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여주었다.“걱정 마. 할미 아직 튼튼해.”서다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 어젯밤에 진짜 깜짝 놀랐어요.”할머니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었다.“이 할미 그리 쉽게 넘어지지 않아. 몸조리 잘해서 너 대신 그 성가신 내연녀 해결해버려야지.”옆에 앉아있던 남하준이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한 말투로 수정했다.“할머니, 저랑 다인이 사이에는 제삼자가 없어요.”할머니는 코웃음 치며 꼭 마치 본인이 배신을 당한 것마냥 분노를 터트렸다.“어젯밤 그년은 제삼자가 아니면 뭔데?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다는 말, 난 그딴 소리 전혀 안 믿어. 순수하긴 뭐가 순수해.”남하준은 말문이 턱 막혀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이대로 웃으면 너무 무례할 것 같아 머리를 숙이고 입을 막은 채 몰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남하준은 감히 웃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머니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완자야, 내가 사람 시켜서 깨끗한 세안 용품을 욕실에 놔뒀으니까 가서 씻고 나와서 밥 먹어.”서다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곧이어 욕실로 향했다.할머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쟤가 서다인이든 완자든 난 다 좋아. 너랑 아주 잘 어울려. 그러니까 너도 그딴 년 때문에 다인이랑 절대 이혼하면 안 돼. 알겠지?”남하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할머니의 건강을 걸고 감히 장담할 수도 없었다.“알았어요.”할머니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짝 언짢은 듯 그에게 질문했다.“솔직하게 말해봐. 정말 완자한테 아무 느낌 없어?”남하준은 의자를 끌고 할머니 옆으로 다가와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처음부터 할머니가 이 결혼을 부추기는 걸 반대했죠? 다인이를 완자라고 오해하든 아니든 강제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게 하는 건 잘못됐어요. 이건 아니에요
남씨 일가 사람들은 할머니를 둘러싸고 따뜻한 관심을 선보였다.서다인은 자신이 병실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 보여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병원 1층 정원 복도에 가서 적적하게 슬레이트 벤치에 앉아 먼 곳에 있는 식물을 멍하니 바라봤다.순간 한 남자의 자석 같은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무슨 생각해?”서다인은 사색을 가다듬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남하준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그의 강렬한 포스에 발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서리가 한 층 뒤덮일 것 같았다.서다인은 가슴이 움찔거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아니에요, 아무것도.”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남하준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짙은 눈길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바라봤다.“우리 계획 다 들었어?”서다인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봤다.남하준은 맑고 영롱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남하준은 그녀의 눈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며 신비롭게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가 한마디 덧붙였다.“안개 찾기 프로젝트.”서다인은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조금 들었어요.”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은은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계획이 유출됐네.”계획이 유출됐는데 그녀랑 무슨 상관이지?설마 지금 서다인을 의심하는 걸까?서다인은 대뜸 서운한 감정이 북받쳤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남하준은 눈앞의 풍경만 감상할 뿐 그녀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몇몇 요직에 있는 지도자들 외엔 너랑 나밖에 없어.”이렇게 말하니 그녀의 혐의가 더 커졌다.서다인은 그가 의심하는 건 이해되지만 안개 찾기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은 아예 몰랐고 비밀을 유출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준 씨, 나 아니에요.”서다인은 아주 정색하며 단호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당신들 상세한 계획 내용도 모르고 그
남하준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심 조로 말했다.“서다인, 만약 네가 기억 상실한 것처럼 연기하는 거라면 이 모든 게 다 합리해져.”서다인은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성형해서 할머니께 이쁨받고 하준 씨랑 결혼해서 당신 옆에 잠복해 있다고요? 재물과 신분 따위 바라지도 않고 오직 M국의 더 많은 중요한 기밀을 훔쳐 가기 위해서요? 내가 만약 기억 상실한 척 연기하는 거라면 난 정말 끝내주는 스파이인 것 같아요.”남하준이 답했다.“맞아, 바로 그거야.”서다인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이젠 정체가 곧 드러날 것 같으니 당신과 이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겠죠.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네요.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요.”남하준이 침묵했다.서다인은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이 일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본인조차 이런 일들이 백 퍼센트 존재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블랙 섀도우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남하준에게 접근하는 것도 조직의 계획이지 않았을까?