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의 말을 들은 서다인은 다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되물었다.“내가 지완 아니라면요? 나도 그저 표절을 좋아하는 아마추어면 어떡하려고요?”남하준은 DNA 검사 결과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취미가 참 많나 봐?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 바꿔치기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대단하고, 또 책 읽는 것을 좋아해 한 번 본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지. 그뿐만 아니라 화학 물질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어려운 외국어조차 손쉽게 읽어내는데 정말 대단한걸?”서다인은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그래서 내가 아직도 블랙 섀도우에서 보낸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남하준은 침묵을 유지했다.그는 워낙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서다인의 신분은 그녀가 선보인 능력, 그리고 품격과 정반대였다.서다인은 지적이고 일거수일투족이 품위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거나, 아니면 후천적으로 강도 높은 특별 훈련을 받은 게 아니라면 이런 능력과 품격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서다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제안했다.“이러는 건 어때요? 내 몸에 도청기를 달고 나를 블랙 섀도우의 아지트에 보내요. 그러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어요?”‘뭐야? 이 순진한 생각은.’남하준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허리 숙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블랙 섀도우가 어떤 조직인지 알아? 훈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어. 만약 당신이 정말 블랙 섀도우 사람이라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이상 돌아가도 죽는 것뿐이야. 당신이 블랙 섀도우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빨리 죽을 것이고.”분노가 치밀어 오른 서다인은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럼 날 가둬서 죽여요. 잘못 죽일지언정 의심이 가는 사람을 놓아주면 안 되잖아요.”남하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이가 없어 미간을 구겼지만 그의 말투는 한껏 부드러워졌다.“왜 맨날 삐지기만 해?”평소에 과묵하기만 남하준이 부드러운 말투로 이
남하준은 흠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졌다.서다인은 식은땀으로 몸이 흠뻑 젖은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가여운 마음이 들어서인지 남하준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서다인의 귀를 막아주었다.이어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겁에 질린 듯한 가여운 울음소리는 품에 안긴 여인에게서 난 것이었다.마치 상처를 입은 작은 고양이가 낸 불쌍한 목소리처럼 들려왔다.그는 서다인이 진심으로 천둥과 번개와 같은 날씨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남하준은 성인 여자에게 허리를 꼭 안긴 건 처음이었다.그녀의 몸은 풍만하고 부드러웠는데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나기도 했다.남하준은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지금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 자괴감이 들었다.서다인이 우는 모습은 그도 처음이었다.그녀의 울음소리는 어린 시절 하린의 울음소리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가 10년 동안 묵혀뒀던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백하린은 돌아온 1년 동안 자주 애교를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렸었는데 남하준은 달래면서도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이젠 나이가 들기도 했고 차분해졌기 때문에 더는 백하린에게 설렘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서다인에게서 다시 어린 시절의 풋풋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방 안은 당장 눈앞의 사람이 누군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깜깜했다.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전혀 멈출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방 안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서다인과 남하준은 서로의 미세한 숨소리, 그리고 심장 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서다인은 천천히 진정을 되찾은 후 남자의 탄탄한 가슴팍에 기대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자기가 선을 넘었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내가 저 사람 허리를 꽉 쥐고 품에 기댔단 말이야? 내가 무안해질까 봐 밀어내지 않고 귀도 막아준 거겠지?’서다인은 그의 허리에서 천천
