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너였어, 우리 재혼해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896 챕터

제31화

은경애는 백하린이 건넨 휴대폰을 바닥에 힘껏 내팽개쳤다.“안 봐.”그녀는 격앙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하준아, 얼른 말해다오. 이 할미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얼른 말해.”남하준은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꼭 잡아드리며 다정하게 위로했다.“할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인이가 완자인 것 같으면 그냥 그렇게 해요. 할머니 마음 편하신 대로 하면 돼요.”이때 백하린이 벌떡 일어나며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하준 오빠, 내가 바로 완자라고요. 오빠 언제까지 할머니 기분 맞춰드리려고 진실을 뒤바꿀 순 없어요. 이건 결국 할머니 본인만 속이는 셈이잖아요!”남하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외쳤다.“그 입 닥쳐.”그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백하린과 서다인 모두 화들짝 놀랐다. 백하린은 속상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흘렸다.은경애는 슬픈 마음을 추스르며 서다인을 바라봤는데 눈가에 애잔함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래, 맞아. 내가 다인이 완자라면 완자인 거야.”화난 백하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또다시 끼어들었다.“할머니, 제가 완자라고요. 하준 오빠가 사랑한 사람은 줄곧 저였어요. 다인 언니를 사랑한 적도 없는데 할머니 때문에 오빠가 무슨 죄에요. 오빠랑 언니는 조만간 이혼할 텐데 이렇게 고집부릴 이유가 뭐냐고요 대체?”백하린은 할머니의 기분 따위 전혀 안중에 없이 바로 인신공격을 해버렸다.남하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한없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왜 어른이 된 백하린은 이토록 악독하게 변한 걸까?해외 교육에 문제가 생긴 걸까?할머니는 백하린의 말을 듣더니 울화가 치밀어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그녀는 백하린에게 삿대질하며 물었다.“너... 방금 누가 고집을 피운다고 했어?”은경애는 평생 자애롭고 너그러운 인품으로 살아오셨는데 늙어서 어디 근본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것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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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백하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본인이 방금 한 말로 은경애가 화나서 잘못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만약 은경애가 죽으면 남하준과 서다인도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 무조건 이혼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백하린은 순간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할망구가 죽는 것도 나름 좋은 일인 듯싶었다....긴긴밤, 고독과 적막이 어우러진 밤.병원 VIP 병실 안은 흐릿한 불빛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서다인은 은경애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메마른 할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한 채 편히 잠든 할머니를 지그시 쳐다봤다.그녀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무사하게 얼른 정신을 차리기만 바랐다.애초에 그녀가 병원에서 처음 의식을 회복했을 때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고 몸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그녀 앞에는 한 무리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이들은 자칭 서다인의 엄마, 아빠, 오빠, 친척, 친구들이라고 했다.경찰도 현장에서 사건 기록을 작성하며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하지만 가족과 지인이라는 이 사람들은 그녀의 사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돈 받는 게 목적이었다.서다인이 죽은 전남편의 집에서 1조 원을 훔친 것 때문에 한바탕 폭행을 당하고 기억을 잃었다.경찰이 증거불충분으로 그녀를 체포하지 않았기에 겨우 재난을 모면했다.서다인도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신원을 조사해보았다.애초에 가정환경이 열악했던 그녀는 부모와 오빠의 사랑을 전혀 못 받고 어린 나이에 사회에 뛰어들어 직접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 과정에 수없이 많은 그릇된 길을 걸었었다.기억을 잃은 후 그녀는 더더욱 이 세상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없었고 인생에 대한 갈피가 전혀 안 잡혔다.그러다가 드디어 은경애 어르신을 만났다.자애로운 어르신은 서다인을 손녀처럼 생각하며 진심으로 이뻐해 주시고 엄청 잘해주셨다.할머니 옆에서 3년 동안 간병인으로 지낸 시간이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할머니는 그녀 마음속 유일한 가족이기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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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백하린은 남하준이 화난 걸 깨닫고 가여운 얼굴로 눈물을 질끈 짜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오빠. 갑자기 왜 나한테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예요?”남하준이 싸늘한 어투로 되물었다.“집에 카메라가 없다고 네가 다인이한테 꼼수 부려서 모함한 걸 내가 모를 것 같아?”백하린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남하준을 바라보다가 잠시 당황한 척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렸다.“다인 언니가 나한테 누명 씌웠어요.”“끝까지 잡아떼네. 내가 바보로 보여?”남하준은 실망 어린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백하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채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오빠. 내가 잘못했어요.”남하준은 여전히 저 자신을 억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네가 진짜 잘못을 깨달았다면 굳이 다인이가 목걸이를 훔쳤다고 모욕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할머니까지 화나게 해서 병원에 입원시켜?”“앞으로 다시는 나랑 다인의 일에 끼어들지 마. 혼자 할머니 댁에 가지도 말고. 한 번만 더 이런 식이면 그땐 절대 가만 안 둬.”