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훤칠한 체구에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냈다.서다인은 한없이 매력적인 그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매번 남하준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몰래 심장이 빨리 뛴다. 피가 역류하여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바짝 긴장하니 하려던 말도 생각이 안 났다.남하준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은은하게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다만 그는 서다인의 선택을 존중하기에 왜 자신이 보낸 이브닝드레스를 안 입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할머니 뵀어?”남하준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서다인은 머리만 내저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입을 여는 순간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져 나올까 봐.남하준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남자였다.그녀는 이 남자에게 마음껏 기대고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아무도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럴 자격이 없다.남하준이 짙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할머니도 못 뵀는데 그냥 간다고?”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물음에 묵인했다.남하준은 속절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서다인의 손목을 잡았다.그의 제스처에 화들짝 놀란 서다인은 시선을 올리고 망연자실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남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연회 끝나고 가.”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인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이 또한 애틋한 스킨쉽인지라 서다인은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고 심장이 마구 쿵쾅대며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가 가슴에 파고들었다.남하준이 옆에 있으니 그녀도 좀 전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귀빈을 접대하러 갔다. 사람들이 그녀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남하준은 아주 대범하게 소개했다.“제 아내 서다인이에요.”아주 간단한 한 마디지만 서다인은
서다인은 무척 감동 받고 옆에 있는 이 남자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키가 185밖에 안 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백 미터가 되는 큰 산처럼 거대하고 듬직하여 마음을 설레게 했다.이때 백하린이 그림을 들고 은경애의 앞으로 다가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저 하린이에요. 아직 기억하시죠?”은경애는 순간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상간녀 네년은 내가 죽어서 재가 돼도 못 잊지!’“기억이 잘 안 나는데 누구신지?”은경애가 담담하게 말했다.백하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차피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계시니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니까.백하린은 은경애의 생각 따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직 이 생신 연회에서 포커스를 받고 남하준과 남씨 일가의 모든 사람 앞에서 더 완벽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을 따름이었다.미모나 효심 전부 장내의 모든 이를 압도하게끔 만들고 싶었다.“여기요, 들여오세요.”백하린이 갑자기 높은 소리로 외쳤다.곧이어 몇몇 도우미가 테이블을 몇 개 들여오더니 다 함께 붙여놨다.장내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백하린은 유가영을 불러와 함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서 손에 쥔 그림을 펼쳐서 길이가 무려 2미터나 되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기세가 웅장한 수묵화가 펼쳐지고 모두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백하린은 앞으로 다가가 할머니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으켰다.“할머니께서 Z국 문화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수집하는 취미가 있으시고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수묵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들었거든요.”“제가 엄청 공들여서 당대 유명한 화가 지완 님의 진품 ‘가을’을 경매에서 낙찰해왔어요. 할머니께 생신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쭉 만수무강하세요 할머니.”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라 골동품 매매나 명화 수집 등에 조예가 깊다. 다들 당대 유명 화가 지완의 진품이란 말에 흥미를 느끼고 둘러서서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백하린은 은경애의 속내를 훤히 꿰
