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이 장면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으며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하지만 소은지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난 지금 그 사람의 제수씨야.”정말이지 이 신분은 아주 좋은 방패였다.하지만 이유영은 그래도 걱정되었다.강이한처럼 뻔뻔스러운 사람을 상대해 본 뒤, 남자가 일단 체면을 버리면 그건 절대로 여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영은 똑똑히 느꼈다.“아 맞다. 일곱째 도련님이 말씀하기를 오늘 정씨 가문에서 중대 발언이 있을 거라던데. 무슨 일이야?”지금 파리의 사람들은 여진우와 이유영의 신분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정씨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욱 몰랐다.정씨 가문의 가풍은 정말 엄격하기를 말할 데 없었다. 적어도 집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발설할 수 없었다.“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그래. 근데 어찌 됐든 네 외삼촌과 외숙모가 너한테 잘해준다니 그거면 됐어. 난 정말 너 대신에 기뻐. 이건 다 네 복이야.”소은지는 이유영에게 정국진과 임소미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정말 어떤 장면일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그러게. 다 내 복이야!”이유영은 강이한을 떠나면 자기의 삶이 정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다.자기의 배후에 이렇게 큰 가문이 있을 줄 이유영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임소미와 달리, 이유영의 예복은 특수한 설계가 되어 있어서 그녀 몸의 모든 흉터를 다 세세하게 가렸다.하지만 옷을 갈아있을 때, 소은지는 이유영 몸에 있는 흉터들을 보았으며, 줄곧 강인하던 슈퍼우먼은 순간 울컥거렸다.“유영아.”예전에 소은지는 그저 이유영의 목에 있는 화상 흉터들만 보았었다.이유영의 몸에 이렇게 대면적의 흉터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그러니 그 당시 화재 속에서 이유영이 도대체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을 겪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은지야. 울면 안 돼! 오늘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아주 특별한 날이거든.”“많이 아팠지?”평소에 손가락을 데는 정도의 아픔도 그렇게나 아픈데, 더군다나 이유영은 그대 불구덩이
휘황찬란한 로비에 드레스와 샴페인이 불빛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으며 한결 다른 분위기를 이루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담화 분위기 속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새하얀 작은 손이 커다란 남자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으며 그 순간... 이유영과 여진우 두 사람은 높은 곳에 서 있었다.한순간에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두 사람...”어떤 사람은 놀란 나머지 말을 잃었다. 아담한 이유영은 커다란 여진우의 옆에 서 있었다.두 사람은 한 발짝 한 발짝 위에서 내려왔으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무대의 중앙에 도착했다.음악이 휙 변하더니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힐을 신은 여자는 아주 우아하고 숙련하게 남자의 보폭에 맞추었으며 똑같이 생긴, 심지어 완벽한 두 얼굴은 사람들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이유영의 댄스 기초는 아주 좋았으며 여진우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케미에 취해 같이 춤추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한 쌍의 인물 같았다.사람들은 연신 감탄을 보냈다.“너의 춤 스텝은 정말 나쁘지 않은데.”여진우는 이유영의 작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상체를 뒤로 굽히는 순간, 이유영의 유연함을 한껏 자아냈다.얼굴이 서로 가깝게 맞붙은 순간, 사람들은 더욱 냉기를 한껏 들이마셨다.애매하고 몽롱한 분위기였다.“너도 나쁘지 않네.”이유영이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이 혈연이 아니라고 하면 그들도 안 믿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사전에 리허설을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지금 이렇게 서로 합이 잘 맞는 것은 마치 마음이 서로 연결된 것만 같았다.소은지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전에는 그저 가볍게 언뜻 보았을 뿐이었는데 지금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지금은 도대체 무슨 소식인지 알아보겠어요?”남자는 소은지의 옆에 서서 그윽한 말투로 말하고는 가볍게 웃었다.“알, 알겠어요...”세상에! 눈앞의 두 사람이 쌍둥이가 아니라고 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하지만