다만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은 거겠지...서다인은 딱히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말을 내뱉는 건 무의미한 노릇이니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떠나갔다.이제 막 두어 걸음 나섰는데 남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다인아, 이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등 돌린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마주하고 힘차게 말을 이었다.“만약 네가 진짜 ‘블랙 섀도우’ 조직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토록 순조롭게 너에 관한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순 없어. 가정배경과 네 과거의 모든 경력들, 성형 전후의 사진 정보, 심지어 네가 블랙 섀도우 조직에 들어가서 특수 훈련을 받은 것까지 손 하나 까
이어진 나날들.서다인은 수원 별장도, 남원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하준이 줬던 카드에서 몇십만 원을 꺼내 작은 빌라를 구하고 생활필수품만 몇 가지 장만했다.그녀는 학력도 없고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기에 화조 시장에 가서 생화를 좀 도매해와 작은 마차에 끌고 야시장에 노점을 차렸다.수입이 비교적 안정적이라 보름도 안 돼서 남하준에게 빌렸던 돈을 다시 카드에 넣어줬다.단순한 일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그녀는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생신 선물을 성심껏 준비해드렸다.할머니가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걸 알고 보름이나 공들여 손수 장청죽을 수놓았다.할머니 생신날 아침 8시.서다인이 꿈속에서 헤맬 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긴 머리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남하준의 비서실장 류청이었다.그는 거대한 선물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사모님.”류청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서다인도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류청 씨도 좋은 아침이에요.”“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서다인은 흠칫 놀라며 선물 상자를 건네받았다.“뭐예요 이게?”류청이 깍듯하게 대답했다.“이브닝드레스와 일부 액세서리입니다. 저녁 5시 정각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사모님.”서다인은 묵직한 선물을 들고 마음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뜻밖의 이벤트에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훈훈해졌다.“하준 씨한테 고맙다고 대신 전해줘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류청은 작별을 고하고 빌라를 나섰다.서다인은 문을 닫고 선물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예쁜 리본 매듭을 풀어 상자를 열어보았다.세련되고 깔끔한 치마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화이트 펀칭 소재의 시스루 롱 드레스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그 옆에는 매우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세트가 놓여 있었는데 럭셔리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서다인의 얼마 남지 않은 기억
백하린은 곧이어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자수를 발견했다.그녀는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다인의 솜씨가 이토록 뛰어날 줄이야. 장청죽을 너무 생생하고 아름답게 수놓았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백하린은 자수를 가리키며 질투 섞인 어조로 물었다.서다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다가가더니 잔뜩 긴장한 채 선물을 치웠다.그녀가 황급히 다가가긴 했지만 결국 한 걸음 늦었다. 백하린은 어느새 가방에서 빨간색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그녀의 자수에 들이부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망가진 자수를 보며 서다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습은 불가능했고 자수는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백하린, 너 미쳤어?”백하린은 씩 웃기만 할 뿐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머지 반병까지 드레스에 들이부었다.그 순간 서다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이미 다 무너진 자수를 꽉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침대 위에 빨갛게 물든 드레스를 쳐다봤다. 그녀의 가슴에도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보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놓은 작품인데, 또한 남하준에게 받은 첫 선물인데 전부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만약 살인이 불법이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백하린을 아작내 버렸을 것이다.백하린은 빈 병을 그녀의 침대에 내던지고 깨끗한 치맛자락으로 더러워진 손을 닦았다. 도발의 뜻이 가득 담긴 제스처는 한없이 경솔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한마디 내던졌다.“잘 들어. 오늘 밤엔 할머니 생신 연회에 절대 나오지 마. 네 신분은 그저 오빠네 가족들 체면만 구기는 셈이고 또한...”백하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다인이 불쑥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두 대 날렸다.“찰싹...”청아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주변 공기마저 확 얼어붙었다.백하린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고 충격과 분노에 찬 눈길로 서다인을 째려봤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다잡고 이를 악문 채 울분을 터트렸다.“네가 감히 날 때려?”서다인은 입술을 꼭 깨물고 눈가에 맺힌