백하린은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살며시 남하준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며 몸을 비틀었다.“오빠, 나 진짜 잘못했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줘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내일 사람 시켜 네 물건 전부 짐 싸서 집으로 보낼 거야. 집에서 반성이나 잘해.”말을 마친 남하준은 앞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백하린은 울며 애원하고 사과도 해보고 애교에 갖은 수단을 다 부려봤지만 남하준은 꿈쩍하지 않았다.집사가 문을 열고 나온 후 그는 백하린을 집사에게 맡기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새벽 3시의 거리는 차 한 대 없이 텅 비어 있었다.남하준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앞에 도착한 남하준은 살며시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흐릿한 불빛 아래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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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할머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여주었다.“걱정 마. 할미 아직 튼튼해.”서다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 어젯밤에 진짜 깜짝 놀랐어요.”할머니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었다.“이 할미 그리 쉽게 넘어지지 않아. 몸조리 잘해서 너 대신 그 성가신 내연녀 해결해버려야지.”옆에 앉아있던 남하준이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한 말투로 수정했다.“할머니, 저랑 다인이 사이에는 제삼자가 없어요.”할머니는 코웃음 치며 꼭 마치 본인이 배신을 당한 것마냥 분노를 터트렸다.“어젯밤 그년은 제삼자가 아니면 뭔데?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다는 말, 난 그딴 소리 전혀 안 믿어. 순수하긴 뭐가 순수해.”남하준은 말문이 턱 막혀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이대로 웃으면 너무 무례할 것 같아 머리를 숙이고 입을 막은 채 몰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남하준은 감히 웃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머니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완자야, 내가 사람 시켜서 깨끗한 세안 용품을 욕실에 놔뒀으니까 가서 씻고 나와서 밥 먹어.”서다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곧이어 욕실로 향했다.할머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쟤가 서다인이든 완자든 난 다 좋아. 너랑 아주 잘 어울려. 그러니까 너도 그딴 년 때문에 다인이랑 절대 이혼하면 안 돼. 알겠지?”남하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할머니의 건강을 걸고 감히 장담할 수도 없었다.“알았어요.”할머니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짝 언짢은 듯 그에게 질문했다.“솔직하게 말해봐. 정말 완자한테 아무 느낌 없어?”남하준은 의자를 끌고 할머니 옆으로 다가와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처음부터 할머니가 이 결혼을 부추기는 걸 반대했죠? 다인이를 완자라고 오해하든 아니든 강제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게 하는 건 잘못됐어요. 이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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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남씨 일가 사람들은 할머니를 둘러싸고 따뜻한 관심을 선보였다.서다인은 자신이 병실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 보여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병원 1층 정원 복도에 가서 적적하게 슬레이트 벤치에 앉아 먼 곳에 있는 식물을 멍하니 바라봤다.순간 한 남자의 자석 같은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무슨 생각해?”서다인은 사색을 가다듬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남하준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그의 강렬한 포스에 발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서리가 한 층 뒤덮일 것 같았다.서다인은 가슴이 움찔거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아니에요, 아무것도.”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남하준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짙은 눈길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바라봤다.“우리 계획 다 들었어?”서다인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봤다.남하준은 맑고 영롱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남하준은 그녀의 눈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며 신비롭게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가 한마디 덧붙였다.“안개 찾기 프로젝트.”서다인은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조금 들었어요.”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은은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계획이 유출됐네.”계획이 유출됐는데 그녀랑 무슨 상관이지?설마 지금 서다인을 의심하는 걸까?서다인은 대뜸 서운한 감정이 북받쳤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남하준은 눈앞의 풍경만 감상할 뿐 그녀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몇몇 요직에 있는 지도자들 외엔 너랑 나밖에 없어.”이렇게 말하니 그녀의 혐의가 더 커졌다.서다인은 그가 의심하는 건 이해되지만 안개 찾기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은 아예 몰랐고 비밀을 유출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준 씨, 나 아니에요.”서다인은 아주 정색하며 단호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당신들 상세한 계획 내용도 모르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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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남하준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심 조로 말했다.“서다인, 만약 네가 기억 상실한 것처럼 연기하는 거라면 이 모든 게 다 합리해져.”