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강유형과의 실패가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정말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걸까?남자가 나를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유가 궁금했다.“진정우.”나는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그리고 그의 등을 천천히 감싸안았다. 옷 너머로 손끝을 살짝 세워 그의 등을 눌렀다.그 순간, 진정우의 몸이 더욱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그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지원아...”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나는 그의 품에 더 바짝 다가갔다. 샤워 후 얇은 잠옷만 걸친 내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이 정도로 했는데도 진정우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정말 내가 매력이 없는 거겠지.“지원아.”그가 나를 다급히 부르더니, 나를 살짝 밀어냈다.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그의 목젖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떨리는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마치 방금 전까지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나는 그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동시에 대담해지기도 했다.“너무 늦었어.”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그 순간 내 마음은 싸늘해졌다.그리고 분노와 수치심, 실패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냥 간다고? 네가 못 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매력이 없어서?”그는 문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붉어진 눈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을 것이다.분명 분노와 부끄러움이 섞인 얼굴이었겠지.진정우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닫으며 다가왔다.그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며 나를 진하게 끌어안았다.나는 눈앞이 어두워졌고 이때 뜨거운 입술이 나를 덮쳤다.그 열기와 함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따뜻했고 강렬했다.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정이었다.“괜찮겠어?”그의 낮고 떨리는 목소리가
[잘 자. 내 여자 친구!]반쯤 잠든 상태에서 진정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이 30분 동안 그는 뭐 했을까?혹시 소설 속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라도 한 걸까?아까 그 긴급한 상황을 떠올리니, 차마 답장할 수 없었다.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아마 나도 냉수 샤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몸 안에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계속 올라왔다.욕망의 문은 한 번 열리면 메꾸기 어렵다는 말을 몸소 느끼게 된 날이었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아침 일찍 깼다.하지만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진정우보다는 늦었다.그는 이미 밖에서 아침 러닝을 하고 있었다.정말이지, 이 남자의 체력과 에너지는 끝도 없는 것 같다.그런데... 이런 그가, 그런 일에서도 체력이 대단하지 않을까?내 머릿속이 마치 저주에 걸린 듯, 자꾸 그쪽으로만 향했다.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다 안리영 때문이다.어젯밤 그 황당한 제안이 떠올랐다.화가 난 나는 지금 몇 시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배 안 고파? 나랑 아침 먹자.”어젯밤 진정우가 끓여준 죽은 먹었지만 밤새 생각이 많아서인지 배가 고팠다.평소 같았으면 진정우에게 말하면 아침을 준비해 줬겠지만 오늘만큼은 피하고 싶었다.어쩐지 나 자신이 괜히 이기적인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런 어색한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민망했다.다른 연인들도 이 ‘다음 단계’를 거치고 나면 나처럼 혼란스럽고 민망해질까?아, 왜 이리 한심한 생각만 드는지 모르겠다.문자를 보내고 난 뒤, 아직 손가락에서 휴대폰을 놓지도 않았는데 안리영의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어머, 보아하니 어젯밤은 별거 없었나 보네.”그녀는 통화 연결과 동시에 날 놀리기 시작했다.“다 너 때문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아침부터 배고파서 허둥댈 일도 없었잖아.”나는 먼저 그녀를 탓했다.안리영은 흰 가운을 입은 채, 병원 휴게실의 의자에 반쯤 누워있었다.