저녁 5시.류청이 운전하여 제시간에 서다인의 빌라에 도착했다.그는 서다인을 본 순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남하준이 선물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오지 않았으니까.서다인은 연하늘색의 수수한 치마를 입고 몸에 두른 유일한 액세서리라곤 포니테일에 묶은 하늘색 리본이 다였다.연한 화장과 청초한 옷차림은 평범한 집안의 어여쁜 딸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사모님, 이건...”류청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실례인 것 같아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기분이 살짝 다운되어 그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안 했다.류청은 두 손이 텅 빈 그녀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돌려서 물었다.“사모님, 뭐 빠트린 것 없으시죠?”서다인이 답했다.“없어요.”류청은 더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줬다.서다인은 그의 차에 앉아서 남씨 일가의 별장으로 향했다.남씨 일가의 별장 밖에는 십여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위엄 있게 대문을 경호하고 있었다.수입차가 속속들이 철문 안으로 들어와 별장 앞의 정원에 주차했다.집사는 밖에서 귀빈들을 모셨고 남씨 일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반겼다.서다인이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밤빛이 드리워졌다. 럭셔리한 별장은 안팎으로 불빛이 환하게 비추고 분위기가 시끌벅적할 따름이었다.은경애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분들은 전부 고귀한 신분이거나 친인척들이라 남씨 일가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게 돌아쳤다.아무도 서다인이 언제 왔는지, 와서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하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연회장에는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며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서다인은 홀로 외롭게 구석의 원형 식탁 앞에 앉아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앞에 두고 할머니가 나오시길 잠자코 기다렸다.그녀는 할머니께 직접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연회에 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그러면 이따가 미리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이곳 말이다.“와, 너 진짜 뻔뻔
백하린은 활짝 웃으며 설레는 표정으로 얌전한 척하며 대답했다.“진짜요? 언니들 저한테 공유할 물건이 있대요? 너무 기대돼요.”백하린은 서다인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예의 바르고 착한 척 인사를 건넸다.“언니, 나 그럼 먼저 아줌마랑 가볼게. 이따가 또 만나.”말을 마친 두 사람은 신나게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서다인은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조용한 그녀는 아웃사이더가 된 것처럼 이 시끌벅적한 연회장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도통 어우러지질 못했다.10분 후, 백하린이 또 나타났다.이번엔 큰 형님 유가영과 둘째 형님 진효은도 함께했다.“언니, 이거 가영 언니가 선물한 옥 팔찌인데 어때? 이쁘지?”백하린은 일부러 친한 척하며 서다인에게 물었다.서다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역겨울 따름이었다.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이리로 와서 일부러 친한 척하며 먼저 말을 거는 이유는 유가영과 진효은을 데려와서 그녀를 망신 주기 위함이었다.서다인은 백하린의 옥 팔찌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 없이 그저 예를 갖추고 큰 형님과 둘째 형님에게 인사했다.큰 형님 유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다인을 훑어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야유 조로 말했다.“우리 남씨 집안의 다섯째 사모님께서 대체 왜 이렇게 초라한 거야?”둘째 형님 진효은도 피식 코웃음을 쳤다.“동서는 안 그래도 신분과 가정 형편이 볼품없는데 이 옷차림은 또 뭐야? 여기 시트콤 찍으러 왔어?”백하린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일부러 착한 척하는 말투로 말했다.“언니들, 다인이 너무 뭐라 하지 말아요. 제가 볼 땐 꽤 이쁘게 차려입고 온 것 같은데요 뭘.”큰 형님 유가영이 웃으며 말했다.“하린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늘 똑같이 착하게 대하잖아요. 난 못 그래요. 유유상종이라고 하자들에겐 잘해줄 필요가 없어요.”서다인은 표정 변화 없이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바라보며 옅
남하준은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훤칠한 체구에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냈다.서다인은 한없이 매력적인 그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매번 남하준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몰래 심장이 빨리 뛴다. 피가 역류하여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바짝 긴장하니 하려던 말도 생각이 안 났다.남하준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은은하게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다만 그는 서다인의 선택을 존중하기에 왜 자신이 보낸 이브닝드레스를 안 입었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할머니 뵀어?”남하준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서다인은 머리만 내저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입을 여는 순간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져 나올까 봐.