가 멈추자마자 진정우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 얼굴을 돌려 잡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첫 반응은 그가 나를 키스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대낮인데... 그것도 길거리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면 우리가 사귀기로 해서 이제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정우 씨는 속으로 이런 사람인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길 한복판에서 키스하려고 할 수 있지?’비록 나는 강유형처럼 무미
나는 진정우의 붉어진 얼굴과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렸고 나는 더 이상 괜한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차를 몰았다.단단한 물건에 관한 질문 하나 때문에 둘 다 몇 분간 침묵했다.그러다가 나는 문득 아까 그가 말한 둘만의 시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어디 가려고?”“오후에 시간 있어?”“있어!”말이 떨어지자마자 난 자신이 너무 빨리 대답한 걸 깨달았다. 마치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너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내가 내비게이션을 설정할게. 그대로 따라가면 돼.”진정우의 내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외진 교외 지역이었다. 사방이 잡초로 덮인 황량한 땅이었지만 멀리서 맑고 반짝이는 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정우 씨, 여기서 뭐 하려는 거야? 설마 나랑 농사지을 계획은 아니겠지?”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는 멀리 강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그럴 생각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정우 씨는 농사보다 전기랑 조명 다루는 데 집중해서 6억 연봉이나 열심히 벌어!”진정우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풀숲에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꺅!”나는 비명을 질렀다.진정우는 나와 두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내 비명을 듣자마자 재빨리 뛰어왔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높이뛰기 하나 제대로 못 했지만 이번엔 완벽하게 뛰어들었다. 마치 착 달라붙은 흡반처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완벽할 정도였다.진정우도 재빨리 나를 단단히 받쳐주며 허리를 감싸안았다.“무슨 일이야?”“뱀이야. 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금 본 게 진짜 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이런 깊은 풀밭에서 뱀이 아니면
나는 내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웃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도 아이처럼 안겨서 빙글빙글 도는 경험이라니.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품에 얌전히 기대야 했다.그 순간 문득 이 모든 게 그의 계산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릴 때 너 이렇게 도는 거 좋아했어.”진정우가 내 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진정우를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어렸었다. 너무 어려서 기억조차 희미했다.그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나도 자연스럽게 물었다.“그럼 난 어렸을 때 또 뭐 좋아했어?”“높이 들어 올리는 거 좋아했고 내 어깨에 올라타서 목마 타는 것도 좋아했지.”진정우의 말에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어쨌든 정우 씨 말이니까 다 믿을 순 없지.”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물놀이도 좋아했어. 물속에서 뛰어놀면서 물을 튀기곤 했지. 온몸이 흠뻑 젖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또 있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졌다.사람은 참으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상한 존재다.그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일 텐데 만약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이 어른이 된 후의 불행을 치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또 하나 있다면 넌 동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어. 근데 내가 이야기를 잘 못 해서 너한테 멍청하다는 소리 들었었지.”그의 말에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동화책만 잔뜩 읽었어. 근데 널 다시 볼 수 없어서 그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없었지.”“근데 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나는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여동생이 태어났는데 몸이 안 좋았거든. 그래서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네 댁에 가서 여동생을 돌보며 살았어.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아마도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마
진정우는 내가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꼬집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너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몰라. 어차피 다 정우 씨가 꾸며낸 이야기잖아.”나는 그가 말한 어릴 적 이야기가 하나같이 황당해서 인정할 수 없었다.“넌 그때 내가 이제 너를 가질 거라고 말했어. 우리는 이미 키스해서 도장을 찍은 거라며 말이지. 이제 넌 내 사람이니 커서 나중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그리고 나에게도 너 말고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어.”진정우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지원아, 그래서 난 네 말대로 했어.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안 해봤고 다른 여자한테 한 번도 마음 준 적 없어. 심지어 다른 여자의 손도 잡아본 적 없어. 정말 네 말 잘 듣고 여태까지 기다렸으니 이제 네가 날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진정우는 마치 내가 거절하면 엄청나게 미안한 사람이라도 될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나는 줄곧 강유형이 나의 죽마고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진정우야말로 진짜 죽마고우였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기억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모든 소중한 순간은 진정우 혼자만 기억하고 있었다.“좋아. 내가 책임질게.”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며 목을 쭉 빼고 발끝을 들어 그의 매끈한 턱을 살짝 물었다.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내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시 도장을 찍어줄게. 이번엔 진하게 말이야. 정우 씨가 내 남자라는 걸 모두가 알아보게.”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작고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쁨은 뚜렷했다.“넌 여전히 어릴 때랑 똑같이 자기주장이 강하네.”“내가 그렇게 자기주장 강한 사람이었어?” 나는 웃으며 반문했지만 사실 그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항상 나는 강유형이나 아줌마 앞에서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자기주장이 강하