“전에 해본 적 있잖아. 전과자라니까.”진정우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이 사람, 자기가 아는 거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굳이 말로 꺼내야 해?진짜 눈치 없네.“지원아.”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그렇게 대담하게 나쁜 짓을 해놓고 끝나고는 겁쟁이가 되는 건 여전하네. 어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나는 반박하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쁜 짓이라면... 설마...’어젯밤 내가 잠옷 입고 문 연 걸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 게 아니라 일부러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세상에 너무 창피해!나는 손에 쥔 차 열쇠를 꽉 쥐었다.그리고 속상함에 목소리를 높였다.“누가 나쁜 짓 했다는 거야? 잘못한 건 정우 씨잖아! 당신이야말로...”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을 막아버렸다.아침 운동을 막 마친 그의 입술은 약간 차가웠지만 몹시 부드러웠다.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눈을 감은 그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그의 높고 곧은 콧대와 선명한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나는 순간 멍해졌다.키스가 끝나고 그는 천천히 몸을 뗐다. 하지만 두 손은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앞으로 그런 나쁜 짓은 내가 할게.”그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고 이제는 목까지 빨개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리영 씨 만나러 가는 거 진짜 별일 아니지?”그가 다시 묻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강유형과 사귈 때는 사람들 앞에서 종종 놀림을 받아도 웃으며 넘겼다.그가 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가끔 볼에 뽀뽀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왜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에도 숨이 막힐 것처럼 부끄럽고 어색한 걸까?진짜... 왜 이러는 거야.“원래는 너 주려고 토마토스
“왜 그래?”“정우 씨!”나와 진정우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오늘 떠난다고 했지? 어디 가는 거야?”나는 그에게 뛰어가면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그는 내가 갑자기 차에서 뛰어나온 것에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내 말을 듣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왜. 내가 도망갈까 봐?”그의 농담에 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다.“진짜 어디 가냐니까?”“일단 안 가기로 했어.”진정우의 답변은 내 질문과는 거리가 멀었다.“뭐라고?”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원래는 떠나려고 했어. 여기 일도 끝났고 미련 같은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지.”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약간 숙였다.“왜냐하면 이제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그의 말이 내 심장을 쿵 하고 울리게 했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기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하지만 내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다음 순간 나는 그의 품 안으로 강하게 끌려갔다.그는 턱을 내 머리 위에 얹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그냥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떠나야 한다면 꼭 너한테 말하고 네가 허락해야 떠날 거야.”내 심장은 이미 두근거림을 넘어 폭발 직전처럼 뛰고 있었고 온몸이 화끈거렸다.이른 아침부터 이런 강렬한 느낌은 정말이지 너무 버거운 존재였다.뭔가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어머나, 이게 뭐야!”놀란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그의 품에서 급히 빠져나왔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볼 사람은 다 봤고 뒤이어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이렇게 아침부터 껴안고 있는가 했더니 우리 지원이랑 정우였네?”“아줌마...”나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이웃들 눈에는 이미 나와 진정우가 공식 커플로 보이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친밀한 장면까지 목격되다니 정말 부끄러웠다.“이른 아침부터 나오셨네요.”진정
예전에 조태혁이 나를 오해했던 게 떠오르자 나는 이번 기회에 복수나 해보자고 생각하며 말했다.“손 좀 놓지? 안 그러면 널 성희롱으로 신고한다.”“참!”조태혁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래? 신고해 봐.”그의 겁먹지 않는 태도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이런 뻔뻔한 사람과 더 엮이기 싫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누나, 오랜만이야. 더... 예뻐진 거 같네.”“꺼져!”내가 손을 빼려고 다시 힘을 줬지만 그는 손을 더 꼭 잡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누나의 화끈한 성격도 여전하네.”조태혁은 정말로 뻔뻔한 자식이었다.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태혁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어디 여자나 꼬실 시간이 있어? 빨리 와!”아까 그렇게 급하게 뛰어온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는 전혀 급한 기색도 없이 내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누나, 요즘 솔로라며? 내가 한번 대시해봐도 돼?”그 말이 내 속을 뒤집었다.내가 싱글?그게 누구 때문인데?바로 네 누나 때문이라고!네 누나가 내 약혼자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동생이 나한테 대시하겠다고?정말 참 대단한 집안이네.그들에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서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 근데 네 누나한테 먼저 물어봐. 허락하면 한번 생각해 볼게.”“정말?”그의 눈이 반짝거렸고 그 순간 나는 움찔했다.설마 이 녀석이 진심인 건가?지금 나는 이미 진정우와 사귀고 있으니 절대 다른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니 화가 치밀었고 나는 바로 발을 들어 그의 발등을 세게 밟았다.“으악!”그러자 조태혁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손을 놓고 발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돌았다.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그를 매섭게 노려본 뒤 자리를 떠났다.“누나! 난 진짜 누나를 원해! 이런 누나 같은 여자가 너무 좋아!”그는 아픈 발을 부여잡고도 병원 로비에서 그렇게 소리쳤고
