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우는 내가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꼬집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너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몰라. 어차피 다 정우 씨가 꾸며낸 이야기잖아.”나는 그가 말한 어릴 적 이야기가 하나같이 황당해서 인정할 수 없었다.“넌 그때 내가 이제 너를 가질 거라고 말했어. 우리는 이미 키스해서 도장을 찍은 거라며 말이지. 이제 넌 내 사람이니 커서 나중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그리고 나에게도 너 말고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어.”진정우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지원아, 그래서 난 네 말대로 했어.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안 해봤고 다른 여자한테 한 번도 마음 준 적 없어. 심지어 다른 여자의 손도 잡아본 적 없어. 정말 네 말 잘 듣고 여태까지 기다렸으니 이제 네가 날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진정우는 마치 내가 거절하면 엄청나게 미안한 사람이라도 될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나는 줄곧 강유형이 나의 죽마고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진정우야말로 진짜 죽마고우였다.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기억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모든 소중한 순간은 진정우 혼자만 기억하고 있었다.“좋아. 내가 책임질게.”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며 목을 쭉 빼고 발끝을 들어 그의 매끈한 턱을 살짝 물었다.진정우가 낮게 신음을 내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다시 도장을 찍어줄게. 이번엔 진하게 말이야. 정우 씨가 내 남자라는 걸 모두가 알아보게.”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작고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쁨은 뚜렷했다.“넌 여전히 어릴 때랑 똑같이 자기주장이 강하네.”“내가 그렇게 자기주장 강한 사람이었어?” 나는 웃으며 반문했지만 사실 그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항상 나는 강유형이나 아줌마 앞에서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자기주장이 강하
나는 멍해졌다.진정우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다시 한번 진정우가 단지 직설적일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나는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는 가운데 머릿속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입이 먼저 움직였다.“왜 안 가는데?”진정우는 침을 한 번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진정우의 이유는 충분했다.연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서로 붙어있고 싶을 것이다. 하루에 24시간, 아니 그 이상으로 서로 곁에 있고 싶어지는 법이다.“근데... 난 정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니야.”나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진정우는 표정이 잠시 굳더니 곧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이렇게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과 그가 보여준 솔직한 태도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그게 바로 진정우였다.“나도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여기 있고 싶어.” 진정우는 어색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런 진정우의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그럼 정우 씨 말은... 나랑 같이 자도 이불 덮고 그냥 얘기만 하겠다는 거야?”진정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뭐... 그런 셈이지.”“그거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내 질문은 점점 더 대놓고 현실적으로 변해갔다.“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진정우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확인해 보자고?’게다가 나도 한 번 진정우가 정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세면도구 챙겨올게. 문 잠그고 안 열어줄 건 아니지?” 진정우는 여전히 솔직하게 바로바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일부러 도발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정우 씨가 다시 돌아올 용기가 없는 건 아니야?”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그럴 리는 없을 거야.”그가 방으로 돌아가자 나는 욕실
나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말이다.이전에 진정우를 은근히 놀리던 장면이 떠오르고 그의 절제된 매력이 느껴지는 얼굴을 보니 문득 안리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정우 씨,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그가 여자 친구도 사귄 적이 없다고 말했던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러자 진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없어.”두 글자가 내 심장을 강하게 요동치게 했다.“그럼... 하고 싶어?”그 말을 들은 진정우는 더욱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다음 순간 내 시야는 그의 얼굴로 가려졌고 곧이어 내 입술에 강렬한 압력이 느껴졌다.진정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나는 이미 답을 얻었다.하지만 그는 바로 더 나아가지 않고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댄 채 나직이 속삭였다. “얼마나 더 날 시험하려고 해? 아니면 그냥 일부러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니 분명 원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모습이 애달팠다.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물었다.“정말 원해? 아니면 단지 내 몸을 갖고 싶은 거야?”이 말을 꺼낸 순간 과거 강유형이 나에게 던졌던 무심한 말이 떠올랐다.“난 너에게 별로 흥미가 없어.”강유형의 그 말이 얼마나 깊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응.”그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너한테만 그래.”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어떤 무거운 짐이 스르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지...”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나는 그의 입을 막으며 입을 맞췄다.이번에는 내가 그를 당겨 더 나아가도록 했다.“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래?”결정적인 순간에 진정우는 가까스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뭘 기다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정식으로 너를 아내로 맞이하는 날 말이야.”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그러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네가 진심이 아니라면 날 아내로 맞이하더라
