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욱과 얘기가 끝난 뒤, 이유영은 먼저 소은지를 찾으러 반산월로 갔다... 도착했을 때, 이유영은 지현우가 차에 타는 것을 보았다.온몸에 고귀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한 지현우는 먹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코트는 오히려 그를 길쭉하게 비추었다. 그는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며 그의 눈매는 냉랭하고 독특하며 또 차가웠다!이런 아우라는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이 특유한 느낌인 것만 같았다. 예전에... 다섯째 도련님 몸에서 느꼈었고, 여섯째 도련님에게서도 느꼈었다.지금은 일곱째 도련님마저도... 지현우도 그랬다!차가 그녀의 옆에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반쯤 내려친 차창으로 지현우의 쌀쌀하고 차가운 두 눈은 그녀와 서로 마주쳤다.한 눈이었지만 이유영은 그의 눈빛이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지현우의 몸에는 예전에 이유영의 곁에 있었을 때의 느낌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차는... 갑자기 서더니 그의 그윽한 말소리가 들렸다.“그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네.”현재의 지현우를 마주하자니 이유영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이유영은 그저 지현우가 속이 너무 깊어 속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지현우가 떠난 뒤 이유영은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비록 소은지와 이유영이 약속한 건 저녁 시간이었지만 소은지는 이미 사람들에게 저녁을 위한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별장 안의 경사스러운 장식을 보니, 이유영은 순간 외로이 자축하는 소은지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짠하게 느껴졌다.“유영?”소은지는 이유영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유영이 이렇게 일찍 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소은지를 잡아당길 때 이유영은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으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이유영은... 어찌 됐든 소은지를 지켜내지 못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데리고 한쪽에 자리 잡아 앉고는 도우미더러 차를 올리라고 하였다. 그 후 소은지는 이유영에게 직접 차를 내려주었다. 능
이유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지가 계속해서 말했다.“엔데스 명우에게 잡혀간 후, 내 미래고 뭐고, 다 깨끗하게 망가졌어. 나에게 인생이 어디 있어?”소은지의 말을 들으니 원래 조여오던 이유영의 가슴은 순간 한데 쪼여 들었다.이유영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그저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에게 잡혀 도망칠 수 없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의 모든 것을 망가뜨렸을 줄은 전혀 몰랐다.소은지의 사업, 그녀는 변호사 업계에서 더는 발을 디딜 곳이 없게 되었다.그녀는 자신의 노력으로 공동 사업자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다... 엔데스 명우 때문에 무너져버렸다. 아무리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놓아준다고 해도 그녀의 능력은 더 이상 빛을 발할 길이 없었다.남자는 일단 독기를 품으면 엄청나게 독하게 변했다. 독한 나머지 반항을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은지야.”입을 연 이유영의 말투에는 온통 소은지에 대한 마음 아픔이었다. 마치 예전에 소은지가 이유영을 마음 아파했던 것처럼.“됐어. 슬퍼할 게 뭐가 있어. 어제 오후에 그 인간이 내가 자기 동생이랑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화났는지 모르지.”“...”이유영은 그 장면이 얼마나 아수라장일지 전혀 상상이 안 갔다. 감히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소은지밖에 없을 것이었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보면서 말했다.“유영아, 전에... 그 인간 때문에 네가 손해를 많이 봤지!?”‘전에?’전에 소은지를 구하기 위해, 이유영은 한때 확실히 엔데스 명우에게 많은 것을 타협했었다...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엔데스 명우를 분통이 터지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얼마 손해 안 봤어.”그저 조금 귀찮을 뿐이었지 소은지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이유영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은지는 결국 파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만의 자유의 하늘로 날아갈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손해를 얼마 봤든 간에 내가 다 차근차근 되찾아줄게!”“은
“왜 그 아이를 바로 해치우지 않았어?”소은지는 분노가 가득 찬 말투로 이유영에게 물었다.강이한은 정말 이유영의 세계에서 끝도 없이 나댔다.예전에 이유영을 괴롭힌 것도 모자라 지금은 이런 짓까지 벌이다니 정말 너무했다.“아무리 해도 그 아이는 고작 애잖아!”이유영은 아주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얘기했다.그 아이가 밉고 심지어 꼴도 보기 싫은 것은 맞지만 이유영은 소은지가 말해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이유영은 그런 충동적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그럼, 왜 강이한더러 그 아이를 데리고 꺼지라고 하지 않았어?”소은지는 정말 화가 났다.한지음의 딸이 강이한에게 그렇게 중요한 거면 강이한더러 그 아이를 데리고 평생 같이 살라고 하고 싶었다.분노하는 소은지에 비해 이유영은 오히려 많이 태연해 보였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어찌 됐든 나랑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어디에서 살건 그건 다 그 사람의 자유야!”“너 정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그렇다니까!”