그 순간 나의 눈꺼풀이 두 번 크게 떨렸다.‘왼쪽 눈이 떨리면 돈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들었는데...’나는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난 아무 대책도 없이 나설 순 없었다.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신지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태 오빠, 나 지금 용준호 만나러 가. 혹시 모르니까 좀 챙겨줘.”메시지를 보낸 후 바로 답장은 없는 걸 봐서는 아마 지금 훈련 중일 것이다.그래. 훈련 중일 거야. 게으름 피우며 자고 있을 리는 없지. 신지태는 곧 있을 대회를 위해 연습과 체력 훈련에 매진 중이었다.답장이 없더라도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면 분명 메시지를 확인할 테고 어차피 용준호를 만나러 가기까지 시간이 있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가속 페달을 밟아 세상 요양원으로 향했다.네가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용준호의 거대한 랜드로버는 이미 요양원 입구에 주차되어 있었다.멀리서 보니 그는 팔을 휘저으며 체조인지 태극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운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폼만 잡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우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아마 내가 늦었다는 걸 이렇게 은근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나는 차에서 내려 빠르게 걸어가며 예의를 차렸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그는 동작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아깝지 않지.”그의 농담 섞인 말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그는 갑자기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들어가려고?”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야 말았다.‘아차, 빈손으로 왔네.’하지만 솔직히 말할 순 없어서 난 핑계를 적당히 둘러댔다.“죄송해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꽃집이 문을 안 열었어요.”그는 피식 웃으며 짧게 웃었다.“하! 정말 그럴싸한 변명
용준호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오자 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그는 웃으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나는 그 말에 멍해졌지만 이내 비웃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아침부터 이런 농담은 좀 아니지 않나요? 게다가 대표님도 잘 알잖아요.”용준호는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농담 아니야. 내 여자 친구가 돼야 우리 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그의 말에 나는 굳어버렸다.이건 분명히 여자 친구라는 명목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거였다.이래서 아까 떨리던 눈꺼풀이 그냥 떨린 게 아니었구나.용준호는 자세히 설명했다.“아마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평생 의심이 많으신 분이야. 아무도 믿지 않지. 특히 지금은 위치가 다르니까 더 그래. 아버지에게 접근하려는 사람 중에 진심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시간 낭비를 막으려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안 만나.”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비웃었다.이건 핑계에 불과했다.“그리고 말이야. 나 사실 너한테 첫눈에 반했어. 나야 이름값처럼 이런저런 연애를 많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다 장난이었어.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도 절대 허락 안 하셨을 거야.”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정직하고 단아해 보이는 사람이야. 딱 집안 살림 잘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그런 사람 같아. 그래서 너를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 눈빛은 뜻밖에도 진심처럼 느껴졌다.어제는 재벌 2세가 나를 쫓아다니겠다더니 오늘은 바람둥이가 진지하게 고백이라니.나에게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몰리는 걸까?하지만 나는 이미 진정우과 사귀고 있었다.이 모든 일이 진정우의 존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대표님의 진심은 잘 알겠어요. 고맙기도 하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요.”나는 그의 직접 거절했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너무 뻔한 핑계 아니야? 지난번에 지태
“네 생각에는?”용준호가 또다시 내게 되물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볼게요.”그러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에게 돌려주려 했다.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받는 시늉을 하더니 꽃잎 하나를 떼어 코끝에 가져가며 향을 맡았다.“이야기해 봐. 대체 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는 거야?”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아버지에게 보여줄 물건 때문에 찾아온 줄 알더니 이제는 내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이제 와서 더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았다.내 말을 들은 용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나는 그러는 용준호가 뭔가 이상했다.“왜요?”“네가 그 일로 우리 아버지를 만나려고 하는 거라면 만나도 소용없어. 우리 아버지는 절대 너한테 알려 주지 않을 거야.”그의 말투는 마치 아버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하지만 정말 문제가 없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대답하지 않겠다는 건 결국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만나야 하고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만약 제가 끝까지 만나겠다고 한다면요? 대표님께서 말하지 못할 비밀이 없을지도 모르잖아요.”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용준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고집 세네. 꼭 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아픈 줄 알겠어? 그래. 그럼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 허락하면 널 안으로 데려가 줄게.”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고 스피커폰을 켰다.“무슨 일이냐.”전화 너머로 들려온 용 회장의 목소리는 굵고 단호했다.“별건 아니고 사람 하나 데려가려고요. 여자예요.”용준호는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말을 아꼈다.“쓸데없는 여자 좀 데리고 오지 말라고 몇 번 말했잖아!”용진표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그러자 용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버지, 그런 여자는
