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친근한 모습의 그는 나의 상사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느껴졌다.나는 웃으며 허진호를 바라보다가 진정우에게 물었다.“정우 씨, 허진호 씨랑 엄청 잘 통하는 것 같네. 나는 면접 끝나자마자 대표님이랑 밥 먹는 사람 처음 봐.”내가 이 말을 한 건 예전에 신지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허진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성이 진 씨라는 사실 때문이었다.나는 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허 대표님이 나랑 밥을 같이 먹는 건 나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거죠. 결국...”진정우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연봉 6억이라는 금액이 작은 건 아니니까.”나는 깜짝 놀랐다.‘연봉이 그렇게 높다고?’나는 진정우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왜 내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그가 솔직하게 묻자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건 아니야.”그리고 이어 물었다. “그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얼마 받았어?”“월급으로 600만 원.”진정우의 대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진호가 제시한 금액은 예전보다 10배나 많았다.“허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먼저 제안했지만 나도 허 대표님이 받아줄 줄은 몰랐어." 진정우가 설명을 덧붙였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이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시네.”그러면서 나는 감탄했다.“정우 씨는 참 대단하네. 그 정도 금액을 제시할 용기도 있다니.”심지어 우리 회사 삼촌 밑의 부대표급들도 연봉 6억을 받는 사람은 드물었다.“내 능력을 알아줄 뿐이야. 게다가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할 수 있잖아.”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내 시동을 걸고 화제를 돌리려 했다.“좀 이따 어디로 가? 내가 태워다줄게.”“넌?” 그가 되물었다.“정우 씨를 태워다주고 회사로 돌아가야지.”“허 대표님이 반나절 휴가를 주셨어.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말이야.”진정우의 말에 나는
‘큰일 났어 그걸 깜빡하다니.’하지만 별로 난 찔릴 건 없으니 바로 부인했다.“그런 추잡한 짓을 한 적은 없어. 누명이야.”“응?”진정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내가 더 자세히 설명해주 길 바라는 듯했다.나는 조태혁을 우연히 넘어뜨렸고 그가 나를 무고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 더 덧붙였다.“그런 꼬맹이는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애야. 난 전혀 관심 없어.”“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해? 아저씨 같은 스타일? 아니면 성숙하고 조용한 사람?”진정우는 아주 솔직했고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살짝 다가가며 말했다.“정우 씨처럼... 거칠고 단단한 사람이 좋아.”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정우의 목젖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나는 또 한 번 그를 놀려버렸다.다음 순간 나는 몸을 빼려 했지만 진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단단한 걸 어떻게 알았어?”“...”그 순간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나는 진정우가 순수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 한마디로 그는 남자의 본성을 드러냈다.“얼굴은 왜 빨개 진 거야?”하필이면 진정우가 또 물었다.‘정우 씨도 만만치 않네. 내 장난에 바로 반격하다니 말이야.’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했다.“술 마셨어?”“아니!”내가 부인하자마자 그가 말했다.“차를 옆에 세워봐.”“왜?”나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가 멈추자마자 진정우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내 얼굴을 돌려 잡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첫 반응은 그가 나를 키스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대낮인데... 그것도 길거리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면 우리가 사귀기로 해서 이제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정우 씨는 속으로 이런 사람인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길 한복판에서 키스하려고 할 수 있지?’비록 나는 강유형처럼 무미
나는 진정우의 붉어진 얼굴과 콧등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렸고 나는 더 이상 괜한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차를 몰았다.단단한 물건에 관한 질문 하나 때문에 둘 다 몇 분간 침묵했다.그러다가 나는 문득 아까 그가 말한 둘만의 시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어디 가려고?”“오후에 시간 있어?”“있어!”말이 떨어지자마자 난 자신이 너무 빨리 대답한 걸 깨달았다. 마치 내가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자 그의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너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내가 내비게이션을 설정할게. 그대로 따라가면 돼.”진정우의 내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외진 교외 지역이었다. 사방이 잡초로 덮인 황량한 땅이었지만 멀리서 맑고 반짝이는 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정우 씨, 여기서 뭐 하려는 거야? 설마 나랑 농사지을 계획은 아니겠지?”나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는 멀리 강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그럴 생각이야.”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정우 씨는 농사보다 전기랑 조명 다루는 데 집중해서 6억 연봉이나 열심히 벌어!”진정우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풀숲에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꺅!”나는 비명을 질렀다.진정우는 나와 두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내 비명을 듣자마자 재빨리 뛰어왔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높이뛰기 하나 제대로 못 했지만 이번엔 완벽하게 뛰어들었다. 마치 착 달라붙은 흡반처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완벽할 정도였다.진정우도 재빨리 나를 단단히 받쳐주며 허리를 감싸안았다.“무슨 일이야?”“뱀이야. 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금 본 게 진짜 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이런 깊은 풀밭에서 뱀이 아니면