서다인은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그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은경애는 오직 백하린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라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모조품이라도 괜찮아. 마음만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너도 더는 진품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진 마.”장내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백하린은 사색이 되어 버럭 화내면서 서다인에게 쏘아붙였다.“네가 뭘 알아? 수묵화를 알기나 해? 수묵화 진품을 본 적은 있냐고? 대체 네가 뭔데 내 그림을 가짜라고 하는 거야?”서다인도 몹시 난감했다. 만약 그녀의 판단이 잘못됐다면 너무 창피한 일이니까.하지만 은경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런 명화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힘들다. 지금 누군가가 가짜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다들 이 그림이 가짜라고 여길 것이다.영수증과 증명 서류를 내놓아도 다들 백하린이 사기를 당한 거라고 믿을 따름이다.명화 수집가 어르신 한 분이 서둘러 돋보기를 끼고 허리를 굽힌 채 머리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백하린은 남하준의 옆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안으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말해봐요. 다인이가 무슨 자격으로 내 그림을 가짜라고 말하는 거죠? 쟤가 뭘 알아요? 개뿔도 모르면서! 감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창피하게 해요? 이건 진짜 너무하네요.”남하준이 차분한 얼굴로 시큰둥하게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나도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막론하고 네가 할머니를 향한 마음만 잘 전달하면 되지 뭐.”백하린은 화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남하준이 이전처럼 자신을 감싸주지 않으니 화가 나서 어리광을 부렸다.“그런 거 아니에요. 다인 언니는 일부러 날 망신 주는 거라고요.”유가영도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확실히 도가 지나치네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심사위원을 할 기세잖아요. 할머니의 신임을 얻고 허튼소리만 내뱉는 게 말이 돼요? 하린 씨 정성만 수포로 만들었어요.”진효은도 말을 이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실력 있으면 진품
서다인은 힘없이 남하준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에 남하준은 한없이 마음이 약해졌다.그녀의 나른하고 무기력한 눈빛이 이토록 강렬한 살상력을 안겨줄 줄이야.남하준은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숙이고 서다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다인아, 여긴 모두 우리 가족이랑 친구들이야. 사실 다들 명화의 진위나 예술적 조예의 높고 낮음에 관심이 없어.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니까 효심만 닿으면 돼. 다른 건 다 허명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그려.”서다인은 그의 말을 듣더니 또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 것처럼 마음의 안정감을 느꼈다.남하준이 질문을 이었다.“모사는 할 줄 알아?”서다인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가능할 것 같아요. 모사는 딱히 어렵지 않거든요.”남하준은 침착하게 말했다.“그럼 지완 거장의 작품을 하나 모사해. 어차피 지금 이것도 가짜잖아. 마침 네 앞에 펼쳐져 있고.”일이 코앞에 닥쳤으니 서다인도 눈 딱 감고 해나가야만 했다.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붓을 들고 먹을 골고루 묻혔다.다른 손으로 백지를 세 번 쓰다듬었는데 제스처마다 부드럽고 가벼울 따름이었다.이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제스처까지 지완 거장을 따라 하는 것 좀 봐. 아무래도 지완님 작품을 모사하려는 모양이야.”누군가는 유심히 지켜보고 누군가는 기대에 차 있으며 또 누군가는 그녀가 망신을 당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이쪽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계속 연회에서 사교 영역을 넓혀갔다.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가을’ 작품을 열심히 살펴보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그렸다.첫 획을 그리는 순간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녀의 수준은 절대 보통이 아니었다.힘찬 붓놀림으로 한 획씩 그릴 때마다 마무리가 깔끔하고 시원시원했다.서다인은 딱 한 번 살펴본 이후로 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근육 기억처럼 힘 조절과 선 처리가 완벽했고 아예 대뇌의 사고를 걸
“살아생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지완님을 이렇게 뵐 수 있다니, 정말 너무 행운입니다.”“지완님은 여자분이셨네요. 전에 영상으로 작품을 볼 때 섬섬옥수가 여자일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작품을 들여다보면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웅장한 포부와 막강한 기세, 그리고 힘찬 기개가 느껴졌어요.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파워가 있거든요.”“지완님 수묵화는 심금을 울리고 시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어요. 심도가 깊고 경지가 있어서 정말 너무 좋아요.”연이은 찬사에 서다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넋 놓은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은경애는 일찌감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고였고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서다인이 다재다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숨겨진 유명 화가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옆에 있는 백하린은 화나서 안색이 다 짙어졌다. 그녀는 원래 서다인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었는데 이런 신분이 숨겨있을 줄이야. 