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희는 옆에서 박한빈의 다정한 행동을 똑똑히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을 챙겨주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식사를 거의 마쳤다고 판단이 들었고 이내 박세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서 그룹 쪽 사람들이랑 만난다던데... 지금 상황이 어때?” 박세빈은 고개를 숙인 채 음식만 먹고 있다가 박한빈의 질문을 듣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 그러더니 놀란 토끼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한편, 김난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서 그룹? 그게 뭔데?” “아, 할머니께선 아직 잘 모르시겠군요. 그쪽은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예요.”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강서 그룹에 대한 설명의 말을 덧붙였다. “쉽게 말해 가진 지분을 담보로 거액의 현금을 빌려주는 곳입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주식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추가 배당도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주식이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계약 조건에 따라 지분을 해체하거나 심지어 삼켜버리기도 하죠.” 그는 천천히 차도 한 모금 마시며 계속 말했다. “그럼 지금 그쪽과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네 생활에 그렇게 큰돈이 필요할 이유가 있나? 그들과 손을 잡아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박한빈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의 명확한 의도는 박세빈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 김난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지화의 지분을 담보로 잡혔단 거니?”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다시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만나기만 했을 뿐이고 아직...”박세빈은 급히 부정했지만 대답을 다 끝내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었다.“정말일까? 근데 내가 알기로는 네가 얼마 전에 해외로 큰 금액을 송금했다던데? 해외에 네가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라도 있나? 그런 큰 금액은 대체 뭐 때문이었어?” 박한빈은 느긋한 말투로 박세빈에게 따지듯 물었다. “설마 너도 주식 같은 거에 손댄 거야? 그
김난희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박세빈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각성한 듯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박한빈의 멱살을 꽉 잡았다. “그러니까 형님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라는 말이군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제가 이렇게 되도록 그냥 놔뒀습니까? 일부러 그랬죠?” 그의 분노 섞인 말에도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답했다.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자기 통제도 못 하는 네가 누구를 탓하겠냐?” “당신이 일부러 만든 함정이었잖아!” “그래. 하지만 그 함정에 뛰어들지 말지 선택한 건 너였어. 내가 네 머리에 총을 들이밀며 강요라도 했니?” 박한빈은 태연히 대꾸하며 그의 손가락을 천천히 하나씩 떼어냈다. “아, 참. 하나 더 알려줄 게 있어. 강서 그룹에는 사실 나도 지분이 있거든.”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네가 건 거래는 사실 내가 너를 위해 맞춤 설계한 거야. 주식을 담당했던 매니저도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사람이었고.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어쩌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큰돈을 손에 넣다가 한순간에 다 날리게 됐겠어?” 박세빈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지 의심만 했었다.비록 그의 질문은 격앙돼 있었지만 가장 큰 가능성은 박한빈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저 방관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 순간, 박세빈은 박한빈의 차분하고 냉담한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 소름이 끼쳤다. “그만하고 얼른 정리해서 돌아가라.” 박한빈은 짧게 대화를 마무리하며 곧바로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이제 집에 가야지.”성유리는 박한빈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걸어가다가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아버린 박세빈이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마치 무언가가 그의 몸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버린 듯한 허탈한 모습이었다. 차에 올라탄
이 시점에서 박한빈의 마음 또한 상당히 복잡했다. 특히 성유리의 솔직한 대답을 들었을 때, 그의 미간은 더욱 많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세계잖아요.” 성유리가 뜸을 들이다 대답을 덧붙였다.“그러니까 잔인하냐고 묻는 건 좀 의미 없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럼 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물었다. “누구? 박세빈 말이야?”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걱정할 이유가 있나? 어쨌든 잘 될 리는 없을 거잖아.” 그의 단호한 태도에 성유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예상대로 지화 관련 보도를 뉴스에서 접했다. 이번 일은 일부 회색 지대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이는 사실상 주식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로 그는 단순히 지화의 일반 주주가 아닌 박한빈의 동생이라는 신분까지 밝혀졌다. 이전에 지화에서 흘러나온 정보는 마치 박세빈이 박한빈의 자리를 대체할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깨달았다. 대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행동은 오히려 박한빈의 보조 역할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하다는 걸 드러냈다. 그리고 언론에 둘러싸여 도마 위에 물고기 된 박세빈은 갑자기 더 큰 폭탄을 터뜨렸다.강서 그룹의 배후에 박한빈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즉, 이번 일이 모두 박한빈의 설계였고 자신은 그 함정에 빠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 폭로로 언론은 즉각 들끓었지만 곧 강서 그룹과 박한빈 사이에 연관된 인물이 전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국 박세빈의 이러한 발언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무책임한 발버둥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리석고 못된 사람이라는 지울 수 없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한편, 박한빈은 언론 인터뷰에서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와 할머니는 세빈이를 믿었기에 회사에 들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고요한 눈빛은 성유정에게 비웃음과 경멸처럼 느껴졌다. 성유정은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뗐다. “그래?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제가 미처 몰랐군요... 그럼 늦게라도 축하라도 해줘야겠죠?” “맘대로 해.” 