나는 내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웃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도 아이처럼 안겨서 빙글빙글 도는 경험이라니.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의 품에 얌전히 기대야 했다.그 순간 문득 이 모든 게 그의 계산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릴 때 너 이렇게 도는 거 좋아했어.”진정우가 내 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진정우를 처음 만났을 땐 정말 어렸었다. 너무 어려서 기억조차 희미했다.그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나도 자연스럽게 물었다.“그럼 난 어렸을 때 또 뭐 좋아했어?”“높이 들어 올리는 거 좋아했고 내 어깨에 올라타서 목마 타는 것도 좋아했지.”진정우의 말에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어쨌든 정우 씨 말이니까 다 믿을 순 없지.”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물놀이도 좋아했어. 물속에서 뛰어놀면서 물을 튀기곤 했지. 온몸이 흠뻑 젖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또 있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졌다.사람은 참으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상한 존재다.그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일 텐데 만약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이 어른이 된 후의 불행을 치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또 하나 있다면 넌 동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어. 근데 내가 이야기를 잘 못 해서 너한테 멍청하다는 소리 들었었지.”그의 말에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동화책만 잔뜩 읽었어. 근데 널 다시 볼 수 없어서 그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없었지.”“근데 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나는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여동생이 태어났는데 몸이 안 좋았거든. 그래서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네 댁에 가서 여동생을 돌보며 살았어.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아마도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마
진정우는 내가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꼬집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너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몰라. 어차피 다 정우 씨가 꾸며낸 이야기잖아.”나는 그가 말한 어릴 적 이야기가 하나같이 황당해서 인정할 수 없었다.“넌 그때 내가 이제 너를 가질 거라고 말했어. 우리는 이미 키스해서 도장을 찍은 거라며 말이지. 이제 넌 내 사람이니 커서 나중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그리고 나에게도 너 말고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어.”진정우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지원아, 그래서 난 네 말대로 했어.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안 해봤고 다른 여자한테 한 번도 마음 준 적 없어. 심지어 다른 여자의 손도 잡아본 적 없어. 정말 네 말 잘 듣고 여태까지 기다렸으니 이제 네가 날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진정우는 마치 내가 거절하면 엄청나게 미안한 사람이라도 될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나는 줄곧 강유형이 나의 죽마고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진정우야말로 진짜 죽마고우였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기억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모든 소중한 순간은 진정우 혼자만 기억하고 있었다.“좋아. 내가 책임질게.”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며 목을 쭉 빼고 발끝을 들어 그의 매끈한 턱을 살짝 물었다.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내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시 도장을 찍어줄게. 이번엔 진하게 말이야. 정우 씨가 내 남자라는 걸 모두가 알아보게.”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작고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쁨은 뚜렷했다.“넌 여전히 어릴 때랑 똑같이 자기주장이 강하네.”“내가 그렇게 자기주장 강한 사람이었어?” 나는 웃으며 반문했지만 사실 그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항상 나는 강유형이나 아줌마 앞에서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자기주장이 강하
나는 멍해졌다.진정우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다시 한번 진정우가 단지 직설적일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나는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는 가운데 머릿속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입이 먼저 움직였다.“왜 안 가는데?”진정우는 침을 한 번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진정우의 이유는 충분했다.연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서로 붙어있고 싶을 것이다. 하루에 24시간, 아니 그 이상으로 서로 곁에 있고 싶어지는 법이다.“근데... 난 정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니야.”나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진정우는 표정이 잠시 굳더니 곧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이렇게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과 그가 보여준 솔직한 태도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그게 바로 진정우였다.“나도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여기 있고 싶어.” 진정우는 어색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런 진정우의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그럼 정우 씨 말은... 나랑 같이 자도 이불 덮고 그냥 얘기만 하겠다는 거야?”진정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뭐... 그런 셈이지.”“그거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내 질문은 점점 더 대놓고 현실적으로 변해갔다.“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진정우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확인해 보자고?’게다가 나도 한 번 진정우가 정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세면도구 챙겨올게. 문 잠그고 안 열어줄 건 아니지?” 진정우는 여전히 솔직하게 바로바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일부러 도발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우 씨가 다시 돌아올 용기가 없는 건 아니야?”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그럴 리는 없을 거야.”그가 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욕실
