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지완님을 이렇게 뵐 수 있다니, 정말 너무 행운입니다.”“지완님은 여자분이셨네요. 전에 영상으로 작품을 볼 때 섬섬옥수가 여자일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작품을 들여다보면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웅장한 포부와 막강한 기세, 그리고 힘찬 기개가 느껴졌어요.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파워가 있거든요.”“지완님 수묵화는 심금을 울리고 시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어요. 심도가 깊고 경지가 있어서 정말 너무 좋아요.”연이은 찬사에 서다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넋 놓은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은경애는 일찌감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고였고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서다인이 다재다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숨겨진 유명 화가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옆에 있는 백하린은 화나서 안색이 다 짙어졌다. 그녀는 원래 서다인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었는데 이런 신분이 숨겨있을 줄이야. 덕분에 서다인만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한껏 뽐내고 장내의 모든 이를 감탄케 했다.남씨 일가의 사람들도 입이 쩍 벌어졌다. 다들 놀라움 속에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었다.이때 류청이 남하준 옆으로 다가와 깍듯이 휴대폰을 건넸다.남하준은 휴대폰을 건네받고 동영상 재생을 클릭했다.영상 속 화면에서 가늘고 새하얀 손이 나왔고 백지 한 장에 붓과 먹이 놓여 있었다.지완은 습관적으로 백지를 세 번 쓰다듬은 후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는 티 나지 않은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류청이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이 바로 지완님인 것 같아요.”남하준은 영상을 끄고 휴대폰을 류청에게 돌려준 후 나지막이 분부했다.“이 계정 당장 조사해봐. 운영하는 회사와 배후에서 계정을 등록한 사람, 그리고 작품을 경매하는 경로와 돈을 기부하는 경로까지 전부 샅샅이 조사해.”“네.”류청은 대답을 마치고 연회장을 떠났다.서다인은 모두의 열정 어린 칭찬 속에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됐다.그녀는 감히 부인할 수도
며칠 후, 사무실 안.류청이 조사 결과를 남하준에게 보고했다.“도련님, 지완 씨가 영상을 업로드하는 계정은 Z국의 한 고아원 공식 계정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선물로 받은 보상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은 고아원 공금 계좌에 바로 입금되었고 원장님은 지완 씨 본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지완 씨 작품의 판매 경로도 아주 특이했어요. 온라인으로 직접 입찰하고 입금 계좌는 각 지역의 고아원이나 자선단체였어요. 모든 수입은 지완 씨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어요.”“따로 운영해주는 회사나 팀도 없고 라이브 방송 때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림만 그렸습니다.”“3년 전에 이 계정은 업데이트가 중단됐고 지완이라는 사람도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어요.”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두 눈을 감고 류청의 보고를 묵묵히 들으며 속으로 서다인을 떠올렸다.이토록 평범한 여자의 배경이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다니.남하준은 자석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차 대기시켜.”류청이 물었다.“어디로 가시게요 도련님?”남하준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다인이 만나러 가야겠어.”...안성시 번화가.노을이 지고 화려한 등불이 켜지면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서다인은 평상시처럼 구석진 곳에서 생화를 팔고 있었다.그녀의 작은 노점은 아늑하고 로맨틱하며 매우 아름답게 꾸며졌다.간혹 주문이 한두 개 들어오기도 했다.“다인아, 오랜만이야.”서다인이 한창 바삐 돌아칠 때 상당히 거슬리는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머리를 들더니 눈빛이 짙어지고 수중의 장미꽃을 천천히 내려놓은 후 옆에 뒀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서지석은 바짝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경계에 찬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서다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화 안 풀렸어?”“지난번에 네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뒤로 아직도 걸음걸이가 시
서지석은 식겁하여 사색이 된 채 이를 악물고 서다인을 노려봤다. 그는 결국 뒤로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서다인 너 딱 기다려. 조만간 혼내준다 내가.”그는 으름장을 놓은 후 줄행랑을 쳤다.서다인은 휴대폰을 거둬들이고 피식 웃으며 서지석의 경고를 새겨듣지도 않았다.앞을 내다보자 훤칠한 체구에 늠름한 자태의 남자가 인파들 속에 서 있었다.위엄이 차 넘치고 기질이 출중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확 집중시켰다.류청이 그의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감개무량하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정말 원칙적인 분이시네요.”남하준은 아무런 대답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류청이 재빨리 뒤따라갔다.서다인은 작은 걸상에 앉아 이제 막 장미꽃 잎과 가시를 다듬고 있었는데 눈앞에 불쑥 늘씬한 다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손님인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서 오세요, 필요한 거...”“있으... 실까요?”서다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겨우 말을 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남하준이 왜 야시장의 거리에 나타난 걸까?그녀는 남하준의 임무 수행 차량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사방을 기웃거렸다.남하준은 놀라면서도 호기심에 찬 그녀의 모습이 마냥 귀여울 따름이었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어떤 꽃이 더 예뻐?”서다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장미꽃을 내려놓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여자분께 드리는 거예요 아니면 어르신께 드리는 거예요?”남하준이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여자.”서다인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이어서 안색도 저도 몰래 어두워졌다.많고 많은 꽃가게 중에 왜 하필 그녀를 찾아와서 백하린에게 선물할 꽃을 사려는 걸까?이 남자는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겠지!서다인은 대충 하얀 국화 한 다발을 집어 들었다.“이 꽃도 이쁘네요.”남하준은 하얀 국화를 건네받았다.부부도 돈 계산은 명확히 해야 하는 법, 서다인은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다.“4천 원이에요.”남하준도 전혀 머
