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5시.류청이 운전하여 제시간에 서다인의 빌라에 도착했다.그는 서다인을 본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남하준이 선물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오지 않았으니까.서다인은 연하늘색의 수수한 치마를 입고 몸에 두른 유일한 액세서리라곤 포니테일에 묶은 하늘색 리본이 다였다.연한 화장과 청초한 옷차림은 평범한 집안의 어여쁜 딸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사모님, 이건...”류청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실례인 것 같아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기분이 살짝 다운되어 그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안 했다.류청은 두 손이 텅 빈 그녀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돌려서 물었다.“사모님, 뭐 빠트린 것 없으시죠?”서다인이 답했다.“없어요.”류청은 더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줬다.서다인은 그의 차에 앉아서 남씨 일가의 별장으로 향했다.남씨 일가의 별장 밖에는 십여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위엄 있게 대문을 경호하고 있었다.수입차가 속속들이 철문 안으로 들어와 별장 앞의 정원에 주차했다.집사는 밖에서 귀빈들을 모셨고 남씨 일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반겼다.서다인이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밤빛이 드리워졌다. 럭셔리한 별장은 안팎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분위기가 시끌벅적할 따름이었다.은경애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분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거나 친인척들이라 남씨 일가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게 돌아쳤다.아무도 서다인이 언제 왔는지, 와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하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연회장에는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며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홀로 외롭게 구석의 원형 식탁 앞에 앉아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나오시길 잠자코 기다렸다.그녀는 할머니께 직접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연회에 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그러면 이따가 미리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이곳 말이다.“와, 너 진짜 뻔뻔
백하린은 활짝 웃으며 설레는 표정으로 얌전한 척하며 대답했다.“진짜요? 언니들 저한테 공유할 물건이 있대요? 너무 기대돼요.”백하린은 서다인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예의 바르고 착한 척 인사를 건넸다.“언니, 나 그럼 먼저 아줌마랑 가볼게. 이따가 또 만나.”말을 마친 두 사람은 신나게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서다인은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조용한 그녀는 아웃사이더가 된 것처럼 이 시끌벅적한 연회장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도통 어우러지질 못했다.10분 후, 백하린이 또 나타났다.이번엔 큰 형님 유가영과 둘째 형님 진효은도 함께했다.“언니, 이거 가영 언니가 선물한 옥 팔찌인데 어때? 이쁘지?”백하린은 일부러 친한 척하며 서다인에게 물었다.서다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역겨울 따름이었다.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이리로 와서 일부러 친한 척하며 먼저 말을 거는 이유는 유가영과 진효은을 데려와서 그녀를 망신 주기 위함이었다.서다인은 백하린의 옥 팔찌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 없이 그저 예를 갖추고 큰 형님과 둘째 형님에게 인사했다.큰 형님 유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다인을 훑어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야유 조로 말했다.“우리 남씨 집안의 다섯째 사모님께서 대체 왜 이렇게 초라한 거야?”둘째 형님 진효은도 피식 코웃음을 쳤다.“동서는 안 그래도 신분과 가정 형편이 볼품없는데 이 옷차림은 또 뭐야? 여기 시트콤 찍으러 왔어?”백하린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일부러 착한 척하는 말투로 말했다.“언니들, 다인이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제가 볼 땐 꽤 이쁘게 차려입고 온 것 같은데요 뭘.”큰 형님 유가영이 웃으며 말했다.“하린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늘 똑같이 착하게 대하잖아요. 난 못 그래요. 유유상종이라고 하자들에겐 잘해줄 필요가 없어요.”서다인은 표정 변화 없이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바라보며 옅
남하준은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훤칠한 체구에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냈다.서다인은 한없이 매력적인 그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매번 남하준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몰래 심장이 빨리 뛴다. 피가 역류하여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바짝 긴장하니 하려던 말도 생각이 안 났다.남하준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은은하게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다만 그는 서다인의 선택을 존중하기에 왜 자신이 보낸 이브닝드레스를 안 입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할머니 뵀어?”남하준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서다인은 머리만 내저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입을 여는 순간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져 나올까 봐.남하준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남자였다.그녀는 이 남자에게 마음껏 기대고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아무도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럴 자격이 없다.남하준이 짙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할머니도 못 뵀는데 그냥 간다고?”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물음에 묵인했다.남하준은 속절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서다인의 손목을 잡았다.그의 제스처에 화들짝 놀란 서다인은 시선을 올리고 망연자실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남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연회 끝나고 가.”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인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이 또한 애틋한 스킨쉽인지라 서다인은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고 심장이 마구 쿵쾅대며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가 가슴에 파고들었다.남하준이 옆에 있으니 그녀도 좀 전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귀빈을 접대하러 갔다. 사람들이 그녀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남하준은 아주 대범하게 소개했다.“제 아내 서다인이에요.”아주 간단한 한 마디지만 서다인은