나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말이다.이전에 진정우를 은근히 놀리던 장면이 떠오르고 그의 절제된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을 보니 문득 안리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정우 씨,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그가 여자 친구도 사귄 적이 없다고 말했던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러자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없어.”두 글자가 내 심장을 강하게 요동치게 했다.“그럼... 하고 싶어?”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더욱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다음 순간 내 시야는 그의 얼굴로 가려졌고 곧이어 내 입술에 강렬한 압력이 느껴졌다.진정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나는 이미 답을 얻었다.하지만 그는 바로 더 나아가지 않고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댄 채 나직이 속삭였다. “얼마나 더 날 시험하려고 해? 아니면 그냥 일부러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니 분명 원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모습이 애달팠다.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물었다.“정말 원해? 아니면 단지 내 몸을 갖고 싶은 거야?”이 말을 꺼낸 순간 과거 강유형이 나에게 던졌던 무심한 말이 떠올랐다.“난 너에게 별로 흥미가 없어.”강유형의 그 말이 얼마나 깊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응.”그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너한테만 그래.”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어떤 무거운 짐이 스르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지...”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나는 그의 입을 막으며 입을 맞췄다.이번에는 내가 그를 당겨 더 나아가도록 했다.“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래?”결정적인 순간에 진정우는 가까스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뭘 기다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정식으로 너를 아내로 맞이하는 날 말이야.”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네가 진심이 아니라면 날 아내로 맞이하더라
‘강유형이 왜 그런 걸까? 왜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었을까? 혹시 어디를 다친 걸까?’이런 꿈은 보통 뭔가를 암시한다고들 했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밤에도 나는 좋지 않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꿈에서 강유형은 앞니 두 개가 빠지며 피가 줄줄 흘렀고 나는 너무 놀라서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부모님은 사고로 나를 떠나버렸다.나는 마음속에 불안이 밀려왔고 옆에 있던 진정우의 시선을 잠시 잊었다.그러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아 식은땀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악몽 꿨어?”진정우의 한마디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그제야 꿈속에서 나는 강유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혹시 진정우가 오해할까봐 나는 서둘러 설명했다.“꿈에서 강유형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내 침대 앞에 서 있었어.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어.”“걱정하지 마. 꿈은 대부분 반대야. 그래도 걱정되면 지금 전화해서 확인해 봐.”진정우가 뜻밖으로 이렇게 말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런 상황에서라면 질투하거나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만약 강유형이었다면 틀림없이 질투했을 것이다.나는 창밖으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았다.진정우에게 더 가까이 파고들며 나지막이 말했다.“피곤해. 조금 더 잘래.”“그래. 빨리 자.”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진정우의 이런 태도는 평소처럼 부드러웠고 전혀 화를 내거나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나는 결국 피로에 지쳐 다시 잠이 들었다.희미한 의식 속에서 진정우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는 느낌이 들렸다. 그리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래도 너는 아직 그를 걱정하는구나.”난 뭔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 9시였다.이 시간에 출근하면 당연히 지각이었다.진정우는 이미 떠난 뒤였고 난 몸을 움직이려 하니 온몸이 쑤시고 무거웠다. 마치 몸이
그는 늘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얼굴이었다. 거짓말을 해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해 보였고 지금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를 보고 나는 더 이상 그가 농담하는지조차 추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그건 애들 장난이지. 그런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진정우, 정말 왜 이래?”그는 채소를 자르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짧게 말했다.“너니까.”정말이지, 이 남자. 달콤한 말을 할 때는 과하다 싶을 정도다.“언니, 나도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든요.”진소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강유형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강유형은 내가 진정우를 데려가고 싶다고 오해했을 뿐이었다.진정우는 내가 데려갈 필요도 없이 놀이공원에 갈 것이었다. 놀이공원 후반 작업, 특히 조명 설계는 그의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까.개장 광고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마케팅팀은 사전 예측을 통해 시간대를 나눠 티켓을 판매하고 입장을 조절했다. 덕분에 혼란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진정우와 나는 진소영을 데리고 전용 통로를 통해 입장했다. 진정우는 내가 특별 손님인 걸 알고 있었기에 진소영을 데리고 놀러 가고 나는 개막식 참석자용 대기실로 향했다.“지원아! 어서 와! 너희 삼촌이랑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한껏 멋을 낸 강유형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나는 강유형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삼촌, 몸은 좀 어떠세요?”“아주 좋아.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고 잠도 푹 자.”그는 농담처럼 말했다.강유형과 강진혁도 정장을 입고 나왔다. 두 사람 모두 훤칠해 눈길을 끌었다. 강유형의 어머니는 그런 두 아들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근데 너 혼자야?” 강유형이 물었다.“정우가 동생 데리고 놀러 갔어.”“점심에 연회가 열릴 거야. 그때 둘 다 같이 오라고 해.”강유형의 아버