덕분에 서다인만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한껏 뽐내고 장내의 모든 이를 감탄케 했다.남씨 일가의 사람들도 입이 쩍 벌어졌다. 다들 놀라움 속에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었다.이때 류청이 남하준 옆으로 다가와 깍듯이 휴대폰을 건넸다.남하준은 휴대폰을 건네받고 동영상 재생을 클릭했다.영상 속 화면에서 가늘고 새하얀 손이 나왔고 백지 한 장에 붓과 먹이 놓여 있었다.지완은 습관적으로 백지를 세 번 쓰다듬은 후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는 티 나지 않은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류청이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이 바로 지완님인 것 같아요.”남하준은 영상을 끄고 휴대폰을 류청에게 돌려준 후 나지막이 분부했다.“이 계정 당장 조사해봐. 운영하는 회사와 배후에서 계정을 등록한 사람, 그리고 작품을 경매하는 경로와 돈을 기부하는 경로까지 전부 샅샅이 조사해.”“네.”류청은 대답을 마치고 연회장을 떠났다.서다인은 모두의 열정 어린 칭찬 속에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됐다.그녀는 감히 부인할 수도
며칠 후, 사무실 안.류청이 조사 결과를 남하준에게 보고했다.“도련님, 지완 씨가 영상을 업로드하는 계정은 Z국의 한 고아원 공식 계정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선물로 받은 보상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은 고아원 공금 계좌에 바로 입금되었고 원장님은 지완 씨 본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지완 씨 작품의 판매 경로도 아주 특이했어요. 온라인으로 직접 입찰하고 입금 계좌는 각 지역의 고아원이나 자선단체였어요. 모든 수입은 지완 씨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어요.”“따로 운영해주는 회사나 팀도 없고 라이브 방송 때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림만 그렸습니다.”“3년 전에 이 계정은 업데이트가 중단됐고 지완이라는 사람도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어요.”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두 눈을 감고 류청의 보고를 묵묵히 들으며 속으로 서다인을 떠올렸다.이토록 평범한 여자의 배경이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다니.남하준은 자석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차 대기시켜.”류청이 물었다.“어디로 가시게요 도련님?”남하준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다인이 만나러 가야겠어.”...안성시 번화가.노을이 지고 화려한 등불이 켜지면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서다인은 평상시처럼 구석진 곳에서 생화를 팔고 있었다.그녀의 작은 노점은 아늑하고 로맨틱하며 매우 아름답게 꾸며졌다.간혹 주문이 한두 개 들어오기도 했다.“다인아, 오랜만이야.”서다인이 한창 바삐 돌아칠 때 상당히 거슬리는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머리를 들더니 눈빛이 짙어지고 수중의 장미꽃을 천천히 내려놓은 후 옆에 뒀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서지석은 바짝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경계에 찬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서다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화 안 풀렸어?”“지난번에 네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뒤로 아직도 걸음걸이가 시
서지석은 식겁하여 사색이 된 채 이를 악물고 서다인을 노려봤다. 그는 결국 뒤로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서다인 너 딱 기다려. 조만간 혼내준다 내가.”그는 으름장을 놓은 후 줄행랑을 쳤다.서다인은 휴대폰을 거둬들이고 피식 웃으며 서지석의 경고를 새겨듣지도 않았다.앞을 내다보자 훤칠한 체구에 늠름한 자태의 남자가 인파들 속에 서 있었다.위엄이 차 넘치고 기질이 출중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확 집중시켰다.류청이 그의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감개무량하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정말 원칙적인 분이시네요.”남하준은 아무런 대답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류청이 재빨리 뒤따라갔다.서다인은 작은 걸상에 앉아 이제 막 장미꽃 잎과 가시를 다듬고 있었는데 눈앞에 불쑥 늘씬한 다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손님인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서 오세요, 필요한 거...”“있으... 실까요?”서다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겨우 말을 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남하준이 왜 야시장의 거리에 나타난 걸까?그녀는 남하준의 임무 수행 차량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사방을 기웃거렸다.남하준은 놀라면서도 호기심에 찬 그녀의 모습이 마냥 귀여울 따름이었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어떤 꽃이 더 예뻐?”서다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장미꽃을 내려놓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여자분께 드리는 거예요 아니면 어르신께 드리는 거예요?”남하준이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여자.”서다인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이어서 안색도 저도 몰래 어두워졌다.많고 많은 꽃가게 중에 왜 하필 그녀를 찾아와서 백하린에게 선물할 꽃을 사려는 걸까?이 남자는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겠지!서다인은 대충 하얀 국화 한 다발을 집어 들었다.“이 꽃도 이쁘네요.”남하준은 하얀 국화를 건네받았다.부부도 돈 계산은 명확히 해야 하는 법, 서다인은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다.“4천 원이에요.”남하준도 전혀 머
