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심 조로 말했다.“서다인, 만약 네가 기억 상실한 것처럼 연기하는 거라면 이 모든 게 다 합리해져.”서다인은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성형해서 할머니께 이쁨받고 하준 씨랑 결혼해서 당신 옆에 잠복해 있다고요? 재물과 신분 따위 바라지도 않고 오직 M국의 더 많은 중요한 기밀을 훔쳐 가기 위해서요? 내가 만약 기억 상실한 척 연기하는 거라면 난 정말 끝내주는 스파이인 것 같아요.”남하준이 답했다.“맞아, 바로 그거야.”서다인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이젠 정체가 곧 드러날 것 같으니 당신과 이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겠죠.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네요.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요.”남하준이 침묵했다.서다인은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이 일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본인조차 이런 일들이 백 퍼센트 존재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블랙 섀도우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남하준에게 접근하는 것도 조직의 계획이지 않았을까?다만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은 거겠지...서다인은 딱히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말을 내뱉는 건 무의미한 노릇이니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떠나갔다.이제 막 두어 걸음 나섰는데 남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다인아, 이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등 돌린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마주하고 힘차게 말을 이었다.“만약 네가 진짜 ‘블랙 섀도우’ 조직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토록 순조롭게 너에 관한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순 없어. 가정배경과 네 과거의 모든 경력들, 성형 전후의 사진 정보, 심지어 네가 블랙 섀도우 조직에 들어가서 특수 훈련을 받은 것까지 손 하나 까
이어진 나날들.서다인은 수원 별장도, 남원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하준이 줬던 카드에서 몇십만 원을 꺼내 작은 빌라를 구하고 생활필수품만 몇 가지 장만했다.그녀는 학력도 없고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기에 화조 시장에 가서 생화를 좀 도매해와 작은 마차에 끌고 야시장에 노점을 차렸다.수입이 비교적 안정적이라 보름도 안 돼서 남하준에게 빌렸던 돈을 다시 카드에 넣어줬다.단순한 일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그녀는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생신 선물을 성심껏 준비해드렸다.할머니가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걸 알고 보름이나 공들여 손수 장청죽을 수놓았다.할머니 생신날 아침 8시.서다인이 꿈속에서 헤맬 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긴 머리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남하준의 비서실장 류청이었다.그는 거대한 선물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사모님.”류청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서다인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류청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서다인은 흠칫 놀라며 선물 상자를 건네받았다.“뭐예요 이게?”류청이 깍듯하게 대답했다.“이브닝드레스와 일부 액세서리입니다. 저녁 5시 정각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사모님.”서다인은 묵직한 선물을 들고 마음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뜻밖의 이벤트에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훈훈해졌다.“하준 씨한테 고맙다고 대신 전해줘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류청은 작별을 고하고 빌라를 나섰다.서다인은 문을 닫고 선물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예쁜 리본 매듭을 풀어 상자를 열어보았다.세련되고 깔끔한 치마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화이트 펀칭 소재의 시스루 롱 드레스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그 옆에는 매우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세트가 놓여 있었는데 럭셔리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서다인의 얼마 남지 않은 기억
백하린은 곧이어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자수를 발견했다.그녀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다인의 솜씨가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장청죽을 너무 생생하고 아름답게 수놓았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백하린은 자수를 가리키며 질투 섞인 어조로 물었다.서다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다가가더니 잔뜩 긴장한 채 선물을 치웠다.그녀가 황급히 다가가긴 했지만 결국 한 걸음 늦었다. 백하린은 어느새 가방에서 빨간색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그녀의 자수에 들이부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망가진 자수를 보며 서다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습은 불가능했고 자수는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백하린, 너 미쳤어?”백하린은 씩 웃기만 할 뿐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머지 반병까지 드레스에 들이부었다.그 순간 서다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이미 다 무너진 자수를 꽉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침대 위에 빨갛게 물든 드레스를 쳐다봤다. 그녀의 가슴에도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보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놓은 작품인데, 또한 남하준에게 받은 첫 선물인데 전부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만약 살인이 불법이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백하린을 아작내 버렸을 것이다.백하린은 빈 병을 그녀의 침대에 내던지고 깨끗한 치맛자락으로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도발의 뜻이 가득 담긴 제스처는 한없이 경솔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한마디 내던졌다.“잘 들어. 오늘 밤엔 할머니 생신 연회에 절대 나오지 마. 네 신분은 그저 오빠네 가족들 체면만 구기는 셈이고 또한...”백하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다인이 불쑥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두 대 날렸다.“찰싹...”청아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주변 공기마저 확 얼어붙었다.백하린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고 충격과 분노에 찬 눈길로 서다인을 째려봤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다잡고 이를 악문 채 울분을 터트렸다.“네가 감히 날 때려?”서다인은 입술을 꼭 깨물고 눈가에 맺힌
