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나의 눈꺼풀이 두 번 크게 떨렸다.‘왼쪽 눈이 떨리면 돈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들었는데...’나는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난 아무 대책도 없이 나설 순 없었다.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신지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태 오빠, 나 지금 용준호 만나러 가. 혹시 모르니까 좀 챙겨줘.”메시지를 보낸 후 바로 답장은 없는 걸 봐서는 아마 지금 훈련 중일 것이다.그래. 훈련 중일 거야. 게으름 피우며 자고 있을 리는 없지. 신지태는 곧 있을 대회를 위해 연습과 체력 훈련에 매진 중이었다.답장이 없더라도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면 분명 메시지를 확인할 테고 어차피 용준호를 만나러 가기까지 시간이 있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가속 페달을 밟아 세상 요양원으로 향했다.네가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용준호의 거대한 랜드로버는 이미 요양원 입구에 주차되어 있었다.멀리서 보니 그는 팔을 휘저으며 체조인지 태극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운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폼만 잡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우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아마 내가 늦었다는 걸 이렇게 은근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나는 차에서 내려 빠르게 걸어가며 예의를 차렸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그는 동작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아깝지 않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그는 갑자기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들어가려고?”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야 말았다.‘아차, 빈손으로 왔네.’하지만 솔직히 말할 순 없어서 난 핑계를 적당히 둘러댔다.“죄송해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꽃집이 문을 안 열었어요.”그는 피식 웃으며 짧게 웃었다.“하! 정말 그럴싸한 변명
용준호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그는 웃으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나는 그 말에 멍해졌지만 이내 비웃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아침부터 이런 농담은 좀 아니지 않나요? 게다가 대표님도 잘 알잖아요.”용준호는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농담 아니야. 내 여자 친구가 돼야 우리 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그의 말에 나는 굳어버렸다.이건 분명히 여자 친구라는 명목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거였다.이래서 아까 떨리던 눈꺼풀이 그냥 떨린 게 아니었구나.용준호는 자세히 설명했다.“아마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평생 의심이 많으신 분이야. 아무도 믿지 않지. 특히 지금은 위치가 다르니까 더 그래. 아버지에게 접근하려는 사람 중에 진심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시간 낭비를 막으려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안 만나.”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비웃었다.이건 핑계에 불과했다.“그리고 말이야.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나야 이름값처럼 이런저런 연애를 많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다 장난이었어.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도 절대 허락 안 하셨을 거야.”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정직하고 단아해 보이는 사람이야. 딱 집안 살림 잘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그런 사람 같아. 그래서 너를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 눈빛은 뜻밖에도 진심처럼 느껴졌다.어제는 재벌 2세가 나를 쫓아다니겠다더니 오늘은 바람둥이가 진지하게 고백이라니.나에게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몰리는 걸까?하지만 나는 이미 진정우과 사귀고 있었다.이 모든 일이 진정우의 존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대표님의 진심은 잘 알겠어요. 고맙기도 하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요.”나는 그의 직접 거절했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너무 뻔한 핑계 아니야? 지난번에 지태
“네 생각에는?”용준호가 또다시 내게 되물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볼게요.”그러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에게 돌려주려 했다.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받는 시늉을 하더니 꽃잎 하나를 떼어 코끝에 가져가며 향을 맡았다.“이야기해 봐. 대체 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는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아버지에게 보여줄 물건 때문에 찾아온 줄 알더니 이제는 내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이제 와서 더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았다.내 말을 들은 용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나는 그러는 용준호가 뭔가 이상했다.“왜요?”“네가 그 일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는 거라면 만나도 소용없어. 우리 아버지는 절대 너한테 알려 주지 않을 거야.”그의 말투는 마치 아버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하지만 정말 문제가 없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대답하지 않겠다는 건 결국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만나야 하고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만약 제가 끝까지 만나겠다고 한다면요? 대표님께서 말하지 못할 비밀이 없을지도 모르잖아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용준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고집 세네. 꼭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아픈 줄 알겠어? 그래. 그럼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허락하면 널 안으로 데려가 줄게.”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고 스피커폰을 켰다.“무슨 일이냐.”전화 너머로 들려온 용 회장의 목소리는 굵고 단호했다.“별건 아니고 사람 하나 데려가려고요. 여자예요.”용준호는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말을 아꼈다.“쓸데없는 여자 좀 데리고 오지 말라고 몇 번 말했잖아!”용진표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그러자 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버지, 그런 여자는
