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게다가 출산조차 힘들어졌는데 당신은 어떻게 내가 어렵게 낳은 그 아이를 보내버리라고 말할 수 있어!?”“안 보내도 돼. 안 보내도 돼.”강이한은 앞으로 다가와 단번에 이유영을 와락 품속에 안았다.강이한의 품이 닿는 순간, 이유영은 그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떨림은 그녀에게 정말 아니꼬웠다.“보내지 말자.”그는 무의식적으로 두 팔에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당신은 지금 상황이 우습지도 않아?”“유영아.”“우리 두 사람, 더 이상 우리 둘의 아이를 가질 수도 없어. 근데 당신은 날 곁에 두어서 뭐 해?”“유영아...”“한지음의 아이, 서재욱의 아이. 하하!”“그만 말해. 입 다물어. 그만 말하라고!”강이한은 지금 매 한마디가 다 너무 귀에 거슬렸다.마음이 아픈 나머지 그는 숨 쉬는 것마저 버거웠다.“당신은 아이의 새아버지가 되는 게 좋겠지만 나는 새엄마가 되기 싫어.”“유영!”한지음 딸의 일에 대해서, 이유영은 어느 때든지 물론하고 다 시종 이런 태도를 견지했다.그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의 이 말을 들은 강이한은 가슴이 더없이 답답해졌다.“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응?”얘기하고 싶지 않았다.계속 얘기하면 안 되었다.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것은 이렇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줄곧 이유영더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만 했지, 전생의 그녀가 이렇게 힘들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유영의 짧은 몇 마디에서 강이한은 그녀가 전생에서 받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이유영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강이한은 알 수 있었다.하지만 한지음에 대해...“유영아, 그 얘기는 일단 그만하자. 응?”너무 조급했다.전에는 강이한이 너무 조급하게 몰아붙였다.그 상처들은 아마 아직도 이유영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그녀더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품에서 그의 떨림을 느
이유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응.”“그놈은 정말 못하는 짓이라고 없네! 난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 그 당시 그놈이 너를 아꼈던 감정들은 도대체 다 뭐야?”그랬다. 아꼈었다.그때 강이한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건 이유영에 대한 아낌이었다.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감정들은... 다 우습기만 했다.우습기 그지없었다.하지만 그런 아낌은 한지음이 나타나기 전까지였다.그리고 한지음이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것들이 다 변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요즈음 네가 사교계에서 엄청나게 얼굴을 잘 드러내던데.”이유영이 말했다.맞는 말이었다. 엔데스 현우와 결혼한 뒤로, 소은지는 재빨리 사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이유영은 소은지와 설유나 사이에 있었던 일화도 전해 들었다.소은지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맞아.”“예전에 넌 이런 것들을 안 좋아했잖아!”“앞으로는 좋아하게 될 거야.”소은지가 대답했다.예전에 싫어했던 건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상류사회 사람들의 행위를 이해할 시간도 전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럼 사람이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선 위치에 맞게 일을 해야 했다.“설유나가 입원했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자기가 알고 있던 소식을 소은지에게 말해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전부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었다.“나도 알고 있었어!”“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소은지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들은 이유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순식간에 포인트를 잡아냈다.‘설유나가 입원한 건 아마 은지와 상관이 있을 가능성이 아주 커.’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유영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그 사람? 하!”엔데스 명우의 얘기가 나오자, 소은지는 냉소를 지었다. 마치 엔데스 명우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말했다.“유영아. 난 네가 내 걱정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랑 그 사람은... 내가 현우 씨와 결혼한 순간부터 이미 대립 면에
뜨거운 찻물이 피부에 닿으면서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소은지의 눈빛은 그저 그렇게 뚫어져라 배천명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넌 내가 일곱째 사모님인 거 알고 있네?”“일곱째 사모님...”“꺼져!”소은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름이며 싸늘하게 두 글자를 내뱉었다. 동시에 아주 짙은 위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배천명은 잠시 넋이 나갔다.비록 전에 엔데스 명우의 곁에 있었을 때도 소은지가 여러 차례 여섯째 도련님한테 반항하는 것을 보아서 그녀의 성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정도로 성격이 나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꺼져라는 두 글자는... 절대 엔데스 가문의 여인한테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일곱째 사모님,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일곱째 도련님을 위해...”“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네!”배천명의 말은 다시 소은지 때문에 끊어졌다. 지금, 이 순간 소은지는 아니꼬운 눈빛으로 배천명을 바라보고 있었다.배천명은 어안이 벙벙했다.‘꿈을 꾼다고? 누가...?’배천명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소은지는 비꼬면서 웃으며 말했다.“다들 이젠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설마 여섯째 도련님은 아직도 소문 속에 자기랑 일곱째 도련님이 사이가 좋다는 것을 믿고 있는 건가?”이 말을 듣자, 배천명의 안색은 순간 확 변했다.소문이라는 두 글자가 세게 그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것들이 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은지가 엔데스 현우와 결혼한 후로 두 형제의 사이는 금세 긴장해졌다.조금 전 배천명은 소은지더러 엔데스 현우의 체면을 생각해 여섯째 도련님한테 너무 강경하게 맞서지 말라고 망상이 담긴 말을 했다.소은지는 자신의 손톱을 어루만지면서 배천명을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거의 죽어가?”말투는 유달리 각박했다.배천명은 침묵을 지켰다.소은지는 계속해서 말했다.“죽어도 사실 별로 나쁠 게 없지.”“일곱째 사모님!”“난 한 번도 그 여자를 살려주겠다고 약속