‘강유형이 왜 그런 걸까? 왜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었을까? 혹시 어디를 다친 걸까?’이런 꿈은 보통 뭔가를 암시한다고들 했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날 밤에도 나는 좋지 않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꿈에서 강유형은 앞니 두 개가 빠지며 피가 줄줄 흘렀고 나는 너무 놀라서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부모님은 사고로 나를 떠나버렸다.나는 마음속에 불안이 밀려왔고 옆에 있던 진정우의 시선을 잠시 잊었다.그러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아 식은땀을 닦아주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악몽 꿨어?”진정우의 한마디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그제야 꿈속에서 나는 강유형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혹시 진정우가 오해할까봐 나는 서둘러 설명했다.“꿈에서 강유형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내 침대 앞에 서 있었어.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어.”“걱정하지 마. 꿈은 대부분 반대야. 그래도 걱정되면 지금 전화해서 확인해 봐.”진정우가 뜻밖으로 이렇게 말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런 상황에서라면 질투하거나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만약 강유형이었다면 틀림없이 질투했을 것이다.나는 창밖으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았다.진정우에게 더 가까이 파고들며 나지막이 말했다.“피곤해. 조금 더 잘래.”“그래. 빨리 자.”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진정우의 이런 태도는 평소처럼 부드러웠고 전혀 화를 내거나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나는 결국 피로에 지쳐 다시 잠이 들었다.희미한 의식 속에서 진정우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는 느낌이 들렸다. 그리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래도 너는 아직 그를 걱정하는구나.”난 뭔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 9시였다.이 시간에 출근하면 당연히 지각이었다.진정우는 이미 떠난 뒤였고 난 몸을 움직이려 하니 온몸이 쑤시고 무거웠다. 마치 몸이
놀이공원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면 결국 문제는 강유형이라는 얘기다.꿈속에서 본 장면과 이번 전화를 건 목적을 떠올리며 나는 강진혁에게 물었다.“설마 강유형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강서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 후에야 입을 열었다.“사실 네가 정말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나을 수 있어.”결국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강진혁의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도 강진혁은 늘 그렇듯 나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내 말뜻은... 너희 둘이 비록 연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오래 지냈으면 이미 가족 같은 사이잖아.”“하...”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그거야 강유형 지금 여자 친구가 질투할까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그러자 강진혁도 덩달아 웃었다.“지원아, 시간 되면 같이 밥이라도 한 번 먹자.”그의 말투는 진심 같았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유형에게 특별한 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하지만 내가 왜 그런 꿈을 꿨을까?어제 그가 했던 말 때문일까? “내가 죽으면 넌 마음이 아플까?”10년의 세월 동안 강유형의 존재는 이미 내 피와 살에 녹아 있었다. 단지 마음먹는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진정우와 새로운 시작을 했고 강유형은 결국 내 인생에서 한때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진정우에게서 문자가 왔다.[깼어?]내가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또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아침은 보온 박스에 넣어 뒀어. 꼭 챙겨 먹고. 오늘은 회사에 안 나와도 돼.]‘뭐야? 겨우 입사한 신입 사원 주제에 대체 무슨 사장님 같은 말투야?’하지만 그의 연봉이 6억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임은 틀림없었다.그가 반차를 신청하면 허진호가 당연히 받아줄 것이다.그런데 나는 이 상황이 조금 불편했다.아무리 진정우가 내 남자 친구라지만 내 사생활 특히 내 업무까지 간섭할
“안녕, 누나!” 조태혁이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벌써 한 시간이나 기다렸어. 누나 오늘 좀 늦었네.”그는 손목시계를 흔들며 말했다.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꾹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오늘은 굽 낮은 신발을 신었다. 다리가 너무 풀려서 높은 구두는 엄두도 못 냈다.“누나, 어디 아파?”꼬마 녀석이 눈치 하나는 빨라서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내 걸음이 순간 흔들리자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조태혁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그의 앞에 앉았다.“그래. 뭐 하러 왔는데?”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말을 돌렸다.“누나, 어젯밤 잘 못 잤어?”조태혁 이 녀석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이 점점 더 대놓고 말했다.나는 태연한 척 자세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아니면 꺼져. 아니면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너 이거 명백한 스토킹이거든.”“하하. 누나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네.”“헛소리 그만하고... 왜 온 건데?”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며 쏘아붙였다.“누나를 쫓아다니고 싶어서 그래.”조태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의 말에 나는 화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가 날 자극하려는 게 뻔했기 때문이다.내가 화를 내면 그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니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너 아직 미성년자 아니니? 정말 날 좋아한다면 너희 부모님을 데리고 와서 얘기해.”