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사무실 안.류청이 조사 결과를 남하준에게 보고했다.“도련님, 지완 씨가 영상을 업로드하는 계정은 Z국의 한 고아원 공식 계정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선물로 받은 보상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은 고아원 공금 계좌에 바로 입금되었고 원장님은 지완 씨 본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지완 씨 작품의 판매 경로도 아주 특이했어요. 온라인으로 직접 입찰하고 입금 계좌는 각 지역의 고아원이나 자선단체였어요. 모든 수입은 지완 씨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어요.”“따로 운영해주는 회사나 팀도 없고 라이브 방송 때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림만 그렸습니다.”“3년 전에 이 계정은 업데이트가 중단됐고 지완이라는 사람도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어요.”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두 눈을 감고 류청의 보고를 묵묵히 들으며 속으로 서다인을 떠올렸다.이토록 평범한 여자의 배경이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다니.남하준은 자석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차 대기시켜.”류청이 물었다.“어디로 가시게요 도련님?”남하준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다인이 만나러 가야겠어.”...안성시 번화가.노을이 지고 화려한 등불이 켜지면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서다인은 평상시처럼 구석진 곳에서 생화를 팔고 있었다.그녀의 작은 노점은 아늑하고 로맨틱하며 매우 아름답게 꾸며졌다.간혹 주문이 한두 개 들어오기도 했다.“다인아, 오랜만이야.”서다인이 한창 바삐 돌아칠 때 상당히 거슬리는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머리를 들더니 눈빛이 짙어지고 수중의 장미꽃을 천천히 내려놓은 후 옆에 뒀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서지석은 바짝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경계에 찬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서다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화 안 풀렸어?”“지난번에 네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뒤로 아직도 걸음걸이가 시
서지석은 식겁하여 사색이 된 채 이를 악물고 서다인을 노려봤다. 그는 결국 뒤로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서다인 너 딱 기다려. 조만간 혼내준다 내가.”그는 으름장을 놓은 후 줄행랑을 쳤다.서다인은 휴대폰을 거둬들이고 피식 웃으며 서지석의 경고를 새겨듣지도 않았다.앞을 내다보자 훤칠한 체구에 늠름한 자태의 남자가 인파들 속에 서 있었다.위엄이 차 넘치고 기질이 출중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확 집중시켰다.류청이 그의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감개무량하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은 정말 원칙적인 분이시네요.”남하준은 아무런 대답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류청이 재빨리 뒤따라갔다.서다인은 작은 걸상에 앉아 이제 막 장미꽃 잎과 가시를 다듬고 있었는데 눈앞에 불쑥 늘씬한 다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손님인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서 오세요, 필요한 거...”“있으... 실까요?”서다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겨우 말을 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남하준이 왜 야시장의 거리에 나타난 걸까?그녀는 남하준의 임무 수행 차량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사방을 기웃거렸다.남하준은 놀라면서도 호기심에 찬 그녀의 모습이 마냥 귀여울 따름이었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어떤 꽃이 더 예뻐?”서다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장미꽃을 내려놓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여자분께 드리는 거예요 아니면 어르신께 드리는 거예요?”남하준이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여자.”서다인은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이어서 안색도 저도 몰래 어두워졌다.많고 많은 꽃가게 중에 왜 하필 그녀를 찾아와서 백하린에게 선물할 꽃을 사려는 걸까?이 남자는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겠지!서다인은 대충 하얀 국화 한 다발을 집어 들었다.“이 꽃도 이쁘네요.”남하준은 하얀 국화를 건네받았다.부부도 돈 계산은 명확히 해야 하는 법, 서다인은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다.“4천 원이에요.”남하준도 전혀 머
돌아가는 길.남하준이 그녀에게 물었다.“남원으로 갈까 아니면 네가 지내는 곳으로 갈까?”서다인의 작은 빌라는 노점과 비교적 가깝고 남원은 백하린의 집이나 다름없기에 딱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빌라로 가요.”15분 후.차가 낡은 빌라 앞에 도착했다. 서다인은 차에서 내려 남하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어두운 밤, 낡은 건물 복도는 좁고 흐릿할 따름이었다. 서다인은 휴대폰으로 조명을 켜고 난감한 듯 말했다.“이 복도 센서등이 자주 고장 나요.”남하준에게 이곳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서다인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불을 켠 후 어색하게 가장자리에 서서 남하준을 안으로 들였다.10평 남짓한 작은 빌라에 발을 들인 순간, 남하준이 받은 첫인상은 바로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서다인이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남하준이 들고 있던 하얀 국화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자.”