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09화

작가: 송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19 19:00:00
유효정의 성격은 화가 나는 것도 빠르지만 가라앉는 것도 빨랐다.

혹은 연정우에 대해서만큼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포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연정우가 단 몇 마디 부드러운 말을 건네기만 해도 유효정의 화는 금세 풀렸다.

한참 서 있던 연정우가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됐습니다. 저 정말 전화 한 통 해야 해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어쨌든 효정 씨가 주선한 자린데 저희 둘 다 없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알았어.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전화 끝나면 빨리 와요.”

“네.”

연정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효정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연정우의 웃음은 즉시 사라졌다. 웃음 대신 피곤함과 분명한 혐오감이 얼굴에 드러났다.

연정우는 몸을 휙 돌려 담배를 피울 장소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연정우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방금 그와 유효정 사이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 같았다.

유효정의 고압적인 태도, 그리고 그의 비굴한 사과까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연정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전례 없는 굴욕감이 그를 짓눌렀고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성유리 또한 연정우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연정우의 옆을 스쳐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너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연정우가 떠나가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걸음을 뚝 멈추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위로는 안 해도 돼.”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나는 아들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그녀의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0화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연정우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눈빛, 심지어 약간의 의문이 담긴 시선이 연정우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너도 나를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넌 잘하고 있어. 너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들을 덧붙였다. “사실 나도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잖아. 그런 내가 널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성유리의 말을 들은 연정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래?” “응, 그래서...” “그래서 넌 그들을 미워하지 않아?” 성유리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연정우는 오히려 손목을 더 세게 붙잡으며 물었다. 그의 힘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사실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어. 궁금해?” 연정우는 말하며 성유리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성유리는 그의 눈에 서려 있는 음침함을 보았다. 하지만 더 눈에 띄었던 것은 연정우의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기에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고 그저 똑바로 서서 움직임 하나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연정우도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성유리가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연정우는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잡더니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때, 성유리 뒤에 있던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연정우를 그녀에게서 떼어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박한빈이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박한빈은 곧바로 연정우에게 달려들었다.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연정우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발생할 때까지 성유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래서 아까 정우가 갑자기 키스한 거구나.’ ‘박한빈 씨가 있는 걸 봤기

    최신 업데이트 : 2024-12-19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1화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집에 가자.” 박한빈은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았다. “어디 가세요?” 그때, 유효정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한빈 씨, 저희가 되게 만만해 보이시나 봐요? 지금 누구 몸에 손을 댔는지 아세요? 박...” “원하시면 경찰에 신고해도 됩니다.” 박한빈은 유효정의 말을 뚝 끊어버리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경찰에 신고하시는 김에 호텔 직원한테 CCTV도 보여 달라고 하세요. 그럼 제가 왜 저 인간을 때렸는지 아실 테니까.” 유효정은 박한빈의 당당하고 냉정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었고 박한빈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걷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종종걸음으로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 너무 급하게 떠난 탓에 성유리는 외투나 목도리조차 챙기지 못해 호텔 밖으로 나오자 강한 바람에 추워서 몸을 벌벌 떨었다. 늘 “다정다감”한 태도로 성유리를 대하던 박한빈은 자기 옆에서 추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 이내 성유리가 박한빈의 힘에 못 이겨 차에 버려지다시피 올라타자 그는 차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강한 힘에 놀란 운전기사는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눈치 빠른 기사는 묵묵히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가는 길 내내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유리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손뼈를 부러뜨릴 듯 아까보다 더 센 힘으로 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손에서 고통이 느껴졌는데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미간만 찌푸린 채 침묵했다. 도연제에 도착하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강제로 차에서 끌어 내렸고 밖은 여전히 추웠기에 성유리는 몇 번이나 재채기까지 했지만 박한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

    최신 업데이트 : 2024-12-19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2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아직도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웬일인지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러더니 실성한 사람처럼 박한빈은 깔깔 웃으며 입을 뗐다. “오, 그래?” “맞아. 난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야, 사실 네 연기도 별로였어.” “내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한 이유는... 내가 너한테 속아주고 싶었을 뿐이고.” “처음부터 날 속이기로 했으면 왜 평생 속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거야? 도대체 왜!”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성유리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더 속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서요. 우습기도 하고.” “그럼 지금 나는 우습지 않다는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제가 말했잖아요. 전 박한빈 씨를 원망한다고요.” 깔끔하고 단호한 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원망은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생기는 거랬어.’ 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눈빛에서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현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원망하고 혐오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아이 때문에 그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때 내가 네 약을 몰래 바꾸지 않았다면 우리는 달랐을까?” 성유리는 침묵했고 박한빈은 그 침묵 속에서 답을 알아차렸다. 그 답은 박한빈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 듯 그는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아? 정말 그런 거야?” “네.” 머릿속이 새하얘진 박한빈은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는 성유리는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박

