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친근한 모습의 그는 나의 상사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느껴졌다.나는 웃으며 허진호를 바라보다가 진정우에게 물었다.“정우 씨, 허진호 씨랑 엄청 잘 통하는 것 같네. 나는 면접 끝나자마자 대표님이랑 밥 먹는 사람 처음 봐.”내가 이 말을 한 건 예전에 신지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허진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성이 진 씨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나는 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허 대표님이 나랑 밥을 같이 먹는 건 나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거죠. 결국...”진정우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연봉 6억이라는 금액이 작은 건 아니니까.”나는 깜짝 놀랐다.‘연봉이 그렇게 높다고?’나는 진정우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왜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그가 솔직하게 묻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그리고 이어 물었다. “그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얼마 받았어?”“월급으로 600만 원.”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진호가 제시한 금액은 예전보다 10배나 많았다.“허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먼저 제안했지만 나도 허 대표님이 받아줄 줄은 몰랐어." 진정우가 설명을 덧붙였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이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시네.”그러면서 나는 감탄했다.“정우 씨는 참 대단하네. 그 정도 금액을 제시할 용기도 있다니.”심지어 우리 회사 삼촌 밑의 부대표급들도 연봉 6억을 받는 사람은 드물었다.“내 능력을 알아줄 뿐이야. 게다가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할 수 있잖아.”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내 시동을 걸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좀 이따 어디로 가? 내가 태워다줄게.”“넌?” 그가 되물었다.“정우 씨를 태워다주고 회사로 돌아가야지.”“허 대표님이 반나절 휴가를 주셨어.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말이야.”진정우의 말에 나는
‘큰일 났어 그걸 깜빡하다니.’하지만 별로 난 찔릴 건 없으니 바로 부인했다.“그런 추잡한 짓을 한 적은 없어. 누명이야.”“응?”진정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해주 길 바라는 듯했다.나는 조태혁을 우연히 넘어뜨렸고 그가 나를 무고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 더 덧붙였다.“그런 꼬맹이는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애야. 난 전혀 관심 없어.”“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해? 아저씨 같은 스타일? 아니면 성숙하고 조용한 사람?”진정우는 아주 솔직했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살짝 다가가며 말했다.“정우 씨처럼... 거칠고 단단한 사람이 좋아.”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정우의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나는 또 한 번 그를 놀려버렸다.다음 순간 나는 몸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단단한 걸 어떻게 알았어?”“...”그 순간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나는 진정우가 순수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 한마디로 그는 남자의 본성을 드러냈다.“얼굴은 왜 빨개 진 거야?”하필이면 진정우가 또 물었다.‘정우 씨도 만만치 않네. 내 장난에 바로 반격하다니 말이야.’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했다.“술 마셨어?”“아니!”내가 부인하자마자 그가 말했다.“차를 옆에 세워봐.”“왜?”나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가 멈추자마자 진정우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 얼굴을 돌려 잡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첫 반응은 그가 나를 키스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대낮인데... 그것도 길거리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면 우리가 사귀기로 해서 이제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정우 씨는 속으로 이런 사람인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길 한복판에서 키스하려고 할 수 있지?’비록 나는 강유형처럼 무미
나는 진정우의 붉어진 얼굴과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렸고 나는 더 이상 괜한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차를 몰았다.단단한 물건에 관한 질문 하나 때문에 둘 다 몇 분간 침묵했다.그러다가 나는 문득 아까 그가 말한 둘만의 시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어디 가려고?”“오후에 시간 있어?”“있어!”말이 떨어지자마자 난 자신이 너무 빨리 대답한 걸 깨달았다. 마치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너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내가 내비게이션을 설정할게. 그대로 따라가면 돼.”진정우의 내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외진 교외 지역이었다. 사방이 잡초로 덮인 황량한 땅이었지만 멀리서 맑고 반짝이는 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정우 씨, 여기서 뭐 하려는 거야? 설마 나랑 농사지을 계획은 아니겠지?”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는 멀리 강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그럴 생각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정우 씨는 농사보다 전기랑 조명 다루는 데 집중해서 6억 연봉이나 열심히 벌어!”진정우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풀숲에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꺅!”나는 비명을 질렀다.진정우는 나와 두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내 비명을 듣자마자 재빨리 뛰어왔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높이뛰기 하나 제대로 못 했지만 이번엔 완벽하게 뛰어들었다. 마치 착 달라붙은 흡반처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완벽할 정도였다.진정우도 재빨리 나를 단단히 받쳐주며 허리를 감싸안았다.“무슨 일이야?”“뱀이야. 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금 본 게 진짜 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이런 깊은 풀밭에서 뱀이 아니면