남하준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남자였다.그녀는 이 남자에게 마음껏 기대고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아무도 눈치 보지 않고 원 없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럴 자격이 없다.남하준이 짙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할머니도 못 뵀는데 그냥 간다고?”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물음에 묵인했다.남하준은 속절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서다인의 손목을 잡았다.그의 제스처에 화들짝 놀란 서다인은 시선을 올리고 망연자실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남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연회 끝나고 가.”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인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이 또한 애틋한 스킨쉽인지라 서다인은 걷잡을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고 심장이 마구 쿵쾅대며 알 수 없는 따뜻한 전류가 가슴에 파고들었다.남하준이 옆에 있으니 그녀도 좀 전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귀빈을 접대하러 갔다. 사람들이 그녀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남하준은 아주 대범하게 소개했다.“제 아내 서다인이에요.”아주 간단한 한 마디지만 서다인은
그래서 이 일은 남태준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그의 사명이고 명예이고 책임이고 그의 전부일 것이다.지우는 남태준을 사랑하고 그의 일과 삶도 존중했다.남태준은 그녀의 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내가 그 비실비실한 이혼남보다도 못하다는 거야?”지우는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겨 방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팔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녀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고 턱은 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바라봤다.남태준은 그녀 눈 밑의 눈물을 바라보며 자신도 눈시울을 붉혔고 그의 슬픈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다리도 못 쓰고 앞도 못 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네가 돈 때문에 나를 보살피기는 했지만 나 그때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그때를 생각하면 지우 눈 밑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그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남태준은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그가 언제나 지금처럼 건강하기를 바랐다.“그때 너는 내가 눈이 안 보인다고 멋대로 행동했어.”남태준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 밑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네가 나를 도와 샤워하고 밥 먹여주고 우리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었지. 넌 청개구리처럼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 했어.”“네가 아무리 완자 친구라지만 내 말 한마디면 엄마는 널 해고할 수 있었어. 하지만 난 널 떠나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어. 진흙탕이 된 내 마음을 넌 작은 작대기로 계속 저어주어 더 이상 평온하지 않고 매일 파도가 일렁였어.”“그러던 어느 날, 네가 갑자기 떠났어.”남태준은 눈물이 흘러넘쳐 흐느껴 울었다.“난 또다시 그 암흑 같은 삶으로 돌아갔어. 햇볕도 없고 활기도 없는 그 어두운 세계로.”“지우야. 네가 돈을 원한다면 난 만족시켜 줄 수 있어. 네가 사랑을 원한다면 난 온 마음을 다해 널 사랑할 거야. 네가 안정감을 원한다면 나 일선에서 떠나 사무직으로 물러날 수 있어.”남태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애틋했고 점점 더 간절해졌다.“제발 나 떠나지 말아줘.
지우는 남태준에 의해 강제로 집에 끌려들어 갔다.문이 잠기는 순간 지우는 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화가 난 남자가 어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지 몰라 계속 몸부림치며 떠나려고 했지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힘센 손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남태준에 의해 거실로 끌려가 그대로 소파에 던져졌다.그녀는 긴장해서 움츠러들었고 방황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태준을 쳐다보았다. 그가 미칠 듯이 달려들 것 같아 속으로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이성적으로 그녀 곁에 앉아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매우 괴로워 보였다.밝은 거실은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창밖은 캄캄했다.집안의 분위기가 점점 굳어졌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지우는 남태준이 화가 나서 그녀와 단둘이 지낼 이유를 찾는 것이지 그녀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태준 씨, 나 놔주겠다고 했잖아요?”남태준은 얼굴을 가리고 깊게 숨을 내쉬더니 온몸에 냉기가 번져 형언할 수 없는 감상과 슬픔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그는 소파 등에 기대어 옆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눈가에 쓸쓸한 감정이 가득했다.“지우야. 내가 헤어지겠다고 했지 널 포기한 적은 없어. 난 계속 노력하고 있었어.네가 나 좋아하도록, 네 가족이 나 좋아하도록.”지우는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며 말했다.“진짜 그럴 필요 없어요.”“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갈등도 다툼도 제삼자도 없었어. 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거 혹시 엄마 때문이야?”지우는 침묵했고 손가락을 꽉 쥐고 손톱을 뜯었다.“대답해줘.”남태준은 소파를 따라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다가갔다가 꾹 참았다.그에게는 이제 지우의 손을 잡을 명분이 없었다.매일같이 그리움에 시달리고, 미칠 듯이 그녀를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도 이젠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그저 모퉁이에 몰래 서서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헤어지는 날은 녹슨 무딘 칼처럼,
