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말을 끝으로 방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김난희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는지 손으로 이불을 꽉 잡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김난희는 한참 후에야 피식 웃더니 입을 뗐다. “그래서?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니? 너 이 빌어먹을 놈! 내가 너 같은 새* 하나 처리하는 방법도 없을 것 같아?” “잊었나 본데 지금 박세빈은 지화 그룹에 있어.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걔한테 넘길 수 있다고.” “네. 박세빈도 있죠.”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난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원인은 걔한테 있나요?” “그러기엔 너무 안 맞지 않나요? 전부터 박세빈의 존재를 알고 있었잖아요. 정말 갑자기 박세빈을 집에 들였다 해도 어머니는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만약 박세빈의 신분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면 모를까.” 박한빈은 아주 명확한 사고방식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김난희에게 따졌고 그녀는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역시 내 말이 맞나보네.’ “정말 제 말이 맞나보군요. 근데 길가에 흔히 보이는 잡초 같은 애가 뭐 숨길 게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저 정도로 흥분하신다면 아마 박세빈 친모 때문일 확률이 높겠죠.” 박한빈은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 아버지와 결혼하기 싫었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끝까지 어머니한테 매달렸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 집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홀로 박씨 가문에서 수년간 버티셨고요.” “비록 나중에서야 진성민 씨가 나타나긴 했지만 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동안 혼자 지내셨으니 외로울 만도 하죠.” “깨어나신 뒤에 진성민 씨 사망 소식을 듣고도 아주 침착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한 번에 무너지신 원인도... 아마 박성훈 씨도 어머니를 속이셨기 때문이겠죠.” “그럼, 과연 아버지
김서영의 물음에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침묵했고 때마침 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성유리는 냉큼 자리를 비켰고 김서영은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의료진들에게 몸을 맡겼다. 무슨 말을 하기도 거부하는 김서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까지 꽉 깨물었다. 그녀의 모습에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야 할 그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성유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박한빈은 통화를 끊더니 직접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깨셨어?” 그의 물음에 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제 그만 가서 푹 쉬어. 내가 가서 얘기 좀 나눌 테니까.” 박한빈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움직였지만 성유리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뭐지?’ 이상한 성유리의 행동에 박한빈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녀의 뜻을 알겠다는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잘 얘기할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성유리는 딱 봐도 박한빈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살짝 어루만지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섰고 간병인은 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박...” 그러나 박한빈은 간병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가보세요.” 김서영은 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떨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는 척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맡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김서영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근데 전 좀 이해가 안 가네요. 어젯밤 일은 미리 계획을 세워두신 겁니까?” “저한테 성유리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대답은 하지 마십시오. 비록 전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유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리 계산을 다 한 거라면 전에 했던 일들은 뭐가 되는 겁니까? 투자자들과 이사회 사람들과 함께 벌인 그 일들은 저와 겨루기 위해 그런 것
성유리는 병원을 떠나지 않았고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박한빈은 병실에서 나오다 여전히 밖에 있는 성유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병실 안만 쳐다보았다. “지금 주무셔.” 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먼저 말해줬다. “괜찮으세요?” 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을 보며 되물었다. “무슨 얘기 하셨는데요?”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대답하세요.” 성유리가 살짝 짜증이 난 말투로 말하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나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자고 일어나면 그때 얘기해줄게.” 박한빈은 잠시 동안은 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주기 싫어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도 물어보기를 포기했고 박한빈은 정말로 그녀와 함께 집에 가 잠만 자려고 했다. 성유리는 자기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연제에 도착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바로 잠들었다. 방안의 커튼은 쳐져 있고 옆에 작은 조명만 켜져 있으니 성유리는 다시 깨어나서도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몰랐다. 성유리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핸드폰을 찾으려 손을 쭉 뻗는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깼어?” 성유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딱 이 시간에 깰 줄 알았어.”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좀 끓였어. 내려와서 같이 먹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죠?” “9시쯤일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박한빈은 방안으로 돌아와 커튼을 활짝 펼치더니 성유리에게 다가왔다. “가자.” 성유리는 그의 말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고 준비돼 있는 많은 양의 면을 보고는 인상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맞아.”