나는 내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웃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도 아이처럼 안겨서 빙글빙글 도는 경험이라니.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품에 얌전히 기대야 했다.그 순간 문득 이 모든 게 그의 계산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릴 때 너 이렇게 도는 거 좋아했어.”진정우가 내 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진정우를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어렸었다. 너무 어려서 기억조차 희미했다.그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나도 자연스럽게 물었다.“그럼 난 어렸을 때 또 뭐 좋아했어?”“높이 들어 올리는 거 좋아했고 내 어깨에 올라타서 목마 타는 것도 좋아했지.”진정우의 말에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어쨌든 정우 씨 말이니까 다 믿을 순 없지.”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물놀이도 좋아했어. 물속에서 뛰어놀면서 물을 튀기곤 했지. 온몸이 흠뻑 젖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또 있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졌다.사람은 참으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상한 존재다.그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일 텐데 만약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이 어른이 된 후의 불행을 치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또 하나 있다면 넌 동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어. 근데 내가 이야기를 잘 못 해서 너한테 멍청하다는 소리 들었었지.”그의 말에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동화책만 잔뜩 읽었어. 근데 널 다시 볼 수 없어서 그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없었지.”“근데 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나는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여동생이 태어났는데 몸이 안 좋았거든. 그래서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네 댁에 가서 여동생을 돌보며 살았어.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아마도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마
진정우는 내가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꼬집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너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몰라. 어차피 다 정우 씨가 꾸며낸 이야기잖아.”나는 그가 말한 어릴 적 이야기가 하나같이 황당해서 인정할 수 없었다.“넌 그때 내가 이제 너를 가질 거라고 말했어. 우리는 이미 키스해서 도장을 찍은 거라며 말이지. 이제 넌 내 사람이니 커서 나중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그리고 나에게도 너 말고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어.”진정우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지원아, 그래서 난 네 말대로 했어.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안 해봤고 다른 여자한테 한 번도 마음 준 적 없어. 심지어 다른 여자의 손도 잡아본 적 없어. 정말 네 말 잘 듣고 여태까지 기다렸으니 이제 네가 날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진정우는 마치 내가 거절하면 엄청나게 미안한 사람이라도 될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나는 줄곧 강유형이 나의 죽마고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진정우야말로 진짜 죽마고우였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기억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모든 소중한 순간은 진정우 혼자만 기억하고 있었다.“좋아. 내가 책임질게.”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며 목을 쭉 빼고 발끝을 들어 그의 매끈한 턱을 살짝 물었다.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내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시 도장을 찍어줄게. 이번엔 진하게 말이야. 정우 씨가 내 남자라는 걸 모두가 알아보게.”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작고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쁨은 뚜렷했다.“넌 여전히 어릴 때랑 똑같이 자기주장이 강하네.”“내가 그렇게 자기주장 강한 사람이었어?” 나는 웃으며 반문했지만 사실 그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항상 나는 강유형이나 아줌마 앞에서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자기주장이 강하
나는 멍해졌다.진정우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다시 한번 진정우가 단지 직설적일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나는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는 가운데 머릿속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입이 먼저 움직였다.“왜 안 가는데?”진정우는 침을 한 번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진정우의 이유는 충분했다.연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서로 붙어있고 싶을 것이다. 하루에 24시간, 아니 그 이상으로 서로 곁에 있고 싶어지는 법이다.“근데... 난 정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니야.”나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진정우는 표정이 잠시 굳더니 곧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이렇게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과 그가 보여준 솔직한 태도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그게 바로 진정우였다.