정국진은 박연준과 서재욱이 같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전에 이유영과 박연준 사이에서 생긴 소문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소곤소곤하기 시작했다.“유영아...”강이한이 입을 열었다. 이 순간 그는 이유영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정국진은 박연준과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재욱은 이유영을 향해 걸어왔다. 비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서재욱이 온몸에서 내뿜는 기운은 사람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유영아.”서재욱은 이유영에게 손을 내밀었다.“...”원래 아파 나는 두피는 지금 서재욱이 자기에게 내민 손을 본 순간, 더욱 미치게 느껴졌다.이건 아수라장일 뿐만 아니라 정말 사람을 피 말라 죽게 했다.이유영은 당장 그 자리에 선 채 사라지고 싶었다!정국진은 이유영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오늘 밤의 중요한 결정을 선포하기로 했다.정국진이 높은 곳에 나타났을 때, 그는 오늘 밤의 가장 중요한 소식을 발표하겠다고 얘기했다.장면은 그제야 조용해졌으며 다들 일제히 정국진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정씨 가문에서 이번 연회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은 정씨 가문에서 중요 소식 발표가 있다는 것을 이미 전해 들었다.“먼저 오늘 밤의 중요한 소식을 발표하기 전, 저는 제 딸과 아들을 먼저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이 말을 내뱉자마자, 현장은 떠들썩해졌다!‘딸? 아들?’다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정씨 가문에는 줄곧 외동딸 정유라만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하지만 지금 정 회장님이 말하기를 딸과 아들을 함께 무대 위로 모신다니?’‘그럼, 그 말인즉 오늘 밤의 소식은 사실...?’강이한의 미간은 한데 찌푸려졌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쳐다보았다.하지만 여진우가 이유영의 손을 잡고 한 발짝 한 발짝 정국진이 있는 무대 위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순간 가슴이... 멎는 것만 같았다.‘설마 두 사람이? 아니, 불가능해! 이건 절대
정씨 가문의 거대한 연회는 온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다. 각 언론사는 서로 앞다투어 기사를 보도했으며 기사 사진은 모두 이유영과 여진우가 손을 잡고 있는 사진으로 기재했다.거의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의 얼굴은 누가 봐도 한배에서 태어난 것이었으면 친형제가 아니라고 말하면 누구도 안 믿을 정도였다.가족사진 한 장으로 파리 사람들은 이들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된 사이인지를 철저하게 인식하였다.발표가 끝난 뒤,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코트를 걸친 채 우아하게 고귀한 옷차림을 한 엔데스 현우의 팔짱을 끼면서 연회장에서 걸어 나왔다.이런 화면은 또 한바탕 기삿거리가 되었다. 엔데스 일곱째 도련님의 종적은... 그야말로 신비하고 알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하지만 이렇게 공식 자리에 덜컥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아내까지 달고 나왔다.차에 오르기 전, 줄줄이 이어진 차 문 앞에 쌀쌀맞은 엔데스 명우가 서 있었으며 그의 옆에는 또 못 보던 여자 파트너가 있었다. 전에 이유영 때문에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여전히 이 꼬락서니였다!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 순간, 소은지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냉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윽하면서도 오만했으며 위험한 기운들로 가득했다.엔데스 명우를 한 눈만 본 뒤, 소은지는 곧바로 눈길을 거두었으며 엔데스 현우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엔데스 명우는 두 손에 주먹을 꼭 쥐었다!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팍팍 돋았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가 아니었다면 엔데스 명우가 아미 정신을 잃고 어떻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도 이 자리에서 소은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었다.엔데스 현우도 마저 차에 오르려는 순간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현우!”내내 침묵을 지키던 여섯째 도련님이 결국 입을 열었다.엔데스 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외부 사람들은 줄곧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과 일곱째 도련님이 엔데스 가문에서 제일 화목한 사이라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소은지의 일이 있고 나니, 전에 얼마나 많은 소문이