마침 그런 생각이 스치던 순간 내 핸드폰이 울렸다.정말이지 어색함의 끝판왕이었다.용준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원 씨,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날 그렇게 못 믿으면서 왜 굳이 이곳으로 온 거야?"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그러자 용준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덤덤히 말했다.“앞으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그렇게 말하고는 차에 올라타더니 한순간에 떠나버렸다.불어오는 바람이 내 옷자락을 흔들고 머리를 흐트러뜨렸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마음이 바뀌는 속도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십 분 전만 해도 나한테 고백하고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했던 사람이 단지 한 통의 전화 때문에 이렇게 태도를 바꾸다니.하지만 난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더 이상 그가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속이 편해졌다.용준호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요양원의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면서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삼촌이 오늘의 중요한 손님일까?그 생각에 나는 망설이다가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한테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아줌마, 무슨 일이세요?”“같이 점심 먹으려고. 전에 자주 가던 일품 레스토랑으로 와줄래? 11시에 맞춰 오면 돼.”아줌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약속을 잡아버렸다.나는 일단 거절하지 않고 대화의 흐름에 따라 아줌마에게 물었다.“삼촌도 오세요?”“아니. 네 삼촌은 오늘 외출했어. 아마 오후쯤에나 돌아오실 거야.”아줌마의 말에 나는 의심이 들었다.삼촌은 회사 업무를 강유형에게 넘긴 뒤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분이었다.“먼 곳으로 가신 거예요?”“아니. 그냥 옛 친구 만나러 가셨어. 매번 만나면 꼭 차 마시고 바둑 두시곤 해.”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손으로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아마도 내 짐작이 맞은 것 같았다. 삼촌이 바로 오늘 용진표가 말했던
나는 결국 가기로 했다.어쩌면 아줌마에게서 우리 부모님 교통사고의 진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나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줌마와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그래서 나는 회사로 향했다.“좋은 아침입니다. 윤 부장님!”허진호가 활짝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마치 내가 보기만 해도 그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허 부대표님.”“윤 부장님, 오늘 기분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연애라도 시작하신 건가요?”그의 농담 섞인 질문에 문득 어제 진정우와 있었던 달콤한 순간들이 떠올라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허 부대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사적으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내 연애사를 굳이 밝힐 이유는 없었다.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러나자 나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오늘은 월요일이라 부서 주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회의 중 각자 지난주의 성과를 보고하던 중 직원 중 한 명인 이한석이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윤 부장님, 이번에 새로 협의한 조명 업체와의 계약서입니다. 신생 회사인데 현재 우리 기술 지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계약 세부 사항 한 번 검토해 주세요.”내가 계약서를 펼쳐 보니 회사가 설립된 지 채 한 달도 안 됐다.“설립한 지 한 달도 안 됐네요?”“네. 아주 신생 회사입니다.”이한석은 눈치 보며 답했다.신생 회사와의 협업은 3년 이상 운영된 회사와 비교했을 때 리스크가 훨씬 컸다.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기 때문이다.내가 반대할까 봐 이한석은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협의하면서 서비스 비용을 미리 조정했어요. 계약금 50%를 선불로 지급하고 협업이 절반 진행될 때 25%를 추가 지급하고 나머지는 프로젝트 완료 후에 정산받기로 했습니다.”그의 말을 듣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진짜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가 보네요.”“맞아요. 진심으로 의욕을 보이더라고요. 제가 거절하면 오히려 미안할
허진호는 전화를 끊고 깊게 숨을 내쉰 후,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앉으세요, 윤 부장님.”그가 손짓하며 권했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그러자 허진호는 또 한숨을 쉬며 말했다.“요즘 고급 인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드네요.”아까 통화 내용을 얼핏 들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물었다.“우리 회사 기술 인력이 많이 부족한가요?”“네, 어제 기술팀 엔지니어 한 명이 퇴사를 얘기했어요. 원래도 기술 인력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정말 답이 없죠.”허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보기 드물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평소 늘 여유롭고 낙천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그였기에 이런 모습은 낯설었다.나는 요즘의 인력 시장 문제를 자연스럽게 언급했다.“요즘 국내 인력 시장이 많이 양극화되고 있잖아요. 고학력 인재는 넘치는데 실전 경험이 풍부한 고급 기술 인재는 부족하고 단순 노동자는 많지만 현장에 들어가 진짜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든 상황이에요.”허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확합니다! 윤 부장님은 업무 능력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 보는 눈도 있으시네요. 다재다능하시네요.”그의 과장된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향이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이 회사 자료를 검토해 봤는데 신생 회사임에도 경영진 구조나 향후 발전 가능성이 괜찮아 보입니다. 게다가 협력 의지도 확실히 느껴지고요.”허진호는 계약서를 받아 들여다보며 말했다.“좋아요. 제가 한 번 살펴본 뒤 결정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아줌마와의 약속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말했다.“허 대표님, 오늘 점심에 잠시 외출할 일이 있어서 오후에 조금 늦게 들어올 것 같습니다.”허진호는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윤 부장님, 그런 건 굳이 보고 안 하셔도 돼요. 알아서 하세요.”“감사합니다.”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허진호가 다시 나를 불렀다.“윤 부장님, 아까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인재 시장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던데 혹시 기술 분야의 인재를 아시거나 추천해 주실 만한 분이 있으면
“윤지원 씨, 물건 확인하고 사인 부탁드립니다.”퀵서비스 직원이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건넸다.순백의 장미!내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나의 꽃 취향을 아는 건 나와 친한 사람 몇 명뿐이다.처음 떠오른 건 역시 강유형이었다.매년 내 생일마다 그는 순백의 장미를, 평소에는 흰 장미를 보내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 꽃을 보낸 걸까?잠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퀵서비스 직원은 꽃을 다시 내게 건넸다.주문이 밀려 보이는 그가 헐떡이며 기다리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꽃을 받았다.“누가 보낸 거예요? 혹시 남자 친구?”언제나처럼 참견을 놓치지 않는 허진호가 뒤에서 물었다.부정하려는 순간, 꽃다발 속에 꽂혀 있던 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허진호가 번쩍 허리를 굽혀 카드를 주워 건네며 말했다.“여기요.”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누나, 굿모닝. 좋은 하루!”이 ‘누나’라는 단어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건 조태혁, 그 짜증 나는 얼굴이었다.도대체 어떻게 이 녀석이 내가 장미를 좋아하는 걸 알았을까?잠깐 고민하다가 금세 답이 나왔다. 분명 조나연이 알려준 것이다.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정말 이 남매, 대단하다.조나연은 내 약혼자를 빼앗더니, 이번엔 동생을 시켜 나를 유혹하려고? 이러다 내가 정말 받아주면 조나연은 더 기분 나빠지겠지?“누가 보낸 건가요?”허진호가 끈질기게 물었다.나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웃으며 말했다.“저를 좋아하는 연하남이요.”“네?”허진호는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부장님, 남자 친구가 보낸 거예요? 정말 예쁘네요!”“부장님은 역시 특별해요. 흰색 장미를 좋아하시다니!”...동료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장난을 쳤다.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평범하거나 눈치 없는 사람이면 어떻게 여러분과 함께 일할 수 있었겠어요?”이 한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고 모두를 일하러 돌려보냈다.나는