나는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단호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말 시간 있어?”그가 갑자기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몸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누나, 이번 주말에 내 생일이야. 드디어 나도 이제 성인이 되거든. 그러니까 성인식에 내 여자 친구로 와줄 수 있어?”그의 말에 기가 막힌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정말 배짱 하나는 좋네.’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조태혁, 네가 어떤 의도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날 자극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진정우가 무턱대고 행동하지 않고 먼저 내 의견을 물어봐 준 것이다.“네, 진...”나는 말을 멈췄다. 그가 회사에서 정확히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실력을 보면 분명 엔지니어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정우 씨, 손님 좀 내보내 주세요.”나는 이렇게 말하며 돌아섰다.하지만 조태혁은 진정우가 들어왔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놀리며 장난을 쳤다.“누나, 주말에 봐. 그날 밤 누나가 내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정우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조태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이제 그만 나가.”조태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누나, 퇴근할 때까지 여기 있을게. 우리 점심 같이 먹자.”나는 잠시 멈췄다가 돌아서서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를 한 대 때려줄까 고민했다.하지만 내가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진정우가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나가라니까.”“네가 뭔데? 네가 나가라면 나가야 해?”조태혁은 겁도 없이 도발하듯 비웃으며 대꾸했다.“저 여자 건드리지 마.”진정우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내뱉었다.날렵한 턱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조태혁도 그의 말에 잠시 얼어붙더니 이내 다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설마 당신도 우리 누나 맘에 두고 있어?”풉!이번에는 내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조태혁, 이 녀석은 진짜 주제를 모르고 덤비는구나.진정우를 '아저씨'라고 부르다니, 이건 분명히 비꼬고 약 올리는 거였다.나는 진정우를 힐끗 보며 속으로 걱정했다.남자라면 나이를 들먹이며 늙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하지만 조태혁은 여전히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한술 더 떴다.“아저씨, 이 나이에 어린 여자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몸이 따라줄까 싶네.”그러면서 엉덩이를 슬쩍 흔들며 비꼬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그의 말투는 분명 정중했다. 그런데도 내 귀에는 상사가 명령하듯 들렸다.그리고 그가 나를 부른 건 절대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어제는 꽃을 보낸 이에 대해 물어보더니, 오늘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다.이건 아무래도 나를 추궁하려는 거 아닌가?이제야 알았다. 남자 친구를 사귀는 건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만약 진정우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태혁이 들이대는 것도 가볍게 쫓아내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진정우의 기분까지 맞춰야 했다.‘역시 세상에 속이 넓은 남자는 없나 보네.’동료들이 모두 지켜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진정우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은 나와 그리 멀지 않았고 내부 인테리어는 심플했다. 하지만 방 안은 온갖 장비들로 꽉 차 있었다.책상과 의자, 컴퓨터 외에도 각종 전자 장비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다.무슨 용도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 연봉 6억의 가치를 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장비들을 흘끗거리며 둘러보았다. 그때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돌아서며 무심하게 인사를 건넸다.“정우 씨.”들어오기 전, 그의 사무실 문패에서 총괄 엔지니어라는 직함을 확인했었다.이 정도 직책이면 연봉 6억도 이상하지 않았다.진정우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침은 먹었어?”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곤 했는데 어젯밤 일을 떠올리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더 어려웠다.나는 방 안의 장비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응.”“오늘 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회사에 나온 거야?”그의 물음에 나는 기계를 구경하던 동작을 멈췄다.그리고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선 넘지 마. 여긴 회사야.”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덧붙였다.“우리가 연인이라고 해서 정우 씨가 내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게 설령 나를 위한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정말 너무해.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구는 거야?”“내가 언제 안 들었어. 네 얘기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그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려졌다.내가 없어진 걸 알고 CCTV까지 확인하며 나를 찾아다녔겠지. 그리고 결국 내가 강유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강유형이 말한 대로 진정우는 나를 찾기 위해 애썼다.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전화 못 받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땐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거든.”“알아.”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화내지 않았어. 그리고 전화가 안 됐던 이유는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그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네가 어젯밤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물도 안 마셨고. 정말 피곤하고 목이 말라.”그의 말에 마음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간 걸 알면서 왜 잠도 안 자고 물도 안 마신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이래?”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돼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짐을 내려놓고 과일을 정리하더니 나를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였다.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해 나는 침을 삼켰다.“물 준비해 놨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질투 났어.”그의 말에 나는 놀라 멈췄다.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투였는데, 이제 와서 질투했다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말을 막았다.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며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거칠고 마른 입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다.“네가 한 일을 이해해. 그래도 질투는 멈출 수 없더라.”그가 입맞춤을 멈추
