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05화

Author: 송진
“네.”

“순조로웠어?”

“아주 순조로웠죠. 의사 말로는 아이가 아주 건강하고 상태도 좋대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박한빈의 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딘가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한빈 씨 오늘 바쁘지 않았나요?”

성유리가 갑자기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박세빈 씨 일은 다 처리된 건가요?”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야.”

“그래요?”

성유리는 아주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

“오늘 병원에서 누구 만났어?”

성유리는 즉답하지 않고 앞에 서 있던 가정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정부는 그들 사이를 몰래 살피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박한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가정부를 저와 함께 보낸 건 사실 절 지켜보기 위함이었네요.”

“너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박한빈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서... 누구 만났는데?”

성유리는 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

“성유정이요. 왜요?”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흰 그냥 짧게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걔가 저한테 해코지한 것도 없고 저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당신한테 굳이 보고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더 묻고 싶은 건 없어?”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마치 무언가를 강요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성유리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별로 물을 것도 없죠.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성유리의 가벼운 말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박한빈의 가슴에 구멍을 내버렸다.

그러자
Locked Chapter
Continue Reading on GoodNovel
Scan code to download App

Related chapters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06화

    12월 초,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웨딩사진을 찍으러 향했다. 두 사람 다 경험이 있기에 이번 과정들은 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박한빈이 특별제작을 맡긴 드레스라 디자이너는 위에 박힌 보석 몇 개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부러움에 가득 찬 표정과 말투로 말했지만 성유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옷으로 갈아입고 사진까지 다 찍은 성유리는 놀이공원 휴게실에서 쉬다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사실 성유리는 원래 그 여성과 모르는 사이였다. 오늘 웨딩사진을 찍기 위해 박한빈은 놀이공원을 통으로 빌렸다. 비록 놀러 오는 손님은 없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직원 몇 명은 꽤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처음에 그 여성 또한 놀이공원 직원인 줄 알았다. 그 여성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유리 씨?” 성유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저 모르시죠?” 여성은 생글생글 웃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전 유효정이라고 해요.” 성유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상대는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연정우 씨랑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에요.” 유효정의 말에 성유리는 머리를 띵하고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유효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음, 보아하니 저에 대해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청첩장 본 적 있어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아, 맞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 둘은 처음 만난 거 아니에요? 앞으로 알고 지내요. 성유리 사모님.” 유효정은 빠르게 태도를 바꿨지만 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그녀 눈빛에 담긴 악의를 발견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그저 그런 악수가 끝나자 유효정은 재빨리 손을 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07화

    성유리는 사실 연정우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아마 그날 카페에서였다.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해외로 떠난다는 말을 전한 날 말이다. 그때 성유리는 앞으로 평생 연정우와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일이 펼쳐질지 몰랐다. 성유리와 연정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에게 연졍우를 한번 소개해 줬다. 박한빈은 아주 정중하게 연정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연정우는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뒤, 손을 천천히 내밀며 악수를 받아줬다. 박한빈은 그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웃더니 계속 말을 걸었다. “곧 결혼하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날짜도 저희랑 똑같던데... 이런 우연도 없습니다.” “맞아요!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유효정도 옆에서 박한빈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근데 날짜는 저희가 전부터 미리 정해놓은 거예요. 청첩장도 박 대표님께 보내드렸었는데?” “아마 박 대표님도 그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셨나 보죠?” 유효정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그 눈빛엔 조롱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효정 씨가 오해하고 계시나 본데 저랑 유리는 사실 재혼입니다.” “이번에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이유도 설명해 드릴 까요?” “전에 유리한테 못 해줬던 일들을 다시 해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과 똑같은 날을 고른 겁니다.” 박한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사실 말해 이날은 저희가 2년, 아니 훨씬 전부터 정해놓은 날이죠.” 그의 말에 유효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박한빈은 이내 분위기를 바꾸려 입을 뗐다. “그렇지만 고작 날짜 하나일 뿐입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거야 그렇죠.” 유효정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연정우는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고 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08화