“갈 거야.”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가야 했다.그곳은 내게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2년 동안 쏟아부은 노력, 무수한 밤의 땀방울, 내 기대와 후회, 그리고 나의 새로운 시작까지.초대장을 손에 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한 사람 더 데려가도 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진정우야?”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네가 오기만 하면 누구를 데려오든 상관없어.”이건 그의 양보였다. 예전의 그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고마워.”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강유형이 다시 나를 불렀다.“지원아, 내일 부모님도 오실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릴 거야.”그는 분명히 내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알겠어.”나의 대답을 듣고도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결국, 그의 침묵 속에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모든 영상 플랫폼과 지역 전광판에 모두 놀이공원 개장 광고가 떴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만큼 확실히 알리고 싶다는 의미였다.천하의 강유형답게 그의 사업적 감각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이렇게 멀어진 지금도 그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언니, 이 놀이공원이 언니랑 오빠가 연애 시작한 장소 아니에요?”진소영이 TV 속 광고를 가리키며 물었다.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고 진정우를 바라봤다.“맞아요?”“아니.”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럼 어디예요?”진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묻는 소영에게 내가 대신 말했다.“청평. 전에 얘기했던 그 작은 마을.”진정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미묘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정우가 주방으로 간 뒤, 나는 그를 따라갔다.“내가 뭔가 잘못 말했어?”“응.”그는 짧게 답했다.“뭔데?”나는 의아해하
혹시 조나연이 단순히 나에 대한 원망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걸까?그럴 리 없다. 조나연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내가 반격하려는 순간, 진정우와 허진호가 나타났다. 진정우는 내 옆으로 걸어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애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조나연은 그의 강렬한 기세에 몸을 떨며, 더더욱 약한 척하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만약 윤지원 씨가 강유형에게 가지 않았다면 당연히 상관없었겠죠.”진정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대꾸했다.“두 사람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서로 연락하면 어때서요?”그의 반격은 나조차도 조금 놀랐다. 조나연은 그의 태도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아마도 그녀는 진정우가 나를 이렇게까지 옹호할 줄 몰랐을 것이다.그 순간, 그녀가 왜 이런 소란을 피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조나연은 내 연인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강유형에게 돌아간다면? 그녀는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하지만 저 여자가 계속 강유형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잖아요.”조나연은 다시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당신과 강유형의 관계가 정말로 탄탄하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지원 씨가 나쁜 여자라고 나더러 믿으라고 이러는 거잖아요.”역시 진정우다. 그는 조나연의 얕은 속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조나연이 입을 열려 하자, 진정우는 내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한 방을 더 날렸다.“조나연 씨, 당신이 지원 씨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건 알겠는데 감히 여기까지 와서 지원 씨를 괴롭히다니요. 대체 무슨 배짱으로요?”그 순간, 주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참 뻔뻔하네!”그 말을 듣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조나연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뺨이라도 맞은 듯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더 몰아붙일 수도
조나연이 나를 찾아온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다만 우리 회사로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의외였다. 차라리 아파트 앞이나 집 근처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당연히 강유형과 관련된 일이겠지만 이제는 그녀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리셉션 직원에게 간단히 말했다.“그냥 제가 없다고 전하세요.”그런데 퇴근 시간이 되어도 그녀는 여전히 회사를 떠나지 않고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 부장님, 그분이 반나절 동안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드린 물도 손도 안 대셨고요. 임신한 몸이신데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요.” 리셉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조나연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나를 압박하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다음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일이 생기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어요.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라 하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건물을 나섰다.“지원 씨!”갑자기 조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그 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었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하얀 실크 소재의 임산부 드레스를 입고 약간 부른 배를 내보이며, 얼굴에는 약간 홍조가 감돌았다. 아마 방금 큰 소리를 낸 탓일 것이다.“왜 저를 피하는 거예요?” 그녀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피하는 게 아니라, 만나기 싫어서 안 만나는 겁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특유의 약한 척하는 모습으로 힘없이 말했다.“찔리니까 그런 거죠.”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강유형에게 저에 대해 고자질한 거예요? 왜 헤어졌으면서도 여전히 그와 얽혀 있는 거죠?”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였다.그녀가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제 우리 둘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두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화제를