남하준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옷자락이 그녀의 손에 쥐어진 느낌이 들자 그는 돌아서서 어둠 속의 서다인을 바라봤다.이때 밖에서 번개가 스쳐 지나가 한순간에 집안을 환히 비췄다.서다인은 눈물을 글썽인 채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척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그저 한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나른해지더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그는 서다인의 이어폰을 들고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안 가. 그냥 회로를 점검하고 올게.”남자의 향기가 서다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숨소리가 볼에 닿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에 서다인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남자의 옷자락을 놓았다.남하준은 잔뜩 겁을 먹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무 겁먹지 마. 나 바로 돌아올게.”그 말을 남긴 뒤 남하준은 집을 나섰다.그의 이 무심한 행동이 서다인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을 남겼는지는 전혀 알지 모른 채 말이다.서다인은 바보같이 그의 손길이 닿은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늦춰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설렘이 지나가자 서다인은 곧이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이 남자를 점점 더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어떡하지? 나 이혼하기 싫어. 저 사람에게 분명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더 깊어지네.’이때 문이 다시 열리면서 통화하는 남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꽃은 기숙사에 가져가서 아내나 여자친구가 있는 놈에게 팔아. 꽃을 사면 내일 하루 휴가 준다고 해. 나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 오늘 밤 돌아가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남하준은 전화를 끊은 후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아파트 전체가 정전되었어. 아무래도 번개 때문에 고장이 난 것 같아. 내일 날이 개면 수리하는 사람이 올 거야.”서다인은 그가 들어설 때부터 이미 이어폰을 뺏기
남하준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머쓱한 서다인은 다급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지난번처럼 하준 씨 몸에 엎드려 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 신경이 쓰인다면 손목에 밧줄을 묶고 잘게요.”서다인이 당황하며 더 설명하려던 그때, 우람한 몸집의 남하준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서다인은 당황한 나머지 침대에 오르더니 몸을 움츠려 다른 쪽으로 옮겼다.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발을 벗더니 바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이다.서다인은 불편한지 계속 경직된 채 앉아 있었다.분명 남하준에게 남아서 자고 가라는 제의를 한 건 서다인인데 막상 그가 침대에 누우니 서다인은 어색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기만 했다.이때 남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워서 얘기나 할까?”남자의 목소리는 감미롭고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서다인은 가슴이 두근거린 채로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불편한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무슨 얘기해요?”“이어폰은 뺏어?”“뺏어요.”“피곤해?”“아니요. 평소에 열한 시가 넘어서야 자니까.”남하준이 또 덤덤하게 물었다.“그때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서다인은 주저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기억을 잃은 후로 사실 앞길이 막막했어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몰라 실버타운으로 가서 간병인으로 일했어요. 어느 날, 할머니께서 옛 친구를 만나러 오셨는데 그때 나와 할머니의 첫 만남이었죠. 나를 보더니 손녀처럼 예뻐해 주셨어요. 나도 할머니가 좋았어요. 호흡이 척척 맞으니까 개인 간병인으로 일하게 되었고요.”남하준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는 또 물었다.“할머니 간병인으로 일한 그 3년 동안 우리가 만난 횟수는 손꼽을 만 하잖아. 그리고 거의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왜 당신은 할머니의 말을 쉽게 믿은 거야? 왜 내가 당신이 좋아 결혼까지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서다인은 말문이 막혔다.분수를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결국 남하준은 너무 좋아한 마
남하준은 자세를 바꿔 옆으로 눕더니 서다인을 마주했다.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의 목소리는 라디오 DJ처럼 감미로웠고 숨결마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었다.“할머니의 소원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당신과 결혼했어. 당신한테는 무책임한 행동이지.”자기반성을 할 줄 알고 책임감 있을 뿐만 아니라 여자를 존중해주기까지 하는 남자는 여간 드문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재력이든 권력이든 꿀리는 게 없는 남자였다.서다인도 홀린 듯이 옆으로 누워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얼굴을 손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하준 씨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엄청 많죠?”“몰라. 나한테 고백한 사람이 없었어.”남하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당신은, 당신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네.”서다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 한 번 더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남하준은 항상 차가운 얼굴을 하고 웃지도 않아 카리스마가 넘쳤다. 한 걸음 다가서기만 해도 떨려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데 누가 감히 고백하겠는가?