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희는 옆에서 박한빈의 다정한 행동을 똑똑히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을 챙겨주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식사를 거의 마쳤다고 판단이 들었고 이내 박세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서 그룹 쪽 사람들이랑 만난다던데... 지금 상황이 어때?” 박세빈은 고개를 숙인 채 음식만 먹고 있다가 박한빈의 질문을 듣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 그러더니 놀란 토끼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한편, 김난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서 그룹? 그게 뭔데?” “아, 할머니께선 아직 잘 모르시겠군요. 그쪽은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예요.”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강서 그룹에 대한 설명의 말을 덧붙였다. “쉽게 말해 가진 지분을 담보로 거액의 현금을 빌려주는 곳입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주식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추가 배당도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주식이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계약 조건에 따라 지분을 해체하거나 심지어 삼켜버리기도 하죠.” 그는 천천히 차도 한 모금 마시며 계속 말했다. “그럼 지금 그쪽과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네 생활에 그렇게 큰돈이 필요할 이유가 있나? 그들과 손을 잡아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박한빈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의 명확한 의도는 박세빈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 김난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지화의 지분을 담보로 잡혔단 거니?”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다시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만나기만 했을 뿐이고 아직...”박세빈은 급히 부정했지만 대답을 다 끝내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었다.“정말일까? 근데 내가 알기로는 네가 얼마 전에 해외로 큰 금액을 송금했다던데? 해외에 네가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라도 있나? 그런 큰 금액은 대체 뭐 때문이었어?” 박한빈은 느긋한 말투로 박세빈에게 따지듯 물었다. “설마 너도 주식 같은 거에 손댄 거야? 그
김난희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박세빈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각성한 듯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박한빈의 멱살을 꽉 잡았다. “그러니까 형님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라는 말이군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제가 이렇게 되도록 그냥 놔뒀습니까? 일부러 그랬죠?” 그의 분노 섞인 말에도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답했다.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자기 통제도 못 하는 네가 누구를 탓하겠냐?” “당신이 일부러 만든 함정이었잖아!” “그래. 하지만 그 함정에 뛰어들지 말지 선택한 건 너였어. 내가 네 머리에 총을 들이밀며 강요라도 했니?” 박한빈은 태연히 대꾸하며 그의 손가락을 천천히 하나씩 떼어냈다. “아, 참. 하나 더 알려줄 게 있어. 강서 그룹에는 사실 나도 지분이 있거든.”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네가 건 거래는 사실 내가 너를 위해 맞춤 설계한 거야. 주식을 담당했던 매니저도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사람이었고.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어쩌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큰돈을 손에 넣다가 한순간에 다 날리게 됐겠어?” 박세빈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지 의심만 했었다.비록 그의 질문은 격앙돼 있었지만 가장 큰 가능성은 박한빈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저 방관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 순간, 박세빈은 박한빈의 차분하고 냉담한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 소름이 끼쳤다. “그만하고 얼른 정리해서 돌아가라.” 박한빈은 짧게 대화를 마무리하며 곧바로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이제 집에 가야지.”성유리는 박한빈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걸어가다가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아버린 박세빈이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마치 무언가가 그의 몸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버린 듯한 허탈한 모습이었다. 차에 올라탄
이 시점에서 박한빈의 마음 또한 상당히 복잡했다. 특히 성유리의 솔직한 대답을 들었을 때, 그의 미간은 더욱 많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세계잖아요.” 성유리가 뜸을 들이다 대답을 덧붙였다.“그러니까 잔인하냐고 묻는 건 좀 의미 없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럼 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물었다. “누구? 박세빈 말이야?”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걱정할 이유가 있나? 어쨌든 잘 될 리는 없을 거잖아.” 그의 단호한 태도에 성유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예상대로 지화 관련 보도를 뉴스에서 접했다. 이번 일은 일부 회색 지대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이는 사실상 주식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로 그는 단순히 지화의 일반 주주가 아닌 박한빈의 동생이라는 신분까지 밝혀졌다. 이전에 지화에서 흘러나온 정보는 마치 박세빈이 박한빈의 자리를 대체할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깨달았다. 대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행동은 오히려 박한빈의 보조 역할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하다는 걸 드러냈다. 그리고 언론에 둘러싸여 도마 위에 물고기 된 박세빈은 갑자기 더 큰 폭탄을 터뜨렸다.강서 그룹의 배후에 박한빈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즉, 이번 일이 모두 박한빈의 설계였고 자신은 그 함정에 빠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 폭로로 언론은 즉각 들끓었지만 곧 강서 그룹과 박한빈 사이에 연관된 인물이 전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국 박세빈의 이러한 발언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무책임한 발버둥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리석고 못된 사람이라는 지울 수 없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한편, 박한빈은 언론 인터뷰에서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와 할머니는 세빈이를 믿었기에 회사에 들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고요한 눈빛은 성유정에게 비웃음과 경멸처럼 느껴졌다. 성유정은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뗐다. “그래?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제가 미처 몰랐군요... 그럼 늦게라도 축하라도 해줘야겠죠?” “맘대로 해.” 성유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네가 축하하든 말든 다 나한텐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성유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성유리의 말과 눈빛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감정이 가득 묻어 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토록 애쓰며 얻고자 한 모든 것이 성유리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현실도 그랬다. 그동안 성유정은 박한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심지어는 성유리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선택받은 사람은 성유리였다. 지금 성유리는 성유정 앞에서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군림하며 그녀를 하찮게 바라보는 듯했다. “사실 별일도 아니잖아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성유정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신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임신했다고 해서... 언니가 반드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가정주가 갑자기 나서며 대꾸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이런 말을 우리 대표님께 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있어요?” 성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되물었다. “참 대단하네요. 성유리 씨. 이제는 옆에 개까지 키우고 있나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죠? 임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참, 언니도 모르죠? 사실 저도 한빈 오빠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가정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억나세요? 저희가 도풍국에 갔을 때 우리 마주쳤잖아요.” 성유