나는 멍해졌다.진정우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다시 한번 진정우가 단지 직설적일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나는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는 가운데 머릿속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입이 먼저 움직였다.“왜 안 가는데?”진정우는 침을 한 번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진정우의 이유는 충분했다.연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서로 붙어있고 싶을 것이다. 하루에 24시간, 아니 그 이상으로 서로 곁에 있고 싶어지는 법이다.“근데... 난 정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니야.”나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진정우는 표정이 잠시 굳더니 곧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이렇게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과 그가 보여준 솔직한 태도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그게 바로 진정우였다.“나도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여기 있고 싶어.” 진정우는 어색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런 진정우의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그럼 정우 씨 말은... 나랑 같이 자도 이불 덮고 그냥 얘기만 하겠다는 거야?”진정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뭐... 그런 셈이지.”“그거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내 질문은 점점 더 대놓고 현실적으로 변해갔다.“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진정우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확인해 보자고?’게다가 나도 한 번 진정우가 정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세면도구 챙겨올게. 문 잠그고 안 열어줄 건 아니지?” 진정우는 여전히 솔직하게 바로바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일부러 도발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우 씨가 다시 돌아올 용기가 없는 건 아니야?”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그럴 리는 없을 거야.”그가 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욕실
나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말이다.이전에 진정우를 은근히 놀리던 장면이 떠오르고 그의 절제된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을 보니 문득 안리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정우 씨,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그가 여자 친구도 사귄 적이 없다고 말했던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러자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없어.”두 글자가 내 심장을 강하게 요동치게 했다.“그럼... 하고 싶어?”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더욱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다음 순간 내 시야는 그의 얼굴로 가려졌고 곧이어 내 입술에 강렬한 압력이 느껴졌다.진정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나는 이미 답을 얻었다.하지만 그는 바로 더 나아가지 않고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댄 채 나직이 속삭였다. “얼마나 더 날 시험하려고 해? 아니면 그냥 일부러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니 분명 원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모습이 애달팠다.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물었다.“정말 원해? 아니면 단지 내 몸을 갖고 싶은 거야?”이 말을 꺼낸 순간 과거 강유형이 나에게 던졌던 무심한 말이 떠올랐다.“난 너에게 별로 흥미가 없어.”강유형의 그 말이 얼마나 깊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응.”그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너한테만 그래.”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어떤 무거운 짐이 스르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지...”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나는 그의 입을 막으며 입을 맞췄다.이번에는 내가 그를 당겨 더 나아가도록 했다.“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래?”결정적인 순간에 진정우는 가까스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뭘 기다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정식으로 너를 아내로 맞이하는 날 말이야.”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네가 진심이 아니라면 날 아내로 맞이하더라
‘강유형이 왜 그런 걸까? 왜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었을까? 혹시 어디를 다친 걸까?’이런 꿈은 보통 뭔가를 암시한다고들 했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밤에도 나는 좋지 않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꿈에서 강유형은 앞니 두 개가 빠지며 피가 줄줄 흘렀고 나는 너무 놀라서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부모님은 사고로 나를 떠나버렸다.나는 마음속에 불안이 밀려왔고 옆에 있던 진정우의 시선을 잠시 잊었다.그러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아 식은땀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악몽 꿨어?”진정우의 한마디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그제야 꿈속에서 나는 강유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혹시 진정우가 오해할까봐 나는 서둘러 설명했다.“꿈에서 강유형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내 침대 앞에 서 있었어.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어.”“걱정하지 마. 꿈은 대부분 반대야. 그래도 걱정되면 지금 전화해서 확인해 봐.”진정우가 뜻밖으로 이렇게 말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런 상황에서라면 질투하거나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만약 강유형이었다면 틀림없이 질투했을 것이다.나는 창밖으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았다.진정우에게 더 가까이 파고들며 나지막이 말했다.“피곤해. 조금 더 잘래.”“그래. 빨리 자.”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진정우의 이런 태도는 평소처럼 부드러웠고 전혀 화를 내거나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나는 결국 피로에 지쳐 다시 잠이 들었다.희미한 의식 속에서 진정우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는 느낌이 들렸다. 그리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래도 너는 아직 그를 걱정하는구나.”난 뭔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 9시였다.이 시간에 출근하면 당연히 지각이었다.진정우는 이미 떠난 뒤였고 난 몸을 움직이려 하니 온몸이 쑤시고 무거웠다. 마치 몸이
