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준호가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나는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용진표를 만나러 가는 건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메시지를 보내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지금 답장을 보내면 그가 다른 조건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고, 거절하면 용진표에게 내 뒷말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가장 현명한 선택은 역시 무시하는 것이었다. 어젯밤처럼 말이다.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안리영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용준호의 메시지에 잠시 신경이 쏠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놓쳤다.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둘이 관계 정했으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아직 아니야?”“다음 단계? 무슨 다음 단계?”나는 여전히 용준호 때문에 머릿속이 어수선했다.“남녀가 사귀면 당연히 그거지. 뭘 또 물어.”안리영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그거라니? 아니야. 정우는 진짜 점잖은 사람이야.”“점잖은 사람이면 그런 욕구도 없는 거야? 사람이면 당연히 있지.”안리영은 마치 나를 놀리는 듯 이어서 말했다.“참, 강유형도 엄청 점잖은 사람이었지.”그 말을 듣자 나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안리영도 눈치챘는지 바로 해명을 시작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단지 말이야, 사랑하면 도파민이 나와서 사람의 호르몬과 본능을 자극한다고.”“쉽게 말해서, 정말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너한테 끌리고,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만약 그렇지 않거나, 너무 자제하는 것 같다면 그건 사랑이 깊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어.”안리영은 자신의 논리를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하며 이야기했다.그녀의 말을 들으니 과거 강유형과의 관계가 떠올랐다.그와 10년을 함께했지만, 우리가 가장 친밀했던 순간은 손을 잡거나 가끔 포옹하는 정도였다.그때는 그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런 줄 알았고 내 자신이 매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리영의 말을 듣고 보니, 강유형이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유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며 메시지가 왔다.안리영의 메시지를 열어보니 욕실에서 갓 나온 여자가 섹시한 잠옷을 입고 유혹적인 포즈를 취한 GIF였다.그리고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런 거 한 번 해봐. 효과 좋을걸?]나는 바로 분노 이모티콘을 보냈다.‘안리영 참... 너무 나가는 거 아냐?’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방법이 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문제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만들어낼지였다.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이유를 궁리했다.‘용준호 얘기를 꺼내볼까? 하지만 그 얘기를 하면 진정우가 분명 막으려고 들겠지.’‘수도관이 고장 났다고 하면? 근데 지금 수도관은 멀쩡한데 억지로 망가뜨릴 수도 없잖아.’‘그럼 배가 고프다고 해서 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이 방법이 가장 자연스럽겠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서둘러 샤워를 끝냈다.그리고 평소엔 거의 꺼내지 않던 섹시한 잠옷을 골랐다.이 잠옷은 사실 예전에 강유형과 약혼했을 때 샀다.약혼 후 함께 살게 되면 입으려고 준비했던 거였는데 정작 강유형은 이 옷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지금은 진정우에게 이걸 입고 보여줄 줄이야.검은색 실크 소재의 잠옷은 내 몸매를 매끈하게 살려줬다.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이 강렬한 인상을 줬다.거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내가 봐도 꽤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진정우밖에 없었다.‘이 남자, 타이밍도 정말 기가 막히네.’굳이 핑계를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혹시 그도... 그런 생각을 하니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몇 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누구세요?”“나야. 연잎 죽 끓였어. 좀 먹어.”문 너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마지막으로 잠옷 어깨끈을 살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진정우를 떠보려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그가 반응하자 도리어 겁이 나고 말았다.나는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마저 떨렸다.“정우야...”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나는 숨이 막혀왔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자 그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나는 신발장 옆으로 몰렸고 여전히 우리는 함께 연잎 죽을 들고 있었다.놀라운 건, 그 와중에도 죽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내 심장은 이미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었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봤다.그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도대체 왜 그를 자극하려 했던 걸까?