    “연정우 씨, 방금 그게 무슨 뜻이었죠?” 유효정은 급히 연정우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사람들 앞에서 저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연정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연정우는 천천히 뒤돌아서더니 유효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유효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연정우를 쏘아붙였다.“그럼 설명해 봐요. 방금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데요?” “그저 오늘 저녁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갔을 뿐입니다.” 연정우는 별 감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미가 없다고요? 박한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나요? 그 사람은 지화 그룹 총괄 매니저예요. 이 금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밥 한 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지 알아요?” “그건 그 사람들이고 전 아닙니다.” 유효정은 한동안 연정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자기 자신이 그 잘난 교수님인 줄 알아요? 아니면 박한빈 씨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빼앗았기 때문인가요?” “유효정 씨.” 그녀의 말에 연정우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겁먹기는커녕 유효정은 오히려 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뭐죠? 그런 태도는?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예전에 박한빈 씨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당신이랑 성유리 씨는 벌써 결혼했겠죠? 방금 그녀를 바라보던 정우 씨의 눈빛을 보세요. 제가 약혼녀라는 사실은 기억이나 하는 거예요?” “연정우 씨, 말해두지만 제 덕이 아니었으면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갔을 거예요.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하려고 우리 아빠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긴 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절 무시하고 억울한 척한다고요?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해요?” 유효정은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금성 상권에서 박씨 가문이 제일 꼭대기에 있으나 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09화

    유효정의 성격은 화가 나는 것도 빠르지만 가라앉는 것도 빨랐다. 혹은 연정우에 대해서만큼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포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연정우가 단 몇 마디 부드러운 말을 건네기만 해도 유효정의 화는 금세 풀렸다. 한참 서 있던 연정우가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됐습니다. 저 정말 전화 한 통 해야 해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어쨌든 효정 씨가 주선한 자린데 저희 둘 다 없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알았어.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전화 끝나면 빨리 와요.” “네.” 연정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효정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연정우의 웃음은 즉시 사라졌다. 웃음 대신 피곤함과 분명한 혐오감이 얼굴에 드러났다. 연정우는 몸을 휙 돌려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연정우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방금 그와 유효정 사이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 같았다. 유효정의 고압적인 태도, 그리고 그의 비굴한 사과까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연정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전례 없는 굴욕감이 그를 짓눌렀고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유리 또한 연정우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연정우의 옆을 스쳐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너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연정우가 떠나가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걸음을 뚝 멈추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위로는 안 해도 돼.”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나는 아들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그녀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0화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연정우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눈빛, 심지어 약간의 의문이 담긴 시선이 연정우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너도 나를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넌 잘하고 있어. 너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들을 덧붙였다. “사실 나도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잖아. 그런 내가 널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성유리의 말을 들은 연정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래?” “응, 그래서...” “그래서 넌 그들을 미워하지 않아?” 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연정우는 오히려 손목을 더 세게 붙잡으며 물었다. 그의 힘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실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어. 궁금해?” 연정우는 말하며 성유리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성유리는 그의 눈에 서려 있는 음침함을 보았다. 하지만 더 눈에 띄었던 것은 연정우의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기에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고 그저 똑바로 서서 움직임 하나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연정우도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성유리가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연정우는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잡더니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때, 성유리 뒤에 있던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연정우를 그녀에게서 떼어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박한빈이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박한빈은 곧바로 연정우에게 달려들었다.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연정우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발생할 때까지 성유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래서 아까 정우가 갑자기 키스한 거구나.’ ‘박한빈 씨가 있는 걸 봤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1화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집에 가자.” 박한빈은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았다. “어디 가세요?” 그때, 유효정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한빈 씨, 저희가 되게 만만해 보이시나 봐요? 지금 누구 몸에 손을 댔는지 아세요? 박...” “원하시면 경찰에 신고해도 됩니다.” 박한빈은 유효정의 말을 뚝 끊어버리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경찰에 신고하시는 김에 호텔 직원한테 CCTV도 보여 달라고 하세요. 그럼 제가 왜 저 인간을 때렸는지 아실 테니까.” 유효정은 박한빈의 당당하고 냉정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었고 박한빈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걷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종종걸음으로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 너무 급하게 떠난 탓에 성유리는 외투나 목도리조차 챙기지 못해 호텔 밖으로 나오자 강한 바람에 추워서 몸을 벌벌 떨었다. 늘 “다정다감”한 태도로 성유리를 대하던 박한빈은 자기 옆에서 추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 이내 성유리가 박한빈의 힘에 못 이겨 차에 버려지다시피 올라타자 그는 차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강한 힘에 놀란 운전기사는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눈치 빠른 기사는 묵묵히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가는 길 내내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유리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손뼈를 부러뜨릴 듯 아까보다 더 센 힘으로 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손에서 고통이 느껴졌는데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미간만 찌푸린 채 침묵했다. 도연제에 도착하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강제로 차에서 끌어 내렸고 밖은 여전히 추웠기에 성유리는 몇 번이나 재채기까지 했지만 박한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2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아직도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웬일인지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러더니 실성한 사람처럼 박한빈은 깔깔 웃으며 입을 뗐다. “오, 그래?” “맞아. 난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야, 사실 네 연기도 별로였어.” “내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한 이유는... 내가 너한테 속아주고 싶었을 뿐이고.” “처음부터 날 속이기로 했으면 왜 평생 속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거야?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성유리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더 속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서요. 우습기도 하고.” “그럼 지금 나는 우습지 않다는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제가 말했잖아요. 전 박한빈 씨를 원망한다고요.” 깔끔하고 단호한 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원망은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생기는 거랬어.’ 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눈빛에서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현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원망하고 혐오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아이 때문에 그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때 내가 네 약을 몰래 바꾸지 않았다면 우리는 달랐을까?” 성유리는 침묵했고 박한빈은 그 침묵 속에서 답을 알아차렸다. 그 답은 박한빈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 듯 그는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아? 정말 그런 거야?” “네.” 머릿속이 새하얘진 박한빈은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는 성유리는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3화