    최신 업데이트 : 2024-12-20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3화

    대화의 끝자락에서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도풍국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자존심까지 다 버리면서 매달릴 때, 그때라도 저한테 기회를 주셨으면 제 마음이 이렇게까지 싸늘하게 식지는 않았을 거예요.” “근데 박한빈 씨는 어떻게 하셨죠?” “성유정을 데리고 여행을 한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키셨잖아요.” 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어두운 안색으로 성유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한빈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물었다. “뭐라고? 성유정이 임신한 아이가 내 아이라는 말을 누가 했는데?”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답을 알아차린 듯 다시 물었다. “성유정이야? 병원에서 마주쳤던 그날에 걔가 그렇게 말했어?” “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은 거야? 내가 설명...” “설명 안 해줘도 돼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제가 물어보지 않은 건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예요.” “박한빈 씨 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 데요?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박한빈은 눈앞에 있는 성유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사람이랑 아예 달라 보였다. 그는 늘 성유리가 다정하고 착한 여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누구보다 더 독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잔인하게 자기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들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박한빈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뗐다. “그래. 너는 관심이 없겠지. 그래도 난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난 성유정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전에 도풍국에서 마주친 그날에도 난 업무를 처리하러 간 거야. 성유정이 억지로 나를 따라오더니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라고!” “네.” 비록 성유리가 방금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꼭 오해를 풀고 싶었고 누명을 벗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도 간결한 대답뿐이었고 박한빈은

    최신 업데이트 : 2024-12-20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4화

    “성유리, 결국 네가 이겼네.” 박한빈은 성유리 앞에 멈춰서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근데 왜 내가 너를 놓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그의 물음에 성유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놓아달라고 한 적 없어요. 전 당신이랑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심지어는 결혼식 날에도 전 평소대로 할 수 있고요.”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하셔야 해요. 앞으로 저희의 생활은 늘 이럴 거예요.” “만약 박한빈 씨가 괜찮다고 한다면 저도 상관없어요.”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서는 저도 어머니의 역할을 잘할 거예요. 그렇지만 아이랑 박한빈 씨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고요. 아이를 사랑해 주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는 제가 낳은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이에요.” ... 박한빈은 그렇게 떠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안엔 적막만이 흘렀고 성유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뒤, 성유리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녀는 박한빈에게 이런 잔인한 말들을 내뱉어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필경 이 모든 일은 자기가 직접 계획을 세운 것이니까. 이런 결과 또한 성유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가슴 한편이 아려왔고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따라 아랫배에서도 살짝 고통이 느껴져 성유리는 손으로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자 아랫배는 성유리의 손길을 느꼈는지 천천히 진정되었고 뱃속 안에 있는 아이도 위로를 받은 듯 잠잠해졌다. 성유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엄마라는 사람이 결국 이러고 있네. 넌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까?” 뱃속 아이는 당연하게도 성유리의 말에 대답할 리가 없었다. 성유리 또한 그 아이의 대답을 바란 적 없다. 왜냐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는 이런 선택을 했을 테고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성유리는 몸을 일으켜 위층으로 향했다. 침실로 돌아가 닫혀있던 커튼을 열어본 성유리는 그제야 밖에