돌아가는 길.남하준이 그녀에게 물었다.“남원으로 갈까 아니면 네가 지내는 곳으로 갈까?”서다인의 작은 빌라는 노점과 비교적 가깝고 남원은 백하린의 집이나 다름없기에 딱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빌라로 가요.”15분 후.차가 낡은 빌라 앞에 도착했다. 서다인은 차에서 내려 남하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어두운 밤, 낡은 건물 복도는 좁고 흐릿할 따름이었다. 서다인은 휴대폰으로 조명을 켜고 난감한 듯 말했다.“이 복도 센서등이 자주 고장 나요.”남하준에게 이곳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서다인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불을 켠 후 어색하게 가장자리에 서서 남하준을 안으로 들였다.10평 남짓한 작은 빌라에 발을 들인 순간, 남하준이 받은 첫인상은 바로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서다인이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남하준이 들고 있던 하얀 국화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자.”그의 말투가 너무 침착해 감정 기복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이 꽃을 왜 주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서다인은 멍하니 넋 놓고 국화를 바라보다가 심장이 마구 떨리고 온몸의 세포가 미친 듯이 뛰어댔다.그녀는 줄곧 백하린에게 주는 꽃이라고 생각했다.갑작스러운 이벤트에 서다인은 아무런 반응도 못 했다.남하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별로야?”서다인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그의 손에서 꽃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두 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너무 예뻐요. 고마워요.”서다인은 전에 자신이 무슨 꽃을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가장 좋아하는 꽃은 바로 하얀 국화일 것이다.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재빨리 주방에 들어가 꽃병을 꺼내서 국화꽃을 꽂았다.남하준은 집안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더블 소파에 가서 앉았다.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그는 책을 들어서 대충 펼쳐보았는데 죄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다.서다인이 M국어와 Z국어를 할 줄 아는 건 이미 아는데 지금 또 다른 나라의 책을 읽는다고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
저녁을 먹고 나니 8시가 넘었고 남서연은 과일도 조금 먹었다.이렇게 큰 집에 그녀와 백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긴장되고 어색했다.그녀는 시간을 보고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저 갈게요.”백건은 부랴부랴 일어나 다급하게 남서연의 손목을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남서연이 그를 뒤돌아보니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조금만 더 앉아 있어. 조금만. 아직 9시도 안 됐으니 조급해하지 마.”남서연은 거절하기 미안하고 또 좋아하는 남자가 붙잡으니 다소 마음이 약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래요.”백건은 그녀가 심심할까 봐 물었다.“TV 볼래? 아니면 영화?”남서연은 2초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애니메이션 영화 봐도 돼요?”백건은 2초간 어리둥절하더니 말했다.“그래. 어떤 애니메이션 보고 싶어?”남서연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너무 귀엽고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도 함께 볼 수 있었다.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남서연은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무거나요.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 아무거나 골라봐요.”백건은 그런 것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그는 평소에도 TV와 영화를 보지 않고 애니메이션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그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자신이 잘 못 골라서 남서연이 지루해할까 봐 휴대전화를 꺼내 하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당장 재미있는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 보내줘. 꼭 재밌어야 해.”잠시 후 하현우가 영화 링크를 그의 휴대전화로 보내주며 꼭 이어폰을 끼고 보라고 일러줬다.백건은 별생각 없이 거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휴대전화의 링크를 TV에 띄웠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영화가 시작되면서 남서연은 서서히 몰입했다.영화의 질감은 아름다운데 여주인공의 몸매가 너무 화끈하고 옷차림도 살짝 드러났다.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남녀주인공을 둘러싼 짝