서다인은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성형해서 할머니께 이쁨받고 하준 씨랑 결혼해서 당신 옆에 잠복해 있다고요? 재물과 신분 따위 바라지도 않고 오직 M국의 더 많은 중요한 기밀을 훔쳐 가기 위해서요? 내가 만약 기억 상실한 척 연기하는 거라면 난 정말 끝내주는 스파이인 것 같아요.”남하준이 답했다.“맞아, 바로 그거야.”서다인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이젠 정체가 곧 드러날 것 같으니 당신과 이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겠죠.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네요.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요.”남하준이 침묵했다.서다인은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이 일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본인조차 이런 일들이 백 퍼센트 존재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블랙 섀도우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남하준에게 접근하는 것도 조직의 계획이지 않았을까?다만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은 거겠지...서다인은 딱히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말을 내뱉는 건 무의미한 노릇이니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떠나갔다.이제 막 두어 걸음 나섰는데 남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다인아, 이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등 돌린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마주하고 힘차게 말을 이었다.“만약 네가 진짜 ‘블랙 섀도우’ 조직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토록 순조롭게 너에 관한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순 없어. 가정배경과 네 과거의 모든 경력들, 성형 전후의 사진 정보, 심지어 네가 블랙 섀도우 조직에 들어가서 특수 훈련을 받은 것까지 손 하나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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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이어진 나날들.서다인은 수원 별장도, 남원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하준이 줬던 카드에서 몇십만 원을 꺼내 작은 빌라를 구하고 생활필수품만 몇 가지 장만했다.그녀는 학력도 없고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기에 화조 시장에 가서 생화를 좀 도매해와 작은 마차에 끌고 야시장에 노점을 차렸다.수입이 비교적 안정적이라 보름도 안 돼서 남하준에게 빌렸던 돈을 다시 카드에 넣어줬다.단순한 일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그녀는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생신 선물을 성심껏 준비해드렸다.할머니가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걸 알고 보름이나 공들여 손수 장청죽을 수놓았다.할머니 생신날 아침 8시.서다인이 꿈속에서 헤맬 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긴 머리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남하준의 비서실장 류청이었다.그는 거대한 선물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사모님.”류청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서다인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류청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서다인은 흠칫 놀라며 선물 상자를 건네받았다.“뭐예요 이게?”류청이 깍듯하게 대답했다.“이브닝드레스와 일부 액세서리입니다. 저녁 5시 정각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사모님.”서다인은 묵직한 선물을 들고 마음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뜻밖의 이벤트에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훈훈해졌다.“하준 씨한테 고맙다고 대신 전해줘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류청은 작별을 고하고 빌라를 나섰다.서다인은 문을 닫고 선물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예쁜 리본 매듭을 풀어 상자를 열어보았다.세련되고 깔끔한 치마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화이트 펀칭 소재의 시스루 롱 드레스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그 옆에는 매우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세트가 놓여 있었는데 럭셔리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서다인의 얼마 남지 않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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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백하린은 곧이어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자수를 발견했다.그녀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다인의 솜씨가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장청죽을 너무 생생하고 아름답게 수놓았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백하린은 자수를 가리키며 질투 섞인 어조로 물었다.서다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다가가더니 잔뜩 긴장한 채 선물을 치웠다.그녀가 황급히 다가가긴 했지만 결국 한 걸음 늦었다. 백하린은 어느새 가방에서 빨간색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그녀의 자수에 들이부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망가진 자수를 보며 서다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습은 불가능했고 자수는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백하린, 너 미쳤어?”백하린은 씩 웃기만 할 뿐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머지 반병까지 드레스에 들이부었다.그 순간 서다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이미 다 무너진 자수를 꽉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침대 위에 빨갛게 물든 드레스를 쳐다봤다. 그녀의 가슴에도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보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놓은 작품인데, 또한 남하준에게 받은 첫 선물인데 전부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만약 살인이 불법이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백하린을 아작내 버렸을 것이다.