바닥에서 매를 맞고 있는 배천명을 보고 있으니 그 순간 이유영은 마치 엔데스 명우를 본 것만 같았다.소은지는 막연하게 몸을 일으켜 서면서 말했다.“죽도록 패지는 마세요.”“네.”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소은지는 뒤의 혼란한 상황을 뒤로 한 채, 그저 그렇게 자리를 떴다.한때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 바로 이런 장면이었다. 세력을 믿고 함부로 하는 짓은 그녀의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명우의 사람만 보면 그녀는 그들을 패버리고 싶었다.설유나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엔데스 명우는 온몸에 중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돌아온 배천명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또 그의 몸 뒤를 한번 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어떻게 된 일이야?”“오기 싫다고 하셨습니다.”배천명은 소은지를 위해 뭘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그러자 엔데스 명우의 별로 안 좋던 안색은 순간 어두워졌으며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음흉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오기 싫다면 다야?’“너 언제부터 이렇게 쓸모가 없어졌어?”상처투성이인 배천명의 모습을 보며 엔데스 명우의 말투는 더욱 차가워졌다.배천명은 공손하게 고개를 떨구었다.그의 몸에 있는 상처들은 더구나... 지금 파리에서의 여섯째 도련님과 일곱째 도련님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만약 예전에 이미 소은지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사이였다고 하면 지금은 더욱... 세게 붉히는 것이었다.“명우 오빠.”병실 침대 위의 설유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짧디짧은 시간에 그녀의 입술은 이미 말랐다.사실 설유나의 병은 더욱이 음식을 조심해야 했으며 평상시에도 보양에 주의해야 했다.게다가 사교 연회의 어떤 것들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엔데스 명우 곁의 여자라는 입장을 굳히기 위해, 중요한 연회가 있을 때마다 꼭 따라가곤 하였다.하지만 설유나의 몸이 이렇게 빨리 악화할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도 당황했다.“괜찮아.”
저녁 식탁에서 이유영은 조용히 국을 먹고 있었다국물의 맛은 정말... 별맛이었다.아마도 이유영이 아침에 성질을 부린 것 때문인지, 강이한은 그 뒤로 주방한테 최대한 이유영이 좋아하는 것들로 하라고 시켰다.“온유야, 왜 그래?”이온유가 시무룩해하는 것을 본 강이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특히 그동안 아이가 밥을 먹을 때의 습관에 대해 강이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지금 이렇게 밥을 먹고 있는 것은 분명 오늘 저녁의 음식들이 입맛에 안 맞아서였다.“먼저 좀 먹어봐.”“네.”이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눈빛이 쌀쌀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이유영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비꼬면서 말했다.“두 사람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역겹네!”“...”“...”그 순간 강이한의 안색은 확 어두워졌다.비록 오전에 나눴던 얘기들 때문에 강이한은 마음속으로 이유영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그녀가 이온유의 면전에 대고 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강이한은 마음이 어느 정도 불편했다.“어떤 사람은 참 가식을 잘 떤다니까. 그 사람과 같은지 모르겠네?”강이한이 말이 없는 것을 보자 이유영은 더욱 세게 비꼬면서 말했다.이에 강이한은 정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젓가락을 내려놓는 순간, 힘이 조금 셌기에 그 누가 들어도 강이한이 화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빠.”이온유는 나지막하게 강이한을 부르며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강이한은 고개를 숙여 국물을 먹고 있는 이유영을 한 눈 보고는 이온유에게 말했다.“아빠가 우리 온유 데리고 나가서 먹을까?”말을 마친 뒤, 그는 아이를 확 일으켜 세웠다.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피식 웃었다.‘어디서 좋은 아버지 행세야? 참 잘 놀고들 있네.’강이한은 이유영을 보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이때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그는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식탁에 이유영 혼자만 남았을 때, 그녀의 입맛은 오히려 더
‘한번? 무슨 말이지?’분명한 건 이유영은 정국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모르게... 사실 아주 일찍이 이유영이 퀘벡으로 갔었을 때, 강이한은 무슨 방법을 써서인지 모르게 비밀리에 정국진과 협의를 달성하였다.하지만 그때 강이한이 한 말들은 정국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정국진은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고 약속하였다.만약 이번 한 번의 시도 끝에 성공을 이루지 못하면 그럼 그는... 앞으로 더 이상 이유영에게 집착하지 않겠다고 했다.“아빠...”“됐어. 난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어. 나중에 봐!”이유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국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 안에서 뚝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며 이유영은 제자리에 앉은 채 오래도록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두 사람...’탈칵 도어록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이유영은 순간 정신을 다잡았다.