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응? 사진 속에 적혀있는 날짜와 시간을 보면 모르겠어?”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박성훈 씨, 그러니까 박한빈 씨 아버지와 박세빈 씨 어머니가 먼저 알던 사이었고 김서영 씨와 결혼한 원인도 외모 때문이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박한빈은 아주 담담하게 맞다는 대답을 했지만 성유리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에서 발생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애써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침묵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왜 나랑 박세빈이 그렇게 닮았는지 궁금했어. 알고 보니까 우리 두 사람 엄마가 이렇게 똑같게 생겼더라고.” “박한빈 씨 어머님도... 최근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건가요?”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박한빈에게 물었다. “응. 전에 박성훈 씨가 밖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본인이랑 많이 닮아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여자의 대체품이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봐.” “할머니가 박세빈을 집에 들이기 전에 어머니는 많이 반대하셨대. 근데 그때 할머니가 사실 사진 속 두 사람이 서로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어머니는 박씨 가문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고 말하셨나 봐. 어머님은 아마 본인이 제삼자 같았을 거야. 마치 다른 여자의 삶을 빌려서 쓰는 도둑처럼 느껴졌을 거고.” 박한빈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지만 표정은 굳어있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화가 나는지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박한빈에게 물었다. “이건... 어머님이 알려주신 건가요?” “응.” “그럼 두 사람...” “화해했다고 할 수 있지.” 박한빈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박한빈이지만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 이번에는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은근슬쩍 박한빈의 핸드폰을 쳐다봤는데 발신자는 다름 아닌 에릭이었다. 박한빈은 핸드폰과 성유리를 번갈아 보더니 전화를 받으러 뒤를 돌았다. 수화기 너머 에릭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인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성유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말?” 성유리의 귀에 박한빈이 대답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그래서?” “알겠어.” 간단한 대답만 내뱉던 박한빈은 바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에릭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어?” 전화를 끊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네.” “둘이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졌지?” 그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전화 한 통 한다고 다 친하지는 않아요.” “내일 비행기로 금성에 온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고 너한테 말해줬어. 이래도 안 친한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고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걔한테 속지 마.”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사람 같지만 사실은 냉혈하고 매정한 사람이야. 그리고 넌 정말 걔한테 연인이 없다고 생각해?” “절대 그렇지 않아. 에릭 그 새*는 전국 각지에 다 여자가 있다고. 게다가 매번 파티를 벌일 때마다 제일 미친 듯이 노는 사람도 에릭이야. 잊었어? 전에 너도 걔한테 잡혀서 몹쓸 짓을 당할 뻔했잖아. 에릭 같은 사람과는... 절대 가까이하지 마.”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에게 짧은 충고 말들만 하려고 했지만 말하다 보니 격양돼서 친구의 뒷담화만 잔뜩 늘어놓았다. 이런 당당하지 못한 행동은 박한빈 본인마저 민망하게 만들었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성유리의 태도는 박한빈의 안색을 더욱 어두워지게 했다. “걱정마세요.” 이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절대 혼자서는 에릭 씨를 만나지 않을 테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멱살을 잡은 손을 놓더니 앞쪽으로 걸어갔고 에릭은 금세 따라붙으며 말했다. “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고 내가 어디에 묵는지 물어봐도 돼? 너희 집인가?” “호텔.” 박한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에릭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했다. 오늘 박한빈에게는 다른 일이 있어 에릭을 호텔까지 데려다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차로 이동하려던 찰나,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너희 부인도 내가 오늘 도착하는 거 안다더라. 나한테 환영회를 열어준다던데 저녁엔 너도 올 거지?” 박한빈은 고개를 휙 돌려 에릭을 쳐다봤고 그는 씩 웃으며 계속 말했다. “괜찮아. 네가 안 와도 우리 둘만 밥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물론 성유리가 있으니 박한빈이 안 갈 리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걔랑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야?” 성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먼저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저녁에 한빈 씨가 초대한다고 해서 제가 온 건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에릭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릭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고 얼마 안 지나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는 새하얀 양복으로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맸는데 마치 어떤 중요한 연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처럼 근엄했다. 게다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에릭은 마치 북유럽 그림에서 걸어 나온 왕자 같았다. 심지어는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도 에릭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에릭은 항상 사람들 앞에서 품위와 우아함을 유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눈에 깃든 혐오를 알아챘음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는 그의 모습에 주문을 받던 직원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직원이 나가고 나서야 에릭은 성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사모님, 저를 이렇게 대접하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에릭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 둘이 힘을 합쳐 박한빈의 사업을 완전히 무너뜨리면 걔는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모풍국에 머물게 될 겁니다.” “그럼 유리 씨도 자유를 얻을 수 있을 테고.” 