    대화의 끝자락에서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도풍국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자존심까지 다 버리면서 매달릴 때, 그때라도 저한테 기회를 주셨으면 제 마음이 이렇게까지 싸늘하게 식지는 않았을 거예요.” “근데 박한빈 씨는 어떻게 하셨죠?” “성유정을 데리고 여행을 한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키셨잖아요.” 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어두운 안색으로 성유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한빈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물었다. “뭐라고? 성유정이 임신한 아이가 내 아이라는 말을 누가 했는데?”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답을 알아차린 듯 다시 물었다. “성유정이야? 병원에서 마주쳤던 그날에 걔가 그렇게 말했어?” “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은 거야? 내가 설명...” “설명 안 해줘도 돼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제가 물어보지 않은 건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예요.” “박한빈 씨 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 데요?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박한빈은 눈앞에 있는 성유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사람이랑 아예 달라 보였다. 그는 늘 성유리가 다정하고 착한 여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누구보다 더 독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잔인하게 자기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들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박한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뗐다. “그래. 너는 관심이 없겠지. 그래도 난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난 성유정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전에 도풍국에서 마주친 그날에도 난 업무를 처리하러 간 거야. 성유정이 억지로 나를 따라오더니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라고!” “네.” 비록 성유리가 방금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꼭 오해를 풀고 싶었고 누명을 벗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도 간결한 대답뿐이었고 박한빈은

Latest chapter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7화

    그래서 그 남자가 다가오는 순간, 연정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식사 대접하겠습니다.”그 말을 남긴 채,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그리고 남겨진 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행사 주최자뿐이었다.박한빈은 술을 마셨기에 운전기사에게 차를 맡겨 집으로 돌아왔다.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는 성유리가 외투를 걸치는 모습을 발견했다.그 시각 성유리는 마침 외출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어디 가려고?”“박한빈 씨? 어떻게 벌써 돌아왔어요?”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순간,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리고 곧바로 성유리를 훑어보았다.연한 색감의 원피스 위에 걸친 깨끗한 흰색 외투.최근 들어 성유리의 안색도 한층 좋아졌다. 덕분에 간단히 립스틱만 발랐을 뿐인데도 더없이 매혹적으로 보였다.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어디 가려는 거야?”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박한빈 씨가 저보고 데리러 오라고 했잖아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도 떠올렸다.‘아, 맞다.’애초에 그는 이번 술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가 몇 번이나 초대했고 또 그 사람이 나이도 있는 편이라 마지못해 참석한 것이었다.애당초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에 미리 성유리에게 시간을 맞춰 데리러 오라고 했던 거다.즉, 성유리가 어디 가려던 게 아니라 자신을 데리러 오려던 것뿐이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긴장을 풀고 나지막이 말했다.“재미없어서 그냥 먼저 왔어.”그러면서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성유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술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별거 아냐.”“연정우 만났죠?”정곡을 찌르는 한마디.그 한마디에 박한빈의 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6화