돌아가는 길.남하준이 그녀에게 물었다.“남원으로 갈까 아니면 네가 지내는 곳으로 갈까?”서다인의 작은 빌라는 노점과 비교적 가깝고 남원은 백하린의 집이나 다름없기에 딱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빌라로 가요.”15분 후.차가 낡은 빌라 앞에 도착했다. 서다인은 차에서 내려 남하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어두운 밤, 낡은 건물 복도는 좁고 흐릿할 따름이었다. 서다인은 휴대폰으로 조명을 켜고 난감한 듯 말했다.“이 복도 센서등이 자주 고장 나요.”남하준에게 이곳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서다인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불을 켠 후 어색하게 가장자리에 서서 남하준을 안으로 들였다.10평 남짓한 작은 빌라에 발을 들인 순간, 남하준이 받은 첫인상은 바로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서다인이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남하준이 들고 있던 하얀 국화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자.”그의 말투가 너무 침착해 감정 기복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이 꽃을 왜 주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서다인은 멍하니 넋 놓고 국화를 바라보다가 심장이 마구 떨리고 온몸의 세포가 미친 듯이 뛰어댔다.그녀는 줄곧 백하린에게 주는 꽃이라고 생각했다.갑작스러운 이벤트에 서다인은 아무런 반응도 못 했다.남하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별로야?”서다인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그의 손에서 꽃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두 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너무 예뻐요. 고마워요.”서다인은 전에 자신이 무슨 꽃을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가장 좋아하는 꽃은 바로 하얀 국화일 것이다.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재빨리 주방에 들어가 꽃병을 꺼내서 국화꽃을 꽂았다.남하준은 집안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더블 소파에 가서 앉았다.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그는 책을 들어서 대충 펼쳐보았는데 죄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다.서다인이 M국어와 Z국어를 할 줄 아는 건 이미 아는데 지금 또 다른 나라의 책을 읽는다고
서다인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남하준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반면에 서다인은 어린아이처럼 조바심이 난 것 같아 보였다.그녀의 머릿속엔 이상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드라마에서 보면 여우짓 하는 못된 여자들이 이런 수법으로 남자를 꼬시던데? 하준 씨가 이렇게 덤덤해 보이는 것도 내가 여우짓 해서 자기를 꼬신다고 생각해서겠지? 남하준은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는 귀찮음이 담겨 있었다.서다인은 마른침을 삼킨 후 다급하게 일어서고는 뒷걸음질을 치며 잘못을 저지를 어린아이처럼 허리 굽혀 사과했다.“미안해요.”남하준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화장실과 헤어드라이어 잠깐 써도 돼?”“네.”서다인은 부랴부랴 화장실을 가리켰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드라이어는 화장실 서랍 안에 있으니 꺼내서 쓰면 돼요.”남하준은 느긋하고 침착하게 화장실로 걸어갔다.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면대에 기대고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울렁였다.‘젠장! 내가 언제부터 유혹에 이렇게 약해진 거야?’드라이어 소리가 화장실에서 한참 울렸다.잠시 후, 남하준이 걸어 나왔다.서다인은 여전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를 유지한 채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물 한 잔이 더 놓여 있었고, 소파 위에는 방수 매트가 깔려 있었다.남하준은 다시 자리에 앉은 후 옆에 있는 나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네.”서다인은 조용히 나무 의자를 끌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딱딱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폈는데 꼭 면접을 보는 사회초년생 같아 보였다.남하준은 워낙 카리스마가 있어 어딜 가든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것 같았다.지금 이 순간, 서다인보다 남하준이야말로 이곳의 주인 같았다.그를 똑바로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은
남하준의 말을 들은 서다인은 다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되물었다.“내가 지완 아니라면요? 나도 그저 표절을 좋아하는 아마추어면 어떡하려고요?”남하준은 DNA 검사 결과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취미가 참 많나 봐?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 바꿔치기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대단하고, 또 책 읽는 것을 좋아해 한 번 본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지. 그뿐만 아니라 화학 물질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어려운 외국어조차 손쉽게 읽어내는데 정말 대단한걸?”서다인은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그래서 내가 아직도 블랙 섀도우에서 보낸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남하준은 침묵을 유지했다.그는 워낙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서다인의 신분은 그녀가 선보인 능력, 그리고 품격과 정반대였다.서다인은 지적이고 일거수일투족이 품위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거나, 아니면 후천적으로 강도 높은 특별 훈련을 받은 게 아니라면 이런 능력과 품격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서다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제안했다.“이러는 건 어때요? 내 몸에 도청기를 달고 나를 블랙 섀도우의 아지트에 보내요. 그러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어요?”‘뭐야? 이 순진한 생각은.’남하준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허리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블랙 섀도우가 어떤 조직인지 알아? 훈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어. 만약 당신이 정말 블랙 섀도우 사람이라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이상 돌아가도 죽는 것뿐이야. 당신이 블랙 섀도우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빨리 죽을 것이고.”분노가 치밀어 오른 서다인은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럼 날 가둬서 죽여요. 잘못 죽일지언정 의심이 가는 사람을 놓아주면 안 되잖아요.”남하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이가 없어 미간을 구겼지만 그의 말투는 한껏 부드러워졌다.“왜 맨날 삐지기만 해?”평소에 과묵하기만 남하준이 부드러운 말투로 이
