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의 모든 챕터: 챕터 121 - 챕터 130

303 챕터

제121화

성유리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진무혁의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로 박한빈에게 인사말을 했다. “박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봅시다.” 진무혁의 인사에 박한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자 진무혁의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꽉 깨물고 있었다. 한편, 성유리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유리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진무혁이 물었다. “내일 너 촬영장 갈 거야?”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진무혁은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너한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혹시 너한테 다른 일정이 있을까봐.” 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요.” “그럼 됐어. 푹 쉬어. 잘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진무혁은 뒤를 돌아 성유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성유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무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입구에서 잠시 머무르다 문득 아까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이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아 보였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박한빈과 그의 눈빛을 보니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그저 낯선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성유리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근 한 달 내에 성유리는 일부로 자기 자신에게 여유시간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바삐 돌았다. 늘 빽빽한 일정을 유지하고 살아간
더 보기

제122화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제야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라이터 소리를 들었다. 딸깍하는 소리에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마 어젯밤에 미리 마주친 탓일까? 오늘 그를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의 손은 뜻대로 되지 않아 미세하게 떨려왔고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길고 넓은 복도에 오직 두 사람이 남아있었고 박한빈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성유리는 불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는 불편함을 못 이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틀거리는 그 사람은 성유리를 못 봤는지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강하게 부딪혀버렸다. 상대가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그 찰나에 성유리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촬영장에서 주는 도시락도 느끼하고 저녁으로 먹는 일식도 성유리의 입맛이 아니었기에 오늘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맡아버린 진한 알코올 냄새에 성유리는 위안에서 뭔가가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부딪히려는 그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성유리에게 부딪힌 그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예상보다 센 성유리의 힘에 박한빈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안색이 어두워진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구토하기 시작했다. 위가 이상하리만큼 불편한데 더해 하루 종일 먹은 음
더 보기

제123화

성유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늘 시기를 잘 맞춰 오던 생리 주기가 늦춰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까지 발견한 성유리는 하던 생각도 멈춘 채, 박한빈에게 손을 잡힌 채로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방 밖으로 나온 진무혁은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봐버렸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박한빈을 따라나서는 성유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진무혁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렸는지 그를 슥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우리 둘 사이 일이니 진 대표님께서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한빈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경고하려는 의도는 명확했다. 진무혁은 그의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성유리는 얼른 괜찮다고 말했다. 진무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박한빈은 약국을 들러 사 온 물건을 성유리에게 건넸다. 성유리는 깜짝 놀라더니 이를 꽉 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 시간에 병원 가면 응급실밖에 없어. 원하다면 내가 사람을 시켜 특별히 안배해 줄게.” 박한빈이 대답했다. “아니요. 됐어요.” 성유리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만약 박한빈에게 안배해달라고 말한다면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 결과보다 이런 결과를 더욱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먼저 테스트라도 해봐.”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내일 아침 병원 가서 피검사도 하자.” 아주 담담해 보이는 박한빈은 마치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 같아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는 쓸데없는 질문은 던지지 않으려 결심했고 손에 들린 테스트기 상자를 꽉 쥐었다. 차는 빠르게 달려 어느덧 호텔에 도착했고 성유리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박한빈이 그녀 뒤를 따랐다. “저 혼자 해보면 돼요.” 성유리는 자신을 따라오는 박한빈이 불편한
더 보기

제124화

“성유리?” 박한빈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하더니 살짝 노크하며 성유리를 불렀다. “...” 하지만 그는 안에 있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노크했지만 안에서 여전히 반응이 없자 박한빈은 발로 문을 차서 억지로 열 준비를 했다. 박한빈이 뒤로 물러나 다리에 힘을 주려는 그 순간, 성유리가 화장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는 하려던 행동을 빠르게 멈췄고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임신 아니에요.” 말하는 성유리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평온해 보였다.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박 대표님, 이제 안심하셔도 되겠어요.”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테스트기를 확인했고 위에는 선명하게 한 줄이 나타나 있었다. “내일 병원 가보자.” “이게 정확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박한빈이 입을 뗐다. “안 가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데 왜 그러시죠?”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 그저 위가 불편할 뿐이에요. 박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우연은 없을 거라는 말이죠.” “아침 8시, 데리러 올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몸을 휙 돌렸고 빠르게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저 혼자 갈게요.” 뒤에서 들려오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재촉하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결과가 나타나면 꼭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성유리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게다가 병원엔 보는 눈도 많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죠. 저는 그 어떤 예외도 발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 선을 딱 그어버리려는 의도가 가득한 말을 했다. 박한빈은 전에 늘 성유리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보니 참 단호
더 보기