남하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또 물었다.“서로 좋아하는 거야?”“아니요. 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이번 생은 절대 이뤄지지 않을 사랑이에요.”남하준은 바로 결론을 내렸다.“그래서 나와 결혼한 거야?”서다인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고 분위기도 한결 편안해졌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죠?”“결혼은 장난이 아니야. 이참에 한 번 잘해보는 건 어때?”남하준이 무심하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서다인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피는 끓어오르고 가슴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그녀는 긴장한 마음에 목소리까지 떨렸다.“뭐... 뭐라고요?”남하준은 여전히 덤덤했다.“할머니는 우리가 이혼하길 원하지 않잖아. 조금 더 지내보고 안 맞으면 그때 이혼하자.”“당신... 내 신분과 과거는 신경 안 쓰여요?”서다인은 흥분한 마음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
서다인은 남하준이 어젯밤 누웠던 자리에 눕고는 눈을 감고 어젯밤 그와 함께했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점심쯤.서다인이 라면을 먹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젓가락을 놓고 급하게 달려가 문을 열었더니 류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옆에는 꽃이 담긴 유리병도 몇 개 있었다.류청은 돈을 건네면서 공손하게 말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 이건 꽃을 판 돈이에요.”서다인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잔돈을 바라보더니 물었다.“어젯밤 계속 소나기가 내렸잖아요. 어떻게 꽃을 다 판 거예요?”“도련님이 기숙사로 가서 팔라고 하셨어요.”어젯밤 전화를 하던 남하준의 모습을 떠올린 서다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기쁜 마음으로 류청이 건넨 돈을 받으며 서다인이 말했다.“고마워요.”류청이 또 말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댁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합니다.”그 말을 들은 서다인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백하린만 떠올리면 그녀는 더는 남원에 발을 들여놓고도 싶지 않았다.잠깐의 고민을 마친 서다인이 물었다.“하준 씨가 나를 남원에 보내려 한다는 거예요?”“네, 그렇긴 합니다만 도련님은 사모님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댁으로 돌아가기 싫으시다면 더 큰 집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요.”서다인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집으로 돌아가긴 할 건데 남원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류청이 흠칫했다.“그럼 어느 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서다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본가요.”남하준이 한걸음 다가와 줬으니 그녀도 남하준에게 다가갈 노력을 할 필요가 있었다.서다인은 본가에 들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본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로 결심했다.그녀는 짐을 간단하게 정리한 후 집을 빼고 류청 따라 본가로 돌아갔다.한바탕 치열한 전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하준을 위해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서다인이 본가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사람들이 예전처럼 그녀를 깔보고 업신여기고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평소에 그녀를 가장 무시하던 맏동서 유가영은 그녀를 보자마자 반
다음 날 아침.초봄의 이른 아침이라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풀잎과 꽃잎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만 봐도 날씨가 아직 쌀쌀하다는 걸 알 수 있다.서다인은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 겉옷을 걸치고는 방을 나섰다.이때 2층의 도우미들은 크고 작은 짐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1층 거실에 허윤미와 남창민은 잠옷을 입은 채 셋째네 부부를 타이르고 있었다.“영준아, 왜 갑자기 떠나겠다는 거야? 엄마 아빠가 식구들 북적북적한 걸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냥 여기서 살아.”서다인은 난간에 기대어 내려봤다. 대충 어떤 일인지 짐작은 갔다.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유가영도 곧바로 거실에 도착했다.유가영은 스스럼없이 말했다.“영준 도련님, 동서가 어제 들어왔는데 벌써 이사를 한다니. 싫어하는 거 너무 티가 나요. 그래도 같은 식구들끼리 그렇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그 말을 들은 남영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영준의 아내인 최서윤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형님이야 아량이 넓어서 어떤 사람이든 같이 살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우리 집안은 다르다고요. 아버지는 대학교 교수이시고, 엄마는 음대 음악가세요. 저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 몸을 파는 여자와 한집에 살 수 없어요.”최서윤이 말을 이어 나갔다.“영준 씨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사장이고, 저도 나가면 사모님이라고 불려요. 우리 두 사람은 몸을 파는 여자와 절대 살 수 없어요. 너무 답답하거든요.”최서윤이 솔직하게 말하고는 하이힐을 또각또각 밟고 본가 대문을 나섰다.남영준은 귀가 얇은 사람이라 아내의 말을 따랐다.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부랴부랴 최서윤을 따라갔다.서다인의 얼굴색이 한껏 어두워졌다. 그녀는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몸을 파는 여자와 같이 못 살겠다고?그 말은 비수처럼 서다인의 가슴에 꽂혔다.허윤미는 남영준 부부가 집을 떠난 걸 보더니 고개 숙여 눈물을 훔쳤다.“막내 하준이는 일이 바빠 1년 내내 몇 번 돌아오지 않지