그의 말투가 너무 침착해 감정 기복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이 꽃을 왜 주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서다인은 멍하니 넋 놓고 국화를 바라보다가 심장이 마구 떨리고 온몸의 세포가 미친 듯이 뛰어댔다.그녀는 줄곧 백하린에게 주는 꽃이라고 생각했다.갑작스러운 이벤트에 서다인은 아무런 반응도 못 했다.남하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별로야?”서다인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그의 손에서 꽃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두 볼이 빨개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너무 예뻐요. 고마워요.”서다인은 전에 자신이 무슨 꽃을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가장 좋아하는 꽃은 바로 하얀 국화일 것이다.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재빨리 주방에 들어가 꽃병을 꺼내서 국화꽃을 꽂았다.남하준은 집안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더블 소파에 가서 앉았다.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그는 책을 들어서 대충 펼쳐보았는데 죄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다.서다인이 M국어와 Z국어를 할 줄 아는 건 이미 아는데 지금 또 다른 나라의 책을 읽는다고
서다인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남하준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반면에 서다인은 어린아이처럼 조바심이 난 것 같아 보였다.그녀의 머릿속엔 이상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드라마에서 보면 여우짓 하는 못된 여자들이 이런 수법으로 남자를 꼬시던데? 하준 씨가 이렇게 덤덤해 보이는 것도 내가 여우짓 해서 자기를 꼬신다고 생각해서겠지? 남하준은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는 귀찮음이 담겨 있었다.서다인은 마른침을 삼킨 후 다급하게 일어서고는 뒷걸음질을 치며 잘못을 저지를 어린아이처럼 허리 굽혀 사과했다.“미안해요.”남하준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화장실과 헤어드라이어 잠깐 써도 돼?”“네.”서다인은 부랴부랴 화장실을 가리켰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드라이어는 화장실 서랍 안에 있으니 꺼내서 쓰면 돼요.”남하준은 느긋하고 침착하게 화장실로 걸어갔다.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면대에 기대고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울렁였다.‘젠장! 내가 언제부터 유혹에 이렇게 약해진 거야?’드라이어 소리가 화장실에서 한참 울렸다.잠시 후, 남하준이 걸어 나왔다.서다인은 여전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를 유지한 채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물 한 잔이 더 놓여 있었고, 소파 위에는 방수 매트가 깔려 있었다.남하준은 다시 자리에 앉은 후 옆에 있는 나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네.”서다인은 조용히 나무 의자를 끌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딱딱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폈는데 꼭 면접을 보는 사회초년생 같아 보였다.남하준은 워낙 카리스마가 있어 어딜 가든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것 같았다.지금 이 순간, 서다인보다 남하준이야말로 이곳의 주인 같았다.그를 똑바로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은
남하준의 말을 들은 서다인은 다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되물었다.“내가 지완 아니라면요? 나도 그저 표절을 좋아하는 아마추어면 어떡하려고요?”남하준은 DNA 검사 결과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취미가 참 많나 봐?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 바꿔치기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대단하고, 또 책 읽는 것을 좋아해 한 번 본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지. 그뿐만 아니라 화학 물질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어려운 외국어조차 손쉽게 읽어내는데 정말 대단한걸?”서다인은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그래서 내가 아직도 블랙 섀도우에서 보낸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남하준은 침묵을 유지했다.그는 워낙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서다인의 신분은 그녀가 선보인 능력, 그리고 품격과 정반대였다.서다인은 지적이고 일거수일투족이 품위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거나, 아니면 후천적으로 강도 높은 특별 훈련을 받은 게 아니라면 이런 능력과 품격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서다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제안했다.“이러는 건 어때요? 내 몸에 도청기를 달고 나를 블랙 섀도우의 아지트에 보내요. 그러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어요?”‘뭐야? 이 순진한 생각은.’남하준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허리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블랙 섀도우가 어떤 조직인지 알아? 훈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어. 만약 당신이 정말 블랙 섀도우 사람이라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이상 돌아가도 죽는 것뿐이야. 당신이 블랙 섀도우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빨리 죽을 것이고.”분노가 치밀어 오른 서다인은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럼 날 가둬서 죽여요. 잘못 죽일지언정 의심이 가는 사람을 놓아주면 안 되잖아요.”남하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이가 없어 미간을 구겼지만 그의 말투는 한껏 부드러워졌다.“왜 맨날 삐지기만 해?”평소에 과묵하기만 남하준이 부드러운 말투로 이