‘연하남.’나는 연하남이 보낸 꽃이라고 콕 짚어 말했다.그리고 진정우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1초, 2초, 3초가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어라?이게 무슨 상황이지?혹시 화난 건가?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건가?답답한 마음에 다시 문자를 보내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그리고 썼던 글을 지웠다.‘다른 사람이 준 꽃에 화를 낸다면, 그건 강유형과 뭐가 다를까?’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회사에 다닐 때도 나를 좋아한다고 접근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그럴 때마다 강유형은 화를 냈고 심지어 나를 탓했다.내가 너무 잘난 척을 한다느니, 왜 사람들한테 오해 살 행동을 하냐느니.결국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남자들과 거리를 두곤 했다.그런 억울한 날들은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했다.그래서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휴대폰이 울렸다.메시지가 아닌 전화였다.나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왜?”“왜 문자 안 봐?”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다시 열어봤다.그가 보낸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솔직히 나 기분 안 좋아. 근데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뭐 다른 사람이 꽃 선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좋아하면 안 돼.][그리고 그런 말 하지 마. 나 불안하단 말이야.]문자를 읽고 나니, 그는 참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나는 문득 할 말을 잃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그가 다시 물었다.나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화난 건 아니야. 그냥...”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질투가 좀 나서.”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질투? 진정우가 질투한다니. 사진 찍어서 보여줘 봐.”그는 민망했던지 화제를 돌렸다.“점심 뭐 먹을 거야?”나와 함께 먹고 싶은 걸까? 아니면 도시락이라도 챙겨줄 생각인가?하지만 나는 이미 아줌마와 약속이 있었기에 그의 데이
강진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와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러자 삼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강진혁,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강진혁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기억하는 한, 유형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유형이를 감싸고 사랑했지만 저는 점점 배제됐죠. 그가 아기일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유형이와 함께 잤어요. 그때 나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홀로 두려움에 떨었죠. 늘 그렇게 말하셨잖아요.‘유형이는 아직 어리니까.’하지만 저는요? 저도 그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다고요. 유형이는 부모님의 사랑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장난감, 제 옷, 제 모든 것이 하나씩 그에게 넘어갔죠. 심지어 제 물건을 빼앗길 때마다, 아버지는 ‘넌 형이니까 양보해야지’라며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두 분은 늘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저를 세뇌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늘 유형이가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가져가 버리면 저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강진혁의 눈동자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억울함과 분노를 보았다.그가 품고 있던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지원이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나는 지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지원이는 유형이의 미래 아내’라고 못 박아버렸죠. 나는 또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면서도 티 내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 감정을 숨겨야 했어요.”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사랑이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된 감정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은 유형이에게 회사를 맡겼죠. 그러면서 저에게는 온갖 이유를 대며 칭찬
“아줌마,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배신해요. 강유형은 이미 저한테 신뢰를 잃었어요. 설령 제가 진혁 오빠를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유형이를 다시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의 부모님이 아직도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다시 잇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를 확실히 끊어놓을 필요가 있었다.“진혁이도 안 돼.”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말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줌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논의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삼촌, 요즘 세상에 연애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리고 아줌마랑 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진혁 오빠한테도 했어요?”나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러자 삼촌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지원아, 우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속 깊이 우리를 원망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못한 건 우리니까, 화가 나면 나한테 직접 풀어. 하지만 우리 아들들까지 싸우게 만들지는 마.”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삼촌, 너무 과대 해석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누구의 사이도 이간질할 생각 없어요. 그저 제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자신도 서글퍼질 만큼 씁쓸하게 웃었다.“저는 그저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요. 