“네.”“순조로웠어?” “아주 순조로웠죠. 의사 말로는 아이가 아주 건강하고 상태도 좋대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박한빈의 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딘가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한빈 씨 오늘 바쁘지 않았나요?”성유리가 갑자기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박세빈 씨 일은 다 처리된 건가요?”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야.” “그래요?” 성유리는 아주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오늘 병원에서 누구 만났어?” 성유리는 즉답하지 않고 앞에 서 있던 가정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정부는 그들 사이를 몰래 살피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박한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가정부를 저와 함께 보낸 건 사실 절 지켜보기 위함이었네요.”“너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박한빈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서... 누구 만났는데?” 성유리는 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성유정이요. 왜요?”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흰 그냥 짧게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걔가 저한테 해코지한 것도 없고 저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당신한테 굳이 보고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더 묻고 싶은 건 없어?”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마치 무언가를 강요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성유리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별로 물을 것도 없죠.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성유리의 가벼운 말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박한빈의 가슴에 구멍을 내버렸다. 그러자
12월 초,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웨딩사진을 찍으러 향했다. 두 사람 다 경험이 있기에 이번 과정들은 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박한빈이 특별제작을 맡긴 드레스라 디자이너는 위에 박힌 보석 몇 개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부러움에 가득 찬 표정과 말투로 말했지만 성유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옷으로 갈아입고 사진까지 다 찍은 성유리는 놀이공원 휴게실에서 쉬다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사실 성유리는 원래 그 여성과 모르는 사이였다. 오늘 웨딩사진을 찍기 위해 박한빈은 놀이공원을 통으로 빌렸다. 비록 놀러 오는 손님은 없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직원 몇 명은 꽤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처음에 그 여성 또한 놀이공원 직원인 줄 알았다. 그 여성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유리 씨?” 성유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저 모르시죠?” 여성은 생글생글 웃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전 유효정이라고 해요.” 성유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상대는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연정우 씨랑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에요.” 유효정의 말에 성유리는 머리를 띵하고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유효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음, 보아하니 저에 대해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청첩장 본 적 있어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아, 맞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 둘은 처음 만난 거 아니에요? 앞으로 알고 지내요. 성유리 사모님.” 유효정은 빠르게 태도를 바꿨지만 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그녀 눈빛에 담긴 악의를 발견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그저 그런 악수가 끝나자 유효정은 재빨리 손을 거
성유리는 사실 연정우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아마 그날 카페에서였다.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해외로 떠난다는 말을 전한 날 말이다. 그때 성유리는 앞으로 평생 연정우와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일이 펼쳐질지 몰랐다. 성유리와 연정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에게 연졍우를 한번 소개해 줬다. 박한빈은 아주 정중하게 연정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연정우는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뒤, 손을 천천히 내밀며 악수를 받아줬다. 박한빈은 그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웃더니 계속 말을 걸었다. “곧 결혼하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날짜도 저희랑 똑같던데... 이런 우연도 없습니다.” “맞아요!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유효정도 옆에서 박한빈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근데 날짜는 저희가 전부터 미리 정해놓은 거예요. 청첩장도 박 대표님께 보내드렸었는데?” “아마 박 대표님도 그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셨나 보죠?” 유효정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그 눈빛엔 조롱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효정 씨가 오해하고 계시나 본데 저랑 유리는 사실 재혼입니다.” “이번에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이유도 설명해 드릴 까요?” “전에 유리한테 못 해줬던 일들을 다시 해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과 똑같은 날을 고른 겁니다.” 박한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사실 말해 이날은 저희가 2년, 아니 훨씬 전부터 정해놓은 날이죠.” 그의 말에 유효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박한빈은 이내 분위기를 바꾸려 입을 뗐다. “그렇지만 고작 날짜 하나일 뿐입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거야 그렇죠.” 유효정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연정우는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고 유
“연정우 씨, 방금 그게 무슨 뜻이었죠?” 유효정은 급히 연정우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사람들 앞에서 저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연정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연정우는 천천히 뒤돌아서더니 유효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유효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연정우를 쏘아붙였다.“그럼 설명해 봐요. 방금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데요?” “그저 오늘 저녁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갔을 뿐입니다.” 연정우는 별 감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미가 없다고요? 박한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나요? 그 사람은 지화 그룹 총괄 매니저예요. 이 금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밥 한 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지 알아요?” “그건 그 사람들이고 전 아닙니다.” 유효정은 한동안 연정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자기 자신이 그 잘난 교수님인 줄 알아요? 아니면 박한빈 씨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빼앗았기 때문인가요?” “유효정 씨.” 그녀의 말에 연정우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겁먹기는커녕 유효정은 오히려 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뭐죠? 그런 태도는?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예전에 박한빈 씨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당신이랑 성유리 씨는 벌써 결혼했겠죠? 방금 그녀를 바라보던 정우 씨의 눈빛을 보세요. 제가 약혼녀라는 사실은 기억이나 하는 거예요?” “연정우 씨, 말해두지만 제 덕이 아니었으면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갔을 거예요.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하려고 우리 아빠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긴 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절 무시하고 억울한 척한다고요?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해요?” 유효정은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금성 상권에서 박씨 가문이 제일 꼭대기에 있으나 유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