남자가 다가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아이가 폐를 끼쳤네요.”“네? 하윤이가 이렇게 귀여운데...”하윤이는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고 나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하윤이는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도 하윤이가 좋아요.”“하윤도 언니 좋아해요.”하윤이의 발음이 약간 어눌했지만 귀여웠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를 향해 말했다.“솔직히 부모님 두 분 다 외국분인 줄 알았어요.”남자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실례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아, 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딸에게 손을 내밀었다.“가자, 아빠랑 탑승하러 가야지.”“언니, 우리랑 같이 가요. 안 돼요?”하윤이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강진혁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탑승권을 쥐고 강진혁은 부녀를 바라보며 아빠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언니, 우리 같이 가요!”하윤이는 어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내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하윤아, 언니는 우리랑 같은 비행기가 아니야.”아빠가 강진혁과 악수를 나눈 뒤,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그럼 언니가 비행기 바꾸면 되잖아요!”하윤이는 비행기를 자주 타본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서양식 이목구비를 보며, 나는 그녀가 혼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윤아, 이제 그만하자.”아빠가 부드럽게 말렸지만 하윤은 기죽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하윤이는 언니랑 같이 비행기 타고 싶어요.”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고 아빠는 하윤을 안아 들며 다시 사과했다.“아이가 고집이 세서 죄송합니다.”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하윤을 안은 채 떠났고 하윤은 아빠 품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언니, 언니... 하윤이는 언니가 보고 싶을 거예요.”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강유형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지원아...”“강유형,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너무 뻔뻔하지 않아?”나의 차가운 태도에 강유형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이 붉어졌고 그 표정에는 당혹감과 자책이 뒤섞여 있었다.“그래.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하다는 거.”그는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내 친구에게 상처를 줬고 이제는 네가 날 구하기 위해 진정우랑 다투기까지 했지. 그런데도 내가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아.”그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나는 그럴 자격도 없어.”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섰다. 나와 강진혁과 함께 병실을 나설 때, 강유형은 배웅하지 않았다.공항에 도착해서 강진혁이 수속을 밟으러 간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몸은 여기 있지만 영혼은 어디론가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언니,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이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니 작은 금발 소녀가 내 옆에 앉아 해맑게 물었다.그녀는 금발과 뽀얀 피부를 가진 외국 아이였지만 동양인의 짙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또박또박한 한국어를 구사했다.아이들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이 작은 아이의 눈빛이 내 떠다니던 영혼을 단번에 붙잡아 주었다.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언니는 여행이 아니라 집에 가는 거야.”“집에 가서 엄마, 아빠 찾는 거예요?”아이의 질문은 끝없는 궁금증으로 가득했다.나는 부모님을 찾고 싶었지만 그분들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이런 슬픈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언니, 남자 친구 있어요?”소녀는 방긋 웃으며 귀엽게 얼굴을 붉혔다.“왜 웃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소녀는 신비로운
이 병실을 제대로 살펴본 건 깨어난 후 두 번뿐이었다. 처음은 진정우를 찾기 위해서였고 이번은 짐을 찾기 위해서였다.이때 강진혁이 내 앞에 다가와 가볍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지원아, 지금은 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고개를 저으려던 찰나,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의사와 강유형이 들어왔다.“의사 선생님 한 번 더 만나고 가. 혹시라도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비행기에서 처리하기 어렵잖아.”강유형이 설명하면서 시선을 강진혁에게로 돌렸다. 나는 그가 살짝 찌푸린 눈썹을 똑똑히 보았다.의사가 다가오자 강진혁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비켜줬고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물러났다. 심장 소리를 듣고 혈압을 재는 등 몇 가지 검사를 받은 후, 의사가 말했다.“회복 상태가 좋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감사합니다.”강유형이 정중히 인사했고 의사를 배웅하며 말했다.“내가 배웅할게. 