남하준은 흠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졌다.서다인은 식은땀으로 몸이 흠뻑 젖은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가여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남하준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서다인의 귀를 막아주었다.이어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겁에 질린 듯한 가여운 울음소리는 품에 안긴 여인에게서 난 것이었다.마치 상처를 입은 작은 고양이가 낸 불쌍한 목소리처럼 들려왔다.그는 서다인이 진심으로 천둥과 번개와 같은 날씨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남하준은 성인 여자에게 허리를 꼭 안긴 건 처음이었다.그녀의 몸은 풍만하고 부드러웠는데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나기도 했다.남하준은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지금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 자괴감이 들었다.서다인이 우는 모습은 그도 처음이었다.그녀의 울음소리는 어린 시절 하린의 울음소리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가 10년 동안 묵혀뒀던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백하린은 돌아온 1년 동안 자주 애교를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렸었는데 남하준은 달래면서도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이젠 나이가 들기도 했고 차분해졌기 때문에 더는 백하린에게 설렘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서다인에게서 다시 어린 시절의 풋풋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방 안은 당장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깜깜했다.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전혀 멈출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방 안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서다인과 남하준은 서로의 미세한 숨소리, 그리고 심장 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서다인은 천천히 진정을 되찾은 후 남자의 탄탄한 가슴팍에 기대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자기가 선을 넘었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내가 저 사람 허리를 꽉 쥐고 품에 기댔단 말이야? 내가 무안해질까 봐 밀어내지 않고 귀도 막아준 거겠지?’서다인은 그의 허리에서 천천
남하준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옷자락이 그녀의 손에 쥐어진 느낌이 들자 그는 돌아서서 어둠 속의 서다인을 바라봤다.이때 밖에서 번개가 스쳐 지나가 한순간에 집안을 환히 비췄다.서다인은 눈물을 글썽인 채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척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그저 한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나른해지더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그는 서다인의 이어폰을 들고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안 가. 그냥 회로를 점검하고 올게.”남자의 향기가 서다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숨소리가 볼에 닿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에 서다인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남자의 옷자락을 놓았다.남하준은 잔뜩 겁을 먹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무 겁먹지 마. 나 바로 돌아올게.”그 말을 남긴 뒤 남하준은 집을 나섰다.그의 이 무심한 행동이 서다인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을 남겼는지는 전혀 알지 모른 채 말이다.서다인은 바보같이 그의 손길이 닿은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늦춰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설렘이 지나가자 서다인은 곧이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이 남자를 점점 더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어떡하지? 나 이혼하기 싫어. 저 사람에게 분명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더 깊어지네.’이때 문이 다시 열리면서 통화하는 남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꽃은 기숙사에 가져가서 아내나 여자친구가 있는 놈에게 팔아. 꽃을 사면 내일 하루 휴가 준다고 해. 나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 오늘 밤 돌아가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남하준은 전화를 끊은 후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아파트 전체가 정전되었어. 아무래도 번개 때문에 고장이 난 것 같아. 내일 날이 개면 수리하는 사람이 올 거야.”서다인은 그가 들어설 때부터 이미 이어폰을 뺏기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남우영은 냉장고에 붙은 메모, 그리고 방에 가지런히 놓인 선물들과 그 위에 올려놓은 그의 블랙카드를 발견했다.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외투를 대충 침대 위에 던진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선물과 카드를 돌려준 걸 보니, 내일은 이혼 서류를 건네겠다는 뜻인가?’그 생각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남우영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다은 씨, 얘기 좀 해요.”방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다은 씨...”