성유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네가 축하하든 말든 다 나한텐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성유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성유리의 말과 눈빛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감정이 가득 묻어 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토록 애쓰며 얻고자 한 모든 것이 성유리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현실도 그랬다. 그동안 성유정은 박한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심지어는 성유리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선택받은 사람은 성유리였다. 지금 성유리는 성유정 앞에서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군림하며 그녀를 하찮게 바라보는 듯했다. “사실 별일도 아니잖아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성유정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신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임신했다고 해서... 언니가 반드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가정주가 갑자기 나서며 대꾸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이런 말을 우리 대표님께 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있어요?” 성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되물었다. “참 대단하네요. 성유리 씨. 이제는 옆에 개까지 키우고 있나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죠? 임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참, 언니도 모르죠? 사실 저도 한빈 오빠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가정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억나세요? 저희가 도풍국에 갔을 때 우리 마주쳤잖아요.” 성유
“네.”“순조로웠어?” “아주 순조로웠죠. 의사 말로는 아이가 아주 건강하고 상태도 좋대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박한빈의 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딘가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한빈 씨 오늘 바쁘지 않았나요?”성유리가 갑자기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박세빈 씨 일은 다 처리된 건가요?”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야.” “그래요?” 성유리는 아주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오늘 병원에서 누구 만났어?” 성유리는 즉답하지 않고 앞에 서 있던 가정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정부는 그들 사이를 몰래 살피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박한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가정부를 저와 함께 보낸 건 사실 절 지켜보기 위함이었네요.”“너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박한빈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서... 누구 만났는데?” 성유리는 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성유정이요. 왜요?”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흰 그냥 짧게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걔가 저한테 해코지한 것도 없고 저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당신한테 굳이 보고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더 묻고 싶은 건 없어?”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마치 무언가를 강요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성유리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별로 물을 것도 없죠.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성유리의 가벼운 말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박한빈의 가슴에 구멍을 내버렸다. 그러자
12월 초,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웨딩사진을 찍으러 향했다. 두 사람 다 경험이 있기에 이번 과정들은 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박한빈이 특별제작을 맡긴 드레스라 디자이너는 위에 박힌 보석 몇 개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부러움에 가득 찬 표정과 말투로 말했지만 성유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옷으로 갈아입고 사진까지 다 찍은 성유리는 놀이공원 휴게실에서 쉬다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사실 성유리는 원래 그 여성과 모르는 사이였다. 오늘 웨딩사진을 찍기 위해 박한빈은 놀이공원을 통으로 빌렸다. 비록 놀러 오는 손님은 없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직원 몇 명은 꽤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처음에 그 여성 또한 놀이공원 직원인 줄 알았다. 그 여성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유리 씨?” 성유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저 모르시죠?” 여성은 생글생글 웃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전 유효정이라고 해요.” 성유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상대는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연정우 씨랑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에요.” 유효정의 말에 성유리는 머리를 띵하고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유효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음, 보아하니 저에 대해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청첩장 본 적 있어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아, 맞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 둘은 처음 만난 거 아니에요? 앞으로 알고 지내요. 성유리 사모님.” 유효정은 빠르게 태도를 바꿨지만 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그녀 눈빛에 담긴 악의를 발견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그저 그런 악수가 끝나자 유효정은 재빨리 손을 거
성유리는 사실 연정우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아마 그날 카페에서였다.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해외로 떠난다는 말을 전한 날 말이다. 그때 성유리는 앞으로 평생 연정우와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일이 펼쳐질지 몰랐다. 성유리와 연정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에게 연졍우를 한번 소개해 줬다. 박한빈은 아주 정중하게 연정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연정우는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뒤, 손을 천천히 내밀며 악수를 받아줬다. 박한빈은 그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웃더니 계속 말을 걸었다. “곧 결혼하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날짜도 저희랑 똑같던데... 이런 우연도 없습니다.” “맞아요!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유효정도 옆에서 박한빈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근데 날짜는 저희가 전부터 미리 정해놓은 거예요. 청첩장도 박 대표님께 보내드렸었는데?” “아마 박 대표님도 그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셨나 보죠?” 유효정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그 눈빛엔 조롱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효정 씨가 오해하고 계시나 본데 저랑 유리는 사실 재혼입니다.” “이번에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이유도 설명해 드릴 까요?” “전에 유리한테 못 해줬던 일들을 다시 해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과 똑같은 날을 고른 겁니다.” 박한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사실 말해 이날은 저희가 2년, 아니 훨씬 전부터 정해놓은 날이죠.” 그의 말에 유효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박한빈은 이내 분위기를 바꾸려 입을 뗐다. “그렇지만 고작 날짜 하나일 뿐입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거야 그렇죠.” 유효정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연정우는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고 유