서다인은 그렇게 설득당했다.유가영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서다인은 화려하게 꾸며져 파티에 참석했다. 현장에 도착하고서야 이 파티는 일반적인 행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이 파티는 럭셔리 크루즈 위에서 진행되는 세계적인 희귀 명품 마켓이었다.그중에는 많은 불법의 골동품과 희귀도 포함되었다.서다인은 할머니 생신 연회에서 그녀가 그린 그림도 판매되고 있다는 걸 발견해 그림을 가리키며 유가영에게 따져 물었다.“형님, 이게 왜 여기 있죠?”유가영은 눈을 반짝이더니 주위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동서, 봐봐. 오늘 이 파티에 온 사람들은 모두 상류층 재벌가나 사모님들이야. 몇십억씩 쓰는 건 기본이라고. 우리가 이 그림만 팔면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 수 있어.”서다인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이 그림이 왜 여기 있는지 물었어요.”유가영은 멋쩍게 웃으면서 소리 낮춰 말했다.“할머님 생신 선물로 많은 걸 받으셨을 거야. 이거 하나 없어도 뭐 어때? 전에 할머님도 하린 씨가 선물한 짝퉁을 받았잖아.”주먹을 꼭 쥔 서다인은 겨우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래서 그 그림을 훔친 거예요?”유가영은 다급하게 손을 저으며 부인했다.“나 아니야. 내가 무슨 배짱으로 훔치겠어? 남편이 가져온 거지.”서다인은 분노가 끓어올랐다.‘친구가 진행하는 파티는 무슨, 부자들이 애장품과 사치품을 되팔고 사는 마켓일 뿐이잖아?’서다인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유가영은 비위를 맞춰주는 듯이 소곤소곤 말했다.“이러는 건 어때? 주최 측에서 10% 수수료를 받을 거니까 나머지는 6대 4로 나눠.”서다인은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7대3, 더는 양보 못 해.”서다인이 진지한 얼굴로 논리정연하게 말했다.“형님, 제가 만약 화가 지완이라면 이 그림으로 얻은 수익은 모두 기부를 해야 합니다. 제가 화가 지완이 아니라면 이 그림은 가짜라고요, 이건 사기예요.”유가영은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찌푸렸다.“돈이 없는 주제에 왜 고상한 척이야? 기부를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
저녁을 먹고 나니 8시가 넘었고 남서연은 과일도 조금 먹었다.이렇게 큰 집에 그녀와 백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긴장되고 어색했다.그녀는 시간을 보고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저 갈게요.”백건은 부랴부랴 일어나 다급하게 남서연의 손목을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남서연이 그를 뒤돌아보니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조금만 더 앉아 있어. 조금만. 아직 9시도 안 됐으니 조급해하지 마.”남서연은 거절하기 미안하고 또 좋아하는 남자가 붙잡으니 다소 마음이 약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래요.”백건은 그녀가 심심할까 봐 물었다.“TV 볼래? 아니면 영화?”남서연은 2초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애니메이션 영화 봐도 돼요?”백건은 2초간 어리둥절하더니 말했다.“그래. 어떤 애니메이션 보고 싶어?”남서연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너무 귀엽고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도 함께 볼 수 있었다.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남서연은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무거나요.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 아무거나 골라봐요.”백건은 그런 것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그는 평소에도 TV와 영화를 보지 않고 애니메이션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그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자신이 잘 못 골라서 남서연이 지루해할까 봐 휴대전화를 꺼내 하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당장 재미있는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 보내줘. 꼭 재밌어야 해.”잠시 후 하현우가 영화 링크를 그의 휴대전화로 보내주며 꼭 이어폰을 끼고 보라고 일러줬다.백건은 별생각 없이 거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휴대전화의 링크를 TV에 띄웠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영화가 시작되면서 남서연은 서서히 몰입했다.영화의 질감은 아름다운데 여주인공의 몸매가 너무 화끈하고 옷차림도 살짝 드러났다.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남녀주인공을 둘러싼 짝
사장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했다.“감사합니다. 곧 보내드릴게요.”백건은 남서연을 끌고 나가 한적한 시장 거리에 서서 화가 난 채로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남서연은 어렴풋이 백건의 화를 느끼며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화를 꾹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남서연, 마지막으로 알려두는데 난 남우영의 삼촌이지 네 삼촌이 아니야. 난 네 부모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알아들어?”남서연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거듭 사과했다.“미안해요.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요.”