나는 눈을 감았다.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정우 씨는 어딘데?”“집 앞이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에 그가 텅 빈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그려졌다.내가 이사를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그는 당연히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핸드폰이 없길래 소영이한테 물어봤더니 네가 집에 돌아갔다고 했어. 리영 씨도 수술 중이라 연락이 안 되고...”진정우가 이유를 설명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새집을 둘러보며 대답했다.“나도 정우 씨가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알아.”그의 짧은 대답에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다.그에게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만나서 이야기할게. 너 이사 간 거야?”지금 이 새로운 집은 진정우도 모르고 있었다.그전에 그는 셋집을 구했다고 나한테 말하면서 나보고 그곳으로 오라고 했고 나도 그 당시 동의했다.하지만 진정우가 연락이 되지 않자 갈 곳이 없던 나는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응. 네 짐도 다 가져왔어.”바닥에 놓인 그의 짐가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사실 그의 짐은 별로 없었다. 그가 살던 곳의 많은 것들은 원래 집주인의 것이었다.그는 잠시 말이 없었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아서 나는 바로 말했다.“택시 타고 자호 가든으로 와. 내가 입구에서 기다릴게.”“알았어.”나는 전화를 끊고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인 뒤 컵 두 개에 식히고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 단지는 작년에 완공된 새 아파트였고 깔끔하고 환경도 좋았다.나는 단지를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보낸 뒤 약속한 입구로 갔다.마침 입구 근처의 과일가게가 새로 문을 열고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 몇 가지 과일을 골랐다. 계산하려던 순간 진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과일가게 안에 있어. 들어와.”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내가 손을 흔들자 그는 빠르게 걸어왔다. 그의 눈길이 내 얼굴에 고정된 것을 느끼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뭐
“그럴 일은 없을 거야.”진소영은 내가 한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요! 오빠가 돌아오면 언니랑 빨리 결혼해야 해요. 그래야 아무도 언니를 노릴 수 없잖아요.”철없고 순진한 동생 같은 말에 웃음이 났다. 세상에는 '이혼'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를 것이다.하지만 나는 진소영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가볍게 대답했다.“그래, 나도 네 오빠가 빨리 나 데려가길 기다리고 있어.”진소영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진정우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언니가 오빠가 데리러 오기만 기다리고 있대요. 얼른 와서 청혼해요!”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메시지를 보낸 뒤 진소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근데 오빠 왜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봐요?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죠?”그 말에 나도 잠시 마음이 철렁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글쎄, 어쩌면 가는 길에 다른 예쁜 여자한테 홀렸을지도 몰라.”“그럴 리 없어요! 오빠는 예전부터 쫓아다니는 여자들한테도 관심 없었어요. 오직 언니만 좋아했거든요.”진소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웃으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 아침을 함께 먹고 나서 나는 간병인에게 진소영을 맡기고 병원에서 나왔다.안리영이 준비해 준 예비 핸드폰과 새 번호를 받아 들고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불안감이 커졌지만 지금 당장 그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나는 집에서 부모님 사고와 관련된 자료를 꺼내 다시 살펴봤다.보고서에는 사고 원인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차량이 통제력을 잃고 전복된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브레이크 고장이라니?이게 단순한 차량 문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손을 댄 걸까?보고서는 이 의문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왜 당시에는 이런 부분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이 모든 사고 처리를 삼촌이 맡았
진소영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진정우에게 전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핸드폰이 드디어 연결된 걸까?처음엔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묵묵히 서서 진소영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오빠, 지원 언니 전 남자 친구가 언니를 보는 눈빛이 이상해. 분명히 아직도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오빠, 혹시 언니랑 싸운 거 아니야? 언니가 아까부터 계속 멍하니 있었어.”“왜 문자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한 가지 확실히 말해둘게. 만약 언니랑 헤어지면 나도 오빠랑 안 볼 거야.”“빨리 답장해. 전화 받으라고!”마지막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통화 중이 아닌 음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진정우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궁금해졌다.나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음성 메시지를 보내는 걸 엿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병실 문을 다시 열고 더 큰 소리로 문을 닫았다.