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이 이유영에게 마음이 생긴 건 진짜였다.하지만 유암이 보기엔 이유영은 뒤끝이 장난 아니게 긴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에 대한 이용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안 이상,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나올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특히 지금 그녀가 뱃속에 얼마나 많은 나쁜 꿍꿍이를 갖고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당연히 믿을 수 없지.”박연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몸을 돌렸다.“...”유암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형님이 방금 뭐라고...’그 순간, 유암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박연준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곁에 있으면서 믿음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그런 박연준이 방금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지?박연준은 이유영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다. 심지어... 애틋한 말투였다.‘설마 형님이...’유암의 눈빛은 심각하게 변했다. 그도 몸을 돌려 박연준을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형님, 설마!”“어찌 됐든 그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이 10년이야.”박연준은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딱... 이번 마지막 한 번만!’예전에 한지음을 붙인 것은 그의 계획이었다. 그럼 이번에 한지음의 딸은? 그는 계획된 것 이외의 감정으로 하며 금 이유영에게 현실을 똑똑히 보여주려 했다.그녀가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도대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이유영에게 제대로 보여주기로 했다.사람은 상처를 어느 정도 깊게 받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자꾸 쓸데없는 희망을 품게 된다. 오로지 극한에 달하는 정도까지 상처를 받아야 현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어떤 감정은 10년이 되었을지라도, 설령 수십 년이 되었다고 해도, 꼭 상대방의 가슴속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잃은 건 사실 그 누구와도 상관이 없었다.만약 이유영이 정말 그의 마음속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면 그 누가 끼어들든, 어떤 음모가 계획되어있든 간에 다 두 사람을 떼어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그럼
강이한은 눈앞에 있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그녀가... 엄청나게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예전에 이유영의 눈에는 온통 강이한이였다. 하지만 지금은?“그럼 뭐가 당신하고 상관이 있는데? 당신과 서재욱의 딸?”그 아이, 이유영이 그 아이를 엄청나게 애호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도 그녀가 그 아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강이한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눈빛에는 싸늘함이 역력했다.“그럼 당신한테는 뭐가 중요한데?”“당신...”“예전에는 한지음, 지금은 한지음의 딸! 어차피 난 당신 마음속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아니잖아. 설마 당신 아직도 내가 예전처럼 당신을 내 마음속의 중요한 위치에 놓을 것이라고 망상하는 거야?”순간 공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두 사람의 차가운 기운이 서로 대치되고 있었다.예전이라... 지금에 있어서 예전이라는 화제는 그들에게... 엄청나게 숨 막히는 것이었다. 예전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아주 각별했다.하지만 결혼한 뒤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역시 사람의 심장은 두 개의 심실이 있듯이, 하나에는 행복이 살고 다른 하나에는 슬픔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은 슬픔에게 상처를 주었다.제일 처음 시작할 때, 행복이 얼마나 컸으면, 몰락한 뒤로 그만큼 한 슬픔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지금, 현실에 상처를 받은 슬픔은 마치 큰 갭처럼 자라났다. 그 3년이란 시간에... 이미 높디높은 장벽을 이뤘으며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우리의 과거 7년에 대해, 당신은 정말 하나도 그립지 않아!?”이 순간, 강이한의 말투는 극한에 달할 정도로 억눌려있었다.이유영은 매번 이렇게 그의 앞에서 사이를 단호하게 잘라냈다.그녀의 단호함 때문에 강이한은 자신이 이유영의 세계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마치 과거 7년이란 세월이 꿈이었던 것처럼.“당신이 한 번 또 한 번 한지음을 선택했을 때, 그때...