백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고 남서연도 그를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치자 눈빛 사이에 조금 다른 감정이 흘렀다.남서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오빠, 진짜 승아 누나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아니야.”남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또 물었다.“그럼 여자친구는 있어요?”“없어.”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자신이 웃지 못하도록 입술을 오므리고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아!”마음을 진정한 백건이 말했다.“가자. 화분이 배달되면 어떻게 놓을지 네가 봐줘.”남서연은 바짝 긴장했다.“오빠 집에까지 가자고요?”백건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그녀가 싫어하는 줄 알고 급히 설명했다.“그냥 화분 놓을 위치만 봐줘. 끝나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네.”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운 미소를 숨겼다.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에 남서연은 그에게 그때 무슨 마음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너무 묻고 싶었다.하지만 너무 어색해 결국 묻지 못했다.남자와 여자는 달랐으니 말이다.어떤 남자들은 사랑을 떠나 그저 외롭고 욕망이 끓어오르면 아무 여자나 찾아 생리적 수요를 해결하면 되었으니.산 중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그들이 막 집에 도착했을 때, 화분을 운반하는 차도 도착했고 일꾼들은 화분을 운반하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배달했다.남서연은 화분의 위치
“오빠. 우리 둘뿐이에요?”“응.”“그래요.”남서연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문을 닫은 백건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떠났다.석양이 서쪽으로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소 답답하고 억압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졌다.남서연은 그 정적을 깨려고 화제를 찾으려 했지만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그때 백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영이는 네가 나와 꽃 사러 가는 거 알아?”“몰라요. 다혜랑 쇼핑 간다고 말했어요.”백건의 안색이 굳어지며 마음이 좀 언짢았다.꽃을 사러 시장에 가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왜 그의 존재를 숨겼을까? 그와 쇼핑하러 가는 것도 가족을 속여야 하는 일일까?새가 지저귀고 꽃이 향기로운 꽃 시장에 간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모두 처음 와서 이 시장이 6시부터 문을 닫는 것을 몰랐다.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두세 군데 가게에 그래도 녹색 식물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화분 필요하세요?”마감 정리를 하던 사장이 반갑게 인사했다.남서연은 백건과 나란히 가게로 걸어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백건은 남서연의 곁에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뭐가 맘에 들어?”남서연은 그제야 모든 녹색 식물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대나무 같은 녹색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예쁘네요.”그러자 백건이 사장에게 말했다.“이 친구가 좋아하는 거 다 포장해 주세요.”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많은 희한한 녹색 식물이 정교하고 예쁘게 생겼다. 처음 본 남서연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것도 예쁘네요.”“이건 무슨 꽃이에요? 실내에서 키울 수 있어요?”“태양이 조금 필요한 베란다에 심을 수 있어요.”“그것도 사죠.”백건이 말했다.남서연은 구석에 있는 이상한 식물을 보고 얼른 백건의 팔을 잡아끌었다.“오빠. 저것 좀
남서연은 심장이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잡은 채 백건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으며 매 글자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지금 나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건가? 가야 하나?’남서연은 고민하다가 운전석의 남우영을 돌아보고 떠보듯 말했다.“오빠, 내일 퇴근 후에는 나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왜?”“그게...”야근한다고 하면 남우영이 곧바로 조사해서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테니 거짓말을 지어냈다.“친구랑 쇼핑하려고요.”“어느 친구? 어디서 쇼핑하는데?”남우영이 묻자 남서연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회사 동료 다혜랑요. 회사 근처에서 쇼핑할 거예요.”남우영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그래. 그럼 조심하고 일찍 집에 돌아와.”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남우영에게 기대어 애교스럽게 웃었다.“고마워요 오빠.”남우영은 어리둥절했다.“나한테 왜 고마워해? 재미있게 놀아.”이어 주머니에서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남서연에게 건넸다.“마음껏 사.”“괜찮아요. 나 돈 있어요. 충분해요.”남우영은 웃으며 카드를 남서연의 손에 쥐여주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넣어둬. 오빠 돈 써. 네 돈은 모아서 부자 돼야지.”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빙그레 웃었다.“고마워요.”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아직 백건에게 답장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채팅창에 입력 중이라고 떴는데 갑자기 취소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입력 중이라고 떴다.