“연정우 씨, 방금 그게 무슨 뜻이었죠?” 유효정은 급히 연정우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사람들 앞에서 저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연정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연정우는 천천히 뒤돌아서더니 유효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유효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연정우를 쏘아붙였다.“그럼 설명해 봐요. 방금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데요?” “그저 오늘 저녁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갔을 뿐입니다.” 연정우는 별 감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미가 없다고요? 박한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나요? 그 사람은 지화 그룹 총괄 매니저예요. 이 금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밥 한 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지 알아요?” “그건 그 사람들이고 전 아닙니다.” 유효정은 한동안 연정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자기 자신이 그 잘난 교수님인 줄 알아요? 아니면 박한빈 씨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빼앗았기 때문인가요?” “유효정 씨.” 그녀의 말에 연정우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겁먹기는커녕 유효정은 오히려 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뭐죠? 그런 태도는?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예전에 박한빈 씨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당신이랑 성유리 씨는 벌써 결혼했겠죠? 방금 그녀를 바라보던 정우 씨의 눈빛을 보세요. 제가 약혼녀라는 사실은 기억이나 하는 거예요?” “연정우 씨, 말해두지만 제 덕이 아니었으면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갔을 거예요.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하려고 우리 아빠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긴 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절 무시하고 억울한 척한다고요?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해요?” 유효정은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금성 상권에서 박씨 가문이 제일 꼭대기에 있으나 유
그래서 그 남자가 다가오는 순간, 연정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식사 대접하겠습니다.”그 말을 남긴 채,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그리고 남겨진 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행사 주최자뿐이었다.박한빈은 술을 마셨기에 운전기사에게 차를 맡겨 집으로 돌아왔다.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는 성유리가 외투를 걸치는 모습을 발견했다.그 시각 성유리는 마침 외출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어디 가려고?”“박한빈 씨? 어떻게 벌써 돌아왔어요?”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순간,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리고 곧바로 성유리를 훑어보았다.연한 색감의 원피스 위에 걸친 깨끗한 흰색 외투.최근 들어 성유리의 안색도 한층 좋아졌다. 덕분에 간단히 립스틱만 발랐을 뿐인데도 더없이 매혹적으로 보였다.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어디 가려는 거야?”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박한빈 씨가 저보고 데리러 오라고 했잖아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도 떠올렸다.‘아, 맞다.’애초에 그는 이번 술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가 몇 번이나 초대했고 또 그 사람이 나이도 있는 편이라 마지못해 참석한 것이었다.애당초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에 미리 성유리에게 시간을 맞춰 데리러 오라고 했던 거다.즉, 성유리가 어디 가려던 게 아니라 자신을 데리러 오려던 것뿐이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긴장을 풀고 나지막이 말했다.“재미없어서 그냥 먼저 왔어.”그러면서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성유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술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별거 아냐.”“연정우 만났죠?”정곡을 찌르는 한마디.그 한마디에 박한빈의 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
박한빈이 말했던 대로 연정우는 지금 금성에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업계에서 몸을 담그고 있으니 마주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머리론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막상 눈앞에서 연정우를 본 순간,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데도 연정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와인잔을 들고 박한빈 쪽으로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어디서든 늘 주목받는 사람이었으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방금까지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런데 연정우가 갑자기 불러 세우면서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었고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박한빈은 말을 거는 연정우를 흘깃 본 뒤, 금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시간이 흘렀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연정우의 인사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연정우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며칠 전 길에서 사모님을 뵀었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사모님.그 세 글자에 몇몇 사람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에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어떤 여자를 데리고 조문을 왔던 기억이 났다.그때 함께 온 여자가...“당연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마침내 침묵하던 박한빈이 대답했지만 얼굴에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제 아내니까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굳이 연 대표님께서 걱정할 필요는 없고요.”“그럼 다행이네요. 사실 전부터 걱정했거든요. 예전에 사건이 있었잖아요? 혹시나 사모님께 영향을 미쳤을까 해서요. 지금 보니 다 회복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연정우의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잔뜩 찌푸려졌다.“그 사건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연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참 좋은 사람이었는데...”“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연정우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어요. 너