이 말에 강이한은 말문이 막혔다.“...”“흑, 흑.”이유영 얘기가 나온 것을 듣자, 이온유는 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이의 눈빛은 정말 억울하기 그지없었다.강이한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이 여자가!’“됐어. 괜찮아.”그는 가벼운 목소리로 이유영이 울린 이온유를 살살 달래주었지만, 마음속에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젠 하다 하다...’그는 이유영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그녀가 아이조차 용납할 수 없을 줄 몰랐다.“아빠, 흑흑.”꼬맹이는 흐느끼면서 입을 열어 강이한을 불렀다.“아빠 여기 있어.”“엄마가 날 하나도 안 좋아해요. 아기 돼지를 빼앗아 갔어요.”이온유의 목소리는 한없이 억울했다.강이한은 안 그래도 힘줄이 불끈 솟은 이마는 지금 더욱 세게 툭툭 뛰고 있었다.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이유영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성질을 부렸는지 알 수 있었다.“아빠가 가서 한 마리 구해다 줄게.”“네.”퉁명한 대답 속에는 여전히 억울함을 숨길 수 없었다.이 정도로 철들고 감정을 억누르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그는 정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정말 겨우겨우 이온유를 달래서 위층으로 올려보낸 뒤, 강이한은 이유영이 아기 돼지를 안고 방 안의 작은 의자에 앉아서 넋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깊게 한숨을 들이켜고는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이 아기 돼지가 그렇게 좋아?”이 말을 듣자 이유영은 순간 정신을 되찾았다.그녀는 품속의 아기 돼지를 한눈 보고는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도 참 유별나. 어떻게 선물을 주는데 이런 걸 줘?”‘이건 남의 지력을 어느 정도까지 짓밟으려는 거야?’강이한은 소파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세게 두 모금 들이마시고 답답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온유를 보낸다고 약속했잖아.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해?”“...”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흠칫했다.강이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빛이 얼른거렸다.그녀는 강이한이 갑작스럽게 꺼낸 말에 대해 안 믿고
그 순간, 강이한이 보기에 이유영이 매몰찬 건 결국 이온유 때문이었다.그는 손안에 든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이유영에게 말했다.“내가 최대한 온유를 빨리 보낼게!”전에는 그냥 보낸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최대한 빨리 보내겠다고 말했다.그러니 한지음 때문에 이온유가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사실 관건은 이온유를 떠나보내느냐 안 보내느냐 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관건은... 그가 이온유를 보내기 아쉬워한다는 것이었다.이유영은 침묵을 지켰다.이 화제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이었다.강이한이 나가려고 일어선 순간, 그의 말투에는 이유영에 대한 경고가 담겨있었다.“앞으로 다시는 박연준을 만나지 마!”이유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쿵 하고 소리와 함께 강이한이 방문을 나갔다.하지만 이유영은 제자리에 앉은 채 냉소를 지으면서 아기 돼지를 의자에 올려두었다.‘박연준을 만나지 말라고? 참말로... 전에는 서재욱을 만나지 말라더니 이제는 박연준도 만나지 말라네.’그 날밤 저녁 이유영은 도통 잠이 들지 못했다. 새벽 때, 밖에서 작지 않은 소란 소리가 들렸으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그 뒤 밖에서 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이튿날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주방 안은 썰렁했다. 강이한과 이온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은 아침 식사가 준비된 식탁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아침은 강이한이 있을 때보다 훨씬 조촐해 보였다.간단한 흰죽과 반찬들이 조금 준비되어 있었다. 조촐한 음식 모습에서 주방 사람들이 얼마나 건성으로 준비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입을 떼고 물었다.“두 사람은요?”옆에 서 있던 집사는 이유영이 질문하는 것을 듣더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온유 아가씨께서 어젯밤에 열이 나셔서 도련님은 아가씨를 데리고 입원하러 가셨습니다. 장 아주머니도 함께 갔습니다.”집사의 말투는 아주 쌀쌀했다.그의 태도에서... 일말의 공손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유
다들 열심히 반쪽짜리 서류를 찾고 있는 데서 이 서류가 도대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유영아, 너...”“엔데스 명우가 무너지기만 하면 현우 씨가... 너를 떠나게 놓아줄 거지? 맞지?”“그래!”“그래. 알겠어.”“유영아, 너 뭐 하려고?”‘내가 뭐할 건 가고? 나를 배신한 놈, 나를 이용한 놈, 그리고 지금 나를 귀찮게 붙잡고 있는 개자식들 다 지옥에 처넣을 거야.’그동안, 월이의 얼굴을 볼 시간이 줄어든 것을 생각하자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이 죽도록 미웠다.한 명은 그녀를 이용했고 다른 한 명은 그녀를... 배신했다. 게다가 그녀더러 원수의 딸을 받아들이라고 했다.박연준의 이간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강이한의 배신은 진짜였다.도원산으로 온 뒤 이유영은 줄곧 강이한의 서재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강이한이 그녀에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박연준이...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의 계략에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어찌 됐든 지금 형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소은지에게는 필요했다.전화를 끊은 뒤 이유영은 곧장 강이한의 서재로 갔다. 그리고 그 안을 발칵 뒤집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그 반쪽짜리 서류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대충 설명해 주었었다.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이유영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강이한이 쌀쌀한 기운을 한 채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이유영이 서랍을 연 것을 본 순간, 그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당신 뭐 찾고 있어?”목소리는 떨림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두 눈은... 삽시에 붉어졌다.서주에서 지냈던 그 시절은 그들에게 엄청나게 예민한 과거였다. 그래서 서재도 당연히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지금, 이 순간 이유영이 서재에서 있는 것을 보고 또 몇 개의 서랍이 열려있는 것을 보니 딱 봐도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당신 뭐 찾고 있었냐고 물었잖아!”이유영이 말이 없는 것을