    박한빈이 말했던 대로 연정우는 지금 금성에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업계에서 몸을 담그고 있으니 마주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머리론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막상 눈앞에서 연정우를 본 순간,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데도 연정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와인잔을 들고 박한빈 쪽으로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어디서든 늘 주목받는 사람이었으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방금까지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런데 연정우가 갑자기 불러 세우면서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었고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박한빈은 말을 거는 연정우를 흘깃 본 뒤, 금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시간이 흘렀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연정우의 인사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연정우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며칠 전 길에서 사모님을 뵀었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사모님.그 세 글자에 몇몇 사람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에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어떤 여자를 데리고 조문을 왔던 기억이 났다.그때 함께 온 여자가...“당연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마침내 침묵하던 박한빈이 대답했지만 얼굴에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제 아내니까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굳이 연 대표님께서 걱정할 필요는 없고요.”“그럼 다행이네요. 사실 전부터 걱정했거든요. 예전에 사건이 있었잖아요? 혹시나 사모님께 영향을 미쳤을까 해서요. 지금 보니 다 회복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연정우의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잔뜩 찌푸려졌다.“그 사건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연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참 좋은 사람이었는데...”“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연정우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어요. 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5화

    “혹시 제가 연정우랑 무슨 일이라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박한빈의 생각을 간파하며 물었다.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평온하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급회전을 하더니 이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성유리는 깜짝 놀랐고 그 탓에 머리를 옆 창문에 부딪쳤다.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가장 먼저 박한빈의 팔을 세게 내리쳤다.“대체 뭐 하는 거예요! 엄청 아프잖아요.”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주먹으로 툭툭 치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만히 있었다.그러더니 몸을 기울여 성유리의 이마를 유심히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뭐라고요?”“네가 직접 생각해 봐. 방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너... 연정우 씨랑 무슨 일이라도 있을 생각이야?”그 말에 성유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뭘 멋대로 지어내고 있냐고요?”성유리는 말하며 박한빈의 손을 확 밀쳐냈다.“방금 네 말투가 딱 그런 뉘앙스였잖아.”“제가 말한 건 박한빈 씨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는 거였잖아요. 제가 무슨 일을 벌이겠다는 뜻이 아니라고요.”“그래서 두 사람 예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고?”결국, 박한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사실 요즘 그는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늘이와의 관계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이번 주 금요일에는 하늘이의 유치원 공개 수업에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과거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입 밖에 꺼내지 않게 됐고 이렇게 계속 평온한 날들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더 이상 그 이름을 떠올릴 일도 거의 없었다.그런데 오늘,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고 나니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들이 박한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그 사람과 성유리는 한때 함께였던 사이다.심지어 결혼까지 생각했었고 같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4화

    성유리는 기사한테 자신을 데리러 오라는 부탁을 마친 상태였다.그런데 뒷좌석에 올라탄 후에야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미 차에 탄 상황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녀는 굳이 다시 내리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박한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탄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 위를 질주했다.그러다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차가 길가에 멈춰 섰다.“이리 와.”“거의 다 왔잖아요.”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성유리는 결국 차에서 내렸다.원래는 조수석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박한빈이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내 박한빈은 그녀의 시선이 앞쪽을 향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연정우 역시 예상치 못한 만남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그녀를 향해 다가오려는 것 같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시선을 확실히 끌기 위해 차 문을 일부러 세게 닫았다.쾅!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연정우도 뒤늦게 그를 보았다.연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성유리를 그대로 품에 안아버렸다.한편, 성유리한테 다가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연정우는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고 그때부터 침묵이 흘렀다.한동안 서로를 지켜보던 끝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연 대표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연정우는 그의 말을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 침묵하다가 이내 시선을 천천히 성유리에게 돌렸다.그리고 잠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군요.”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옆에 있던 박한빈 역시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단호하게 말했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3화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2화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1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80화

    성유리는 고개를 숙여 박한빈의 손을 쓱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놔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파요.”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제야 박한빈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은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손을 끌어올렸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꽤 강한 힘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성유리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가 좀 더 제대로 물 수 있도록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박한빈의 팔뚝을 놓아주었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드러냈다.“계속 물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박한빈 씨는 제가 고작 한번 물었다고 화가 풀릴 것 같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성유정이 한 짓을 알게 됐어요?”“우리가 첫 번째 이혼을 한 다음에.”박한빈이 대답에 성유리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그럼 그전까지는... 그때 유산된 게 정말 사고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네요?”박한빈은 침묵했고 성유리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박한빈이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었다.“그래. 나도 인정해. 난 한심한 놈이었어.”박한빈이 성유리의 귓가에서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날 때리든 욕하든 뭐든 다 받아들일게.”“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 곁에 있어. 그것만 해준다면... 나머지는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고 최대한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그리고 아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79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