“혹시 제가 연정우랑 무슨 일이라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박한빈의 생각을 간파하며 물었다.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평온하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급회전을 하더니 이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성유리는 깜짝 놀랐고 그 탓에 머리를 옆 창문에 부딪쳤다.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가장 먼저 박한빈의 팔을 세게 내리쳤다.“대체 뭐 하는 거예요! 엄청 아프잖아요.”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주먹으로 툭툭 치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만히 있었다.그러더니 몸을 기울여 성유리의 이마를 유심히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뭐라고요?”“네가 직접 생각해 봐. 방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너... 연정우 씨랑 무슨 일이라도 있을 생각이야?”그 말에 성유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뭘 멋대로 지어내고 있냐고요?”성유리는 말하며 박한빈의 손을 확 밀쳐냈다.“방금 네 말투가 딱 그런 뉘앙스였잖아.”“제가 말한 건 박한빈 씨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는 거였잖아요. 제가 무슨 일을 벌이겠다는 뜻이 아니라고요.”“그래서 두 사람 예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고?”결국, 박한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사실 요즘 그는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늘이와의 관계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이번 주 금요일에는 하늘이의 유치원 공개 수업에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과거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입 밖에 꺼내지 않게 됐고 이렇게 계속 평온한 날들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더 이상 그 이름을 떠올릴 일도 거의 없었다.그런데 오늘,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고 나니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들이 박한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그 사람과 성유리는 한때 함께였던 사이다.심지어 결혼까지 생각했었고 같은
성유리는 기사한테 자신을 데리러 오라는 부탁을 마친 상태였다.그런데 뒷좌석에 올라탄 후에야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미 차에 탄 상황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녀는 굳이 다시 내리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박한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탄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 위를 질주했다.그러다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차가 길가에 멈춰 섰다.“이리 와.”“거의 다 왔잖아요.”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성유리는 결국 차에서 내렸다.원래는 조수석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박한빈이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내 박한빈은 그녀의 시선이 앞쪽을 향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연정우 역시 예상치 못한 만남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그녀를 향해 다가오려는 것 같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시선을 확실히 끌기 위해 차 문을 일부러 세게 닫았다.쾅!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연정우도 뒤늦게 그를 보았다.연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성유리를 그대로 품에 안아버렸다.한편, 성유리한테 다가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연정우는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고 그때부터 침묵이 흘렀다.한동안 서로를 지켜보던 끝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연 대표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연정우는 그의 말을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 침묵하다가 이내 시선을 천천히 성유리에게 돌렸다.그리고 잠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군요.”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옆에 있던 박한빈 역시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단호하게 말했다.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성유리는 고개를 숙여 박한빈의 손을 쓱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놔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파요.”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제야 박한빈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은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손을 끌어올렸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꽤 강한 힘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성유리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가 좀 더 제대로 물 수 있도록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박한빈의 팔뚝을 놓아주었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드러냈다.“계속 물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박한빈 씨는 제가 고작 한번 물었다고 화가 풀릴 것 같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성유정이 한 짓을 알게 됐어요?”“우리가 첫 번째 이혼을 한 다음에.”박한빈이 대답에 성유리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그럼 그전까지는... 그때 유산된 게 정말 사고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네요?”박한빈은 침묵했고 성유리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박한빈이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었다.“그래. 나도 인정해. 난 한심한 놈이었어.”박한빈이 성유리의 귓가에서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날 때리든 욕하든 뭐든 다 받아들일게.”“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 곁에 있어. 그것만 해준다면... 나머지는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고 최대한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그리고 아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