한참이나 메시지를 받지 못하자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을 했다.서재에 있는 백건은 휴대폰을 보고 또 보았다. 책상 위에 놓았다가 또 들고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그녀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왜 답장을 안 하지? 나와 함께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뚜뚜.백건은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고 열어보았다.[좋아요.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퇴근 후에 시간 있어요.]백건은 미간을 구부리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바로 답장했다.[그
화제가 끝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회사에서 힘든 점은 없어?”그는 애써 화제를 찾으며 둘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썼다.남서연은 갑자기 감원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물었다.“회사에서 감원해요?”남서연의 시선이 마침내 그에게 향하자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넌 제외대상이니까 걱정 마.”“여다혜라고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직원도 안 자르면 안 돼요?”“여다혜?”백건이 진지하게 묻자 남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이름 기억했어.”“고마워요.”말을 마친 남서연은 남자의 눈빛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서둘러 시선을 TV에 옮겼다.“서연아...”백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저번에 일은 우리...”그때 남우영이 걸어 나오자 백건의 소리가 뚝 그쳤다.남서연은 마음이 켕기고 또 긴장해서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었다.“지나간 일은 다시 꺼내지 말아요. 이미 지나갔어요.”그녀는 남우영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지만 백건의 귀에는 아주 차갑고 무정하게 들렸다.이제 보니 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여자아이가 몰래 금단의 열매를 시도한 충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다.감정도, 결혼도, 미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남우영은 두 사람 사이에 앉더니 남서연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말했다.“이 영화가 끝나면 우리 돌아가자. 너무 늦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 걱정하셔.’“네.”남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백건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백건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남우영과 남서연이 떠날 때는 직접 문 앞까지 배웅했다.그는 우뚝 서서 남서연이 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서연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곧 차량은 떠났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서 그의 눈앞에서 차량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그의 마음은 텅 비고 너무 허전했다.고개를 돌려 커다란 집을 돌아보니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남씨 가문 사람들은 남서연을 너무 잘 보호했다. 그녀의 출퇴근을
남서연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러자 백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급히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저녁 먹고 가.”남우영은 고민하며 백건을 바라보았다.그가 식탁 쪽을 가리키자 도우미가 마침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날이 저물었어. 지금 집에 돌아가면 너무 배고프잖아. 여기서 먹고 가.”남우영이 남서연을 보자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난 다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었다. 그는 백건의 외로움을 마음속으로 동정하며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럼 오늘은 삼촌 집에서 저녁 먹자.”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남우영과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니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낸 남서연이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걸음을 떼는 순간 백건과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긴장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백건은 은근 고조된 기분을 감추고 차가운 외모에 비해 뜨거운 눈동자로 부드럽게 속삭였다.“요리사에게 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족발이랑 새우 만두 준비하라고 했어.”남서연은 살짝 넋이 나가 한참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이 음식들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분명 방금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았을까?“고마워요.”남서연은 말랑말랑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백건은 그녀가 지나가도록 서둘러 자리를 옮겼고 남서연은 그의 곁을 넘어 식탁으로 향했다.그리고 백건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식탁에 앉고 보니 여섯 가지 요리와 국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남우영은 국자로 국을 떠주며 나무랐다.“삼촌,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모두 서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잖아요.”백건은 말없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남서연은 볼이 약간 뜨거워지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떴다. 남우영이 건넨 국을 받아 조용히 마셨다.남우영은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없이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백건은 식사 예절이 아주 우아하고 규범적이었는데