남하준은 흠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졌다.서다인은 식은땀으로 몸이 흠뻑 젖은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가여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남하준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서다인의 귀를 막아주었다.이어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겁에 질린 듯한 가여운 울음소리는 품에 안긴 여인에게서 난 것이었다.마치 상처를 입은 작은 고양이가 낸 불쌍한 목소리처럼 들려왔다.그는 서다인이 진심으로 천둥과 번개와 같은 날씨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남하준은 성인 여자에게 허리를 꼭 안긴 건 처음이었다.그녀의 몸은 풍만하고 부드러웠는데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나기도 했다.남하준은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지금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 자괴감이 들었다.서다인이 우는 모습은 그도 처음이었다.그녀의 울음소리는 어린 시절 하린의 울음소리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가 10년 동안 묵혀뒀던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백하린은 돌아온 1년 동안 자주 애교를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렸었는데 남하준은 달래면서도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이젠 나이가 들기도 했고 차분해졌기 때문에 더는 백하린에게 설렘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서다인에게서 다시 어린 시절의 풋풋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방 안은 당장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깜깜했다.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전혀 멈출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방 안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서다인과 남하준은 서로의 미세한 숨소리, 그리고 심장 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서다인은 천천히 진정을 되찾은 후 남자의 탄탄한 가슴팍에 기대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자기가 선을 넘었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내가 저 사람 허리를 꽉 쥐고 품에 기댔단 말이야? 내가 무안해질까 봐 밀어내지 않고 귀도 막아준 거겠지?’서다인은 그의 허리에서 천천
남하준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옷자락이 그녀의 손에 쥐어진 느낌이 들자 그는 돌아서서 어둠 속의 서다인을 바라봤다.이때 밖에서 번개가 스쳐 지나가 한순간에 집안을 환히 비췄다.서다인은 눈물을 글썽인 채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척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그저 한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나른해지더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그는 서다인의 이어폰을 들고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안 가. 그냥 회로를 점검하고 올게.”남자의 향기가 서다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숨소리가 볼에 닿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에 서다인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남자의 옷자락을 놓았다.남하준은 잔뜩 겁을 먹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무 겁먹지 마. 나 바로 돌아올게.”그 말을 남긴 뒤 남하준은 집을 나섰다.그의 이 무심한 행동이 서다인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을 남겼는지는 전혀 알지 모른 채 말이다.서다인은 바보같이 그의 손길이 닿은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늦춰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설렘이 지나가자 서다인은 곧이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이 남자를 점점 더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어떡하지? 나 이혼하기 싫어. 저 사람에게 분명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더 깊어지네.’이때 문이 다시 열리면서 통화하는 남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꽃은 기숙사에 가져가서 아내나 여자친구가 있는 놈에게 팔아. 꽃을 사면 내일 하루 휴가 준다고 해. 나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 오늘 밤 돌아가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남하준은 전화를 끊은 후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아파트 전체가 정전되었어. 아무래도 번개 때문에 고장이 난 것 같아. 내일 날이 개면 수리하는 사람이 올 거야.”서다인은 그가 들어설 때부터 이미 이어폰을 뺏기