사장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했다.“감사합니다. 곧 보내드릴게요.”백건은 남서연을 끌고 나가 한적한 시장 거리에 서서 화가 난 채로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남서연은 어렴풋이 백건의 화를 느끼며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화를 꾹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남서연, 마지막으로 알려두는데 난 남우영의 삼촌이지 네 삼촌이 아니야. 난 네 부모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알아들어?”남서연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거듭 사과했다.“미안해요.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요.”백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고 남서연도 그를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치자 눈빛 사이에 조금 다른 감정이 흘렀다.남서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오빠, 진짜 승아 누나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아니야.”남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또 물었다.“그럼 여자친구는 있어요?”“없어.”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자신이 웃지 못하도록 입술을 오므리고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아!”마음을 진정한 백건이 말했다.“가자. 화분이 배달되면 어떻게 놓을지 네가 봐줘.”남서연은 바짝 긴장했다.“오빠 집에까지 가자고요?”백건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그녀가 싫어하는 줄 알고 급히 설명했다.“그냥 화분 놓을 위치만 봐줘. 끝나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네.”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운 미소를 숨겼다.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에 남서연은 그에게 그때 무슨 마음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너무 묻고 싶었다.하지만 너무 어색해 결국 묻지 못했다.남자와 여자는 달랐으니 말이다.어떤 남자들은 사랑을 떠나 그저 외롭고 욕망이 끓어오르면 아무 여자나 찾아 생리적 수요를 해결하면 되었으니.산 중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그들이 막 집에 도착했을 때, 화분을 운반하는 차도 도착했고 일꾼들은 화분을 운반하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배달했다.남서연은 화분의 위치
“오빠. 우리 둘뿐이에요?”“응.”“그래요.”남서연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문을 닫은 백건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떠났다.석양이 서쪽으로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소 답답하고 억압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졌다.남서연은 그 정적을 깨려고 화제를 찾으려 했지만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그때 백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영이는 네가 나와 꽃 사러 가는 거 알아?”“몰라요. 다혜랑 쇼핑 간다고 말했어요.”백건의 안색이 굳어지며 마음이 좀 언짢았다.꽃을 사러 시장에 가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왜 그의 존재를 숨겼을까? 그와 쇼핑하러 가는 것도 가족을 속여야 하는 일일까?새가 지저귀고 꽃이 향기로운 꽃 시장에 간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모두 처음 와서 이 시장이 6시부터 문을 닫는 것을 몰랐다.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두세 군데 가게에 그래도 녹색 식물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화분 필요하세요?”마감 정리를 하던 사장이 반갑게 인사했다.남서연은 백건과 나란히 가게로 걸어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백건은 남서연의 곁에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뭐가 맘에 들어?”남서연은 그제야 모든 녹색 식물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대나무 같은 녹색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예쁘네요.”그러자 백건이 사장에게 말했다.“이 친구가 좋아하는 거 다 포장해 주세요.”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많은 희한한 녹색 식물이 정교하고 예쁘게 생겼다. 처음 본 남서연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것도 예쁘네요.”“이건 무슨 꽃이에요? 실내에서 키울 수 있어요?”“태양이 조금 필요한 베란다에 심을 수 있어요.”“그것도 사죠.”백건이 말했다.남서연은 구석에 있는 이상한 식물을 보고 얼른 백건의 팔을 잡아끌었다.“오빠. 저것 좀
남서연은 심장이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잡은 채 백건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으며 매 글자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지금 나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건가? 가야 하나?’남서연은 고민하다가 운전석의 남우영을 돌아보고 떠보듯 말했다.“오빠, 내일 퇴근 후에는 나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왜?”“그게...”야근한다고 하면 남우영이 곧바로 조사해서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테니 거짓말을 지어냈다.“친구랑 쇼핑하려고요.”“어느 친구? 어디서 쇼핑하는데?”남우영이 묻자 남서연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회사 동료 다혜랑요. 회사 근처에서 쇼핑할 거예요.”남우영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그래. 그럼 조심하고 일찍 집에 돌아와.”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남우영에게 기대어 애교스럽게 웃었다.“고마워요 오빠.”남우영은 어리둥절했다.“나한테 왜 고마워해? 재미있게 놀아.”이어 주머니에서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남서연에게 건넸다.“마음껏 사.”“괜찮아요. 나 돈 있어요. 충분해요.”남우영은 웃으며 카드를 남서연의 손에 쥐여주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넣어둬. 오빠 돈 써. 네 돈은 모아서 부자 돼야지.”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빙그레 웃었다.“고마워요.”