“이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인사팀장을 찾든지 아니면 바로 삼촌을 찾아가.”남서연은 한바탕 생각에 잠겼다.백건을 찾아가라?이것은 마치 그에게 접근하는 핑계 같았다. 다만 이 핑계가 좀 구차하고 미미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일이 바로 해결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했다.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방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남우영이 열심히 차를 몰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넣고 한 번 눌렀다.“여보세요. 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그를 올려다보며 괜히 마음이 긴장됐다.휴대전화 저쪽에서 백건이 말했다.“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한 번 다녀가.”“하 비서 시켜서 보내세요. 나 지금 서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있어서 못 가요.”“아주 중요한 거야. 다른 사람 손에 넣을 수 없어.”‘아주 중요하다고? 하 비서도 못 믿을 만큼?’남우영은 너무 궁금했다.그때 남서연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집에 늦게 가도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더니 바로 백건에게 말했다.“좋아요. 지금 당장 갈게요.”남우영은 방향을 틀었다.30분 후, 차량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남서연은 낯설고 궁금해서 물었다.“오빠 여긴 어디예요?”“삼촌이 사는 곳.”남서연은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백씨 가문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남우영도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걸으며 말했다.“삼촌 이제 나와서 혼자 살아.”남서연이 그의 귀를 따라가며 경악해서 물었다.“왜요?”“외할머니가 통제욕이 너무 강하고 또 삼촌더러 승아 누나와 결혼하라고 협박하잖아.삼촌이 지금까지는 계속 참으며 살았는데 이제 한계를 건드려서 못 참고 외할머니와 크게 싸우고 혼자 살고 있어.”“외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워요?”남우영은 벨을 누르고 고개를 돌려 답했다.“삼촌은 사생활이 전혀 없었어. 일기장도 외할머니가 떳떳하게 꺼내 보는데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어?”그때
엘리베이터 문은 디자인팀 사무실 층에서 멈추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남우영이 말했다.“서연아 도착했어.”남서연은 바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마주 보며 남우영을 향해 미소 짓고 손짓했지만 부드러운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백건에게 떨어졌다백건은 그윽한 눈빛으로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눈이 서로 마주치자 서로 회피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가 차단되었다.남서연은 가볍게 심장을 가리고 왠지 모를 긴장과 설렘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이제 백건을 당당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남몰래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남의 남자친구를 훔치는 죄책감도 없게 되었다.다만 아직 백건이 솔로인지 100% 확실하지 않았다. 유승아와 사귀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일단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남서연은 즐겁게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싱글벙글 웃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디자인 팀 사무실로 들어섰다.디자인 팀의 업무는 남서연에게 매우 충실하고 성취감이 있었다.그녀는 패션디자인을 매우 좋아해서 한번 일에 몰두하면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겨울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선별하는 중인데 남서연이 제출한 몇몇 제품들이 탈락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여다혜는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싸안고 책상에 머리를 쿡쿡 박았다.초조해하는 여다혜를 본 남서연은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여다혜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슬퍼하며 말했다.“서연아, 내 디자인 모두 떨어졌어.”남서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내 것도 마찬가지야.”“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번 구조조정에서 감원대상이 될 거야.”남서연은 경악했다.“또 감원해?”여다혜는 고개를 들고 슬픈 얼굴,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너 그거 알아? 새로 부임한 대표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원래 대표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