잠시 후,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일찍 자려고요.”시간을 보니 아직 자기에는 이른 초저녁이었다.남우영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샤워를 마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밤 9시경, 남우영은 다시 이다은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등록된 지문으로 방문을 열었다.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의 불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희미하게나마 침대의 윤곽만이 보였다.남우영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이다은은 문 열리는 소리에 긴장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어둠 속에서 다가온 남우영이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남우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다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우영은 대답 대신 이불을 들추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남우영 씨!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요?”남우영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내 아내를 안고 자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놓자.”이다은은
이다은은 남우영의 메시지를 읽고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화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남우영, 나쁜 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다 네 맘대로 되는 줄 아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면 재밌어? 정말 너무해...”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충분히 쉰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이다은은 간단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남우영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시 우주항공청으로 향했다. 남은 데이터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연구소로 들어선 그녀는 몇몇 뛰어난 교수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교수들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규 학위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점심시간, 이다은은 교수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밝고 친근한 성격 덕분에 교수들과 금세 가까워졌다.정안 교수는 유난히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이다은 씨,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일곱입니다.”정안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믿기지 않네요. 제 아들이랑 동갑인데, 훨씬 어려 보이세요.”이다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교수님, 자녀가 몇 분 계세요?”정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들 하나요.”“아, 그러시구나...”이때 옆에 있던 교수들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정 교수님, 혹시 이다은 씨를 아드님께 소개하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다은 씨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다른 교수는 웃으며 농담을 이어갔다.“그거 반어법 아닌 거 확실하죠?”이다은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안은 그녀가 불편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무슨 그런 말씀을! 물론 우리 아들이 다른 씨같이 참하고 능력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난다면 저야 기쁘겠죠. 하지만 우리 아들은...”정안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면서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이
남우영의 폭풍 같은 키스에 이다은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강렬한 입맞춤과 단단한 품 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이성을 잃고 그의 리드에 따르고 있었다.숨은 점점 가빠지고 온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고, 그녀는 자신이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두 사람의 침실은 2층에 있었지만, 거실 소파 앞에 다다르자, 남우영은 이다은이 갑작스럽게 이성을 되찾아 자신을 밀어낼까 두려워 서둘러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이다은은 여전히 그의 키스에 취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고 가슴은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이다은의 온몸 곳곳을 부드럽게 만지던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거실의 공기는 뜨겁고도 위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조정했다. 은은한 빛으로 바뀐 거실은 마치 꿈속 같은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다은은 이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자신이 언제 옷을 벗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살이 찢기는 듯한 첫 경험의 고통이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아... 아파요!”이다은은 고개를 돌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간신히 말했다.“남우영 씨, 미쳤어요? 진짜 나쁜 놈이에요... 흑...”“미안해요... 다은 씨... 정말 미안해요.”남우영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지만, 고장난 1톤 트럭처럼 절대 멈추지 않았다.그의 강압적인 태도는 이다은을 더욱 혼란스럽고 무력하게 만들었다.이다은은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고, 더 이상 어떤 존중도 느낄 수 없었다.‘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아