고개를 돌려보니 강이한이 온몸의 기운을 짓누른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저녁 식사 자리가 불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온 하루 세 끼에서, 아침은 이유영 때문에 난리가 났고 점심때 강이한은 이온유를 데리고 그냥 밖에서 먹었다. 온 하루가 지나 이유영의 기분도 조금 괜찮아졌을까 했는데 결국 저녁에도 그는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외식했다.어찌 됐든 하루라는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다...“우린 꼭 이렇게 지내야 해?”강이한은 이유영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에 웅크리고 앉더니 그녀의 차가운 손을 끌어 잡았다.그는 말하면서 얼마나 자신의 불쾌함을 애써 억눌렀는지 모른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기 앞에 웅크리고 앉은 강이한을 보며 자신의 손을 따뜻한 그의 손에서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다 당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맞는 말이었다.두 사람은 원로 서로를 간섭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각자 자신의 삶을 살면서 누구도 상대방에게 영향 주지 않아도 되었다. 강이한이 이온유의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해
이 말이 끝나자, 이유영의 눈빛에는 짙은 위험한 기운이 퍼졌다.“내가 도원산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그녀는 이를 악물며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전화 안의 사람은 마치 그녀의 감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만 같았다.“내 목적은 당신이 생각해야 할 바가 아니야. 당신은 그 서류나 빨리 찾아!”말투에는 온통 위험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핸드폰을 부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 전 상대방이 한 말이 떠올라 늠름한 말투로 물었다.“그 애가 열이 난 것도 당산과 연관이 있어?”“추측해 봐!”“난 이런 질문 놀이를 하나도 안 좋아해!”이유영의 말투는 더욱 심각해졌다.전화 안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안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자신감이 없는 거야?”“난 당신처럼 아이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는 변태가 아니야!”비록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지음을 지극히 미워했고 이온유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건 엄마인 그녀가 한 아이를 무정하게 이용하고 상처를 줄 수 있게 눈감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아니야!”“당신이랑 상관이 없어야 할 거야. 아니면...”여기까지 말한 이유영은 잠시 멈칫하였다. 동시에 그녀의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졌다.전화 안에서 남자의 그윽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당신 한 가지 잊고 있나 본데, 당신은 나랑 조건을 따질 권한이 없어!”“...”‘권한이 없다고?’그랬다. 그녀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강이한의 마음속에서 그녀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유영은 줄곧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순간... 공기는 조용해졌지만, 그녀의 삶은 오히려 엉망이 되어버렸다.‘박연준이...’그랬다. 방금 이유영과 통화한 사람은 박연준이었다!이유영이 박연준과 사이가 틀어진 뒤로, 두 사람은 이런 관계가 되었다.이유영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망울은 반짝거렸다. 마치 얼음이 빛에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박연준은..
앞으로 다가가려던 강이한의 발길은 그 순간 마치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는 이유영을 향해 반걸음도 다가갈 수 없었다.하지만 아직 혼수상태에 있는 이온유를 생각하니 강이한은 그저 마음이 답답해났다....곧장 방으로 돌아온 이유영은 안색이 차가운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 도우미들의 곁을 지날 때, 이유영은 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사람들의 눈 속에서 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은 사실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한지음의 딸이 강이한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거지? 한지석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만약 한지석 때문이라면 이번 생의 한지음은 그토록 중요하지 않을 건데. 아니면 정말로 강이한의 말처럼 내가... 한지음한테 빚진 것인가?’이 생각이 들었을 때, 이유영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내가... 한지음한테 빚졌다고? 그래. 빚진 것이 있다고 한들 뭐? 그때의 그 불길, 그리고 내 끝장, 그것들로 맞바꾼다고 쳐도 내가 더 피해 본 게 아니야?’...강이한은 아주 어렵게 이유영을 자기 곁에 남게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다.이유영이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맞았지만 그가 원하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았다.강이한과 이유영의 상황은 그야말로 엎질러진 물처럼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엄마, 엄마...”이온유는 열이 세게 났다. 다행히 해열 주사를 나서 열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하지만 해롱해롱한 와중에 이온유는 여전히 이유영을 찾고 있었다.이온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기억이 있고부터 이유영을 엄마로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세상에는... 종래도 한지음이라는 사람이 없었다.“온유야.”강이한은 애틋하게 이온유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직 열이 조금 있었기에 이마는 뜨거웠으며 얼굴도 열 때문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엄마, 엄마.”“...”이온유는 몸이 허약했기에 매번 아플 때마다 엄청나게 사람 손을 탔다.그리고 이온유가 아플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