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엔데스 명우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근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해!”“...”“내일 당신을 데리고 이유영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후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알겠어?”‘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앗싸, 좋아! 너무 좋아!’소은지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른다.하지만 소은지는 이런 상황에서 이 답을 들기를 절대 바라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유영이를 놓아줄 거야?”“그 여자는 내 미래의 왕비야. 놓아주고 말 것도 없어. 그녀는 파리에서 지고 지상의 여자가 될 거야...!”“걘 그런 거 원하지 않아!”소은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엔데스 명우는 자기가 이유영에게 제일 좋은 것을 준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이유영이 어떤 사람인지 소은지가 모를 리가 없었다.제일 웃긴 건 이 남자는 심지어 이런 방식으로 소은지와 이유영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다.“보아하니 당신은 이유영과의 사이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소은지는 말이 없었다.엔데스 명우 같은 사람이 어떻게 우정을 이해하겠는가?“당신 같은 사람은 아마 평생토록 진정한 친구가 없을 거야.”“그럼, 어디 두고 봐. 이유영이 당신을 미워하는 날이면 어떨지?”“...”엔데스 명우 눈 밑의 미소에는 그토록 강인한 자신감이 붙어있었다.마치 그가 말한 일이 바로 내일에 일어날 것처럼!하지만 소은지는 줄곧 자기와 이유영 사이의 감정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한테서 이유영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소은지는 그래도 저도 모르게 숨이 턱턱 막혔다.“걱정하지 마. 절대로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비록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소은지는 이 순간까지도 굳게 믿고 있었다.엔데스 명우 눈 밑의 풍자함은 더욱 짙어졌으며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소은지는 호흡이 조금 가빠져서 엔데스 명우에게 눈을 떼고는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와인잔이 대리석 테이블이
‘공항? 손을 잡았다고?’‘이런, 엔데스 명우가 고의로 이런 일을 벌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 정말 비겁한 사람이네!’이유영은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잡으면서 말했다.“외숙모 이 일은...”“파리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야?”전화 반대편 임소미의 말투는 순간 엄숙해졌다.아무래도 외삼촌이랑 같이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한 여인인지라 외숙모도 정말 세심하고 민감하기 그지없었다.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했다.“일이 좀 생기긴 했는데 외숙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이쪽에서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유영이 너 어떻게 처리할 거야?”‘어떻게 처리하냐고? 외삼촌이랑 상의 했던 대로만 하면...!’당연히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뭘 하든 다 하기 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이 매체에 까밝혀진 이상, 이건 이유영을 제일 앞으로 미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지금 후퇴를 한다고 해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이 엔데스 명우라는 자는 단지 소문으로만 듣던 마음이 독하고 성질이 더러운 남자만은 아니었다. 지금 보니, 그는 세심하고 치밀하기까지 했다.일단 그에게 빌미를 잡히기만 하면 그의 손에 꼭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네 외삼촌이 돌아간 것도 이 일 때문이야?”이유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임소미가 계속해서 되물었다.이유영은 눈을 감았다!‘외삼촌도 참 가엽네.’“유영아!”“외숙모, 외삼촌은 외숙모가 걱정할까 봐 걱정돼서...”필경 파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엔데스 가문의 도련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다행히 이 도련님들은 단결하지 못했다. 만약 이들이 서로 단결해서 다 같이 대외적으로 맞선다면 다른 사람들은 기회조차 없었다.그러면 아마 파리는 온통 엔데스 가문의 것일지도 모른다.“너희들 정말 갈수록 말이 안 되잖아.”뚝. 뚝. 뚝.임소미는 호통을 친 후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나 이유영은 전화가 끊긴 소리를 들으면서 제자리에 멍해서 전혀 반응을 잃었다!‘이게 무슨 일이야?’‘이건...’이유영은 가족들이 자
이유영은 어제까지만 해도 다 자기의 생각대로 이뤄질 것만 같이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일이 전부 다 탄로되어 온 파리 사람들이 다 알게 된 이상, 예상 밖의 상황이라도 생기면 다 같이 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이었다.이유영은 몹시 화가 났지만 그래도 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정국진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일은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진행해야 해.”“네?”“이렇게 된 이상, 누가 더 체면을 중시하는지 볼 수밖에 없어.”“…”‘무슨 뜻이지?’이유영은 외삼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설마 이 시점에서 누가 더 뻔뻔하게 나오는지 보려는 건 아니겠지?’“유영아.”“네.”“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넌 지금 계속해서 엔데스 명우랑 관계를 이어 나가서는 안 돼.”