조태혁은 키가 180cm나 되는 큰 체구로 나를 거의 넘어뜨릴 뻔했다.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비틀거렸지만 뭐라 하기도 전에 조나연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그 순간 문득, 조나연이 정말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어떻게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아마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거겠지. 지금의 조나연은 내면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음이 추하니 얼굴까지 변한 것 같았다.“조태혁, 이리 와.”조나연은 동생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나, 살려줘!”조태혁은 내 뒤에 숨으며 어린애처럼 애원했다.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손 놔!”“누나, 제발 좀 살려줘.”조태혁은 끈질기게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이를 악물고 참다못한 나는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아!”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고 나는 그가 잡았던 팔을 재빨리 옷에 문질러 닦았다.그런데도 조나연이 내 앞을 막아섰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비켜주세요.”“지원 씨, 당신이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너무하네요.”조나연은 나를 향해 비난 섞인 목소리를 냈다.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머리가 나쁘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세요.”“당신은 강유형이랑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도 왜 굳이 우리 가족을 망신 주고 날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어야 해요? 난 집에서 쫓겨났어요. 그래도 유형이가 다른 집을 마련해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이긴 것도 아니죠.”조나연의 원망 섞인 말에 상황이 명확히 이해됐다.그녀가 집에서 쫓겨난 게 사실이었다.어제 아줌마가 조나연을 내쫓겠다고 했을 때, 내가 굳이 말렸던 것이 떠올랐다.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살벌한 눈빛에도 나는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열받으면 그걸로 됐어요.”그러자 조나연의 얼굴은
“누나!” 조태혁이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고 난 그 표정이 정말 얄미웠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이곳에서 조태혁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또 무슨 사고 쳤어?”조태혁이 사고를 안 치면 평소에 여길 올 일도 없을 것이다.조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맞아. 무면허 운전.”그 말에 나는 문득 그가 생일 초대했던 일이 떠올랐다.아직 미성년자인데 말이다.“축하해.”나는 어이가 없어 험한 말이 나갔다.“고마워!”그는 여전히 뻔뻔하게 받아쳤다.나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무시하고 자료를 찾고 있던 경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고 자료가 너무 오래된 건지 경찰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못 찾은 듯했다.“누나, 여기엔 왜 온 거야?”조태혁이 옆으로 다가오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볼일 좀 보러.”나는 대충 둘러댔다.“무슨 일이야? 잘 안 풀리면 내가 사람 찾아서 도와줄게.”조태혁이 멋진 남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나는 비웃으며 말했다.“네 일을 해결할 사람을 먼저 찾아보는 게 어때?”무면허 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만약 그랬다면 여기서 꽤 고생했을 거다.“난 이미 해결됐어.”조태혁은 아주 뻔뻔하게 말했다.그 말을 듣자 아까 강유형이 여기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역시 그가 도와줬을 것이다.다음 순간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조태혁이 가까이 와 있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우리 매형이 여기 국장이랑 아주 친하거든.”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였다.하지만 그가 말한 매형이라는 표현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이 녀석이 일부러 나를 짜증 나게 하려고 작정했네.’“필요 없어!”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괜찮아. 가족끼린데 뭘. 내가 가서 바로 얘기할게.”조태혁은 고집을 부리며 나설 기세였다.역시 조나연의 친동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가족 같은 사랑을 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랑이 혹시나 한낱 웃음거리가 될까봐 두려웠다.하지만 용진표의 말은 믿어도 되는 걸까?내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라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어떻게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지원아, 너 아직 모르고 있을 텐데 강 대표한테 작은 비밀 금고가 하나 있어.”용진표가 말을 꺼내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허허.”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강 대표랑 나는 같은 부류가 아니야.”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용진표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구나.’인터넷에서는 그가 부인과 애인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다.하지만 그런 소문에도 그는 자식이 딱 하나 용준호만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삼촌과 아줌마는 사이가 정말 좋으세요.”용진표는 다시 한번 웃었지만 난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더니 그는 말을 이었다.“강 대표의 비밀 금고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야. 당시 그 계약의 모든 수익과 그 이후의 배당금이 들어있지.”그는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지원아, 그 금고는 너희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그 돈은 너희 아버지 몫이라는 거지.”나는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나는 KS 그룹에 이렇게 오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삼촌은 나에게 이 일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강 대표는 그 돈이 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얻은 돈이라 자기는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 돈을 쓰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며 그 프로젝트의 모든 수익을 네 아버지 이름으로 돌려놓았지. 그리고 네가 나중에 결혼할 때 그 돈을 네 부모님이 너에게 남겨준 결혼 자금이라고 준다고 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이 찌르는
