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본인이 방금 한 말로 은경애가 화나서 잘못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만약 은경애가 죽으면 남하준과 서다인도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 무조건 이혼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백하린은 순간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할망구가 죽는 것도 나름 좋은 일인 듯싶었다....긴긴밤, 고독과 적막이 어우러진 밤.병원 VIP 병실 안은 흐릿한 불빛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서다인은 은경애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메마른 할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한 채 편히 잠든 할머니를 지그시 쳐다봤다.그녀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무사하게 얼른 정신을 차리기만 바랐다.애초에 그녀가 병원에서 처음 의식을 회복했을 때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고 몸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그녀 앞에는 한 무리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이들은 자칭 서다인의 엄마, 아빠, 오빠, 친척, 친구들이라고 했다.경찰도 현장에서 사건 기록을 작성하며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하지만 가족과 지인이라는 이 사람들은 그녀의 사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돈 받는 게 목적이었다.서다인이 죽은 전남편의 집에서 1조 원을 훔친 것 때문에 한바탕 폭행을 당하고 기억을 잃었다.경찰이 증거불충분으로 그녀를 체포하지 않았기에 겨우 재난을 모면했다.서다인도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신원을 조사해보았다.애초에 가정환경이 열악했던 그녀는 부모와 오빠의 사랑을 전혀 못 받고 어린 나이에 사회에 뛰어들어 직접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 과정에 수없이 많은 그릇된 길을 걸었었다.기억을 잃은 후 그녀는 더더욱 이 세상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없었고 인생에 대한 갈피가 전혀 안 잡혔다.그러다가 드디어 은경애 어르신을 만났다.자애로운 어르신은 서다인을 손녀처럼 생각하며 진심으로 이뻐해 주시고 엄청 잘해주셨다.할머니 옆에서 3년 동안 간병인으로 지낸 시간이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할머니는 그녀 마음속 유일한 가족이기에 이
백하린은 남하준이 화난 걸 깨닫고 가여운 얼굴로 눈물을 질끈 짜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오빠. 갑자기 왜 나한테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예요?”남하준이 싸늘한 어투로 되물었다.“집에 카메라가 없다고 네가 다인이한테 꼼수 부려서 모함한 걸 내가 모를 것 같아?”백하린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남하준을 바라보다가 잠시 당황한 척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렸다.“다인 언니가 나한테 누명 씌웠어요.”“끝까지 잡아떼네. 내가 바보로 보여?”남하준은 실망 어린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백하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채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오빠. 내가 잘못했어요.”남하준은 여전히 저 자신을 억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네가 진짜 잘못을 깨달았다면 굳이 다인이가 목걸이를 훔쳤다고 모욕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할머니까지 화나게 해서 병원에 입원시켜?”“앞으로 다시는 나랑 다인의 일에 끼어들지 마. 혼자 할머니 댁에 가지도 말고. 한 번만 더 이런 식이면 그땐 절대 가만 안 둬.”백하린은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살며시 남하준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며 몸을 비틀었다.“오빠, 나 진짜 잘못했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줘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내일 사람 시켜 네 물건 전부 짐 싸서 집으로 보낼 거야. 집에서 반성이나 잘해.”말을 마친 남하준은 앞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백하린은 울며 애원하고 사과도 해보고 애교에 갖은 수단을 다 부려봤지만 남하준은 꿈쩍하지 않았다.집사가 문을 열고 나온 후 그는 백하린을 집사에게 맡기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새벽 3시의 거리는 차 한 대 없이 텅 비어 있었다.남하준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앞에 도착한 남하준은 살며시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흐릿한 불빛 아래 서다
할머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여주었다.“걱정 마. 할미 아직 튼튼해.”서다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 어젯밤에 진짜 깜짝 놀랐어요.”할머니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었다.“이 할미 그리 쉽게 넘어지지 않아. 몸조리 잘해서 너 대신 그 성가신 내연녀 해결해버려야지.”옆에 앉아있던 남하준이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한 말투로 수정했다.“할머니, 저랑 다인이 사이에는 제삼자가 없어요.”할머니는 코웃음 치며 꼭 마치 본인이 배신을 당한 것마냥 분노를 터트렸다.“어젯밤 그년은 제삼자가 아니면 뭔데?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다는 말, 난 그딴 소리 전혀 안 믿어. 순수하긴 뭐가 순수해.”남하준은 말문이 턱 막혀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이대로 웃으면 너무 무례할 것 같아 머리를 숙이고 입을 막은 채 몰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남하준은 감히 웃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머니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완자야, 내가 사람 시켜서 깨끗한 세안 용품을 욕실에 놔뒀으니까 가서 씻고 나와서 밥 먹어.”서다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곧이어 욕실로 향했다.할머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쟤가 서다인이든 완자든 난 다 좋아. 너랑 아주 잘 어울려. 그러니까 너도 그딴 년 때문에 다인이랑 절대 이혼하면 안 돼. 알겠지?”남하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할머니의 건강을 걸고 감히 장담할 수도 없었다.“알았어요.”할머니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짝 언짢은 듯 그에게 질문했다.“솔직하게 말해봐. 정말 완자한테 아무 느낌 없어?”남하준은 의자를 끌고 할머니 옆으로 다가와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처음부터 할머니가 이 결혼을 부추기는 걸 반대했죠? 다인이를 완자라고 오해하든 아니든 강제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게 하는 건 잘못됐어요. 이건 아니에요