저녁 5시.류청이 운전하여 제시간에 서다인의 빌라에 도착했다.그는 서다인을 본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남하준이 선물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오지 않았으니까.서다인은 연하늘색의 수수한 치마를 입고 몸에 두른 유일한 액세서리라곤 포니테일에 묶은 하늘색 리본이 다였다.연한 화장과 청초한 옷차림은 평범한 집안의 어여쁜 딸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사모님, 이건...”류청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실례인 것 같아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기분이 살짝 다운되어 그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안 했다.류청은 두 손이 텅 빈 그녀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돌려서 물었다.“사모님, 뭐 빠트린 것 없으시죠?”서다인이 답했다.“없어요.”류청은 더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줬다.서다인은 그의 차에 앉아서 남씨 일가의 별장으로 향했다.남씨 일가의 별장 밖에는 십여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위엄 있게 대문을 경호하고 있었다.수입차가 속속들이 철문 안으로 들어와 별장 앞의 정원에 주차했다.집사는 밖에서 귀빈들을 모셨고 남씨 일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반겼다.서다인이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밤빛이 드리워졌다. 럭셔리한 별장은 안팎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분위기가 시끌벅적할 따름이었다.은경애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분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거나 친인척들이라 남씨 일가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게 돌아쳤다.아무도 서다인이 언제 왔는지, 와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하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연회장에는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며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홀로 외롭게 구석의 원형 식탁 앞에 앉아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나오시길 잠자코 기다렸다.그녀는 할머니께 직접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연회에 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그러면 이따가 미리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이곳 말이다.“와, 너 진짜 뻔뻔
백하린은 활짝 웃으며 설레는 표정으로 얌전한 척하며 대답했다.“진짜요? 언니들 저한테 공유할 물건이 있대요? 너무 기대돼요.”백하린은 서다인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예의 바르고 착한 척 인사를 건넸다.“언니, 나 그럼 먼저 아줌마랑 가볼게. 이따가 또 만나.”말을 마친 두 사람은 신나게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서다인은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조용한 그녀는 아웃사이더가 된 것처럼 이 시끌벅적한 연회장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도통 어우러지질 못했다.10분 후, 백하린이 또 나타났다.이번엔 큰 형님 유가영과 둘째 형님 진효은도 함께했다.“언니, 이거 가영 언니가 선물한 옥 팔찌인데 어때? 이쁘지?”백하린은 일부러 친한 척하며 서다인에게 물었다.서다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역겨울 따름이었다.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이리로 와서 일부러 친한 척하며 먼저 말을 거는 이유는 유가영과 진효은을 데려와서 그녀를 망신 주기 위함이었다.서다인은 백하린의 옥 팔찌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 없이 그저 예를 갖추고 큰 형님과 둘째 형님에게 인사했다.큰 형님 유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다인을 훑어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야유 조로 말했다.“우리 남씨 집안의 다섯째 사모님께서 대체 왜 이렇게 초라한 거야?”둘째 형님 진효은도 피식 코웃음을 쳤다.“동서는 안 그래도 신분과 가정 형편이 볼품없는데 이 옷차림은 또 뭐야? 여기 시트콤 찍으러 왔어?”백하린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일부러 착한 척하는 말투로 말했다.“언니들, 다인이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제가 볼 땐 꽤 이쁘게 차려입고 온 것 같은데요 뭘.”큰 형님 유가영이 웃으며 말했다.“하린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늘 똑같이 착하게 대하잖아요. 난 못 그래요. 유유상종이라고 하자들에겐 잘해줄 필요가 없어요.”서다인은 표정 변화 없이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바라보며 옅
남하준은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훤칠한 체구에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냈다.서다인은 한없이 매력적인 그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매번 남하준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몰래 심장이 빨리 뛴다. 피가 역류하여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바짝 긴장하니 하려던 말도 생각이 안 났다.남하준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은은하게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다만 그는 서다인의 선택을 존중하기에 왜 자신이 보낸 이브닝드레스를 안 입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할머니 뵀어?”남하준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서다인은 머리만 내저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입을 여는 순간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져 나올까 봐.남하준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남자였다.그녀는 이 남자에게 마음껏 기대고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아무도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럴 자격이 없다.남하준이 짙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할머니도 못 뵀는데 그냥 간다고?”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물음에 묵인했다.남하준은 속절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서다인의 손목을 잡았다.그의 제스처에 화들짝 놀란 서다인은 시선을 올리고 망연자실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남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연회 끝나고 가.”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인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이 또한 애틋한 스킨쉽인지라 서다인은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고 심장이 마구 쿵쾅대며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가 가슴에 파고들었다.남하준이 옆에 있으니 그녀도 좀 전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귀빈을 접대하러 갔다. 사람들이 그녀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남하준은 아주 대범하게 소개했다.“제 아내 서다인이에요.”아주 간단한 한 마디지만 서다인은
서다인은 무척 감동 받고 옆에 있는 이 남자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키가 185밖에 안 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백 미터가 되는 큰 산처럼 거대하고 듬직하여 마음을 설레게 했다.이때 백하린이 그림을 들고 은경애의 앞으로 다가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저 하린이에요. 아직 기억하시죠?”은경애는 순간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상간녀 네년은 내가 죽어서 재가 돼도 못 잊지!’“기억이 잘 안 나는데 누구신지?”은경애가 담담하게 말했다.백하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차피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계시니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니까.백하린은 은경애의 생각 따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직 이 생신 연회에서 포커스를 받고 남하준과 남씨 일가의 모든 사람 앞에서 더 완벽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을 따름이었다.미모나 효심 전부 장내의 모든 이를 압도하게끔 만들고 싶었다.“여기요, 들여오세요.”백하린이 갑자기 높은 소리로 외쳤다.곧이어 몇몇 도우미가 테이블을 몇 개 들여오더니 다 함께 붙여놨다.