성유리는 에릭의 대답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에릭은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에릭 씨, 당신은 저를 돕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네?” “박한빈 씨를 절망하게 만드는 건 간단해요. 당신과 제가 손잡았다는 사실만 알려주면 충분하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에릭 씨가 저보다 잘 알잖아요. 그의 국내 사업을 망쳐놓으면 그 사람이 당신을 가만두겠어요?” “그건 에릭 씨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겠죠. 그래서 당신은 그저 제가 박한빈 씨를 배신했다고 믿게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그동안 저를 재촉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죠. 맞나요?” “그렇게 되면 에릭 씨는 박한빈 씨에게 말할 수 있겠죠. 이것 좀 보라고. 네 곁에 있는 사람들, 아내마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오직 나만이 너의 진정한 동료라고.”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에릭은 한참을 침묵한 후에야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 원래 난 유리 씨를 그냥 겉만 화려한 바보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로얀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요.” 성유리는 무표정하게 그저 에릭을 쳐다볼 뿐이었다. “흠... 유리 씨 말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손해가 될 건 없잖아요? 어차피 유리 씨가 원하는 건 박한빈 곁을 떠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유리 씨를 폭로하면 한빈이가 당신에게 실망해 결국 놓아줄 테니까. 그때면 성유리 씨가 원하는 걸 얻게 되는 셈 아닙니까?” “아니면... 혹시 박한빈 옆에 남고 싶어진 건가요?”“아니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그녀의 말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에릭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하지만 지금은 아니
성유리가 에릭과 거의 동시에 방으로 돌아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즉각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둘이 어디 갔다 온 거야?”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성유리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가는 길에 에릭 씨를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고요.” 그녀의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웠다.게다가 여기는 금성이었으니 박한빈도 에릭이 대담한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한빈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는 에릭을 한번 흘겨보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주문한 음식은 이미 모두 상에 차려져 있었다. 에릭은 여전히 중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체면상 조금 먹는 척은 했다. 대신 에릭은 박한빈과 함께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박한빈이 계속 술을 마시려 하자 성유리는 그의 잔을 꽉 쥐며 내려놓더니 말했다.“그만 마셔요.”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면서 이렇게 술까지 많이 마시면 몸이 성하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눈에는 불만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 박한빈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에릭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난 안 마실게.” 에릭은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의 시선 대부분은 성유리에게 향해 있었다. 솔직히 방금 성유리가 했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박한빈을 걱정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여자의 연기력은 이제 무서울 정도라니까.’ ... 박한빈은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집에 도착한 후, 성유리는 그에게 꿀물 한 잔을 타 주었다. 그는 성유리가 건네준 잔을 받아 들더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래요?” 성유리가 물었다. “그냥... 네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너 이제 나 안 미워해?” 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스스로 미간을 찌푸리며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성유리는 고개를 숙여 박한빈의 손을 쓱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놔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파요.”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제야 박한빈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은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손을 끌어올렸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꽤 강한 힘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성유리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가 좀 더 제대로 물 수 있도록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박한빈의 팔뚝을 놓아주었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드러냈다.“계속 물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박한빈 씨는 제가 고작 한번 물었다고 화가 풀릴 것 같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성유정이 한 짓을 알게 됐어요?”“우리가 첫 번째 이혼을 한 다음에.”박한빈이 대답에 성유리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그럼 그전까지는... 그때 유산된 게 정말 사고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네요?”박한빈은 침묵했고 성유리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박한빈이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었다.“그래. 나도 인정해. 난 한심한 놈이었어.”박한빈이 성유리의 귓가에서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날 때리든 욕하든 뭐든 다 받아들일게.”“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 곁에 있어. 그것만 해준다면... 나머지는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고 최대한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그리고 아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