제125화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아래층 1613호실로 가서 여자 한 명 찾아. 그리고 그 여자랑 같이 병원으로 가고.” 그의 요구에 차제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이 일은 그 누구한테도 알려지면 안 돼. 만약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대가를 치를지 알 것이라고 믿어.” 박한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차제니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차제니마저 방을 떠나자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박한빈은 방금 발생한 일을 더 생각하기 싫었지만 저녁에 잠을 잘 때, 갑자기 아이가 나타나는 꿈 하나를 꿨다. 그는 종래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감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다루는 법이 서툴렀던 박한빈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부모님에게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박한빈이 다 커서도 그의 가정은 딱히 화목한 편이 아니었기에 사랑에 서툴렀다. 그렇다고 박한빈이 아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확고히 키워왔던 개념 탓일까? 박한빈은 늘 자신에게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아이가 갖고 싶었다. 꿈속에 나타난 아이는 흐릿한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이는 뒤돌아 박한빈을 쓱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박한빈이 뒤늦게 쫓아가려고 할 때, 아이는 이미 종적을 감췄다. 이상한 꿈에 눈을 번쩍 뜬 박한빈은 날이 이미 밝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기이했기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이의 정체를 추측했다. 그때, 차제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 대표님, 1613호실에 사람이 없는데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제니의 말
더 보기

제126화

한편, 성유리는 이미 피검사를 다 마치고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성유리는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그녀 본인조차도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서운 건지 파악이 안 됐다. 성유리는 당연히 아이가 생기면 꼭 낳고 싶었다. 필경 그 아이는 자신과 피를 나눈 사람이자 자신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할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유리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감정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날 아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박씨 가문에서 아이를 뺏어갈까 두려웠다. 박한빈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그는 절대 아이를 자기 자신에게 남겨둘 것 같지 않았다. 성유리는 정말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가늠이 안 됐다. 어젯밤, 이것까지 생각한 성유리는 일부로 수돗물로 테스트했었다. 결과를 보여준다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던 박한빈은 완강히 자신을 데리고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말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을 쳤다. 뭐가 어떻게 되든 성유리는 지금 그저 검사 결과만 알고 싶었다. 결과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잠겼을 때,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거니와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아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성유리는 무언가 감지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박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정이 삽시간에 바뀐 성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박한빈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앉혔다. “또 어디로 갈 생각이지?” 묻는 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를 쓰며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정말 임신이 맞는 거
더 보기

제127화

성유리는 자신을 부르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하며 뒤돌아봤다.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에게 다가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행동에 성유리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그때, 성유리는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유리는 잘 알았다. 그녀는 박한빈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임신 아닙니다.” 의사가 단호하게 성유리에게 결과를 알려줬다. “생리가 늦춰지는 원인은 아마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생리가 끝난 후에 다시 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비록 성유리는 조금 전 이미 결과를 알아버렸지만 의사의 입에서 확실한 결과를 듣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임신하시려고 준비 중이십니까?”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발견한 의사가 물었다. “아니에요.” 의사는 신유리의 대답을 바로 무시해 버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너무 조급해하시면 안 됩니다. 조급해하시면 하실수록 임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보면 되고요.” 의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며 많은 말을 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성유리는 응당 기뻐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박한빈과 있었던 그 일을 자세히 떠올려보면 임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만약 그날 일로 성유리가 임신했다면 정말 하늘이 내린 장난과도 같은 기적이었다. ‘나한테 그런 기적은 없나 보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성유리가 더 이상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성유리는 임신이 아니니 이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결과를 알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성유리가 진료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떠나버렸는지
더 보기