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아직 백건에게 답장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채팅창에 입력 중이라고 떴는데 갑자기 취소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입력 중이라고 떴다.한참이나 메시지를 받지 못하자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을 했다.서재에 있는 백건은 휴대폰을 보고 또 보았다. 책상 위에 놓았다가 또 들고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그녀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왜 답장을 안 하지? 나와 함께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뚜뚜.백건은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고 열어보았다.[좋아요.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퇴근 후에 시간 있어요.]백건은 미간을 구부리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바로 답장했다.[그
화제가 끝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회사에서 힘든 점은 없어?”그는 애써 화제를 찾으며 둘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썼다.남서연은 갑자기 감원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물었다.“회사에서 감원해요?”남서연의 시선이 마침내 그에게 향하자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넌 제외대상이니까 걱정 마.”“여다혜라고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직원도 안 자르면 안 돼요?”“여다혜?”백건이 진지하게 묻자 남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이름 기억했어.”“고마워요.”말을 마친 남서연은 남자의 눈빛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서둘러 시선을 TV에 옮겼다.“서연아...”백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저번에 일은 우리...”그때 남우영이 걸어 나오자 백건의 소리가 뚝 그쳤다.남서연은 마음이 켕기고 또 긴장해서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었다.“지나간 일은 다시 꺼내지 말아요. 이미 지나갔어요.”그녀는 남우영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지만 백건의 귀에는 아주 차갑고 무정하게 들렸다.이제 보니 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여자아이가 몰래 금단의 열매를 시도한 충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다.감정도, 결혼도, 미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남우영은 두 사람 사이에 앉더니 남서연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말했다.“이 영화가 끝나면 우리 돌아가자. 너무 늦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 걱정하셔.’“네.”남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백건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백건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남우영과 남서연이 떠날 때는 직접 문 앞까지 배웅했다.그는 우뚝 서서 남서연이 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서연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곧 차량은 떠났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서 그의 눈앞에서 차량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그의 마음은 텅 비고 너무 허전했다.고개를 돌려 커다란 집을 돌아보니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남씨 가문 사람들은 남서연을 너무 잘 보호했다. 그녀의 출퇴근을
남서연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러자 백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급히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저녁 먹고 가.”남우영은 고민하며 백건을 바라보았다.그가 식탁 쪽을 가리키자 도우미가 마침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날이 저물었어. 지금 집에 돌아가면 너무 배고프잖아. 여기서 먹고 가.”남우영이 남서연을 보자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난 다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었다. 그는 백건의 외로움을 마음속으로 동정하며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럼 오늘은 삼촌 집에서 저녁 먹자.”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남우영과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니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낸 남서연이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걸음을 떼는 순간 백건과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긴장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백건은 은근 고조된 기분을 감추고 차가운 외모에 비해 뜨거운 눈동자로 부드럽게 속삭였다.“요리사에게 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족발이랑 새우 만두 준비하라고 했어.”남서연은 살짝 넋이 나가 한참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이 음식들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분명 방금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았을까?“고마워요.”남서연은 말랑말랑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백건은 그녀가 지나가도록 서둘러 자리를 옮겼고 남서연은 그의 곁을 넘어 식탁으로 향했다.그리고 백건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식탁에 앉고 보니 여섯 가지 요리와 국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남우영은 국자로 국을 떠주며 나무랐다.“삼촌,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모두 서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잖아요.”백건은 말없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남서연은 볼이 약간 뜨거워지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떴다. 남우영이 건넨 국을 받아 조용히 마셨다.남우영은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없이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백건은 식사 예절이 아주 우아하고 규범적이었는데