“맞아. 하지만 이미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 미안해.”진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말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만약 네 마음에 있는 그 남자에게 기회가 없다면 차라리 그 기회를 나에게 주는 건 어때? 어쩌면 우리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잖아.”지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진준호 역시 멈추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나 아주 아쉬워. 널 오랫동안 짝사랑했지만 졸업 시즌에 네게 고백하지 못한 거 계속 후회했어. 만약 지금 그 기회가 왔다면 놓치고 싶지 않아.”지우는 용감한 사람을 탄복했다“준호야, 나...”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의 그림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지우가 반응도 하기 전에 강력한 힘의 큰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잡고 힘껏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자신의 따뜻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그녀가 경악하며 고개를 들자 남태준의 준수한 얼굴을 보고는 가슴이 떨렸다.지우가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진준호는 다급하게 물었다.“당신 뭐야?”남태준의 거대한 체구에 진준호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당장 지우 놔줘!”남태준은 싸늘한 눈빛에 노기를 띤 채 말했다.“미안하지만 내 여자친구에게 할 말이 있어 먼저 실례할게요.”여자친구?지우는 멍해졌고 진준호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남태준이 지우를 끌고 떠나자 진준호가 급히 쫓아가 두 사람 앞을 막으며 물었다.“지우야. 너 솔로라며?”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가로젓고는 혼란스럽게 말했다.“나 솔로 맞아. 이 사람은 전 남자친구야.”그녀의 말에 남태준의 안색이 더욱 새파래졌다.“나 이 사람이랑 얘기 좀 할 테니까 너 먼저 가봐.”지우는 웃으며 진준호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진준호도 더 이상 지우를 빼앗을 이유가 없어 지우가 끌려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노려봤다.남태준은 지우를 차에 태워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고는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량이 넓
지우는 입술을 깨물고 서러워하며 되물었다.“그럼 네가 다시는 목숨으로 나 협박하지 말라고 엄마 설득할 수 있어?”“아니 난 못해. 엄마는 너무 독해. 매번 빈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이시잖아.”지성은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고 지우도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사랑을 위해 어머니의 목숨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남태준을 잊고 가슴 아픈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칠 후 지성이 퇴원하자 지우의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왔다.매일 글쓰기에 바쁘고 어머니의 매점도 봐주고 가끔 밥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가 쇼핑을 하며 기분 전환을 했다.이날 송수빈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자고 했다.늘 외지에서 일했던 지우는 동창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올해 그녀가 마침 고향에 있으니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창들과 모이려고 했다.한 식당의 룸.큼지막한 원형 테이블에는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가득했는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는 신혼이거나 미혼인 사람도 있었다.지우와 송수빈은 미혼이라 싱글남 친구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두 사람의 외모도 출중하고 몸매도 좋았다.모두들 웃고 떠들며 건배하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준호가 지우를 오랫동안 짝사랑했잖아. 준호 녀석 지금 이혼했는데 설마 아직 지우를 못 잊은 거 아니야?”음식을 먹던 지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경악하며 말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반장이던 그는 지금 한 기업의 관리자였다.그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 지우를 향해 물었다.“지우야. 너 아직 싱글이라며. 아직 준호에게 기회가 있는 거냐?”지우는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 진준호를 바라보았다.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진준호는 어색한 듯 지우를 바라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이공계 IT 남으로 수입도 높고 외모도 잘생겼고 성격도 온순했다.같은 마을 사람이라 부모끼리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지우는 난처해하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 지성은 말을 할 수 있었고 사유도 또렷했다.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지성의 몸 상태를 물었고 지성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는 조사를 시작했다.