장내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백하린은 유가영을 불러와 함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서 손에 쥔 그림을 펼쳐서 길이가 무려 2미터나 되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기세가 웅장한 수묵화가 펼쳐지고 모두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백하린은 앞으로 다가가 할머니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으켰다.“할머니께서 Z국 문화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수집하는 취미가 있으시고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수묵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들었거든요.”“제가 엄청 공들여서 당대 유명한 화가 지완 님의 진품 ‘가을’을 경매에서 낙찰해왔어요. 할머니께 생신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쭉 만수무강하세요 할머니.”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라 골동품 매매나 명화 수집 등에 조예가 깊다. 다들 당대 유명 화가 지완의 진품이란 말에 흥미를 느끼고 둘러서서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백하린은 은경애의 속내를 훤히 꿰
서다인은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그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은경애는 오직 백하린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라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모조품이라도 괜찮아. 마음만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너도 더는 진품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진 마.”장내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백하린은 사색이 되어 버럭 화내면서 서다인에게 쏘아붙였다.“네가 뭘 알아? 수묵화를 알기나 해? 수묵화 진품을 본 적은 있냐고? 대체 네가 뭔데 내 그림을 가짜라고 하는 거야?”서다인도 몹시 난감했다. 만약 그녀의 판단이 잘못됐다면 너무 창피한 일이니까.하지만 은경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런 명화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힘들다. 지금 누군가가 가짜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다들 이 그림이 가짜라고 여길 것이다.영수증과 증명 서류를 내놓아도 다들 백하린이 사기를 당한 거라고 믿을 따름이다.명화 수집가 어르신 한 분이 서둘러 돋보기를 끼고 허리를 굽힌 채 머리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백하린은 남하준의 옆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안으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말해봐요. 다인이가 무슨 자격으로 내 그림을 가짜라고 말하는 거죠? 쟤가 뭘 알아요? 개뿔도 모르면서! 감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창피하게 해요? 이건 진짜 너무하네요.”남하준이 차분한 얼굴로 시큰둥하게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나도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막론하고 네가 할머니를 향한 마음만 잘 전달하면 되지 뭐.”백하린은 화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남하준이 이전처럼 자신을 감싸주지 않으니 화가 나서 어리광을 부렸다.“그런 거 아니에요. 다인 언니는 일부러 날 망신 주는 거라고요.”유가영도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확실히 도가 지나치네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심사위원을 할 기세잖아요. 할머니의 신임을 얻고 허튼소리만 내뱉는 게 말이 돼요? 하린 씨 정성만 수포로 만들었어요.”진효은도 말을 이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실력 있으면 진품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남우영은 냉장고에 붙은 메모, 그리고 방에 가지런히 놓인 선물들과 그 위에 올려놓은 그의 블랙카드를 발견했다.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외투를 대충 침대 위에 던진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선물과 카드를 돌려준 걸 보니, 내일은 이혼 서류를 건네겠다는 뜻인가?’그 생각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남우영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다은 씨, 얘기 좀 해요.”방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다은 씨...”잠시 후,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일찍 자려고요.”시간을 보니 아직 자기에는 이른 초저녁이었다.남우영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샤워를 마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밤 9시경, 남우영은 다시 이다은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등록된 지문으로 방문을 열었다.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의 불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희미하게나마 침대의 윤곽만이 보였다.남우영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이다은은 문 열리는 소리에 긴장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어둠 속에서 다가온 남우영이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남우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다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우영은 대답 대신 이불을 들추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남우영 씨!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요?”남우영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내 아내를 안고 자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놓자.”이다은은
이다은은 남우영의 메시지를 읽고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화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남우영, 나쁜 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다 네 맘대로 되는 줄 아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면 재밌어? 정말 너무해...”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충분히 쉰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이다은은 간단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남우영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시 우주항공청으로 향했다. 남은 데이터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연구소로 들어선 그녀는 몇몇 뛰어난 교수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교수들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규 학위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점심시간, 이다은은 교수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밝고 친근한 성격 덕분에 교수들과 금세 가까워졌다.정안 교수는 유난히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이다은 씨,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일곱입니다.”정안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믿기지 않네요. 제 아들이랑 동갑인데, 훨씬 어려 보이세요.”이다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교수님, 자녀가 몇 분 계세요?”정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들 하나요.”“아, 그러시구나...”이때 옆에 있던 교수들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정 교수님, 혹시 이다은 씨를 아드님께 소개하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다은 씨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다른 교수는 웃으며 농담을 이어갔다.“그거 반어법 아닌 거 확실하죠?”이다은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안은 그녀가 불편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무슨 그런 말씀을! 물론 우리 아들이 다른 씨같이 참하고 능력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난다면 저야 기쁘겠죠. 하지만 우리 아들은...”정안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면서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이
