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391 - Chapter 400

761 Chapters

제391화

박한빈의 손을 잡은 성유리는 그 손이 너무 차가워 깜짝 놀랐다. 마치 한 구의 시신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는 박한빈의 손이 성유리는 믿기지 않았다. 만약 박한빈이 지금 그녀 옆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성유리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마도 성유리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서일까, 박한빈 또한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먼저 가세요. 제가 여기 있으면 되니까.” “아니. 난....”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맞아. 깨어나셔서 먼저 보는 사람이 나라면 또 기분이 언짢아지실 거야. 겨우 살았는데 다시 죽고 싶어질 수도 있을 거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다시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너도 좀 쉬어야지.” “괜찮아요. 여기 있어도 잘 휴식할 수 있어요. 게다가 간병인 한 명만 남겨두고 가면 박한빈 씨도 안심이 안 되시잖아요.” 성유리의 말에 이번엔 박한빈이 침묵했고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됐어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전화 드릴게요.” 결국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대로 떠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웬일인지 머릿속이 새하얘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리의 말에 움직이는 로봇처럼 박한빈은 앞으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밖을 나오자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뭔가 떠오른 박한빈은 바로 운전대를 잡아 본가로 향했다. 저녁에 그렇게 큰 일이 있었지만 본가는 이미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김난희와 가사도우미들도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다 평화로워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그날 처음으로 그 집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섬뜩한 공간인지 느꼈다. 마치 누구의 생사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요하고 평소와 다른 점이 없이 똑같은 공간이 무서워졌다. 발걸음을 뚝 멈추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다시 안으로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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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박한빈의 말을 끝으로 방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김난희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는지 손으로 이불을 꽉 잡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김난희는 한참 후에야 피식 웃더니 입을 뗐다. “그래서?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니? 너 이 빌어먹을 놈! 내가 너 같은 새* 하나 처리하는 방법도 없을 것 같아?” “잊었나 본데 지금 박세빈은 지화 그룹에 있어.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걔한테 넘길 수 있다고.” “네. 박세빈도 있죠.”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난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원인은 걔한테 있나요?” “그러기엔 너무 안 맞지 않나요? 전부터 박세빈의 존재를 알고 있었잖아요. 정말 갑자기 박세빈을 집에 들였다 해도 어머니는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만약 박세빈의 신분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면 모를까.” 박한빈은 아주 명확한 사고방식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김난희에게 따졌고 그녀는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역시 내 말이 맞나보네.’ “정말 제 말이 맞나보군요. 근데 길가에 흔히 보이는 잡초 같은 애가 뭐 숨길 게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저 정도로 흥분하신다면 아마 박세빈 친모 때문일 확률이 높겠죠.” 박한빈은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 아버지와 결혼하기 싫었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끝까지 어머니한테 매달렸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 집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홀로 박씨 가문에서 수년간 버티셨고요.” “비록 나중에서야 진성민 씨가 나타나긴 했지만 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동안 혼자 지내셨으니 외로울 만도 하죠.” “깨어나신 뒤에 진성민 씨 사망 소식을 듣고도 아주 침착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한 번에 무너지신 원인도... 아마 박성훈 씨도 어머니를 속이셨기 때문이겠죠.” “그럼, 과연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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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김서영의 물음에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침묵했고 때마침 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성유리는 냉큼 자리를 비켰고 김서영은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의료진들에게 몸을 맡겼다. 무슨 말을 하기도 거부하는 김서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까지 꽉 깨물었다. 그녀의 모습에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야 할 그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성유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박한빈은 통화를 끊더니 직접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깨셨어?” 그의 물음에 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제 그만 가서 푹 쉬어. 내가 가서 얘기 좀 나눌 테니까.” 박한빈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움직였지만 성유리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뭐지?’ 이상한 성유리의 행동에 박한빈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녀의 뜻을 알겠다는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잘 얘기할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성유리는 딱 봐도 박한빈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살짝 어루만지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섰고 간병인은 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박...” 그러나 박한빈은 간병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가보세요.” 김서영은 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떨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는 척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맡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김서영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근데 전 좀 이해가 안 가네요. 어젯밤 일은 미리 계획을 세워두신 겁니까?” “저한테 성유리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대답은 하지 마십시오. 비록 전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유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리 계산을 다 한 거라면 전에 했던 일들은 뭐가 되는 겁니까? 투자자들과 이사회 사람들과 함께 벌인 그 일들은 저와 겨루기 위해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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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성유리는 병원을 떠나지 않았고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박한빈은 병실에서 나오다 여전히 밖에 있는 성유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병실 안만 쳐다보았다. “지금 주무셔.” 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먼저 말해줬다. “괜찮으세요?” 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을 보며 되물었다. “무슨 얘기 하셨는데요?”