안리영의 부추김 때문이라지만 그녀도 남자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한순간의 충동이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해지려 애썼다.지금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분명 내 자극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는 지금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드러난 핏줄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죽은 가져다줬으니 이제 돌아가.”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대답도 없었다.“정우야...”내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그가 낮고 쉰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깃털이 내 가슴을 스치는 것처럼 아찔했다.순간 온몸이 긴장했고 낯선 감각이 차올랐다.“응?”내 목소리마저 떨렸다. 어디선가 달콤한 기운이 섞인 듯했다.놀란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그는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눌러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그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뭐?”“움직이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나는 눈
과거에 강유형과의 실패가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정말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걸까?남자가 나를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유가 궁금했다.“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그리고 그의 등을 천천히 감싸안았다. 옷 너머로 손끝을 살짝 세워 그의 등을 눌렀다.그 순간, 진정우의 몸이 더욱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그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나는 그의 품에 더 바짝 다가갔다. 샤워 후 얇은 잠옷만 걸친 내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이 정도로 했는데도 진정우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정말 내가 매력이 없는 거겠지.“지원아.”그가 나를 다급히 부르더니, 나를 살짝 밀어냈다.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그의 목젖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떨리는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마치 방금 전까지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나는 그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동시에 대담해지기도 했다.“너무 늦었어.”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그 순간 내 마음은 싸늘해졌다.그리고 분노와 수치심, 실패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냥 간다고? 네가 못 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매력이 없어서?”그는 문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붉어진 눈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을 것이다.분명 분노와 부끄러움이 섞인 얼굴이었겠지.진정우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닫으며 다가왔다.그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며 나를 진하게 끌어안았다.나는 눈앞이 어두워졌고 이때 뜨거운 입술이 나를 덮쳤다.그 열기와 함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따뜻했고 강렬했다.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정이었다.“괜찮겠어?”그의 낮고 떨리는 목소리가
[잘 자. 내 여자 친구!]반쯤 잠든 상태에서 진정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이 30분 동안 그는 뭐 했을까?혹시 소설 속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라도 한 걸까?아까 그 긴급한 상황을 떠올리니, 차마 답장할 수 없었다.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마 나도 냉수 샤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몸 안에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계속 올라왔다.욕망의 문은 한 번 열리면 메꾸기 어렵다는 말을 몸소 느끼게 된 날이었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아침 일찍 깼다.하지만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진정우보다는 늦었다.그는 이미 밖에서 아침 러닝을 하고 있었다.정말이지, 이 남자의 체력과 에너지는 끝도 없는 것 같다.그런데... 이런 그가, 그런 일에서도 체력이 대단하지 않을까?내 머릿속이 마치 저주에 걸린 듯, 자꾸 그쪽으로만 향했다.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다 안리영 때문이다.어젯밤 그 황당한 제안이 떠올랐다.화가 난 나는 지금 몇 시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배 안 고파? 나랑 아침 먹자.”어젯밤 진정우가 끓여준 죽은 먹었지만 밤새 생각이 많아서인지 배가 고팠다.평소 같았으면 진정우에게 말하면 아침을 준비해 줬겠지만 오늘만큼은 피하고 싶었다.어쩐지 나 자신이 괜히 이기적인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런 어색한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민망했다.다른 연인들도 이 ‘다음 단계’를 거치고 나면 나처럼 혼란스럽고 민망해질까?아, 왜 이리 한심한 생각만 드는지 모르겠다.문자를 보내고 난 뒤, 아직 손가락에서 휴대폰을 놓지도 않았는데 안리영의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어머, 보아하니 어젯밤은 별거 없었나 보네.”그녀는 통화 연결과 동시에 날 놀리기 시작했다.“다 너 때문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아침부터 배고파서 허둥댈 일도 없었잖아.”나는 먼저 그녀를 탓했다.안리영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병원 휴게실의 의자에 반쯤 누워있었다.