가는 김에 짐도 챙겨야 하니, 너는 여기서 지원이랑 잠시 이야기라도 나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병실에는 나와 강유형만 남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고 강유형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미안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눈빛이 얼마나 공허하고 흐릿한지 느낄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휴링턴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위험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나를 구하려고 그렇게 많은 피를 헌혈하지도 않았을 텐데…… 게다가 진정우에게까지 오해를 사게 됐잖아.”나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떨어뜨려 그의 셔츠 두 번째 단추를 바라봤다.“미안해할 거 없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도 있는 법이니까.”이건 아마도 운명이었을 것이다.“지원아.”강유형은 나를 부드럽게 불렀다.“왜 그랬어? 목숨 걸고 날 구하려고 한 이유가 뭐야?”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나는 강진혁을 계속 바라봤고 그의 짧은 반응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답을 알 수 있었다.“지원아.” 강진혁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응?’솔직히, 애초에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진혁이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삼촌과 아줌마도 알고 있었죠?”내 질문은 물음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그들이 날 이렇게 오래 키웠는데 내 혈액형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지원아. 우리 부모님이 널 데려와 키우기로 했으니, 네 혈액형 같은 건 알아야 책임질 수 있었어. 그게 이상한 건 아니야.” 강진혁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그들이 내 혈액형을 알고 있었다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한 번도 말한 적 없다는 게 이상했다.“왜 말이 없어? 오해하지 마. 우리 부모님은 널 친딸처럼 여겼어.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어.”강진혁은 다급한 듯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진심이 엿보였지만 나는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이란 원래 숨기려 할수록 더 드러나기 마련이고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오빠, 사실 오빠가 이런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전혀 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빠가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강진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지원아...”“오빠, 짐이나 챙겨줘요.”나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짐 챙기기를 부탁했다. 강진혁을 의도적으로 오해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사람이란 한 번 의심이 시작되면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이다.강진혁이 짐을 챙기는 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나와 강유형의 혼약이 떠올랐다.우리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 그들은 내게 물었다.“네가 아직 어릴 때 약혼을 정해놓으면 어떻겠니?”그때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싫어요! 저는 엄마랑 아빠만 있으면 돼요.”그리고
“그럼 돌아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로는 혼자 갈 수 없어.”강유형이 단호하게 말했고 잠시 침묵하다가 강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형, 지원이랑 같이 가줘.”강진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리 거절해도 그들이 날 혼자 두고 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나는 강유형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난 여기 남아서 신지태 나오면 같이 갈 거야.”강유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신지태가 낯선 곳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왔는데 아무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하지만 강유형의 지금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신지태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이 상태로 있으면 신지태가 더 죄책감 느낄 텐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괜찮아. 사고 얘기는 꺼내지 않을 거니까.”강유형은 단호히 답했다. 더는 설득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지태 오빠, 경기 다시 뛸 수 있을까?”이번에는 강진혁이 대답했다.“아직 몰라. 구단 쪽 반응도 봐야 하고 Q클럽의 태도에 따라 다를 거야.”문득 진정우가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줄 사람은 진정우일 텐데 지금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시작했다.“내 것도 같이 예약해 줘.”강진혁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의 표까지 예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여권 정보 줘.”강진혁은 여권을 건네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말했다.“이미 예약했어. 두 장.”그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그는 이어 말했다.“짐 챙겨. 한 시간 뒤에 공항으로 가자.”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고 강진혁이 먼저 강유형을 향해 말했다.“머리 다친 건 별일 아니지만 이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해. 네 몸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걸 잊지 마.”그의 말