서다인은 무척 감동 받고 옆에 있는 이 남자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키가 185밖에 안 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백 미터가 되는 큰 산처럼 거대하고 듬직하여 마음을 설레게 했다.이때 백하린이 그림을 들고 은경애의 앞으로 다가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저 하린이에요. 아직 기억하시죠?”은경애는 순간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상간녀 네년은 내가 죽어서 재가 돼도 못 잊지!’“기억이 잘 안 나는데 누구신지?”은경애가 담담하게 말했다.백하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차피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계시니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지극히 정상이니까.백하린은 은경애의 생각 따위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직 이 생신 연회에서 포커스를 받고 남하준과 남씨 일가의 모든 사람 앞에서 더 완벽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을 따름이었다.미모나 효심 전부 장내의 모든 이를 압도하게끔 만들고 싶었다.“여기요, 들여오세요.”백하린이 갑자기 높은 소리로 외쳤다.곧이어 몇몇 도우미가 테이블을 몇 개 들여오더니 다 함께 붙여놨다.장내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백하린은 유가영을 불러와 함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어서 손에 쥔 그림을 펼쳐서 길이가 무려 2미터나 되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기세가 웅장한 수묵화가 펼쳐지고 모두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백하린은 앞으로 다가가 할머니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으켰다.“할머니께서 Z국 문화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수집하는 취미가 있으시고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수묵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들었거든요.”“제가 엄청 공들여서 당대 유명한 화가 지완 님의 진품 ‘가을’을 경매에서 낙찰해왔어요. 할머니께 생신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쭉 만수무강하세요 할머니.”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라 골동품 매매나 명화 수집 등에 조예가 깊다. 다들 당대 유명 화가 지완의 진품이란 말에 흥미를 느끼고 둘러서서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백하린은 은경애의 속내를 훤히 꿰
서다인은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그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은경애는 오직 백하린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라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모조품이라도 괜찮아. 마음만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너도 더는 진품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진 마.”장내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백하린은 사색이 되어 버럭 화내면서 서다인에게 쏘아붙였다.“네가 뭘 알아? 수묵화를 알기나 해? 수묵화 진품을 본 적은 있냐고? 대체 네가 뭔데 내 그림을 가짜라고 하는 거야?”서다인도 몹시 난감했다. 만약 그녀의 판단이 잘못됐다면 너무 창피한 일이니까.하지만 은경애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런 명화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힘들다. 지금 누군가가 가짜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다들 이 그림이 가짜라고 여길 것이다.영수증과 증명 서류를 내놓아도 다들 백하린이 사기를 당한 거라고 믿을 따름이다.명화 수집가 어르신 한 분이 서둘러 돋보기를 끼고 허리를 굽힌 채 머리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백하린은 남하준의 옆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안으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말해봐요. 다인이가 무슨 자격으로 내 그림을 가짜라고 말하는 거죠? 쟤가 뭘 알아요? 개뿔도 모르면서! 감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창피하게 해요? 이건 진짜 너무하네요.”남하준이 차분한 얼굴로 시큰둥하게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나도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막론하고 네가 할머니를 향한 마음만 잘 전달하면 되지 뭐.”백하린은 화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남하준이 이전처럼 자신을 감싸주지 않으니 화가 나서 어리광을 부렸다.“그런 거 아니에요. 다인 언니는 일부러 날 망신 주는 거라고요.”유가영도 그녀를 대신해 말했다.“확실히 도가 지나치네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심사위원을 할 기세잖아요. 할머니의 신임을 얻고 허튼소리만 내뱉는 게 말이 돼요? 하린 씨 정성만 수포로 만들었어요.”진효은도 말을 이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실력 있으면 진품