한지음 얘기를 꺼냈을 때 속이 좀 불편한 거 외에 이유영은 정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 사람이 파리에 있는 한, 너랑 가까이에 있으면서 분명 계속 사달을 일으킬 거야!”“...”소은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이것도 역시 이유영이 제일 머리 아픈 부분이었다.“됐어. 은지야.”이유영은 이 순간만큼 강이한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이유영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사람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영은 더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럼 너는, 너랑 현우 씨...”이런 상황은 전혀 이유영이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전에 이유영은 계속 소은지를 어떻게 하면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까를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줄은 전혀 몰랐다.조금 전 문 앞에서 지현우를 보았을 때 이유영은 이미... 지현우에게서 짐작이 전혀 안 가는 야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현우 씨가 왜 네 말을
박연준은 전기봉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쉽게 손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지금의 상황에서 전기봉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는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지가 말하기를 그녀가 엔데스 일곱째 도련님 즉 지현우랑 결혼하는 것은 다 전기봉 때문이라고 했다.‘그럼, 은지랑 전기봉은 도대체 어떤 관계지?’생각할수록 이유영은 가슴이 조여들었다...왜냐하면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소은지가 이미 굉장히 무서운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은지가 말했듯이 이제 그녀에게는 아무런 인생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 소용돌이에 빠져든 이상, 그녀는 평생, 이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게 되었다.“은지야...”소은지가 말이 없는 것을 보자 이유영은 자기의 짐작이 거의 맞다는 것을 눈치챘다.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이유영은 말투 속의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됐어.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그럼, 엔데스 명우는 지금...”이 말을 꺼냈지만, 이유영은 더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어쨌든 예전에 설선비라는 사람 때문에 엔데스 명우는 정말 온갖 힘을 다해 소은지를 망가뜨리려고 했다.그래서 이유영이 보기에 소은지가 아무리 지현우랑 삶을 시작했다고 해도 그건 엔데스 명우와 악연의 결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반대로 이건 어쩌면 더 잔혹한 시작일 수도 있었다.소은지가 훗날 마주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니 이유영의 마음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으며 감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은지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이유영은 깊게 숨을 한 모금 들이마셨다.아무리 지금 이런 잔인한 국면까지 이르렀지만, 이유영은 그래도 소은지가 파리를 떠났으면 했다.여긴 너무 난장판이었다!2년 동안의 평온함은 서주의 변동이 있고 난 뒤부터.. 파리도 조금씩 엮어서 움직임이 생겼다. 이유영은 소은지가 정말 걱정되었다.“은지야. 나도 네가 내 걱정하는 거 알아. 근데 난 갈 수가 없어. 그거 알
소은지는 연약한 적이 없었다.그래서 처음부터 이유영은 그런 생각을 갖고 지냈다. ‘엔데스 명우는 은지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거야. 은지에게 신분을 뒤엎을 기회를 주면, 그날은 엔데스 명우의 끝 날이 될 거야.’그게 아니면 지금 상황을 봐서 파리는 다시 난장판이 될 것이 뻔했다.소은지가 말을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봐서 그녀더러 파리를 떠나게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떠난다고 해도 소은지가 말한 것처럼 그녀에게는 더는 미래와 자유가 없을 것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설선비의 원수를 갚아 줄 것에 대한 집착에 의하면, 소은지가 어떤 곳에 간다고 해도 그는 다시 소은지를 잡아 올 것이 분명했다.그때가 되면 소은지에게 도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은지야.”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유영은 결혼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고 다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것들은 다 여자가 쉽게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일단 접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었다.“너 지금 술 마시면 안 되지?”소은지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이유영의 눈 주변을 살살 어루만졌다.“조금은 마실 수 있어.”소은지의 결혼 축하주인 만큼 이유영은 당연히 마셔야 했다.하지만 소은지는 이유영을 말렸다.“넌 술 대신 차를 마셔. 오늘 내가 술에 취하기 전에 넌 집에 못 갈 줄 알아. 알겠지?”이유영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이었다.“그래.”소은지가 취하기 전에 두 사람은 끝내지 않기로 했다!‘이게 얼마 만이지? 은지랑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신 게 얼마 만이지?’예전에 이유영의 몸이 건강했을 적에 소은지는 시간만 나면 이유영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러 갔었다.그때 소은지가 항상 했던 말이 강씨 가문에서 나날을 보내는 이유영이 정말 고달프다는 것이었다.그래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야지 아니면... 정말 언젠가는 우울증에 걸리겠다는 것이었다