남하준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머쓱한 서다인은 다급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지난번처럼 하준 씨 몸에 엎드려 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 신경이 쓰인다면 손목에 밧줄을 묶고 잘게요.”서다인이 당황하며 더 설명하려던 그때, 우람한 몸집의 남하준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서다인은 당황한 나머지 침대에 오르더니 몸을 움츠려 다른 쪽으로 옮겼다.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발을 벗더니 바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이다.서다인은 불편한지 계속 경직된 채 앉아 있었다.분명 남하준에게 남아서 자고 가라는 제의를 한 건 서다인인데 막상 그가 침대에 누우니 서다인은 어색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기만 했다.이때 남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워서 얘기나 할까?”남자의 목소리는 감미롭고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서다인은 가슴이 두근거린 채로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불편한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무슨 얘기해요?”“이어폰은 뺏어?”“뺏어요.”“피곤해?”“아니요. 평소에 열한 시가 넘어서야 자니까.”남하준이 또 덤덤하게 물었다.“그때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서다인은 주저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기억을 잃은 후로 사실 앞길이 막막했어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몰라 실버타운으로 가서 간병인으로 일했어요. 어느 날, 할머니께서 옛 친구를 만나러 오셨는데 그때 나와 할머니의 첫 만남이었죠. 나를 보더니 손녀처럼 예뻐해 주셨어요. 나도 할머니가 좋았어요. 호흡이 척척 맞으니까 개인 간병인으로 일하게 되었고요.”남하준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는 또 물었다.“할머니 간병인으로 일한 그 3년 동안 우리가 만난 횟수는 손꼽을 만 하잖아. 그리고 거의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왜 당신은 할머니의 말을 쉽게 믿은 거야? 왜 내가 당신이 좋아 결혼까지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서다인은 말문이 막혔다.분수를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결국 남하준은 너무 좋아한 마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지우는 당장 남태준을 찾아가고 싶었다.그러나 어젯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상대할 의향이 있을까?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어젯밤 자신이 남태준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 그는 아직도 답장하지 않았다.어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매몰차게 말했는데 지금 다시 메시지를 보내 다시 만나자고 하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이지는 않을까?이렇게 하면 그녀가 남태준을 대하는 감정이 제멋대로이고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처럼 오만하게 보이지 않을까?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고민하다 보니 생각이 많고 마음이 착잡했다.전화도 문자도 모두 성의 없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이 시간에 남태준은 이미 퇴근했을 것이다.저녁노을이 지우에게 쏟아지고 그녀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가락을 찾지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스쿠터가 무성한 오동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봄바람이 불어와 공기마저 향긋했다.지우는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30분 후. 경찰서 입구에 도착한 지우는 브레이크를 밟고 전원을 끄고 대문 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안에서 계속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유독 남태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지우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차를 잠그고 가방을 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좀 긴장되었다.들어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전부 업무를 보고 사건을 처리하는 경찰들이었다.그때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면서 물었다.“어떻게 오셨죠?”지우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긴장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마약 단속팀 남 대장님 계시나요?”남자는 사무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안 계세요.”“그럼 어디로 가셨죠?”지우가 또 묻자 경찰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주시했다.“누구시죠? 무슨 일로 남 대장님을 찾으시죠?”지우는 상대방의 경계심과 엄숙함이 느껴졌고 뭔가 사납고 엄한 압박감을 주는
“난...”진효연은 당황하고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이게 전부 너를 위해서야.”지우는 눈물을 닦고 울며 말했다.“전 세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거의 매일 사람이 죽어요.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살해당하거나.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내가 만약 운전기사와 결혼하면 남편이 운전하다가 차에 치여 죽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요?”“내가 작은 가게 사장에게 시집가면 그 사람이 술을 많이 마셔 죽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요?”“만약 농부에게 시집가면 가난해서 죽겠네요?”“뉴스 보면 가문이 몰살되는 참사가 얼마나 많아요?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고 마약 형사만 해당하는 거 아니라고요.”“제발 엄마의 그 비참한 운명을 나에게도 돌리지 말라고요!”지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파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진효연은 어찌할 줄 몰라 멍하니 있으며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고 마음도 어지러워졌다.한바탕 눈물을 흘린 지우는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였다.“엄마 첫사랑인 그 약혼자가 뜻밖에 세상을 떠나 결혼하지 못한 건 엄마 평생의 한이겠죠. 이제 나도 똑같아요. 다른 점은 내 첫사랑은 죽지 않았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 감정은 엄마 때문에 이미 억눌려 죽었어요.”