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니, 내가 굳이 거절의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진정우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작업복 스타일의 팬츠를 입고, 검은 오토바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모습에 시선이 저절로 끌렸다.이런 모습의 진정우는 처음이었다.하지만 이런 남자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예전에 강유형도 이런 모습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자신감 넘쳤던 때가 있었다.그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지금도 생생하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타 그의 허리를 감싸고, 밤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그 짜릿한 순간들이.“아직도 오토바이를 좋아하나 봐?”잠시 넋이 나간 사이, 강유형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의도를 눈치챘지만, 나는 가볍게 미소만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정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진정우는 내가 다가가자마자 천천히 걸음을 맞춰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를 막아섰다.진수로!우리 회사의 대표님이자, 진정우와 나의 현재 상사였다.그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빳빳한 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그의 단단한 배와 진정우의 날렵한 체격은 대비가 극명했다.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마치 진정우가 진수로에게 지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진수로가 나를 흘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진정우는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그가 강유형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 향하고 있었고, 걸음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그의 발걸음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오래 기다렸어?”나는 계단 위, 그는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덕분에 우리 눈높이가 나란히 맞았다.“아니.”진정우의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그의 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의 말처럼 그의 마음도 정직하고 솔직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가자.”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그때 진수로가
“지원 씨, 지금 강유형과 같이 계세요? 제 전화 좀 받아달라고 해주실 수 있나요?”조나연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방 안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했다.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 섞인 숨소리와 함께 모든 시선이 내 휴대폰과 강유형 사이를 오갔다.나는 주변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강유형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조나연 씨, 혹시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당신 남자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왜 저한테 전화하시는 거죠?”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이 큰 공간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제... 제 전화를 안 받으까요...”조나연의 목소리는 분명히 기운이 빠져 있었다.“아, 그렇군요.”나는 비웃듯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제가 받아보라고 하면 정말 받을 것 같으세요?”내 말이 끝나자 조나연은 대답하지 못했고 대신 강유형이 내 휴대폰을 확 낚아채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그를 보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이렇게 행동하시면 당신 여자 친구가 더 오해하지 않겠어요? 제가 일부러 대표님께서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이죠.”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아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강유형!”신지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비켜.”강유형은 짧게 말하며 신지태를 밀어냈다.신지태는 내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해 따라오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지태야, 저 둘은 아직 풀지 못한 게 있는 것 같아. 네가 끼어들 필요 없어.”그들에게는 내가 여전히 강유형과 잘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하지만 방금 전의 대화는 나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방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세게 뿌리치며 말했다.“강유형,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내 손 더럽히지 말고.”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강유형의 곁에 있을 때 나는 늘 그에게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 좀 하라고 말했었다. 어울리기 너무 어려운 사람으로 보이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땐 그나마 좀 나았는데 지금의 강유형은 완전히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다.“유형이 너랑 헤어진 이후로 쟤 완전히 딴사람이 됐어. 맨날 저런 얼굴로 세상 다 빚진 사람처럼 굴잖아."