삼촌과 아줌마는 나에게 정말 잘해주셨고 나도 그들을 진심으로 내 부모처럼 여겼다.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계약서를 발견한 이후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 항상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이제 그걸 풀어내고 싶다. 나도 그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용진표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넌 네 아버지를 똑 닮았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그는 아까 분명히 내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제야 알았다. 그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나는 숨을 깊게 쉬며 손끝으로 내 손바닥을 쥐었다.그때 용진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강 대표가 자주 언급했어. 아니면 내가 어떻게 10년도 더 된 사람을 기억하겠어?”내 목이 조여오며 말했다.“삼촌이 제 아버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죠?”그러자 용진표가 일어섰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왔지만 용진표는 손짓으로 그를 멈추게 하고 큰 창문 앞으로 걸어가 풀밭을 바라보았다.“어떻게 생각해? 네가 강 대표라면 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아?”역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사람을 다루는 게 정말 능숙했다.나는 삼촌이 무슨 말을 했을지 전혀 모르겠고 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그래서 나는 일어나 그를 따라가서 그의 옆에 섰다.“삼촌은 제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예요.”용진표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나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넓은 풀밭, 초록색으로 가득한 풍경이 시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이 풍경은 갑자기 아버지와 함께 갔던 큰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는 그렇게 부유하진 않았지만 매년 여행을 떠났다.그들은 큰 도시보다는 자연을 선호했고 그 덕분에 나는 초원이나 사막, 바다와 같은 광활한 자연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눈앞의 초록 풀밭은 불현듯 나를 몽골 대초원으로 데려갔고 아버지와 함께 몽골 텐트에서 자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삼촌이 용진표처럼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나는 언제나 생각이 많았기에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여기 앉아.”용진표가 내게 손짓을 하자 나는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옆의 아가씨들이 물을 따라줬고 서비스는 매우 세심했다.나는 이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지만 상황에 맞춰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결혼 안 했지?”용진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아니요.”“그럼 언제 강 대표네 집으로 시집갈 거야?”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이미 강유형과 헤어진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용준호가 나에게 그의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아버지를 만나자고 했던 것도 어이가 없었다.지난번에 용준호의 말을 듣고 그랬다면 용진표는 어쩌면 화가 나서 터졌을 수도 있었다. “결혼 안 할 거예요.”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진표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어?”그의 말투가 자연스러웠고 내가 결혼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미 내가 KS 그룹에서 나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그냥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나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사실 그가 이렇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작은 회사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 같았다.“어떤 남자 친구를 원해?”용진표가 내 사생활에 대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가 궁금했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남자 친구가 있어요.”“오.”용진표는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를 기억하시나요?”용진표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기억이 안 나네.”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파일 안에 있던 계약서를 꺼내 두 손으로 그에게
나는 원래 입구컷을 당할 줄 알았다.역시 강두식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대단했다. 특히는 용진표에게는 더욱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서 기운을 다스리며 태극권을 연습하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눈에 들어왔다.‘저 사람이 바로 용진표야?’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지금 60세가 채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그의 외모는 내가 가진 정보와 일치했지만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바로 용진표라고 믿기 힘들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젊은 아가씨, 뭐 하러 날 찾으러 왔지?”용진표는 여전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며 나를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그가 바로 용진표였다.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별로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그래. 알고 있었어.”용표는 여전히 태극권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조금 놀랐고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용진표가 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내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일까? 혹시 용진표가 미리 말을 전해놨을까?’“옛날부터 강 대표님은 너를 많이 아꼈고 너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자주 나한테 자랑했지.”그의 말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그러면 내가 찾는 이유도 아는 거겠지?’“그래.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뭐야?”그는 태극권을 계속 연습하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계속 동작을 이어갔기에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물었다.“용 대표님, 혹시 윤동휘라는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10여 년 전에 윤동휘라는 분과 계약을 체결하셨던 것으로