진효연은 얼굴이 창백하여 넋을 잃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지우는 휴대전화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은 적막했다.진효연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넋을 잃은 채로 소파에 멍하니 있었고 초점을 잃은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그날 밤, 지우도 잠을 설쳤고 진효연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아침.하룻밤이 지나자 지우는 어제저녁 자신이 한 말이 너무 심해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거나 진효연은 지우를 사랑하고 걱정하기 때문이었다.지우는 미안한 마음으로 진효연의 방문을 두드렸다.“엄마. 일어났어요?”방안에 인기척이 없자 지우는 또 몇 번 두드리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진효연은 늘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늘 삶에 대
지우가 난동을 부릴수록 남자는 더욱 괴로웠다.남자의 키스는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가며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부드럽게 닿았다.지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다가 눈을 감은 채 몸을 떨며 울먹였다.“태준 씨. 이러지 말아요.”“사랑해 지우야.”그녀의 귓불에 키스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빠져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지우는 그의 손길이 스쳐 지나고 그가 키스한 피부에 마치 전류가 흘러 사지를 관통하고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두렵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갈망하고 있었다.어느새 몸부림을 포기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누군가를 사랑하기 전, 그녀는 절대 혼전 순결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하지만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이성보다 신체의 갈망이 훨씬 컸다.지우는 온몸에 힘을 빼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한 촉감에 입에서 수줍은 신음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꾹 참았다.그녀가 남태준이 주는 정욕의 설렘을 즐기고 있을 때 남자가 갑자기 멈추었다.그는 지우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숨을 몰아쉬더니 그녀의 옷 밑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어 그녀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주었다.“미안해.”남태준은 욕망을 고통스럽게 억누르고 죄책감 가득한 채 속삭였다.“미안해. 미안해.”그는 하마터면 통제력을 잃을 뻔했다.이성이 돌아온 지금, 남태준은 자신의 뺨을 몇 대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른 거야?’“난 정말 개자식이야. 미안해.”남태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그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지우는 가슴이 출렁이고 호흡이 어지럽고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욕망을 추슬렀다.좋아하는 남자가 키스하면서 쓰다듬어주면 몸에서 이렇게 격렬한 반응이 일어날 줄이야.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아 강렬한 욕망까지 생겼다.아주
그래서 이 일은 남태준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그의 사명이고 명예이고 책임이고 그의 전부일 것이다.지우는 남태준을 사랑하고 그의 일과 삶도 존중했다.남태준은 그녀의 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내가 그 비실비실한 이혼남보다도 못하다는 거야?”지우는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겨 방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팔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녀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고 턱은 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바라봤다.남태준은 그녀 눈 밑의 눈물을 바라보며 자신도 눈시울을 붉혔고 그의 슬픈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다리도 못 쓰고 앞도 못 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네가 돈 때문에 나를 보살피기는 했지만 나 그때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그때를 생각하면 지우 눈 밑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그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남태준은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그가 언제나 지금처럼 건강하기를 바랐다.“그때 너는 내가 눈이 안 보인다고 멋대로 행동했어.”남태준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 밑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네가 나를 도와 샤워하고 밥 먹여주고 우리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었지. 넌 청개구리처럼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 했어.”“네가 아무리 완자 친구라지만 내 말 한마디면 엄마는 널 해고할 수 있었어. 하지만 난 널 떠나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어. 진흙탕이 된 내 마음을 넌 작은 작대기로 계속 저어주어 더 이상 평온하지 않고 매일 파도가 일렁였어.”“그러던 어느 날, 네가 갑자기 떠났어.”남태준은 눈물이 흘러넘쳐 흐느껴 울었다.“난 또다시 그 암흑 같은 삶으로 돌아갔어. 햇볕도 없고 활기도 없는 그 어두운 세계로.”“지우야. 네가 돈을 원한다면 난 만족시켜 줄 수 있어. 네가 사랑을 원한다면 난 온 마음을 다해 널 사랑할 거야. 네가 안정감을 원한다면 나 일선에서 떠나 사무직으로 물러날 수 있어.”남태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애틋했고 점점 더 간절해졌다.“제발 나 떠나지 말아줘.