신지태가 나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흘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지태 오빠,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나는 그가 지금 시합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만 이 부탁은 그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다.“뭔데?”신지태는 먼저 동의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짜 원인을 좀 알아봐 줄래?”그러자 그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준비해 온 사고 감정서와 의문점을 그에게 보여주었다.“지태 오빠, 날 도와 줄 수 있는 건 오빠뿐이야.”“지원아, 그걸 알아낸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는데?”신지태가 되물었다.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달라질 건 없어. 부모님이 돌아오실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난 진실을 알고 싶어. 그래야 부모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알아볼 거야? 어떤 결과가 나와도 괜찮아?”“응.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았어.”신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지태 오빠, 비용은 내가 낼게.”신지태도 분명히 다른 사람을 시켜서 조사할 것이고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그래. 근데 결과 나오고 나서 얘기하자.”그도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듯 가볍게 말했다.신지태와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모두 술에 취해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지태야! 빨리 와. 오늘 네가 주인공이잖아! 그리고 지원아,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보다 지태랑만 붙어 있잖아!”나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지태 오빠가 나 잘 챙겨
나는 조나연을 따라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단지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보자 머릿속에 딱 두 글자가 떠올랐다.어이없었다.그녀가 바로 내 위층에 살고 있었다.이게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된 걸까?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다행인 건 내 옆집 이웃은 거의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이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 조나연과도 절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그녀의 무거운 걸음걸이를 보니 출산이 가까운 듯했다.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녀는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물건조차 사기 어려워 보였는데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산다니 누가 도왔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강유형.그는 여전히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내가 그런 그를 떠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정우는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며칠 뒤, 지태 오빠가 경기를 마치고 돌아왔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니 함께하자고 했다.“너 경기 보러 못 와서 아쉬웠잖아. 축하 파티엔 꼭 와야지.”나는 고민스러웠다. 그 자리에 강유형과 그의 친구들이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다음에 따로 축하하면 안 될까?”하지만 신지태는 단호했다.“내일 바로 해외로 나가야 해. 이번 아니면 기회 없어.”내가 망설이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설마 강유형이랑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거야?”“맞아.”나는 솔직히 인정했다.그러자 신지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그건 네가 아직도 강유형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는 뜻이야. 만약 정말로 다 정리했다면 강유형도 그냥 아는 사람일 뿐이잖아.”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태 오빠조차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 특히 강유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정말 너무해.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구는 거야?”“내가 언제 안 들었어. 네 얘기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그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려졌다.내가 없어진 걸 알고 CCTV까지 확인하며 나를 찾아다녔겠지. 그리고 결국 내가 강유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강유형이 말한 대로 진정우는 나를 찾기 위해 애썼다.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전화 못 받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땐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거든.”“알아.”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화내지 않았어. 그리고 전화가 안 됐던 이유는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그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네가 어젯밤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물도 안 마셨고. 정말 피곤하고 목이 말라.”그의 말에 마음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간 걸 알면서 왜 잠도 안 자고 물도 안 마신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이래?”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돼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짐을 내려놓고 과일을 정리하더니 나를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였다.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해 나는 침을 삼켰다.“물 준비해 놨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질투 났어.”그의 말에 나는 놀라 멈췄다.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투였는데, 이제 와서 질투했다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말을 막았다.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며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거칠고 마른 입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다.“네가 한 일을 이해해. 그래도 질투는 멈출 수 없더라.”그가 입맞춤을 멈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