남우영의 폭풍 같은 키스에 이다은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강렬한 입맞춤과 단단한 품 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이성을 잃고 그의 리드에 따르고 있었다.숨은 점점 가빠지고 온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고, 그녀는 자신이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두 사람의 침실은 2층에 있었지만, 거실 소파 앞에 다다르자, 남우영은 이다은이 갑작스럽게 이성을 되찾아 자신을 밀어낼까 두려워 서둘러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이다은은 여전히 그의 키스에 취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고 가슴은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이다은의 온몸 곳곳을 부드럽게 만지던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거실의 공기는 뜨겁고도 위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조정했다. 은은한 빛으로 바뀐 거실은 마치 꿈속 같은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다은은 이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자신이 언제 옷을 벗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살이 찢기는 듯한 첫 경험의 고통이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아... 아파요!”이다은은 고개를 돌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간신히 말했다.“남우영 씨, 미쳤어요? 진짜 나쁜 놈이에요... 흑...”“미안해요... 다은 씨... 정말 미안해요.”남우영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지만, 고장난 1톤 트럭처럼 절대 멈추지 않았다.그의 강압적인 태도는 이다은을 더욱 혼란스럽고 무력하게 만들었다.이다은은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고, 더 이상 어떤 존중도 느낄 수 없었다.‘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아
두 사람이 차에 타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이다은은 창가 쪽으로 몸을 틀어 최대한 남우영과 거리를 두며 참았던 화를 터뜨리듯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남우영 씨, 왜 자꾸 억지 부리시는 거예요?”남우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의자에 기대고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억지라니요.”“억지잖아요! 남우영 씨의 차를 얻어 타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잖아요!”“다은 씨, 제가 잘못한 거니까 저를 미워해도 돼요. 저를 원망한다 해도 할말 없고, 심지어 때려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혼은 절대 안 돼요.”이다은은 울분을 담아 쏘아붙였다.“이건 사기 결혼이에요! 이 결혼은 애초에 무효라고요!”“사기 결혼이라... 그 말 누가 믿을까요?”이다은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 당황한 듯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사기 결혼이라니... 보통 그런 건 돈이나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근데... 남우영 같은 부자가 나같이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여자를 속여서 결혼했다? 그걸 누가 믿겠어?’“그건...”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있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무거운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이다은 역시 이혼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이 큰 간격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옭아매게 했다.이다은이 아무리 분수를 알고 결혼을 요구해도 남우영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다은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남우영은 평소처럼 주방으로 향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한때는 대저택에서 손끝 하나 물에 적시지 않던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요리하는 시간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다은은 씻고 나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때, 방에서 나오던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흠칫 놀라며 다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남우영 씨! 제발 이제 저를 위해 요리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거... 받을 자격 없다
이다은은 정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화학 교수라고 하면 보통 나이 많은 대머리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련되고 기품 있는 분도 있구나.’정안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뒤쪽 데이터에서 또 편차가 발생했습니다. 이전에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수정했던 동료에게 다시 맡겼지만, 이번엔 손도 못 대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 데이터를 수정했던 숨은 고수가 있다며 다은 씨를 언급했어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안 교수님, 이덕수 차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받은 돈은 다 돌려드릴게요. 각서도 쓰고 협약서에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데이터를 유출하거나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정안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다은 씨,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희는 당신 씨를 감옥에 보낼 생각 전혀 없어요. 다만 데이터를 직접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주실 수 있을까요?”이다은은 순간 멍하니 정안을 바라보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대와 긴장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덕수마저 옆 의자를 당기며 권했다.“자, 여기 앉으세요.”이다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가운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비록 M국 항공우주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항공우주 데이터 분석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자격이 부족하다며 좌절하는 대신, 독학으로 공부하며 스스로 능력을 키워온 결과였다.시간이 흘러 30분이 지나자, 이다은은 화면에 집중한 채 외쳤다.“찾았어요! 여기 오류가 있네요.”방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문제는 단순히 코드 하나가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수정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쉽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반면 남우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는 이다은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그 이다은 말입니다.”그의 말에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침묵을 깨고 여중권이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겠군요.”