“전에 해본 적 있잖아. 전과자라니까.”진정우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이 사람, 자기가 아는 거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굳이 말로 꺼내야 해?진짜 눈치 없네.“지원아.”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그렇게 대담하게 나쁜 짓을 해놓고 끝나고는 겁쟁이가 되는 건 여전하네. 어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나는 반박하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쁜 짓이라면... 설마...’어젯밤 내가 잠옷 입고 문 연 걸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 게 아니라 일부러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세상에 너무 창피해!나는 손에 쥔 차 열쇠를 꽉 쥐었다.그리고 속상함에 목소리를 높였다.“누가 나쁜 짓 했다는 거야? 잘못한 건 정우 씨잖아! 당신이야말로...”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을 막아버렸다.아침 운동을 막 마친 그의 입술은 약간 차가웠지만 몹시 부드러웠다.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눈을 감은 그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그의 높고 곧은 콧대와 선명한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나는 순간 멍해졌다.키스가 끝나고 그는 천천히 몸을 뗐다. 하지만 두 손은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앞으로 그런 나쁜 짓은 내가 할게.”그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고 이제는 목까지 빨개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리영 씨 만나러 가는 거 진짜 별일 아니지?”그가 다시 묻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강유형과 사귈 때는 사람들 앞에서 종종 놀림을 받아도 웃으며 넘겼다.그가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가끔 볼에 뽀뽀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왜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에도 숨이 막힐 것처럼 부끄럽고 어색한 걸까?진짜... 왜 이러는 거야.“원래는 너 주려고 토마토스
“왜 그래?”“정우 씨!”나와 진정우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오늘 떠난다고 했지? 어디 가는 거야?”나는 그에게 뛰어가면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그는 내가 갑자기 차에서 뛰어나온 것에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내 말을 듣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왜. 내가 도망갈까 봐?”그의 농담에 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다.“진짜 어디 가냐니까?”“일단 안 가기로 했어.”진정우의 답변은 내 질문과는 거리가 멀었다.“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원래는 떠나려고 했어. 여기 일도 끝났고 미련 같은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지.”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약간 숙였다.“왜냐하면 이제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그의 말이 내 심장을 쿵 하고 울리게 했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기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하지만 내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다음 순간 나는 그의 품 안으로 강하게 끌려갔다.그는 턱을 내 머리 위에 얹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그냥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떠나야 한다면 꼭 너한테 말하고 네가 허락해야 떠날 거야.”내 심장은 이미 두근거림을 넘어 폭발 직전처럼 뛰고 있었고 온몸이 화끈거렸다.이른 아침부터 이런 강렬한 느낌은 정말이지 너무 버거운 존재였다.뭔가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어머나, 이게 뭐야!”놀란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그의 품에서 급히 빠져나왔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볼 사람은 다 봤고 뒤이어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이렇게 아침부터 껴안고 있는가 했더니 우리 지원이랑 정우였네?”“아줌마...”나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이웃들 눈에는 이미 나와 진정우가 공식 커플로 보이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친밀한 장면까지 목격되다니 정말 부끄러웠다.“이른 아침부터 나오셨네요.”진정
예전에 조태혁이 나를 오해했던 게 떠오르자 나는 이번 기회에 복수나 해보자고 생각하며 말했다.“손 좀 놓지? 안 그러면 널 성희롱으로 신고한다.”“참!”조태혁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신고해 봐.”그의 겁먹지 않는 태도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이런 뻔뻔한 사람과 더 엮이기 싫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누나, 오랜만이야. 더... 예뻐진 거 같네.”“꺼져!”내가 손을 빼려고 다시 힘을 줬지만 그는 손을 더 꼭 잡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누나의 화끈한 성격도 여전하네.”조태혁은 정말로 뻔뻔한 자식이었다.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태혁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어디 여자나 꼬실 시간이 있어? 빨리 와!”아까 그렇게 급하게 뛰어온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는 전혀 급한 기색도 없이 내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누나, 요즘 솔로라며? 내가 한번 대시해봐도 돼?”그 말이 내 속을 뒤집었다.내가 싱글?그게 누구 때문인데?바로 네 누나 때문이라고!네 누나가 내 약혼자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동생이 나한테 대시하겠다고?정말 참 대단한 집안이네.그들에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서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근데 네 누나한테 먼저 물어봐. 허락하면 한번 생각해 볼게.”“정말?”그의 눈이 반짝거렸고 그 순간 나는 움찔했다.설마 이 녀석이 진심인 건가?지금 나는 이미 진정우와 사귀고 있으니 절대 다른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니 화가 치밀었고 나는 바로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세게 밟았다.“으악!”그러자 조태혁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손을 놓고 발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돌았다.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그를 매섭게 노려본 뒤 자리를 떠났다.“누나! 난 진짜 누나를 원해! 이런 누나 같은 여자가 너무 좋아!”그는 아픈 발을 부여잡고도 병원 로비에서 그렇게 소리쳤고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