두 사람이 차에 타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이다은은 창가 쪽으로 몸을 틀어 최대한 남우영과 거리를 두며 참았던 화를 터뜨리듯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남우영 씨, 왜 자꾸 억지 부리시는 거예요?”남우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의자에 기대고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억지라니요.”“억지잖아요! 남우영 씨의 차를 얻어 타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잖아요!”“다은 씨, 제가 잘못한 거니까 저를 미워해도 돼요. 저를 원망한다 해도 할말 없고, 심지어 때려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혼은 절대 안 돼요.”이다은은 울분을 담아 쏘아붙였다.“이건 사기 결혼이에요! 이 결혼은 애초에 무효라고요!”“사기 결혼이라... 그 말 누가 믿을까요?”이다은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 당황한 듯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사기 결혼이라니... 보통 그런 건 돈이나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근데... 남우영 같은 부자가 나같이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여자를 속여서 결혼했다? 그걸 누가 믿겠어?’“그건...”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있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무거운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이다은 역시 이혼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이 큰 간격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옭아매게 했다.이다은이 아무리 분수를 알고 결혼을 요구해도 남우영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다은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남우영은 평소처럼 주방으로 향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한때는 대저택에서 손끝 하나 물에 적시지 않던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요리하는 시간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다은은 씻고 나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때, 방에서 나오던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흠칫 놀라며 다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남우영 씨! 제발 이제 저를 위해 요리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거... 받을 자격 없다
이다은은 정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화학 교수라고 하면 보통 나이 많은 대머리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련되고 기품 있는 분도 있구나.’정안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뒤쪽 데이터에서 또 편차가 발생했습니다. 이전에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수정했던 동료에게 다시 맡겼지만, 이번엔 손도 못 대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 데이터를 수정했던 숨은 고수가 있다며 다은 씨를 언급했어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안 교수님, 이덕수 차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받은 돈은 다 돌려드릴게요. 각서도 쓰고 협약서에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데이터를 유출하거나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정안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다은 씨,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희는 당신 씨를 감옥에 보낼 생각 전혀 없어요. 다만 데이터를 직접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주실 수 있을까요?”이다은은 순간 멍하니 정안을 바라보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대와 긴장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덕수마저 옆 의자를 당기며 권했다.“자, 여기 앉으세요.”이다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가운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비록 M국 항공우주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항공우주 데이터 분석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자격이 부족하다며 좌절하는 대신, 독학으로 공부하며 스스로 능력을 키워온 결과였다.시간이 흘러 30분이 지나자, 이다은은 화면에 집중한 채 외쳤다.“찾았어요! 여기 오류가 있네요.”방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문제는 단순히 코드 하나가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수정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쉽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반면 남우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는 이다은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그 이다은 말입니다.”그의 말에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침묵을 깨고 여중권이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겠군요.”여민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를 홍보팀에 들여온 것도 계획된 거였나요? 저를 직접 면접 본 것도 다 계획이었나요?”남우영은 부드럽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여민지 씨가 제 아내를 사칭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제 아내로 위장해 제 아내의 학위를 가로채고, 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옥에 갈 이유가 되니까요.”여민지는 온몸을 떨며 부모를 불안하게 쳐다봤다.여중권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남 대표님, 대화로 해결합시다. 과거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어려운 이씨 가문을 도와줬던 건 대표님도 잘 아실 겁니다.”남우영은 냉소를 띤 채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 딸을 회사에 들인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걸 제대로 정산할 때가 됐군요.”여중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혜원과 여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필사적으로 남우영에게 용서를 빌었다.“남 대표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어떤 방법이든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남우영은 비웃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잠시 후, 경찰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체포되었다.여민지는 울면서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남우영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외면했다.레스토랑을 나서며 남우영은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