지성은 남태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누나의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고 더욱 존경했다.지성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누나가 육건우를 고소했기 때문에 제 빚은 소송이 끝나기 전까지 갚지 않아도 되거든요.”“하지만 육건우의 부하들이 저를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날 저를 뒷산으로 데려가 폭행했고 저는 그들을 따돌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어요. 철조망이 가로막힌 곳까지 도망쳤는데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어서 아주 높은 나무에 올라가 철조망을 넘어 안에 있는 나무로 뛰어올랐어요.”“들어가고 나서 계속 출구를 찾았는데 못 찾았고 마스티프 몇 마리가 저를 쫓아왔어요.”“그래서 큰 스튜디오 몇 군데로 달려갔어요. 근데 안에 촬영 장비는 없고 오히려 양귀비꽃과 비슷한 식물이 많이 심겨 있더라고요.”“저는 깜짝 놀라 얼른 숨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요.”“그러다 어떤 창고에 숨었는데 그 안에서 마약을 정제하는 사람들이 저를 발견하고는 저를 죽일 듯이 때렸고 제 심장에 칼까지 꽂고 산기슭에 저를 던졌어요.”지성은 심장의 상처를 만졌다. 의사가 말하길 지성의 심장 위치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조금 빗나가 목숨을 부지했다고 했다.불행 중 다행이었다.남태준과 오신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표정이 굳어졌다.산꼭대기에 촬영기지를 설립하려면 소방 안전 검사와 경찰의 순찰도 필요하다.그런데도 안에서 미친 듯이 독을 심고 마약을 정제할 수 있다면 분명 백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그 백은 결코 직위가 낮지 않을 것이다.자백을 마친 지성이 긴장하며 물었다.“남 대장님, 만약 제가 죽지 않은 걸 알면 또 사람을 보내 저를 죽이러 올까요?”“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남태준은 온화한 태도로 진지하게 말했다.“지성 씨 옆에 24시간 경호를 붙여 신변을 보호할게요.”“감사합니다.”지성이 예의
남태준은 쓸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아주머니 미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이해하는걸요? 만약 제 딸이 마약 형사와 만난다고 하면 저도 반대했을 거예요.”진효연은 고개를 돌려 남태준을 바라보며 그가 진심으로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만약 직업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지우가 그에게 시집가는 건 커다란 복일 것이다.“지성이 병원비는...”진효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태준이 이미 그녀의 뜻을 알고 급히 위로했다.“병원비는 급히 갚을 필요 없어요. 지성이가 깨어나서 나중에 돈을 벌면 천천히 갚으라고 하세요. 무기한으로요.”진효연은 가슴이 뭉클해 눈시울이 젖었고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는 울먹였다.“내가 정말 고마워요. 지성이를 대신해서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남태준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고 가슴이 내려앉았다.그에게 있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며 지우를 도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벗고 나설 것이다.진효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남 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지우 오빠로...”남태준의 얼굴빛이 순간 굳어지더니 바로 말을 끊었다.“아주머니. 그럴 필요 없어요. 헤어졌는데 어떻게 오빠 동생으로 지내요?”진효연은 난처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남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랐다.남태준은 마음이 답답했다.어떻게 그더러 지우의 오빠로 지내라고 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앞으로 계속 연락하지만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되며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지우가 시집가는 걸 눈 뜨고 지켜보고 지우의 미래 남편을 매부라고 불러야 할까?남태준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말했다.“아주머니 저는 아직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제게 전화하세요.”“그래요. 어서 가봐요.”남태준은 목례를 하고 성큼성큼 떠났다.진효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또 한바탕 한숨을 쉬었다.남태준이 마약 형사의 일을 그만두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저희는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오신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살펴 가세요.”지우는 오신우와 다른 형사 한 명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는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ICU 병실로 향했다.그녀는 ICU 입구에 있는 벤치 앞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남태준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화기애애했다.그녀는 완전히 멍해졌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지우가 생각해 보니 진효연은 남태준을 본 적이 없으니 그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인 줄 모를 것이다.지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가가며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남 대장님 오셨어요?”남태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며칠 못 본 사이에 부쩍 초췌하고 말라 있었다.진효연도 멍하니 지우를 바라봤다.지우는 남태준과 거리감 있게 인사하고는 진효연에게 물었다.“엄마. 지성이 깼어요?”진효연이 유리창 안쪽 병실을 가리켰다.