이유영이 소은지를 말렸다.“됐어. 인제 그만 난동 부려.”“일곱째 도련님이 왜 나랑 손을 잡았는지 알아?”“전기봉 때문이잖아.”“틀렸어. 내가 엔데스 명우를 무척 미워하는 것 때문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야! 지현우는 그가 죽었으면 해!”“...”‘소문?’소문에 따르면 엔데스 명우랑 사이가 제일 좋은 건 일곱째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소은지의 말대로라면 이 속에는 외부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사실 말이지 소문이라는 것도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하지만 인물관계가 복잡한 엔데스 가문의 특성대로라면 단순하게 사이가 좋은 관계가 그들한테 진짜로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지현우가 돌아왔을 때, 소은지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이유영이 아직도 있는 것을 보고 지현우는 미간을 한데 찌푸렸다.도우미들은 지현우가 돌아온 것을 보고 얼른 만취 상태인 소은지를 부축하여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현우는 이유영을 보며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눈은 아직 수술하지 않았어요?”지현우는 그윽한 말투로 물었다.“제가 시력을 회복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시력을 잃고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 거잖아요. 비록 지금은 흐릿하지만 그나마 보이는 정도라 수술하지 않았어요.”이유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어두움 속에 갇힌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겪어 본 이유영은 잘 알았다.정씨 가문에서 그녀에게 수술을 해주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수술이라는 것을 이유영도 알고 있지만 계속 미루고 있었다.그 과정에 일어날 일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번 어둠을 겪어본 그녀는 도무지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대신해 그런 고통을 똑같이 겪게 할 수는 없었다.“저는 모르고 있었네요.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도련님이 사실은 예전에 제 비서였다는 것 말이에요.”이유영은 살짝 긴장하며 말했다.말이 끝나자, 지현우의 미간은 더욱 세게 찌푸려졌다.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의 외삼촌은 줄곧 알고 있었어요.”“...”이 말을 들은
반산월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들의 차를 가로막았다.기사가 입을 열었다.“이 아가씨...”앞에는 롤스로이스 한대가 길에 가로놓여 있었으며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너무 어두운 밤이어서 이유영의 시력은 조금 모호했지만 그래도 그 롤스로이스가 강이한의 차라는 것을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이유영 온몸의 기운은 순간 차갑게 변했다.쾅 소리와 함께 강이한이 차에서 내렸으며 이유영이 탄 차 쪽으로 걸어왔다. 기사님도 강이한을 알아보았으며 그를 보면서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이 아가씨, 아니면 도로 반산월로...”“괜찮아요.”‘이곳까지 가로막은 놈이 무슨 짓이든 못 하겠어?’이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차 문은 강이한에게 당겨 열렸다.강이한은 아주 매너답게 손바닥을 이유영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그는 사람에게 말 없는 강압감을 주었다.엔데스 현우의 사람 앞에 이유영은 끝내 마지막까지 자기의 품위를 지키면서 강이한을 따라 그의 차에 올라탔다.차는 그리로 줄곧 도원산의 방향으로 갔다.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이유영의 기억 속에 그녀는 입을 열고 강이한과 말하기 시작하면 분노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게다가 강이한도 마치 불붙은 맹수처럼 전혀 공제가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묵묵히 최익준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그에게 도원산으로 와서 자기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도원산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옆에 앉은 강이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난 당신이 다시는 서재욱과 만나지 않을 줄 알았어!”“...”이 말을 들은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시렸으며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건 당신 생각이고.”그동안 강이한은 서재욱에게 맹공격하였다. 이유영을 만나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서재욱을 괴롭히는가 하면 또...강이한의 인식 속에 이유영은 항상 타인에게 민폐를 끼칠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강이한은 이유영이 누가 뭐래도 다시는 서
“당신...”“오늘 서재욱이랑 함께 호텔에서 얼마나 있었어?”“나를 내려줘!”화가 난 이유영은 짝 소리와 함께 강이한의 뺨을 내리쳤다.순간 강이한의 얼굴은 새까맣게 변했다.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그는 이유영을 안은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당신이 소은지를 만났으니 지금 그 여자가 어떤 상황에 엮여있는지도 잘 알겠네. 그 여자에게 한 마디 전해 줘!”“...”“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이랑 막무가내로 맞서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다 걷어치우라고 해. 그 여자는 여섯째 도련님한테 상대가 안 돼...”‘은지더러 생각을 걷으라고?’그건 어려울 거라는 것을 이유영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지금 소은지가 마음속으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엔데스 명우인데, 그녀더러 쉽게 마음을 거두라고 하는 것은 아마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안고 집안에 들어왔을 때, 이온유는 식탁에 앉아서 과일을 먹고 있었다. 이온유는 아주 허약해 보였으며... 아픈 사람처럼 창백해 보였다.이유영은 이온유를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 이유영을 본 이온유는 무의식적으로 겁을 먹으며 강이한의 품에 있는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유영아.”그의 말투 속에는 어쩔 수 없다는 기운이 들어있었다.정말이지 이유영의 키는 이온유랑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게다가 성격으로 봐서도 강이한은 그녀가 어린애 같아 보였다.이유영은 눈길을 이온유한테서 뗐지만, 강이한의 말에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유영은 그들과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강이한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가 이온유를 남몰라라 할 일은 없었다.그리고 강이한이 이온유를 어떻게 대하든 그건 이유영과 상관이 없어졌다.결론적으로 강이한은 이유영을 데리고 의무실 쪽으로 갔다.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을 봤을 때, 이유영은 어안이 벙벙했다.“뭐 하자는 거야?”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경보음이 울렸다.강이한의 의료진이 그녀에게 하려는 짓은 그녀를 핍박하는