지우는 남태준에 의해 강제로 집에 끌려들어 갔다.문이 잠기는 순간 지우는 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화가 난 남자가 어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지 몰라 계속 몸부림치며 떠나려고 했지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힘센 손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남태준에 의해 거실로 끌려가 그대로 소파에 던져졌다.그녀는 긴장해서 움츠러들었고 방황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태준을 쳐다보았다. 그가 미칠 듯이 달려들 것 같아 속으로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이성적으로 그녀 곁에 앉아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매우 괴로워 보였다.밝은 거실은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창밖은 캄캄했다.집안의 분위기가 점점 굳어졌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지우는 남태준이 화가 나서 그녀와 단둘이 지낼 이유를 찾는 것이지 그녀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태준 씨, 나 놔주겠다고 했잖아요?”남태준은 얼굴을 가리고 깊게 숨을 내쉬더니 온몸에 냉기가 번져 형언할 수 없는 감상과 슬픔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그는 소파 등에 기대어 옆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눈가에 쓸쓸한 감정이 가득했다.“지우야. 내가 헤어지겠다고 했지 널 포기한 적은 없어. 난 계속 노력하고 있었어.네가 나 좋아하도록, 네 가족이 나 좋아하도록.”지우는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며 말했다.“진짜 그럴 필요 없어요.”“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갈등도 다툼도 제삼자도 없었어. 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거 혹시 엄마 때문이야?”지우는 침묵했고 손가락을 꽉 쥐고 손톱을 뜯었다.“대답해줘.”남태준은 소파를 따라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다가갔다가 꾹 참았다.그에게는 이제 지우의 손을 잡을 명분이 없었다.매일같이 그리움에 시달리고, 미칠 듯이 그녀를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도 이젠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그저 모퉁이에 몰래 서서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헤어지는 날은 녹슨 무딘 칼처럼,
“맞아. 하지만 이미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 미안해.”진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말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만약 네 마음에 있는 그 남자에게 기회가 없다면 차라리 그 기회를 나에게 주는 건 어때? 어쩌면 우리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잖아.”지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진준호 역시 멈추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나 아주 아쉬워. 널 오랫동안 짝사랑했지만 졸업 시즌에 네게 고백하지 못한 거 계속 후회했어. 만약 지금 그 기회가 왔다면 놓치고 싶지 않아.”지우는 용감한 사람을 탄복했다“준호야, 나...”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의 그림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지우가 반응도 하기 전에 강력한 힘의 큰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잡고 힘껏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자신의 따뜻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그녀가 경악하며 고개를 들자 남태준의 준수한 얼굴을 보고는 가슴이 떨렸다.지우가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진준호는 다급하게 물었다.“당신 뭐야?”남태준의 거대한 체구에 진준호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당장 지우 놔줘!”남태준은 싸늘한 눈빛에 노기를 띤 채 말했다.“미안하지만 내 여자친구에게 할 말이 있어 먼저 실례할게요.”여자친구?지우는 멍해졌고 진준호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남태준이 지우를 끌고 떠나자 진준호가 급히 쫓아가 두 사람 앞을 막으며 물었다.“지우야. 너 솔로라며?”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가로젓고는 혼란스럽게 말했다.“나 솔로 맞아. 이 사람은 전 남자친구야.”그녀의 말에 남태준의 안색이 더욱 새파래졌다.“나 이 사람이랑 얘기 좀 할 테니까 너 먼저 가봐.”지우는 웃으며 진준호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진준호도 더 이상 지우를 빼앗을 이유가 없어 지우가 끌려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노려봤다.남태준은 지우를 차에 태워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고는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량이 넓