“언니!”진소영이 문소리를 듣고 날 불렀다.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숨기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며 웃었다.“별생각 하지 마.”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아까 병실에 왔던 사람이 내 전 남자 친구였어. 하지만 다 지난 일이야. 지금은 그냥 친구 아니면 형제 같은 관계야.”진소영은 빤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언니, 그럼 그 사람이랑 어떻게 만나서 연애했는지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그녀의 순수한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려는 것 같았다.아마 그녀는 로맨스 소설 속 사랑 이야기만 접해봤기에 현실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더 궁금했을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더 알고 싶기 마련이다.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그녀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게 뻔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 너의 궁금증을 풀어줄게.”나는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진소영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강유
“그 나쁜 계집애가 강유형을 믿고 이러는 거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아줌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줌마, 우선 조나연이 삼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해요.”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무슨 말을 했겠어? 당연히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다는 얘기겠지. 대놓고 우리한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했을 거야.”아줌마의 말투에서 조나연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천만에. 세상에 여자가 다 없어져서 강유형이 평생 혼자 산다 해도 그런 년을 절대 우리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나는 그녀의 분노가 삼촌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화를 풀게 두고 있었다.그리고 얼마 후 아줌마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지원아, 지켜봐. 내가 그년을 제대로 혼쭐낼 거야.”그 말을 듣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강유형 집에 들어온 지 2년째인가 3년째 되는 해 아줌마와 삼촌은 이혼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줌마가 누군가를 혼쭐내겠다고 전화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아줌마는 상대방에게 내 남편을 건드리지 말라며 경고했다.그 일 후, 삼촌과 아줌마는 크게 다퉜고 삼촌은 아줌마를 지독한 여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오늘의 아줌마도 그때와 비슷했다. 나는 이번에도 아줌마가 무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그녀를 말리지 않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삼촌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제가 조나연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볼게요. 어떤 속셈인지 확인한 후 그다음에 대책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아요.”나는 차분히 설득했고 아줌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마침내 동의했다.“그래. 네가 가서 물어봐. 하지만 분명히 전해줘. 만약 너희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년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라고.”그 마지막 말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병실에 갑자기 나타나자 내 첫 반응은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물었다.“삼촌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강유형은 병실 안을 둘러보지 않고 나만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으셔.”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엄마가 널 찾으셔.”안도의 한숨이 나왔다.“무슨 일인데?”“글쎄... 나도 모르겠어. 급한 것 같아. 어서 너 보고 전화하라고 하셨어.”그는 다시 핸드폰을 내 앞에 내밀었다.내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으려는 순간 뒤에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이분은 누구세요?”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진소영은 이미 내가 진정우랑 왜 싸웠을까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강유형이 내 전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게다가 그녀는 로맨스 소설로 가득 찬 머릿속을 가지고 있으니 온갖 상상을 할 게 분명했다.“저기... 내 오빠야.”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한 냉기가 주위를 감싸는 걸 느꼈다.나는 강유형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반응이 예상되었다.나는 진소영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너는 구운 배를 마저 먹어.”진소영은 손에 작은 스푼을 든 채 강유형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경계와 방어의 기색이 가득했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가자.”그 순간 진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저분이 둘째 오빠인 걸 저도 알아요.”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강유형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그가 지금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불편한 걸까?하지만 우리가 이미 헤어진 사이고 그의 부모님은 나를 건너뛰어 의붓딸 삼겠다고 했으니 강유형은 엄연히 내 둘째 오빠가 맞다.“맞아. 둘째 오빠야.”나는 단호히 대답했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병실을 나섰다.병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의