“맞아. 그 자국이 정말 컸어. 딱 보니 진정우 씨 여자 친구는 폐활량도 대단하네.”“꼭 그런 건 아닐걸? 어쩌면 진정우 씨가 워낙 잘해서 여자 친구가 흥분한 거일 수도 있어.”나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이 두 여직원은 의외로 상식도 많고 생각보다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것 같았다.“정말 눈도 밝으시네요.”나는 억지로 웃어넘기려 했다.“우리가 눈이 밝은 게 아니에요. 진정우 씨가 일부러 보라고 한 거라니까요. 셔츠 목깃을 반쯤 풀고 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어요.”한 여직원이 말하며 옆 사람을 툭 치며 물었다.“그렇지?”“맞아요. 우리만 본 게 아니라 회사 모든 여직원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다 봤다니까요.”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이 얘기가 어쩌면 회사 전역을 돌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 씨는 평소에 정말 조용한 사람이잖아요. 회사 안에서는 거의 자리에만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라고요.”“그러게. 설마 일부러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그럴 가능성 있어. 아니. 그냥 확실해. 아마도 우리더러 마음을 접으라고 일부러 그랬겠지.”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지금 시대 여자들의 감각과 눈치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진정우의 당돌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정우 씨는 진짜 철저하네. 자기 손으로 직접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들키면서 주변에서 치근덕대는 여자들을 다 잘라버리는 걸 보니 말이야.’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그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진정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네. 이런 모습 보니까 더 좋아졌어.”“맞아. 너무 멋진 사람이야.”그들이 진정우를 향해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나는 살짝 웃으며 티 나지 않게 나왔다. 마음속으로는 무척 행복했다.내가 용준호가 보낸 위치 정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산업단지의 신영 투자 회사였다.밖에는 개업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하지만 막
“쉿...”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냈다.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민감하고 약간의 쾌감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그 순간 묘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점점 더 장난기가 심해지는 내 모습에 자신도 놀라웠다.나는 그의 반응을 끝으로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진정우는 내가 방금 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사무실로 돌아와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음이 나는지는 몰랐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마치 장난꾸러기 아이가 몰래 나쁜 장난을 치고 신나서 웃는 것처럼 정말 속이 후련하고 유쾌했다.그렇게 웃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하니 용준호였다.그가 보낸 건 한 장소의 주소였다.링크를 눌러보니 외곽에 있는 한 산업단지에 위치한 신영 투자회사라는 주소였다.나는 그가 왜 이 주소를 보내온 건지 의아했다.‘잘못 보낸 건가? 아니면 나를 일부러 놀리려는 건가?’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찰나 그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면 여기로 와.”‘용준호의 아버지, 용진표가 요양원을 떠났다고? 용준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략일까?’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다.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못 믿겠으면 오지 마.”“대표님은 저더러 아버지를 찾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난다 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나는 전에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지금 그는 또 나에게 주소를 보내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하는 게 참으로 수상했다.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히 대답했다.“맞아. 나는 네가 헛수고할 까봐 말렸던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너잖아?”그러더니 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못 본 척하면 되지.”그의 말투는 여전히 건
허진호의 말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긴급 출장이라도 가야 하나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정도 외근 나가야 할 것 같아요.”나는 조금 전 아침 회의를 마쳤지만 외근 관련 내용은 없었다. 아마도 허진호가 방금 급히 잡은 일정인 듯했다.“어디로 무슨 일로 가야 하죠?” 나는 상황을 더 알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요.”그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대표님의 지시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서둘러 현재 진행 중인 업무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오전 10시 반쯤에야 잠시 여유가 생긴 나는 컵을 들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티 룸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 두 명의 수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새로 온 진정우 씨는 보면 볼수록 멋있지 않아? 오늘 입은 작업복 바지 보니까 다리가 2미터처럼 느껴지더라니까!”“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너 요즘 진정우 씨한테 너무 빠졌구나. 근데 넌 예전엔 허진호 대표님 팬이었던 거 같은데?”“맞아, 예전엔 허 대표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우 씨가 오고 나서는...”여직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젠 허 대표님이 길거리 물건처럼 보일 정도야.”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직원들의 말이 참 매섭네.’“앞으로 내 마음속 아이돌은 진정우 씨야. 다른 누구도 못 따라올 거야!”그녀의 선언 같은 말이 끝날 즈음에 나는 티 룸으로 들어섰다.그들은 내가 들어오자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윤 부장님, 차 드실래요? 아니면 커피 드실래요?”나는 컵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진정우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그녀들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네. 진정우 씨는 너무 멋있어요. 게다가 전직 군인이라면서요?”“그래요. 확실히 멋있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