지우는 입술을 깨물고 서러워하며 되물었다.“그럼 네가 다시는 목숨으로 나 협박하지 말라고 엄마 설득할 수 있어?”“아니 난 못해. 엄마는 너무 독해. 매번 빈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이시잖아.”지성은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고 지우도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사랑을 위해 어머니의 목숨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남태준을 잊고 가슴 아픈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칠 후 지성이 퇴원하자 지우의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왔다.매일 글쓰기에 바쁘고 어머니의 매점도 봐주고 가끔 밥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가 쇼핑을 하며 기분 전환을 했다.이날 송수빈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자고 했다.늘 외지에서 일했던 지우는 동창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올해 그녀가 마침 고향에 있으니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창들과 모이려고 했다.한 식당의 룸.큼지막한 원형 테이블에는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가득했는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는 신혼이거나 미혼인 사람도 있었다.지우와 송수빈은 미혼이라 싱글남 친구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두 사람의 외모도 출중하고 몸매도 좋았다.모두들 웃고 떠들며 건배하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준호가 지우를 오랫동안 짝사랑했잖아. 준호 녀석 지금 이혼했는데 설마 아직 지우를 못 잊은 거 아니야?”음식을 먹던 지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경악하며 말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반장이던 그는 지금 한 기업의 관리자였다.그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 지우를 향해 물었다.“지우야. 너 아직 싱글이라며. 아직 준호에게 기회가 있는 거냐?”지우는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 진준호를 바라보았다.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진준호는 어색한 듯 지우를 바라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이공계 IT 남으로 수입도 높고 외모도 잘생겼고 성격도 온순했다.같은 마을 사람이라 부모끼리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지우는 난처해하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 지성은 말을 할 수 있었고 사유도 또렷했다.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지성의 몸 상태를 물었고 지성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는 조사를 시작했다.지성은 남태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누나의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고 더욱 존경했다.지성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누나가 육건우를 고소했기 때문에 제 빚은 소송이 끝나기 전까지 갚지 않아도 되거든요.”“하지만 육건우의 부하들이 저를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날 저를 뒷산으로 데려가 폭행했고 저는 그들을 따돌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어요. 철조망이 가로막힌 곳까지 도망쳤는데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어서 아주 높은 나무에 올라가 철조망을 넘어 안에 있는 나무로 뛰어올랐어요.”“들어가고 나서 계속 출구를 찾았는데 못 찾았고 마스티프 몇 마리가 저를 쫓아왔어요.”“그래서 큰 스튜디오 몇 군데로 달려갔어요. 근데 안에 촬영 장비는 없고 오히려 양귀비꽃과 비슷한 식물이 많이 심겨 있더라고요.”“저는 깜짝 놀라 얼른 숨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요.”“그러다 어떤 창고에 숨었는데 그 안에서 마약을 정제하는 사람들이 저를 발견하고는 저를 죽일 듯이 때렸고 제 심장에 칼까지 꽂고 산기슭에 저를 던졌어요.”지성은 심장의 상처를 만졌다. 의사가 말하길 지성의 심장 위치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조금 빗나가 목숨을 부지했다고 했다.불행 중 다행이었다.남태준과 오신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표정이 굳어졌다.산꼭대기에 촬영기지를 설립하려면 소방 안전 검사와 경찰의 순찰도 필요하다.그런데도 안에서 미친 듯이 독을 심고 마약을 정제할 수 있다면 분명 백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그 백은 결코 직위가 낮지 않을 것이다.자백을 마친 지성이 긴장하며 물었다.“남 대장님, 만약 제가 죽지 않은 걸 알면 또 사람을 보내 저를 죽이러 올까요?”“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남태준은 온화한 태도로 진지하게 말했다.“지성 씨 옆에 24시간 경호를 붙여 신변을 보호할게요.”“감사합니다.”지성이 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