그러자 진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야죠.”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좋아. 언니가 응원할게.”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격려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근데 이 책들 혼자 이해할 수 있겠어? 혹시 어려우면 원포인트로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볼까?”진소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언니. 심장 이식받고 나서 그런지 전보다 머리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이 책도 금방 이해되더라고요.”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자 진소영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언니, 혹시 이 심장의 주인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걸까요?”“무슨 소리야. 공부 잘하는 건 머리로 하는 거지 심장이랑은 상관없어.”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사실 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괜히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그녀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넌 원래 똑똑해. 네 오빠도 그렇게 말했잖아.”나는 진소영을 다독이며 말했다.진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언니, 저 정말 대학 가고 싶어요. 캠퍼스 생활도 해보고 싶고요.”“좋아!”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격려하며 책을 몇 장 넘겨보았다. 책에는 필기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고 누군가 사용했던 헌책인 것 같았다.“이 책들은 누가 구해줬어? 네 오빠가 준 거야?”“아니에요. 어떤 친구가 줬어요.”진소영은 말하면서 시선을 약간 피했다.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나는 살짝 장난스럽게 물었다.“어머. 병원에서도 친구를 사귀었어? 그것도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니... 대단한데?”진소영은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친구라고 하기엔 좀 그래요...”“그럼 어떤 사람이야?”나는 모르는 척 더 물어봤다.“다른 병실 환자 가족이에요. 그분이 책 보다가 병실을 착각해서 우리 방에 들어왔어요. 처음엔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까 박사 준비 중이래요...”진소영의 말을 들으니 꽤
“강 대표님께서 지원 씨 목이 잠겼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부탁해서 구운 배에 도라지를 넣어달라고 하셨어요. 한밤중에 주문한 건데도 지금도 따뜻하네요.”고준석은 말을 마치며 따뜻한 구운 배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건넸다.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나는 봉투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고준석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윤 팀장님, 지금 사시는 아파트로 모실까요?”그 아파트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이었다.그가 이렇게 쉽게 물어본 걸 보니 지난번 한밤중에 강유형이 우리 집 아래에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아마 고준석이 미리 알아보고 강유형에게 정보를 준 게 분명했다.“아니요. 괜찮아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고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룸미러로 나를 쳐다봤다.“그럼 어디로...”“고 비서님, 차를 세워주세요.”내 말에 고준석은 움찔하며 차를 한쪽에 세웠다.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윤지원 씨, 무슨 일이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 병원 외과 병동으로 가주세요.”잠시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아직 병원에서 회복 중인 진소영을 찾아가야 한다는 걸 말이다.고준석은 금세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소영의 수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걸 보니 강유형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해서 그런지 아니면 강유형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 못 하면 돌아가서 욕을 먹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지 몰랐다.“괜찮아요.”나는 말하며 차에서 내리려 했다.“윤 팀장님.”그가 나를 다시 불렀다.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따뜻한 구운 배로 향해 있었다.“강 대표님은 여전히 윤 팀장님을 위해 정말 많이 신경 쓰십니다. 만약 제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두 분은 결혼하셨을지도 모릅니다.”그 일이 아직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
나는 왜 그를 밀쳐내지 못했을까?강유형은 여전히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착각하며 집착한다면 나는 그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결국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건 그 자신일 테니까.이것은 어쩌면 하늘이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아니면 내 부모님이 하늘에서 내 지난 10년간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강유형이 나와의 과거를 잊지 못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조금 있으면 고준석이 핸드폰을 가져다줄 거야. 들어가서 푹 쉬어.”강유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허리를 감싸던 손을 풀었다.그는 뒤돌아섰고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꼿꼿했다.한때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던 내가 이제는 그 모습이 아련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나는 로비로 내려갔다.문을 나서려는 찰나에 고준석이 도착했다.“윤 팀장님.”나는 더 이상 그의 비서가 아니었지만 고준석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하지만 호칭 따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강 대표님이 직접 주문하신 핸드폰입니다. 윤지원 씨가 쓰시던 브랜드의 최신 모델이에요.”그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핸드폰은 필요 없으니 당신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고준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윤 팀장님, 그건 조금...”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한 번 거절한 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핸드폰 빌릴 수 없으면 그냥 됐어요.”나는 말하며 돌아섰다.“아, 알겠어요!”고준석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그 핸드폰을 받아 들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자동 응답 메시지가 들려왔다.진정우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혹시 진정우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간 걸까?혹시 몰라 내 핸드폰에도 전화를 걸어봤다. 이번엔 통화 연결음이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진정우가 화가 나서 내 전화를 일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