서다인은 힘없이 남하준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에 남하준은 한없이 마음이 약해졌다.그녀의 나른하고 무기력한 눈빛이 이토록 강렬한 살상력을 안겨줄 줄이야.남하준은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숙이고 서다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다인아, 여긴 모두 우리 가족이랑 친구들이야. 사실 다들 명화의 진위나 예술적 조예의 높고 낮음에 관심이 없어.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니까 효심만 닿으면 돼. 다른 건 다 허명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그려.”서다인은 그의 말을 듣더니 또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 것처럼 마음의 안정감을 느꼈다.남하준이 질문을 이었다.“모사는 할 줄 알아?”서다인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가능할 것 같아요. 모사는 딱히 어렵지 않거든요.”남하준은 침착하게 말했다.“그럼 지완 거장의 작품을 하나 모사해. 어차피 지금 이것도 가짜잖아. 마침 네 앞에 펼쳐져 있고.”일이 코앞에 닥쳤으니 서다인도 눈 딱 감고 해나가야만 했다.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붓을 들고 먹을 골고루 묻혔다.다른 손으로 백지를 세 번 쓰다듬었는데 제스처마다 부드럽고 가벼울 따름이었다.이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제스처까지 지완 거장을 따라 하는 것 좀 봐. 아무래도 지완님 작품을 모사하려는 모양이야.”누군가는 유심히 지켜보고 누군가는 기대에 차 있으며 또 누군가는 그녀가 망신을 당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이쪽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계속 연회에서 사교 영역을 넓혀갔다.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가을’ 작품을 열심히 살펴보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을 그렸다.첫 획을 그리는 순간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녀의 수준은 절대 보통이 아니었다.힘찬 붓놀림으로 한 획씩 그릴 때마다 마무리가 깔끔하고 시원시원했다.서다인은 딱 한 번 살펴본 이후로 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근육 기억처럼 힘 조절과 선 처리가 완벽했고 아예 대뇌의 사고를 걸
“살아생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지완님을 이렇게 뵐 수 있다니, 정말 너무 행운입니다.”“지완님은 여자분이셨네요. 전에 영상으로 작품을 볼 때 섬섬옥수가 여자일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작품을 들여다보면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웅장한 포부와 막강한 기세, 그리고 힘찬 기개가 느껴졌어요.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파워가 있거든요.”“지완님 수묵화는 심금을 울리고 시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어요. 심도가 깊고 경지가 있어서 정말 너무 좋아요.”연이은 찬사에 서다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넋 놓은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은경애는 일찌감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고였고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서다인이 다재다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숨겨진 유명 화가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옆에 있는 백하린은 화나서 안색이 다 짙어졌다. 그녀는 원래 서다인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었는데 이런 신분이 숨겨있을 줄이야. 덕분에 서다인만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한껏 뽐내고 장내의 모든 이를 감탄케 했다.남씨 일가의 사람들도 입이 쩍 벌어졌다. 다들 놀라움 속에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었다.이때 류청이 남하준 옆으로 다가와 깍듯이 휴대폰을 건넸다.남하준은 휴대폰을 건네받고 동영상 재생을 클릭했다.영상 속 화면에서 가늘고 새하얀 손이 나왔고 백지 한 장에 붓과 먹이 놓여 있었다.지완은 습관적으로 백지를 세 번 쓰다듬은 후 그림을 그렸다.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는 티 나지 않은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류청이 말했다.“도련님, 사모님이 바로 지완님인 것 같아요.”남하준은 영상을 끄고 휴대폰을 류청에게 돌려준 후 나지막이 분부했다.“이 계정 당장 조사해봐. 운영하는 회사와 배후에서 계정을 등록한 사람, 그리고 작품을 경매하는 경로와 돈을 기부하는 경로까지 전부 샅샅이 조사해.”“네.”류청은 대답을 마치고 연회장을 떠났다.서다인은 모두의 열정 어린 칭찬 속에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됐다.그녀는 감히 부인할 수도
며칠 후, 사무실 안.류청이 조사 결과를 남하준에게 보고했다.“도련님, 지완 씨가 영상을 업로드하는 계정은 Z국의 한 고아원 공식 계정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선물로 받은 보상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은 고아원 공금 계좌에 바로 입금되었고 원장님은 지완 씨 본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지완 씨 작품의 판매 경로도 아주 특이했어요. 온라인으로 직접 입찰하고 입금 계좌는 각 지역의 고아원이나 자선단체였어요. 모든 수입은 지완 씨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어요.”“따로 운영해주는 회사나 팀도 없고 라이브 방송 때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림만 그렸습니다.”“3년 전에 이 계정은 업데이트가 중단됐고 지완이라는 사람도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어요.”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두 눈을 감고 류청의 보고를 묵묵히 들으며 속으로 서다인을 떠올렸다.이토록 평범한 여자의 배경이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다니.남하준은 자석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차 대기시켜.”류청이 물었다.“어디로 가시게요 도련님?”남하준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다인이 만나러 가야겠어.”...안성시 번화가.노을이 지고 화려한 등불이 켜지면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서다인은 평상시처럼 구석진 곳에서 생화를 팔고 있었다.그녀의 작은 노점은 아늑하고 로맨틱하며 매우 아름답게 꾸며졌다.간혹 주문이 한두 개 들어오기도 했다.“다인아, 오랜만이야.”서다인이 한창 바삐 돌아칠 때 상당히 거슬리는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머리를 들더니 눈빛이 짙어지고 수중의 장미꽃을 천천히 내려놓은 후 옆에 뒀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서지석은 바짝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경계에 찬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서다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화 안 풀렸어?”“지난번에 네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뒤로 아직도 걸음걸이가 시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