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대답하세요.” 성유리가 살짝 짜증이 난 말투로 말하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나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자고 일어나면 그때 얘기해줄게.” 박한빈은 잠시 동안은 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주기 싫어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도 물어보기를 포기했고 박한빈은 정말로 그녀와 함께 집에 가 잠만 자려고 했다. 성유리는 자기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연제에 도착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바로 잠들었다. 방안의 커튼은 쳐져 있고 옆에 작은 조명만 켜져 있으니 성유리는 다시 깨어나서도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몰랐다. 성유리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핸드폰을 찾으려 손을 쭉 뻗는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깼어?” 성유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딱 이 시간에 깰 줄 알았어.”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좀 끓였어. 내려와서 같이 먹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죠?” “9시쯤일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박한빈은 방안으로 돌아와 커튼을 활짝 펼치더니 성유리에게 다가왔다. “가자.” 성유리는 그의 말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고 준비돼 있는 많은 양의 면을 보고는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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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맞아.”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응? 사진 속에 적혀있는 날짜와 시간을 보면 모르겠어?”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박성훈 씨, 그러니까 박한빈 씨 아버지와 박세빈 씨 어머니가 먼저 알던 사이었고 김서영 씨와 결혼한 원인도 외모 때문이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박한빈은 아주 담담하게 맞다는 대답을 했지만 성유리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에서 발생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애써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침묵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왜 나랑 박세빈이 그렇게 닮았는지 궁금했어. 알고 보니까 우리 두 사람 엄마가 이렇게 똑같게 생겼더라고.” “박한빈 씨 어머님도... 최근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건가요?”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박한빈에게 물었다. “응. 전에 박성훈 씨가 밖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본인이랑 많이 닮아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여자의 대체품이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봐.” “할머니가 박세빈을 집에 들이기 전에 어머니는 많이 반대하셨대. 근데 그때 할머니가 사실 사진 속 두 사람이 서로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어머니는 박씨 가문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고 말하셨나 봐. 어머님은 아마 본인이 제삼자 같았을 거야. 마치 다른 여자의 삶을 빌려서 쓰는 도둑처럼 느껴졌을 거고.” 박한빈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지만 표정은 굳어있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화가 나는지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박한빈에게 물었다. “이건... 어머님이 알려주신 건가요?” “응.” “그럼 두 사람...” “화해했다고 할 수 있지.” 박한빈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박한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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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 이번에는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은근슬쩍 박한빈의 핸드폰을 쳐다봤는데 발신자는 다름 아닌 에릭이었다. 박한빈은 핸드폰과 성유리를 번갈아 보더니 전화를 받으러 뒤를 돌았다. 수화기 너머 에릭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인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성유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말?” 성유리의 귀에 박한빈이 대답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그래서?” “알겠어.” 간단한 대답만 내뱉던 박한빈은 바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에릭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어?” 전화를 끊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네.” “둘이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졌지?” 그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전화 한 통 한다고 다 친하지는 않아요.” “내일 비행기로 금성에 온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고 너한테 말해줬어. 이래도 안 친한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고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걔한테 속지 마.”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사람 같지만 사실은 냉혈하고 매정한 사람이야. 그리고 넌 정말 걔한테 연인이 없다고 생각해?” “절대 그렇지 않아. 에릭 그 새*는 전국 각지에 다 여자가 있다고. 게다가 매번 파티를 벌일 때마다 제일 미친 듯이 노는 사람도 에릭이야. 잊었어? 전에 너도 걔한테 잡혀서 몹쓸 짓을 당할 뻔했잖아. 에릭 같은 사람과는... 절대 가까이하지 마.”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에게 짧은 충고 말들만 하려고 했지만 말하다 보니 격양돼서 친구의 뒷담화만 잔뜩 늘어놓았다. 이런 당당하지 못한 행동은 박한빈 본인마저 민망하게 만들었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성유리의 태도는 박한빈의 안색을 더욱 어두워지게 했다. “걱정마세요.” 이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절대 혼자서는 에릭 씨를 만나지 않을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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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멱살을 잡은 손을 놓더니 앞쪽으로 걸어갔고 에릭은 금세 따라붙으며 말했다. “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고 내가 어디에 묵는지 물어봐도 돼? 너희 집인가?” “호텔.” 박한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에릭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했다. 오늘 박한빈에게는 다른 일이 있어 에릭을 호텔까지 데려다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차로 이동하려던 찰나,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너희 부인도 내가 오늘 도착하는 거 안다더라. 나한테 환영회를 열어준다던데 저녁엔 너도 올 거지?” 박한빈은 고개를 휙 돌려 에릭을 쳐다봤고 그는 씩 웃으며 계속 말했다. “괜찮아. 네가 안 와도 우리 둘만 밥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물론 성유리가 있으니 박한빈이 안 갈 리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걔랑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야?” 성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먼저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저녁에 한빈 씨가 초대한다고 해서 제가 온 건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에릭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릭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고 얼마 안 지나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는 새하얀 양복으로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맸는데 마치 어떤 중요한 연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처럼 근엄했다. 게다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에릭은 마치 북유럽 그림에서 걸어 나온 왕자 같았다. 