백하린은 빈 병을 그녀의 침대에 내던지고 깨끗한 치맛자락으로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도발의 뜻이 가득 담긴 제스처는 한없이 경솔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한마디 내던졌다.“잘 들어. 오늘 밤엔 할머니 생신 연회에 절대 나오지 마. 네 신분은 그저 오빠네 가족들 체면만 구기는 셈이고 또한...”백하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다인이 불쑥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두 대 날렸다.“찰싹...”청아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주변 공기마저 확 얼어붙었다.백하린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고 충격과 분노에 찬 눈길로 서다인을 째려봤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다잡고 이를 악문 채 울분을 터트렸다.“네가 감히 날 때려?”서다인은 입술을 꼭 깨물고 눈가에 맺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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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저녁 5시.류청이 운전하여 제시간에 서다인의 빌라에 도착했다.그는 서다인을 본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남하준이 선물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오지 않았으니까.서다인은 연하늘색의 수수한 치마를 입고 몸에 두른 유일한 액세서리라곤 포니테일에 묶은 하늘색 리본이 다였다.연한 화장과 청초한 옷차림은 평범한 집안의 어여쁜 딸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사모님, 이건...”류청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실례인 것 같아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기분이 살짝 다운되어 그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안 했다.류청은 두 손이 텅 빈 그녀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돌려서 물었다.“사모님, 뭐 빠트린 것 없으시죠?”서다인이 답했다.“없어요.”류청은 더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줬다.서다인은 그의 차에 앉아서 남씨 일가의 별장으로 향했다.남씨 일가의 별장 밖에는 십여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위엄 있게 대문을 경호하고 있었다.수입차가 속속들이 철문 안으로 들어와 별장 앞의 정원에 주차했다.집사는 밖에서 귀빈들을 모셨고 남씨 일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반겼다.서다인이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밤빛이 드리워졌다. 럭셔리한 별장은 안팎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분위기가 시끌벅적할 따름이었다.은경애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분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거나 친인척들이라 남씨 일가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게 돌아쳤다.아무도 서다인이 언제 왔는지, 와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하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연회장에는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며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홀로 외롭게 구석의 원형 식탁 앞에 앉아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나오시길 잠자코 기다렸다.그녀는 할머니께 직접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연회에 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그러면 이따가 미리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이곳 말이다.“와, 너 진짜 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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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백하린은 활짝 웃으며 설레는 표정으로 얌전한 척하며 대답했다.“진짜요? 언니들 저한테 공유할 물건이 있대요? 너무 기대돼요.”백하린은 서다인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예의 바르고 착한 척 인사를 건넸다.“언니, 나 그럼 먼저 아줌마랑 가볼게. 이따가 또 만나.”말을 마친 두 사람은 신나게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서다인은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조용한 그녀는 아웃사이더가 된 것처럼 이 시끌벅적한 연회장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도통 어우러지질 못했다.10분 후, 백하린이 또 나타났다.이번엔 큰 형님 유가영과 둘째 형님 진효은도 함께했다.“언니, 이거 가영 언니가 선물한 옥 팔찌인데 어때? 이쁘지?”백하린은 일부러 친한 척하며 서다인에게 물었다.서다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역겨울 따름이었다.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이리로 와서 일부러 친한 척하며 먼저 말을 거는 이유는 유가영과 진효은을 데려와서 그녀를 망신 주기 위함이었다.서다인은 백하린의 옥 팔찌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 없이 그저 예를 갖추고 큰 형님과 둘째 형님에게 인사했다.큰 형님 유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다인을 훑어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야유 조로 말했다.“우리 남씨 집안의 다섯째 사모님께서 대체 왜 이렇게 초라한 거야?”둘째 형님 진효은도 피식 코웃음을 쳤다.“동서는 안 그래도 신분과 가정 형편이 볼품없는데 이 옷차림은 또 뭐야? 여기 시트콤 찍으러 왔어?”백하린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일부러 착한 척하는 말투로 말했다.“언니들, 다인이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제가 볼 땐 꽤 이쁘게 차려입고 온 것 같은데요 뭘.”큰 형님 유가영이 웃으며 말했다.“하린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늘 똑같이 착하게 대하잖아요. 난 못 그래요. 유유상종이라고 하자들에겐 잘해줄 필요가 없어요.”서다인은 표정 변화 없이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바라보며 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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