제128화

성유리가 옷을 바꾸고 나온 순간까지 박한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외투는 아직도 성유리에게 있어 박한빈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차림이었다. 박한빈은 팔 쪽에 있는 단추를 풀어 헤친 상태라 그의 적나라한 근육과 핏줄들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더해 박한빈의 포스와 곱게 빚은 듯 정교한 이목구비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박한빈은 사람들의 시선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고개를 숙여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본 체하고 앞으로 걸어가려던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지만 박한빈은 그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조금 오므리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한빈 씨 옷이 조금 더러워졌어요.”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가서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 돌려드릴게요.” 박한빈은 원래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성유리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 짧은 대화를 마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만 만이 흘렀다. 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제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제 알았으니...” “아침 안 먹었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뚝 잘라버리며 물었다. “가자. 밥부터 먹자.” 그는 성유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아예 말릴 틈도 없었다. “전에 수성 시 와본 적 있어?” 어느 한 식당 안, 먹을 메뉴를 다 시킨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마침 이번 기회를 빌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 내일이면 돌아가려고 했어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박한빈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옆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이번에 진무혁이랑 함께 왔니? 결국 제작권을 그 사람한테 넘
더 보기

제129화

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를 뚫어져라 주시했고 성유리는 그의 시선에 몸이 잔뜩 굳어졌다. 박한빈의 눈빛은 마치 하루빨리 그녀와 어떤 관계를 성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너와 진무혁 씨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유정이도 이제는 진무열 씨랑 약혼을 했으니 나는 그 가문 사람들의 도구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박한빈은 아주 이성적으로 분석을 해 성유리를 설득했다.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이 명함으로 전화 해.” 성유리가 입을 뻥긋할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려주며 말을 이어갔다. “성유리, 나는 지금 너한테 딱 한 가지 요구밖에 없어. 나한테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잘 행동하고 다녀. 알았어?” ... 차제니의 전화가 걸려 올 때, 성유리는 마침 호텔 방 안에 누워있었다. “성유리 씨, 안녕하세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밝은 여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귀를 기울였다. “저는 차제니라고 해요. 박 대표님께서 성유리 씨에게 배정한 가이드이기도 하고요. 혹시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면 지금 저랑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괜찮아요. 저는 지금 그냥 가만히 쉬고 싶어서.” “오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차제니는 상냥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성유리 씨, 저는 당신의 가이드예요. 만약 저한테 아무것도 시키시지 않는다면 저는 일자리를 잃을지도 몰라요.” “박 대표님 쪽은 저도 뭐라 할 수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차제니의 말에 고민하다가 작은 부탁 하나를 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혹시 진통제 하나만 사다 줄 수 있나요?” “네? 어디 불편하세요?” “생리통이요. 이것도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제니는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를 빠르게 끊어버렸고 성유리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 그녀
더 보기

제130화

그 후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차제니는 성유리의 가이드라는 역할로 며칠 동안 성유리와 함께 수성 시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간 곳은 대부분 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곳도 아니었고 차제니 또한 일정을 잘 안배했다. 천천히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기에 성유리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저녁에 이곳에서 폭죽 쇼도 한 대요.” 두 사람이 함께 저녁밥을 먹을 때, 차제니가 성유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다 알려줬다. “이 쇼는 매일 있는 것도 아니래요. 오늘이 입동이잖아요. 수성 시에서는 입동 일에만 이런 쇼를 주최한다고 해요. 위층에 제가 성유리 씨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뒀어요. 전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완전 제일 좋은 자리예요. 밥 다 드시고 올라가서 꼭 보세요.” “제니 씨는 저랑 같이 안 가나요?” 차제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리 씨, 저는 남자 친구가 있는 몸이라서요. 며칠 동안 별로 안 놀아줬는데 오늘 저녁까지 안 돌아가면 무조건 화낼 거예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찮아요. 이건 제 직업이니까요. 해야 할 일이죠. 제가 짠 계획이나 여행 일정이 마음에 드셨다면 나중에 박 대표님 앞에서 저 좀 칭찬해 주세요.” “저랑 박 대표님은...” “아이고, 괜찮아요. 유리 씨 마음에 드셨으니 제 일은 완벽하게 끝을 맺은 것 같네요.” 차제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먼저 가볼게요. 폭죽 쇼 꼭 보셔야 해요. 아시겠죠?”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성유리는 차제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이 일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제니는 이미 떠나버렸으니 물을 사람도 없어졌기에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지만 성유리는 가기 싫었다. 그러나 창밖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한 성유리는 결국 올라갈 채비를 했
더 보기
이전
1
...
1112131415
...
31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