    최신 업데이트 : 2024-12-20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5화

    성유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해가 떠 있는 상태였다. 내리던 눈은 이미 멈췄지만 방 안에는 여전히 성유리 홀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박한빈이 오늘 자신을 찾아와 얘기를 나눌 줄 알았다. 성유리가 아는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이런 일을 질질 끌지는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을 더 끌면 끌수록 박한빈은 견딜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성유리의 이번 추측은 제대로 빗나갔다. 그날, 박한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쯤에 김서영이 전화를 걸어 교외에 있는 별장으로 오라는 말까지 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의도를 몰랐지만 다음 날, 결국 그곳으로 향했다. 아마 생활환경이 바뀌어서일까? 김서영의 모습은 전보다 더 생기 있고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늘 입고 있던 우아한 원피스와 액세서리가 아닌 편안 차림으로 머리까지 낮게 묶고 있는 김서영은 보기에 전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아니, 젊어진 게 아니라 생동해졌다. 성유리는 늘 김서영이 그림 속에 갇혀있는 여인인 줄 알았지만 편하게 있는 김서영을 보니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그녀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정원에서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끙끙거리며 땅을 파고 있는 김서영을 보던 성유리가 다가가 도움을 주려 했다. 그제야 성유리를 발견한 김서영이 고개를 들더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왔니?” “네.” “다른 사람이 선물로 준 망고 나문데 열매가 맺히면 그렇게 맛있다더라. 내년이면 열매가 맺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려고. 아, 맞다! 유리 너도 망고 좋아하지 않니?” 성유리는 스스로도 언제부터 망고를 즐겨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서영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박한빈이 전에 사줬던 망고 케이크가 떠올랐다. ‘케이크 좀 먹었다고 내가 망고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가?’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 시간에 나무 심으면 안 되지 않나요?” “그렇지? 근데 누가 그러더라. 정성껏 나무를 심으면 시간이 늦어도 상

    최신 업데이트 : 2024-12-20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6화

    성유리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망고나무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 열매가 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키보다 큰 나무가 몇 년 뒤에는 얼마나 장관일지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난 이 나무를 못 보겠지?’ 성유리는 김서영에게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알려주었고 김서영은 안색이 굳어진 채로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다시 잘 될 확률은 없니?” “네.” “근데 난 네가 떠날 것 같지 않구나.”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 “사실 전에 너한테 가라고 했을 때가 제일 좋은 기회였어.” 성유리가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무슨 대답을 하려는 찰나,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빈이는 내 아들이야. 나는 누구보다 더 걔를 잘 알아.” “지금 너희 둘 사이가 나쁘다 해도 한빈이는 너한테 집착할 거야. 절대 유리 너를 떠나게 하지 않을 거고.”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설령 너희 둘 사이에 원한과 원망의 감정만 남아있다고 해도 말이다.” 김서영은 하려던 말들을 다 내뱉었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필경 어젯밤 박한빈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심한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상황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서영의 말은 다 사실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다음 날 저녁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심지어는 손에 케이크 하나를 든 채로 말이다.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쳐다만 보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먼저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내가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린 평소대로 살 수 있다고.” “그럼 계속 살던 대로 살자. 우리 둘의 결혼인 이미 한번 실패로 끝을 봤는데 한 번 더 실패하면... 금성에 있는 사람들 입에 우스운 이야깃거리로 남을 테니까.”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관계라고 해도 같이 살아가자고.” 박한빈은

    최신 업데이트 : 2024-12-21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17화

    “맞아. 하지만 이게 투자라고? 이건 분명 덫이야! 진무열이 일부러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표정에서 서서히 굳어갔다.“만약 신고를 하신다면 제가 증거 몇 가지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가며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성시원에게 건넸다. 성시원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는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모든 걸 알고도 내가 이 함정에 빠지는 걸 뻔히 지켜본 거야? 딱 오늘을 위해서?”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모든 걸 대변하고 있었다. 성시원은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으며 물었다. “너 미쳤어? 나한테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심지어 성유리를 너한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성시원의 손을 내려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저한테 화내셔도 소용없습니다. 돈은 이미 날아갔고 당신이 제 사무실을 부순다고 해도 그 돈은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제 말대로만 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기회를 드리는 거죠.” 성시원이 박한빈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박한빈은 침착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천성에 배 공장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걸 넘겨드릴 수 있어요. 이후에 꾸준히 자원을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비록 회장님이 원하던 상업적 높이에는 못 미칠지 몰라도 적어도 실업자는 되지 않게 해드리죠.” 성시원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끝내 붙잡고 있던 손을 서서히 놓았다. 그의 주먹은 여전히 꽉 쥐어있었지만 목소리는 점차 진정이 되는 듯 가라앉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박한빈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이 진무열이 혼자 한 짓일 리가 없죠. 성

    최신 업데이트 : 2024-12-21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7화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6화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5화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4화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3화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2화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1화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0화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9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