여진우가 돌아왔을 때, 강이한은 여전히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고 떠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집 안쪽을 힐끗 보았다.여진우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천천히 강이한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순간,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지금 상황에 여기까지 올 여유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여진우가 말했다.서주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국진이 발을 뗀 이후 이유영은 서주와 거리를 두었지만 여진우만큼은 그곳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지금 서주는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서주의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곳까지 올 결심을 한 것이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유영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강이한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전생에, 강이한은 이유영과 여진우가 남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사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그들의 닮은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랬다면 서주에서 여진우를 만났을 때 이유영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널 과소평가했어. 이렇게 빠져나올 줄이야!”강이한은 서주를 언급하며 말했다.여진우가 만약 능력이 없었다면, 이번 서주 사태는 여진우에게도 큰 위기가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여진우는 담담히 말했다.“인생은 많은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중요한 것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해!”여진우의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강이한은 여진우의 말을 곱씹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중요한데 포기한다고?여진우는 강이한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갔다.“하지만 너한텐 포기라는 건 없어 보이네.”“...”“예를 들면, 이온유...”이온유. 그렇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핵심 갈등은 연서였고 그 문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존재는 바로 이온유였다.강이한은 여진우를 바라보며 입술을 다물었다.여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려 집 안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말했다.“서주로
“정 선생임...”강이한은 믿기 어렵다는 듯 정국진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이 정국진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정국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설마 또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과거에.강이한은 이유영 앞에서 여러 차례 그저 아이일 뿐이라는 말을 강조해 왔다.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이유영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뜻인가? 월이가 희생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던 걸까?그 순간.정국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강이한의 가슴에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았고,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깊이 찔러 들어왔다.누구나 이성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감정은 편애를 피할 수 없다.그리고 강이한의 편애는 분명히 한지음과 한지음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그는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만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었다. 이유영과 아이에게는 그의 모든 행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이한, 이번이 마지막이다.”정국진은 강경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여기서 떠나!”그의 말투에는 명백한 경고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정국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정국진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긴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단 하나였다.강이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유영과 월이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지음도, 한지음의 딸도 그저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일 뿐이었다.월이와 이유영은 어떤 의무도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강이한은?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백산 별장.임소미는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천천히 걸으며 달래고 있었다. 아이의 감정은 이제서야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월이는 강이한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를 본