남씨 일가 사람들은 할머니를 둘러싸고 따뜻한 관심을 선보였다.서다인은 자신이 병실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 보여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병원 1층 정원 복도에 가서 적적하게 슬레이트 벤치에 앉아 먼 곳에 있는 식물을 멍하니 바라봤다.순간 한 남자의 자석 같은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무슨 생각해?”서다인은 사색을 가다듬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남하준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그의 강렬한 포스에 발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서리가 한 층 뒤덮일 것 같았다.서다인은 가슴이 움찔거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아니에요, 아무것도.”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남하준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짙은 눈길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바라봤다.“우리 계획 다 들었어?”서다인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봤다.남하준은 맑고 영롱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남하준은 그녀의 눈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며 신비롭게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가 한마디 덧붙였다.“안개 찾기 프로젝트.”서다인은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조금 들었어요.”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은은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계획이 유출됐네.”계획이 유출됐는데 그녀랑 무슨 상관이지?설마 지금 서다인을 의심하는 걸까?서다인은 대뜸 서운한 감정이 북받쳤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남하준은 눈앞의 풍경만 감상할 뿐 그녀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몇몇 요직에 있는 지도자들 외엔 너랑 나밖에 없어.”이렇게 말하니 그녀의 혐의가 더 커졌다.서다인은 그가 의심하는 건 이해되지만 안개 찾기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은 아예 몰랐고 비밀을 유출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준 씨, 나 아니에요.”서다인은 아주 정색하며 단호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당신들 상세한 계획 내용도 모르고 그
남하준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심 조로 말했다.“서다인, 만약 네가 기억 상실한 것처럼 연기하는 거라면 이 모든 게 다 합리해져.”서다인은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성형해서 할머니께 이쁨받고 하준 씨랑 결혼해서 당신 옆에 잠복해 있다고요? 재물과 신분 따위 바라지도 않고 오직 M국의 더 많은 중요한 기밀을 훔쳐 가기 위해서요? 내가 만약 기억 상실한 척 연기하는 거라면 난 정말 끝내주는 스파이인 것 같아요.”남하준이 답했다.“맞아, 바로 그거야.”서다인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이젠 정체가 곧 드러날 것 같으니 당신과 이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겠죠.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네요.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요.”남하준이 침묵했다.서다인은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이 일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본인조차 이런 일들이 백 퍼센트 존재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블랙 섀도우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남하준에게 접근하는 것도 조직의 계획이지 않았을까?다만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은 거겠지...서다인은 딱히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말을 내뱉는 건 무의미한 노릇이니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떠나갔다.이제 막 두어 걸음 나섰는데 남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다인아, 이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등 돌린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마주하고 힘차게 말을 이었다.“만약 네가 진짜 ‘블랙 섀도우’ 조직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토록 순조롭게 너에 관한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순 없어. 가정배경과 네 과거의 모든 경력들, 성형 전후의 사진 정보, 심지어 네가 블랙 섀도우 조직에 들어가서 특수 훈련을 받은 것까지 손 하나 까
이어진 나날들.서다인은 수원 별장도, 남원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하준이 줬던 카드에서 몇십만 원을 꺼내 작은 빌라를 구하고 생활필수품만 몇 가지 장만했다.그녀는 학력도 없고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기에 화조 시장에 가서 생화를 좀 도매해와 작은 마차에 끌고 야시장에 노점을 차렸다.수입이 비교적 안정적이라 보름도 안 돼서 남하준에게 빌렸던 돈을 다시 카드에 넣어줬다.단순한 일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그녀는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생신 선물을 성심껏 준비해드렸다.할머니가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걸 알고 보름이나 공들여 손수 장청죽을 수놓았다.할머니 생신날 아침 8시.서다인이 꿈속에서 헤맬 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긴 머리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남하준의 비서실장 류청이었다.그는 거대한 선물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사모님.”류청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서다인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류청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서다인은 흠칫 놀라며 선물 상자를 건네받았다.“뭐예요 이게?”류청이 깍듯하게 대답했다.