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네. 이러다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남씨 가문 며느리가 감옥에 가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겠지?’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막막한 심정으로 끌려갔다.한편, 남우영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레스토랑에서 남우영을 만난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여민지의 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치 딸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남우영은 마주 앉아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전직 공무원에 전직 판사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다은 씨 같은 약자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여민지의 아버지, 여중권이 먼저 입을 열며 공손히 물었다.“남우영 씨는 어디에서 일하고 계십니까?”“에이스타 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여민지의 어머니, 이혜원이 대화를 거들며 말했다.“우리 딸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어요?”“얼마 안 됐습니다.”이혜원이 다시 물었다.“그럼 두 분 관계는 어느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남우영은 태연히 답했다.“오늘이 처음으로 저녁 약속을 한 정도입니다.”여중권과 이혜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중권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첫 만남부터 저희를 초대하신 이유는 뭔지...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어서요.”남우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결혼 이야기라니요. 두 분은 저와 다은 씨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이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민지가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빠, 엄마... 대표님께서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하셔
여민지는 모두의 칭찬과 아부 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남우영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로비를 응시하며 이다은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대부분 직원이 퇴근했지만, 그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안녕하세요.”여민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여민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도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소문이요?”“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더라고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심지어 대표님이 저에게 적극 대시한다고들 해요...”남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여민지는 그가 미소 짓는 걸 보고 신이 난 듯 한 발 더 다가섰다.“대표님, 기회 되면 저녁 식사하면서 조용히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남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좋아요. 부모님도 모시고 나오세요.”여민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뭐라고요?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남우영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갑시다.”여민지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우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건물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다은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이 함께 차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이다은은 뒤척이며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만약 이 사실이 남우영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다음 날 아침, 이다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남우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주어진 일을 받아 들고 묵묵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하는 등 사소한 일을 처리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그녀는 팀장에게서 늘 가벼운 업무만 배정받았다. 학력이 높지 않은 데다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우아한 몸매는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게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하러 나갔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은 그녀처럼 사무실에 남아 빵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이다은은 무심히 빵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어떻게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랑 번개 모임을 가지듯 결혼할 수가 있냐고!’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항공 개발 부서에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일이야.’그녀가 빵을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이다은 씨.”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남자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시락을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점심입니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주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