강이한은 눈썹을 찌푸린 채, 여전히 이유영과 임소미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만 쳐다봐!”정국진이 말했다.정국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단호했다. 외조카와 친딸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었다.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이유영이 서주에서 돌아온 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국진은 여진우를 통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정국진의 태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정국진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방금...”“네가 본 대로다. 유영이의 시력은 급격히 악화했고 의사 말로는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정국진의 차가운 말이 강이한을 가로막았다.강이한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숨 막히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이유영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유영이 엄마 말로는, 박연준이 유영이를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더군.”알프산? 강이한의 표정이 굳었다.“...”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강이한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었다.이유영의 몸 상태로는 그런 추운 지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가 단순히 추위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눈부신 설원과 강한 햇빛이 유영이의 눈에 치명적인 자극과 손상을 남겼어. 지금 시력이 이렇게 된 것도 그 탓이지.”정국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은 이미 느끼고 있던 가슴속 고통이 정국진의 이 말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결국... 박연준이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간 탓에 그녀의 시력이 이렇게 빠르게 악화한 것인가?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강이한은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얼어붙은 광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정국진은 강이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시 찾아오지 마라.”기회는 이미 넘칠 만큼 주어졌다. 강이한은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을
이유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허리에 전해진 강한 힘이 이유영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익숙한 기운이 스며들며 이유영을 감싸안았다.중심을 되찾는 순간, 이유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 자신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와아아...”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유영의 차가운 눈빛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이유영은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아이에게 달려갔다.“월이야, 월이야.”이유영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엄마, 무서워요!”“괜찮아. 엄마가 여기 있잖아.”“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작은 아이는 두려운 목소리로 강이한을 보고 외쳤다.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강이한은 아이의 입에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나쁜 사람... 이의 기억 속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그래, 이게 바로 그가 아이에게 남긴 흔적이었다.이것이 바로 그의 존재가 남긴 기억이었다.“그래, 맞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하지만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어떤 나쁜 사람도 월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이유영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강이한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고요한 광경이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놓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하인들과 집사들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강이한을 보자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이내 임소미와 정국진도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임소미는 강이한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여긴 왜 온 거야?”임소미의 말투는 한 치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유영이를 좀 봐.”정국진이 임소미에게 말했다.임소미는 강이한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이유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감정을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