“이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인사팀장을 찾든지 아니면 바로 삼촌을 찾아가.”남서연은 한바탕 생각에 잠겼다.백건을 찾아가라?이것은 마치 그에게 접근하는 핑계 같았다. 다만 이 핑계가 좀 구차하고 미미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일이 바로 해결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했다.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방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남우영이 열심히 차를 몰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넣고 한 번 눌렀다.“여보세요. 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그를 올려다보며 괜히 마음이 긴장됐다.휴대전화 저쪽에서 백건이 말했다.“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한 번 다녀가.”“하 비서 시켜서 보내세요. 나 지금 서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있어서 못 가요.”“아주 중요한 거야. 다른 사람 손에 넣을 수 없어.”‘아주 중요하다고? 하 비서도 못 믿을 만큼?’남우영은 너무 궁금했다.그때 남서연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집에 늦게 가도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더니 바로 백건에게 말했다.“좋아요. 지금 당장 갈게요.”남우영은 방향을 틀었다.30분 후, 차량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남서연은 낯설고 궁금해서 물었다.“오빠 여긴 어디예요?”“삼촌이 사는 곳.”남서연은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백씨 가문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남우영도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걸으며 말했다.“삼촌 이제 나와서 혼자 살아.”남서연이 그의 귀를 따라가며 경악해서 물었다.“왜요?”“외할머니가 통제욕이 너무 강하고 또 삼촌더러 승아 누나와 결혼하라고 협박하잖아.삼촌이 지금까지는 계속 참으며 살았는데 이제 한계를 건드려서 못 참고 외할머니와 크게 싸우고 혼자 살고 있어.”“외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워요?”남우영은 벨을 누르고 고개를 돌려 답했다.“삼촌은 사생활이 전혀 없었어. 일기장도 외할머니가 떳떳하게 꺼내 보는데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어?”그때
엘리베이터 문은 디자인팀 사무실 층에서 멈추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남우영이 말했다.“서연아 도착했어.”남서연은 바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마주 보며 남우영을 향해 미소 짓고 손짓했지만 부드러운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백건에게 떨어졌다백건은 그윽한 눈빛으로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눈이 서로 마주치자 서로 회피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가 차단되었다.남서연은 가볍게 심장을 가리고 왠지 모를 긴장과 설렘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이제 백건을 당당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남몰래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남의 남자친구를 훔치는 죄책감도 없게 되었다.다만 아직 백건이 솔로인지 100% 확실하지 않았다. 유승아와 사귀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일단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남서연은 즐겁게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싱글벙글 웃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디자인 팀 사무실로 들어섰다.디자인 팀의 업무는 남서연에게 매우 충실하고 성취감이 있었다.그녀는 패션디자인을 매우 좋아해서 한번 일에 몰두하면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겨울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선별하는 중인데 남서연이 제출한 몇몇 제품들이 탈락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여다혜는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싸안고 책상에 머리를 쿡쿡 박았다.초조해하는 여다혜를 본 남서연은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여다혜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슬퍼하며 말했다.“서연아, 내 디자인 모두 떨어졌어.”남서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내 것도 마찬가지야.”“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번 구조조정에서 감원대상이 될 거야.”남서연은 경악했다.“또 감원해?”여다혜는 고개를 들고 슬픈 얼굴,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너 그거 알아? 새로 부임한 대표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원래 대표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