심지어는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도 에릭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에릭은 항상 사람들 앞에서 품위와 우아함을 유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눈에 깃든 혐오를 알아챘음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는 그의 모습에 주문을 받던 직원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직원이 나가고 나서야 에릭은 성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사모님, 저를 이렇게 대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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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에릭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 둘이 힘을 합쳐 박한빈의 사업을 완전히 무너뜨리면 걔는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모풍국에 머물게 될 겁니다.” “그럼 유리 씨도 자유를 얻을 수 있을 테고.” 성유리는 에릭의 대답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에릭은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에릭 씨, 당신은 저를 돕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네?” “박한빈 씨를 절망하게 만드는 건 간단해요. 당신과 제가 손잡았다는 사실만 알려주면 충분하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에릭 씨가 저보다 잘 알잖아요. 그의 국내 사업을 망쳐놓으면 그 사람이 당신을 가만두겠어요?” “그건 에릭 씨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겠죠. 그래서 당신은 그저 제가 박한빈 씨를 배신했다고 믿게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그동안 저를 재촉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죠. 맞나요?” “그렇게 되면 에릭 씨는 박한빈 씨에게 말할 수 있겠죠. 이것 좀 보라고. 네 곁에 있는 사람들, 아내마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오직 나만이 너의 진정한 동료라고.”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에릭은 한참을 침묵한 후에야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원래 난 유리 씨를 그냥 겉만 화려한 바보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로얀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요.” 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저 에릭을 쳐다볼 뿐이었다. “흠... 유리 씨 말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손해가 될 건 없잖아요? 어차피 유리 씨가 원하는 건 박한빈 곁을 떠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유리 씨를 폭로하면 한빈이가 당신에게 실망해 결국 놓아줄 테니까. 그때면 성유리 씨가 원하는 걸 얻게 되는 셈 아닙니까?” “아니면... 혹시 박한빈 옆에 남고 싶어진 건가요?”“아니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그녀의 말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에릭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하지만 지금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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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성유리가 에릭과 거의 동시에 방으로 돌아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즉각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둘이 어디 갔다 온 거야?”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성유리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가는 길에 에릭 씨를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고요.” 그녀의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웠다.게다가 여기는 금성이었으니 박한빈도 에릭이 대담한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한빈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는 에릭을 한번 흘겨보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주문한 음식은 이미 모두 상에 차려져 있었다. 에릭은 여전히 중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체면상 조금 먹는 척은 했다. 대신 에릭은 박한빈과 함께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박한빈이 계속 술을 마시려 하자 성유리는 그의 잔을 꽉 쥐며 내려놓더니 말했다.“그만 마셔요.”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면서 이렇게 술까지 많이 마시면 몸이 성하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눈에는 불만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 박한빈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에릭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난 안 마실게.” 에릭은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의 시선 대부분은 성유리에게 향해 있었다. 솔직히 방금 성유리가 했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박한빈을 걱정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여자의 연기력은 이제 무서울 정도라니까.’ ... 박한빈은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집에 도착한 후, 성유리는 그에게 꿀물 한 잔을 타 주었다.  그는 성유리가 건네준 잔을 받아 들더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래요?” 성유리가 물었다. “그냥... 네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너 이제 나 안 미워해?” 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스스로 미간을 찌푸리며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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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김서영의 부상은 심각했지만 치명적인 곳까지는 다치지 않아 며칠 병원에 머문 뒤에는 퇴원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박한빈은 김서영을 박씨 본가에 돌아가게 하지 않고 조용하고 품격 있는 장소에 머물게 했다. 마침 월말이 되어 박세빈이 금성에 돌아와 직무 보고를 할 예정이었다. 박한빈은 외부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하며 다 같이 모여서 화합의 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성유리는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박씨 가문의 모임이라는 게 한 번도 순조롭게 끝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기에 아무리 싫어도 성유리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금성시는 이미 겨울에 접어들어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이 더 떨어져 있었다. 외출하기 전,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직접 흰색 목도리를 둘러줬다. 목도리 색은 그녀가 입은 코트와 같은 계열이었고 반대로 그는 온통 검은색의 차림으로 입고 있었다. 극과 극의 색상이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잘 어울렸다. 박한빈은 성유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찍더니 말했다. “참, 며칠 후엔 우리 웨딩촬영도 해야 해.” 그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덧붙였다. “청첩장도 곧 돌릴 건데 초대하고 싶은 친구 있어?” “없어요.” 성유리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박한빈은 웃으며 말했다. “참 신기하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 결혼식 날짜가 연정우 씨의 결혼식이랑 같은 날이더라고.” 연정우라는 이름은 성유리가 한동안 떠올리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갑작스럽게 언급되었지만 성유리는 가볍게 대답해 주며 별로 흥미 없는 듯 반응했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한 번 흘깃 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곧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안내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기 전, 성유리는 문 너머로 들리는 김난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기서 잘해 봐. 이번이 네 기회야. 그쪽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면 회사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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