“이브닝드레스와 일부 액세서리입니다. 저녁 5시 정각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사모님.”서다인은 묵직한 선물을 들고 마음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뜻밖의 이벤트에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훈훈해졌다.“하준 씨한테 고맙다고 대신 전해줘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류청은 작별을 고하고 빌라를 나섰다.서다인은 문을 닫고 선물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예쁜 리본 매듭을 풀어 상자를 열어보았다.세련되고 깔끔한 치마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화이트 펀칭 소재의 시스루 롱 드레스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그 옆에는 매우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세트가 놓여 있었는데 럭셔리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서다인의 얼마 남지 않은 기억
백하린은 곧이어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자수를 발견했다.그녀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다인의 솜씨가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장청죽을 너무 생생하고 아름답게 수놓았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백하린은 자수를 가리키며 질투 섞인 어조로 물었다.서다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다가가더니 잔뜩 긴장한 채 선물을 치웠다.그녀가 황급히 다가가긴 했지만 결국 한 걸음 늦었다. 백하린은 어느새 가방에서 빨간색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그녀의 자수에 들이부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망가진 자수를 보며 서다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습은 불가능했고 자수는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백하린, 너 미쳤어?”백하린은 씩 웃기만 할 뿐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머지 반병까지 드레스에 들이부었다.그 순간 서다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이미 다 무너진 자수를 꽉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침대 위에 빨갛게 물든 드레스를 쳐다봤다. 그녀의 가슴에도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보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놓은 작품인데, 또한 남하준에게 받은 첫 선물인데 전부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만약 살인이 불법이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백하린을 아작내 버렸을 것이다.백하린은 빈 병을 그녀의 침대에 내던지고 깨끗한 치맛자락으로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도발의 뜻이 가득 담긴 제스처는 한없이 경솔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한마디 내던졌다.“잘 들어. 오늘 밤엔 할머니 생신 연회에 절대 나오지 마. 네 신분은 그저 오빠네 가족들 체면만 구기는 셈이고 또한...”백하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다인이 불쑥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두 대 날렸다.“찰싹...”청아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주변 공기마저 확 얼어붙었다.백하린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고 충격과 분노에 찬 눈길로 서다인을 째려봤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다잡고 이를 악문 채 울분을 터트렸다.“네가 감히 날 때려?”서다인은 입술을 꼭 깨물고 눈가에 맺힌
저녁 5시.류청이 운전하여 제시간에 서다인의 빌라에 도착했다.그는 서다인을 본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남하준이 선물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오지 않았으니까.서다인은 연하늘색의 수수한 치마를 입고 몸에 두른 유일한 액세서리라곤 포니테일에 묶은 하늘색 리본이 다였다.연한 화장과 청초한 옷차림은 평범한 집안의 어여쁜 딸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사모님, 이건...”류청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실례인 것 같아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기분이 살짝 다운되어 그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안 했다.류청은 두 손이 텅 빈 그녀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돌려서 물었다.“사모님, 뭐 빠트린 것 없으시죠?”서다인이 답했다.“없어요.”류청은 더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줬다.서다인은 그의 차에 앉아서 남씨 일가의 별장으로 향했다.남씨 일가의 별장 밖에는 십여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위엄 있게 대문을 경호하고 있었다.수입차가 속속들이 철문 안으로 들어와 별장 앞의 정원에 주차했다.집사는 밖에서 귀빈들을 모셨고 남씨 일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반겼다.서다인이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밤빛이 드리워졌다. 럭셔리한 별장은 안팎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분위기가 시끌벅적할 따름이었다.은경애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분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거나 친인척들이라 남씨 일가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게 돌아쳤다.아무도 서다인이 언제 왔는지, 와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하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연회장에는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며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홀로 외롭게 구석의 원형 식탁 앞에 앉아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나오시길 잠자코 기다렸다.그녀는 할머니께 직접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연회에 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그러면 이따가 미리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이곳 말이다.“와, 너 진짜 뻔뻔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