하지만 지금 엔데스 현우가 급하게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다니 소은지는 믿어지지 않았다.“일곱째 도련님, 어찌 됐든 저는 너무 감사드려요!”소은지가 말한 건 자기와 결혼해 준 일이었다.탁탁 소리와 함께 라이터의 소리가 들렸다. 엔데스 현우는 시가 한 대에 불을 붙이고는 두 모금 들이켰다. 그는 조금 짜증이나 보였다.사실 오늘 저녁에 이유영을 본 뒤로, 엔데스 현우의 기운은 줄곧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설마, 이 사람 사실은...’소은지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는 말을 계속해 나가지 않았다.엔데스 가문의 모든 것이 정착되면, 모든 것이 엔데스 현우의 손에 들어가면, 그때가 되면 소은지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그럴 수 있었다...소은지는 그저 엔데스 현우에게 힘을 보태주어 그가 최종적으로 엔데스 가문을 손에 넣게 하면 되었다.그때가 되면 엔데스 현우의 형제들은 다 스스로 파리를 떠나서 각자 발전하게 된다. 이 가족은 여태껏 그랬다!마지막에 가문을 손에 쥔 사람만이 진정으로 파리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엔데스 가문의 백 년 안정을 위해서 그랬다.가문을 장악한 뒤, 엔데스 가문의 다른 형제들은 떠나야만 했다.엔데스 명우는 줄곧 엔데스 가문을 철저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이 몇 년 사이에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으며 소은지는 그걸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는 소은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짓밟아버렸다.그래서 소은지도... 그가 제일 원하는 제일 중요한 것들을 철저하게 망가뜨릴 생각이었다....다른 한편, 정씨 가문 쪽... 하객들은 전부 다 떠났다. 강이한은 이유영을 매섭게 쳐다보며 그 순간 무슨 심정으로 그녀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유영아...”순간, 강이한은 숨결마저 긴장해졌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을 한 눈 쳐다보았으며 그녀의 눈에는 아주 비꼬는 감정이 역력했다.오늘 저녁은 파리 전체를 충격시켰지만, 그중에서 마음의 충격이 제일 큰 사람은 아마도 눈앞의 강이한이 분명할 것이었다.
“넌 정말 돼지 새끼보다 못해. 홍문동에서 길렀던 뭉치도 너보다는 사랑스러웠지!"정말 돼지 새끼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돼지처럼 귀엽지는 않았다!만약 일반농장에서 기르는 돼지에 비한다면 아마 강이한은 사람을 제일 열받게 하는 그런 돼지였을 것이었다.하지만 뭉치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눈동자는 순간 풀렸다... 생각은 멀리멀리 날아올라 갔으며 마치 청하시에 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뭉치는... 어느 해 생일 때,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선물해 준 애완 돼지였다. 그때는 엄청나게 작은 미니 돼지였다.이유영이 제일 신났던 거를 하나 꼽는다면 아마도 그 선물을 꼽을 것이었다.게다가 이유영은 강이한의 곁에 있을 때 줄곧 바라는 것이 많지 않았었다...강이한은 언제 어떻게 뒤뜰에서 걸어 나왔는지 모른 채 로비에서 마지막 하객을 마중하는 정국진과 마주쳤다!강이한을 보더니 정국진의 안색은 확 어두워졌다.정국진은 강이한을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의 상태는 다 별로 좋지 않았다. 오늘 저녁의 일은 강이한에게 있어서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그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정국진은 강이한을 보면서 그윽하게 입을 열었다.“난 유영에 대한 너의 그 마음을 이해해. 하지만 네가 너무 과격해!”그동안 모든 사람이 본 것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혹독하게 대하는 것이었으며 너무 과격했다.하지만 유독 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사실 이 방법 외에는 이유영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차가웠다.마치 은하수를 둔 것만 같은 거리감, 도무지 건너갈 수 없을 정도였다.다른 한편, 박연준과 이유영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어두운 귤색 불빛 아래, 잔디에서는 이따금 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당신이 다시는 파리에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아주 돌려서 참으며 말했다.필경 그동안 서주의 일에 대해서 박연준이 이유영을 속인 것도 사실이었고 그녀를 이용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이유영의 속이 불편하지 않다고