여민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를 홍보팀에 들여온 것도 계획된 거였나요? 저를 직접 면접 본 것도 다 계획이었나요?”남우영은 부드럽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여민지 씨가 제 아내를 사칭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제 아내로 위장해 제 아내의 학위를 가로채고, 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옥에 갈 이유가 되니까요.”여민지는 온몸을 떨며 부모를 불안하게 쳐다봤다.여중권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남 대표님, 대화로 해결합시다. 과거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어려운 이씨 가문을 도와줬던 건 대표님도 잘 아실 겁니다.”남우영은 냉소를 띤 채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 딸을 회사에 들인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걸 제대로 정산할 때가 됐군요.”여중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혜원과 여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필사적으로 남우영에게 용서를 빌었다.“남 대표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어떤 방법이든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남우영은 비웃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잠시 후, 경찰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체포되었다.여민지는 울면서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남우영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외면했다.레스토랑을 나서며 남우영은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
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네. 이러다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남씨 가문 며느리가 감옥에 가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겠지?’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막막한 심정으로 끌려갔다.한편, 남우영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레스토랑에서 남우영을 만난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여민지의 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치 딸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남우영은 마주 앉아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전직 공무원에 전직 판사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다은 씨 같은 약자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여민지의 아버지, 여중권이 먼저 입을 열며 공손히 물었다.“남우영 씨는 어디에서 일하고 계십니까?”“에이스타 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여민지의 어머니, 이혜원이 대화를 거들며 말했다.“우리 딸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어요?”“얼마 안 됐습니다.”이혜원이 다시 물었다.“그럼 두 분 관계는 어느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남우영은 태연히 답했다.“오늘이 처음으로 저녁 약속을 한 정도입니다.”여중권과 이혜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중권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첫 만남부터 저희를 초대하신 이유는 뭔지...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어서요.”남우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결혼 이야기라니요. 두 분은 저와 다은 씨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이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민지가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빠, 엄마... 대표님께서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하셔
여민지는 모두의 칭찬과 아부 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남우영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로비를 응시하며 이다은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대부분 직원이 퇴근했지만, 그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안녕하세요.”여민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여민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도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소문이요?”“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더라고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심지어 대표님이 저에게 적극 대시한다고들 해요...”남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여민지는 그가 미소 짓는 걸 보고 신이 난 듯 한 발 더 다가섰다.“대표님, 기회 되면 저녁 식사하면서 조용히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남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좋아요. 부모님도 모시고 나오세요.”여민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뭐라고요?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남우영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갑시다.”여민지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우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건물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다은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이 함께 차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이다은은 뒤척이며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만약 이 사실이 남우영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다음 날 아침, 이다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남우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주어진 일을 받아 들고 묵묵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하는 등 사소한 일을 처리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그녀는 팀장에게서 늘 가벼운 업무만 배정받았다. 학력이 높지 않은 데다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우아한 몸매는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게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하러 나갔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은 그녀처럼 사무실에 남아 빵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이다은은 무심히 빵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어떻게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랑 번개 모임을 가지듯 결혼할 수가 있냐고!’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항공 개발 부서에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일이야.’그녀가 빵을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이다은 씨.”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남자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시락을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점심입니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주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