뉴스?무슨 뉴스?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내가 깨어난 이후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있던 강유형과 강진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무슨 뉴스야?”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마도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는 듯했다.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다 들었으니까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강진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강유형이 말리려는 듯 보였지만 내가 강한 눈빛으로 제지하자 그도 말없이 물러섰다.“이미 알게 된 이상 차라리 직접 확인하고 진정우랑 제대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강진혁이 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 화면에는 웹 기사 캡처가 떠 있었다.[희귀한 황금 혈액형 연인, 여자 친구가 800cc의 피로 남자 친구를 구해줌. 이제 내 피가 당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어요.]로맨틱한 제목과 함께 내가 강유형의 손가락을 잡고 응원하던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저 힘내라는 뜻에서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지만 제목과 사진이 더해지니 마치 우리가 생사를 함께하는 연인처럼 보였다.“이 뉴스 언제 올라온 거야?”나는 강진혁을 보며 물었다.“3일 전이야. 네가 수혈을 끝내고 바로 올라왔어.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진정우도 이미 와 있던 상태였어. 진정우가 아마 이걸 봤던 게 분명해.”그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강진혁은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덧붙였다.“바로 사람을 시켜 이 뉴스는 삭제했어.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어.”그게 무슨 소용일까.진정우는 이미 이 기사를 봤을 텐데 말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진정우만큼은 아니었다.그가 아무리 나를 믿고 있더라도 이 사진과 제목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이 일은... 내가 진정우한테 직접 설명할게.”강유형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은 설명할수록 더 복잡
나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래.]그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잠시 후,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때 강유형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저 자식,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그는 다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빠르게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공기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강유형과 강진혁은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더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걸까? 그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일까?아니면 내가 이렇게 기다렸음에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까?나는 진정우를 기다렸고 그는 왔지만 나는 결국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저 긴 잠에 빠졌을 뿐인데 겨우 사흘 동안 못 봤다고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를 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쳐서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걸까?아니면 그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의 가족, 특히 그 유명한 진씨 가문이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뒤엉켰지만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생각을 멈췄다.이럴 때일수록 직접 확인하는 게 나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전화를 꺼둔 탓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 순간, 문득 진소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와 시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전화를 걸었다.“언니!”진소영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언니?”그녀가 다시 불렀다.“잘못 걸었어. 미안해, 자는데 깨웠지?”내 목소리에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걱정할 것이다.“아니에요
“지원아!”강유형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나는 그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와 함께 들어온 강진혁을 향해 말했다.“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러자 강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아?”“확실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요.”나는 힘없이 대답했다.“전화했더니 바쁘다면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요.”나는 이유를 설명했다.“그럼 다시 전화해 봤어?”강유형이 물었다. 사실 다시 걸어보진 않았다.진정우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다.“내가 걸어볼게.”강유형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 대표님.”바로 내 앞에서 전화했기에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정우 씨, 지금 어디예요?”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비행기 안이에요.”진정우의 대답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를 힐끗 보며 다시 물었다.“비행기? 어디로 가는 중이죠?”“귀국 중입니다.”이 짧은 두 글자에 내 심장은 쥐어짜이는 듯했다. 나는 강유형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정우야, 무슨 일 생긴 거야?”아무 대답이 없자 내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그가 깨어난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일에는 반드시 와야 하지 않나?“아니야. 거짓말 안 했어.”진정우가 차분하게 답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못 믿어. 전에 나 속인 적 있잖아.”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못 믿겠으면 사진 보내줄게.”전화가 끊기고 곧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는 비행기 좌석에 앉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비행기표 사진을 보내왔다.그가 진짜 귀국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