“깼는데 아직 활력 징후가 불안정해 ICU에서 나올 수 없대.”“지성이가 산에서 양귀비를 봤다고 했어요?”지우가 묻자 진효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악에 받쳐 말했다.“마약은 우리 일대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어. 곳곳에 끝없이 이어진 언덕이 있고 몇 개의 큰 산을 넘으면 바로 이웃 나라 국경이잖아. 약쟁이들은 우리처럼 작은 지역을 좋아해. 외진 곳이라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말을 마친 진효연은 다시 남태준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남 대장님, 일하면서 꼭 몸조심하세요. 마약쟁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마예요.”남태준이 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꼭 조심할게요.”지우는 다시 한번 경악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마약 형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형사에게 시집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진효연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지우에게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 넌 매점에 가봐. 난 여기서 지성이 지켜보면서 남 대장님과 더
“전에 출연했던 작품 투자자였어요.”“당신들은 촬영이 끝났는데 왜 아직도 안 가는 거죠?”“새로운 작품 촬영 중인데요?”“육건우 뒤에 있는 보스와 아직도 연락할 수 있어요?”임다희는 차갑게 웃었다.“태준이한테 배웠어요?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듯한 말투네요.”“만약 남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도와주세요. 하마터면 그 사람을 죽일 뻔했던 배후를 잡아야죠.”“그건 그쪽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예요.”“그럼 오늘 날 왜 찾아왔죠?”“그쪽이 태준이와 깨끗하게 끝났으면 해서요.”“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끝난 거죠?”지우가 물으니 임다희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과 명함 한 장을 꺼냈다.“카드 안에 6천만 원 들어 있어요. 동생 병원비로 쓰세요. 그리고 이건 내 친구 명함이에요. 다른 도시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우 씨가 그 회사에 출근해도 돼요. 조건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알고 보니 그녀는 지우를 남태준에게 멀리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이었다.지우는 명함과 은행 카드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내가 아직도 다희 씨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내가 소질이 있어서지 당신 같은 사람과 거래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당신은 여전히 내게 태준 씨를 팔아넘겨 죽일 뻔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여자니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당신은 내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이야.”“태준 씨가 만약 당신을 사랑해서 다시 만나고 싶다면 난 그 사람 축복해. 나와 태준 씨는 이미 끝난 사이니까 이딴 짓 하지 마. 역겨우니까.”말을 마친 지우는 일어나 차갑게 인사했다.“당신 같은 사람이랑은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당신의 그 더러운 손이 우리 가족에게 뻗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지우가 몇 걸음 갔을 때 임다희가 뒤에서 외쳤다. “당신들 남동생 병원비를 전혀 감당할 수 없잖아? 내 돈을 받지 않겠다면 태준이 찾아가 돈을 빌리는 일도 없었으면 해. 이미 끝난 이상 더 이상 얽히지 말라고.”지우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지우는 울지 않았고 울 수도 없었다.테이블 밑에 놓인 그녀의 손은 일찌감치 주먹을 불끈 쥔 채 눈 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화가 나서 눈앞의 징그러운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이 여자는 지금 무슨 자격으로 우는 거지? 정말 미치겠네!’임다희는 휴지를 꺼내 계속 눈물을 닦았다. “나중에 난 무사히 귀국했지만 태준이는 이미 살아날 확률이 전혀 없을 정도로 혹사당했어요. 모두 태준이가 죽은 줄 알고 해변에 시신을 버렸어요.”지우는 눈시울을 붉히고 이를 갈며 물었다.“겨우 살아난 태준 씨가 가장 절망적이고 어둡던 시절에 당신은 어디 있었죠?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요? 대체 왜죠? 태준 씨가 장애를 얻어서?”임다희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글썽이며 지우를 보았다.“아니에요. 난 태준이 동생 때문에 감히 보러 가지 못했어요.”“남하준?”지우가 묻자 임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태준이가 사고 난 후로 우리나라 미사일이 바로 이웃 섬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초토화됐어요. 국제적으로는 미사일이 빗나간 우발적인 사고라고 보도됐죠.”“하지만 난 그 섬이 태준이가 계속 조사해온 가장 큰 마약 굴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섬 전체가 마약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있었거든요.”지우는 차갑게 웃고는 차를 마시고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남하준이 그 일로 당신에게 복수할까 봐 감히 태준 씨를 보러 가지 못했다?”임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하지만 태준 씨는 당신을 언급하지도 않았어요. 그 일도 남하준이 직접 조사한 거고.”“그분 성격으로는 당신을 죽이고도 남았겠지만 태준 씨가 원하지 않았죠.”임다희는 눈물을 닦고 밝은 태도를 보였다.“그걸 난 이제야 알았고 그래서 지우 씨에게 태준이는 아직도 날 많이 사랑한다고 알려주고 싶었어요.”지우는 참다못해 차갑게 웃고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려 창밖의 대나무 숲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임다희를 바라보았다. “당신 남태준 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