이성은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다.분노가 폭발한 뒤 남은 건 강이한의 미친 듯한 웃음뿐이었다. 그 웃음소리는... 그토록 슬프고 무거웠다.그 후 강이한의 세상 속에서 무언가가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여진우는 그저 핑계였던 거네. 그러니까 당신은 박연준 때문에 이 집에 들어온 거네? 그렇지?”전에 강이한은 그런 생각까지 했었다.‘이제 유영이의 세상 속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구나. 그저 아이와 정씨 가문의 사람들만 제일 소중하구나.’하지만 사실 아이의 아버지인 서재욱도 중요했고 심지어 박연준도 그녀의 가슴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을지 모른다.지금 이유영의 세상에서 그 누구든 강이한보다 더 중요했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예전에 강이한은 자기와 이유영의 10년 감정은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전생에서 쫓아온 그는 독선적으로 함께 지낸 10년이란 세월이 그가 이유영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제일 유리한 카드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그의 생각이 틀렸다.그는 결국 여전히 틀렸다.이유영은... 마음이 변했다.“당신은 박연준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장작 그 사람은 당신의 그 비천한 딸에게 새아버지가 되고 싶어 할까?”미치도록 소리친 뒤 남는 건 그의 조롱뿐이었다.그 순간 강이한이 내뱉은 매 글자는 다 이유영의 가슴을 콕콕 찔러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유영은 그가 월이를 ‘비천한 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눈빛에는 싸늘한 기운이... 짙게 퍼졌다.강이한은 비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무 천진하게 생각하지 마. 박연준과 같은 신분의 사람이 어떻게 당신한테 딸이 있는 걸 받아들이겠어?”“당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로 들리네?”강이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유영은 재빨리 그의 말에 토를 달았다.강이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분명 평온했지만... 사람에게 싸늘한 느낌을 주었다.“...”‘받아들일 수 있나?’이유영의 이런 눈빛 때문에 강이한도 끊임없
그리고 이 큰일이 누구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지 그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랬다. 이온유를 둘러싼 것이었다.‘이 세상에 강이한을 이토록 나사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더 있겠어?’한지음이 아니면 한지음의 딸이었다.“비천한 딸이라고? 하하...”강이한이 월이에게 붙인 호칭을 생각하자 이유영은 정말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강이한이 이온유에 대한 편애만 놓고 보아도 월이를 절대 그의 딸로 만들 수 없었다.그때 되면 강이한은 ‘월이의 체면을 봐서’라는 핑계로 어떤 이상한 요구를 제기할지도 모른다.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병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그 뒤로 3일 연속 강이한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중간에 이정이 한 번 다녀갔었다. 이유영은 서재에서 그 반쪽짜리 서류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서류가 도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애초부터 도원산에 없었을 수도 있네. 어찌 됐든 강이한 명의로 되어있는 부동산이 그렇게나 많은데 서류를 어디에 숨겨 놨을지 누가 알아?’그리고 이 사흘 동안 이유영은 거의 도원산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그날 강이한과 서로 얼굴을 붉히고 헤어진 뒤 그녀는 낮에 거의 백산 별장에 있곤 하였다.“월아, 아. 입 벌려야지.”이유영은 숟가락을 월이의 입가에 댔다.하지만 꼬맹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이유영은 걱정스럽게 임소미를 쳐다보며 말했다.“요 며칠 월이가 별로 입맛이 없어 보이네요.”“그러게 말이다. 조금 있다가 약 좀 먹어야겠어.”임소미가 답했다.그동안 임소미는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육아에 관한 책을 읽어보곤 하였다.아이의 여러 가지 증상에 대하여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임소미는 거의 다 배워갔다.평소에 심심하면 이유영과 경험을 교류하기도 했다.“강이한은 요 며칠 계속 병원에서 지내는 거야?”첫날에 돌아오자마자 임소미는 이유영한테서 얘기를 들었다.강이한이 정말 도원산에 있었다면 이유영이 매일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런 생각이 들자 이유영의 눈빛에는 저도 모르게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서 여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 안에서 여진우의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너 지금 재욱 씨와 같이 있어?”“응.”“무슨 일이 있어?”여진우가 정말 서재욱과 함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이유영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여진우는 비록 그녀의 오빠이긴 했지만, 서주에서 있었던 그의 과거를 조금 알게 된 뒤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위험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게다가 서재욱, 사실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는 순 장사꾼이었다. 그래서 이유영은 자연스럽게 걱정이 들었다.“너 지금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전화 반대편의 여진우는 마치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짧디짧은 한 마디로 이유영의 마음속 걱정을 콕 집어냈다.“오빠, 재욱 씨는...”“서재욱이 어떻든 다 너랑 아무 상관이 없어!”“그래, 나랑 아무 상관이 없지!”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비록 전에 그녀가 서재욱을 끌어들여 그에게 폐를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보상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었다.‘그리고 그 외의 것은 아마도 이제 나랑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여진우와 통화를 마친 뒤 이유영은 마음이 조금 갑갑했다.도원산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소은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유영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은지야!”“내일 잠깐 만날까?”“그래.”이제 파리에서 두 사람은 다 모처럼 자유의 몸을 회복하였으니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되었다.소은지의 전화를 끊었을 때 이유영은 마침 도원산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이유영은 강이한의 차가 마당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강이한이 돌아온 것이었다.또다시 강이한과 이온유의 얼굴을 마주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유영은 뜬금없이 울화가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이 두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매번 얼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