“나도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여기 있고 싶어.” 진정우는 어색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런 진정우의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그럼 정우 씨 말은... 나랑 같이 자도 이불 덮고 그냥 얘기만 하겠다는 거야?”진정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뭐... 그런 셈이지.”“그거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내 질문은 점점 더 대놓고 현실적으로 변해갔다.“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진정우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확인해 보자고?’게다가 나도 한 번 진정우가 정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세면도구 챙겨올게. 문 잠그고 안 열어줄 건 아니지?” 진정우는 여전히 솔직하게 바로바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일부러 도발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우 씨가 다시 돌아올 용기가 없는 건 아니야?”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그럴 리는 없을 거야.”그가 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욕실
나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말이다.이전에 진정우를 은근히 놀리던 장면이 떠오르고 그의 절제된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을 보니 문득 안리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정우 씨,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그가 여자 친구도 사귄 적이 없다고 말했던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러자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없어.”두 글자가 내 심장을 강하게 요동치게 했다.“그럼... 하고 싶어?”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더욱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다음 순간 내 시야는 그의 얼굴로 가려졌고 곧이어 내 입술에 강렬한 압력이 느껴졌다.진정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나는 이미 답을 얻었다.하지만 그는 바로 더 나아가지 않고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댄 채 나직이 속삭였다. “얼마나 더 날 시험하려고 해? 아니면 그냥 일부러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니 분명 원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모습이 애달팠다.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물었다.“정말 원해? 아니면 단지 내 몸을 갖고 싶은 거야?”이 말을 꺼낸 순간 과거 강유형이 나에게 던졌던 무심한 말이 떠올랐다.“난 너에게 별로 흥미가 없어.”강유형의 그 말이 얼마나 깊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응.”그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너한테만 그래.”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어떤 무거운 짐이 스르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지...”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나는 그의 입을 막으며 입을 맞췄다.이번에는 내가 그를 당겨 더 나아가도록 했다.“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래?”결정적인 순간에 진정우는 가까스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뭘 기다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정식으로 너를 아내로 맞이하는 날 말이야.”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네가 진심이 아니라면 날 아내로 맞이하더라
‘강유형이 왜 그런 걸까? 왜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었을까? 혹시 어디를 다친 걸까?’이런 꿈은 보통 뭔가를 암시한다고들 했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밤에도 나는 좋지 않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꿈에서 강유형은 앞니 두 개가 빠지며 피가 줄줄 흘렀고 나는 너무 놀라서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부모님은 사고로 나를 떠나버렸다.나는 마음속에 불안이 밀려왔고 옆에 있던 진정우의 시선을 잠시 잊었다.그러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아 식은땀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악몽 꿨어?”진정우의 한마디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그제야 꿈속에서 나는 강유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혹시 진정우가 오해할까봐 나는 서둘러 설명했다.“꿈에서 강유형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내 침대 앞에 서 있었어.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어.”“걱정하지 마. 꿈은 대부분 반대야. 그래도 걱정되면 지금 전화해서 확인해 봐.”진정우가 뜻밖으로 이렇게 말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런 상황에서라면 질투하거나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만약 강유형이었다면 틀림없이 질투했을 것이다.나는 창밖으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았다.진정우에게 더 가까이 파고들며 나지막이 말했다.“피곤해. 조금 더 잘래.”“그래. 빨리 자.”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진정우의 이런 태도는 평소처럼 부드러웠고 전혀 화를 내거나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나는 결국 피로에 지쳐 다시 잠이 들었다.희미한 의식 속에서 진정우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는 느낌이 들렸다. 그리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래도 너는 아직 그를 걱정하는구나.”난 뭔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 9시였다.이 시간에 출근하면 당연히 지각이었다.진정우는 이미 떠난 뒤였고 난 몸을 움직이려 하니 온몸이 쑤시고 무거웠다. 마치 몸이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