제게도 그런 가족이 있으면 좋겠어요.”“지원아, 만약 네가 정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아줌마가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게.”아줌마는 다급한 듯이 말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그럼 진혁 오빠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빠는 절 원하고 있어요. 제 마음속에 아직 진정우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요.”그 말이 끝나자 거실이 순간 얼어붙었다.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후, 아줌마는 마치 울고 싶은 듯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강진혁과 함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자, 강유형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아줌마는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했다. 오랜만에 나를 보자 그녀는 감격한 듯 눈물을 훔쳤다.“이제야 다시 보게 되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삼촌은 소파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나빠 보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기 때문일까?우리 사이의 벽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삼촌, 오랜만이에요.”나는 이미 이들과의 감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원한을 묻기로 했으니, 그들에게‘빚을 갚으라’는 듯한 태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삼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강유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잠깐 나와봐.”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는 강유형의 성격을 알기에,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진혁과 크게 한바탕 할 기세였다.아줌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입을 열려다 이내 망설였다.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지원아, 너랑 진혁이 요즘 많이 가까워졌니?”나는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오빠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아줌마와 삼촌은 동시에 굳어버렸다. 아줌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물었다.“그럼... 너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야?”그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예전에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졌을 때조차‘같은 집안사람인데 인연을 이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하더니, 지금은 확실히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아마도 이제는 단순한 집안 문제를 넘어, 그동안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겠지.“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빠가
나는 힘없이 웃었다. 허진호가 굳이 전화를 걸어 단순한 안부를 물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분명 내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작은 방울을 입술에 살짝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정우야, 네 친구가 널 대신해서 내 안부를 챙겨주고 있어.”해가 질 무렵, 나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진혁을 발견했다.붉게 물든 석양 아래 그의 실루엣이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선명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젊은 여자 직원들이 연신 뒤돌아보며 속삭였고 어떤 용기 있는 이는 대놓고 감탄하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어요!”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선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진혁 오빠, 인기 여전하네요?”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까지 장난치지 마.”나는 가벼운 농담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소희 소식은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아직이야. 하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었다.“뭐가 문제예요?”“그 사람, 빚이 많더라. 사채와 온라인 대출까지 뒤얽혀 있었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었어.”그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었을지도 몰랐다.“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체포됐어.”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면회 가능한가요?”“가능하지. 내가 알아볼게.”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 오르자 내 자리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화려한 장미가 아닌, 연보랏빛 라벤더와 안개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이건...?”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별을 따다 줄 순 없어서 대신 이걸 준비했어.”그의 말은 부드럽고 낭만적이었
“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용설아뿐만 아니라 허진호 역시 진정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가 겪었던 위험과 고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과거를 깊이 파고들 용기가 없었다.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마음이 아플 테고 그리움만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저는 믿을 수 없어요.”허진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나 역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진정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것뿐이라고.“그럼 정우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시다.”나는 손목에 걸린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에 마치 진정우가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야.’그가 남긴 이 작은 방울이, 나를 붙잡아 줄 마지막 선물 같았다. 그때, 허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원 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요.”“뭐죠?”“직접 보면 알 거예요.”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던 그가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에게도 진정우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허진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친구였다.그가 느낄 상실감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다.그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회사를 나와 이소희의 집으로 향했다.전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회사에 알아보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결국,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누구세요?”소희의 어머님인 박수미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