박연준의 눈빛은 그윽하기를 밑바닥이 안 보일 정도였다.“있어요?”대답이 없는 박연준을 보며 이유영은 이를 꽉 깨물며 재차 물었다.하지만 박연준은 웃었다.“당신은 이미 마음속으로 나랑 연관되어있다고 단정 지었잖아요?”“한지음 배후에 있던 그 사람도 줄곧 당신이었죠?” “...”박연준이 말한 것처럼, 이유영은 거의 단정 지었다.박연준이 자기를 이용한다는 것을 안 뒤, 이유영은 자기와 강이한 사이를 파괴하는 모든 것, 그것이 한지음이든 아니면 이온유든, 이유영은 마음속으로 반드시 박연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박연준은 그저 말없이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이유영은 가슴이 쿵쾅거렸으며 머릿속의 폭풍우도 더욱 세차게 휘몰아쳤다. 결국 그녀는 쿵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박연준, 오늘부터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친구 사이도 아니에요!” 당장 이곳에서 나가주세요.”말을 마친 뒤, 이유영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발을 두 발짝 내디뎠을 때, 뒤에서 박연준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생각지도 못했어요.”이유영은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고개를 돌리지 않고 제자리에 선 채 박연준의 뒷얘기를 기다렸다.“당신이 바로 정 회장의 친 딸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박연준, 모든 사람이 다 바보인 것은 아니에요!”아무리 예전에 박연준이 그녀에게 말 못 할 정도로 상냥했다지만 그때 이유영은 한 시도 경계심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왜냐?그건 이유영이... 사랑 앞에서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당신은 모든 사람을 경계했지만 유독 그 사람한테는 이상하게 너그러웠어요.”‘여기서 그 사람은 강이한을 말하는 건가!?’“...”이 말에 이유영의 눈 밑에는 위험한 기운이 역력했다.‘너그러웠다고? 아니. 그런 다 내려놓아서야!’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당신은 강이한에게 얻을 목적을 다 이뤘잖아요. 이젠 앞으로 더 이상 나한테 찾아오지 마세요.”이 말만 남긴
그러니 박연준이 강이한의 곁에 한지음을 보낸 것은 그저 강이한과 이유영의 혼인에 금이 가는 것을 가속했을 뿐이었다. 정국진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비록 이유영이 받은 고통의 근원에 박연준의 책임이 있는 것은 맞지만... 박연준의 한 말들은 사실이었다.그 당시 강이한이 한지음을 대하는 태도를 봐서, 한지음이 아니었더라도 신변 관계가 복잡한 강이한이라면...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생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연회가 끝난 뒤, 백산 별장의 사람들은 전부 정리를 하느라 바삐 돌아쳤다. 이유영은 자기를 반산월로 보내달라고 말했다.월이가 아직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유영을 보더니 월이는 까르르 웃으며 두 팔을 치켜들면서 그녀에게 달려왔다. 온몸에는 옷 한 벌과 기저귀만 차고 있었다.꼬맹이의 포동포동한 다리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녹게 했다.“엄마. 엄마.”월이는 이유영의 두 다리를 안으며 그녀의 몸으로 바라 올라가려고 했다.다들 여자아이는 얌전하다고 말하는데 월이랑 같이 지낸 후 이유영이 느낀 것은 이 아이는 사지가 유달리 발달하였다는 것이었다.특히 지금 걸음마도 엄청나게 안정적이었으며 낮에는 두 눈을 뜨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무엇이든 다 놀아보고 싶어 했다.“아가씨.”도우미는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왔다.“왜요?”“아가씨 방에 있던 액세서리를 월이 아가씨가 깨트렸습니다!”“...”이런 소식에 대해 이유영은 정말 놀랍지도 않았다.하지만 도우미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봐서 아마도 깨뜨린 물건이 너무 비싼 것일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고 해도 자기 친 딸이 깨뜨린 것인데 아이를 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다음부터 주의 좀 해주시면 돼요.”“네, 명심하겠습니다.”도우미는 이유영의 말을 듣고 그제야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됐든 그 물건은 딱 봐도 가격이 상당해 보였다.이유영은 품속에 있는 월이를 보며 말했다.“우리 월이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않았습니다.”도우미는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