정국진은 아주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유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네.”이 점에 대해, 이유영은 섬에서 나갈 때부터 알아차렸다. 하지만 엔데스 명우가 자기를, 이 지경까지 밀어 넣을 줄 이유영도 몰랐을 뿐이었다.지금 그녀는 몹시 골치가 아팠다.하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 제일 중요한 건 소은지의 사건에 대해 결판을 짓는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일단 뒤로 미루고 봐야 했다!…다른 한편, 풍산의 서재에서…!현 시각 공기 속에는 끊임없이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쳤다. 손에 아이패드를 든 박연준의 눈에서는 예전의 그런 부드러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지금의 박연준은 매섭고 위험해 보였다.문기원도 옆에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한참 지나서야 박연준은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풍기면서 입을 열었다.“현재 정국진 쪽 태도는 어때?”조건 전 박연준이 본 건 기사에 실린 이유영과 엔데스 명우가 공항에서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분명했다.마치 이런 강렬한 방식으로 정씨 가문의 후계자가 엔데스 명우랑 만난다는 것을 온 파리에 명백히 알리는 것만 같았다.“정씨 가문에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문기원이 대답했다.이건 예상했던 그림이었다.박연준의 눈 밑에는 씁쓸
한편 시테섬에서, 소은지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오그린 채 누워있었다. 엔데스 명우는 이미 옷차림을 단정히 하여, 다시 품위 있고 우아한 모습을 되찾았다.정말이지 엔데스 명우를 만났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그에 대한 편애를 감탄할 것이었다.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에게 편애를 받는 남자는 밤이 되면... 아주 끔찍하고 악랄했다.진흙처럼 휘늘어진 소은지를 보는 엔데스 명우의 눈에는 온통 경멸이었다.“당신 이제 가도 돼.”엔데스 명우는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가도 된다고?’드디어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2년이 되었다. 꼬박 2년 동안, 소은지는 줄곧 이곳에서 지냈다. 외부랑 연결을 하지도, 외계 소식을 접하지도 못했다.소은지는 거의 이곳에 묻힐 때까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길 나 갈 수 있는 날이 올지 생각지도 못했다!근데 이런 방식으로 나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소은지는 가슴 한쪽이 끊임없이 떨렸다.엔데스 명우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문고리에 올린 순간,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소은지에게 말했다.“난 당신이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나에게 빌기를 기대하고 있어.”‘빈다고?’이유영의 눈 밑에는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소은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엔데스 명우가 입을 열고 마저 말했다.“내기 하나 할래? 당신은... 반드시 제 발로 기꺼이 여길 다시 찾아올 거야.”“헛된 생각하지 마!”소은지는 분노하며 외쳤다.“허!”엔데스 명우는 냉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소은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빈다고?’엔데스 명우가 이 단어를 내뱉을 때 소은지는 사실 이미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놔 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엔데스 명우는 그저 소은지에게 두 개의 선택 항을 주는 것이었다. 떠나거나 남거나, 소은지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진짜 이곳에서 떠나야만 했다. 아니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분명 평생토록 보기 싫은 악몽 같은 장면일 것이었다....백산 별장에서, 엔데스
이유영의 믿을 수 없는 눈초리는 지금 놀람으로 가득 찼다. 소은지가 이런 말을 내뱉을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은지 지금 나랑 절교하자는 건가!?’‘엔데스 명우 때문에?’“은지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이유영은 살짝 울컥하면서 말했다.“너랑 강이한이 이혼할 때 난 찬성했어. 그리고 네가 박연준이랑 만나든 아니면 서재욱이랑 만나든 난 다 찬성이야. 근데 유영아...”여기까지 말한 소은지는 갑자기 멈칫거렸다!이유영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사업상의 정상에 오른 슈퍼우먼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소은지의 날카로움은 절대로 자신을 겨냥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눈초리를 보며 이유영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은지의 날카로운 눈빛과 이유영의 억울한 눈빛은 아주 선명한 대비가 되었다.두 사람은 그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이유영은 갑자기 코를 훌쩍이면서 소은지를 확 잡아당겼다.그리고 입을 열면서 물었다.“은지야, 너 왜 그래?”“유영아, 그 사람한테서 떨어져. 그 사람과의 혼인 계약을 취소해. 나랑 그 사람, 네가 멋대로 생각한 그런 사이가 아니야...”여기까지 말한 소은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그리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소은지의 눈빛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그럼 어떤 사이인데?’‘내가 멋대로 생각했다고?’‘정말 은지말대로 내가 멋대로 생각한 거라면 왜 모든 사람들은 다 알면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지금 은지가 나보고 멋대로 생각한다고 하다니.’이유영의 억울한 표정을 보며 소은지의 마음속도.... 뒤죽박죽 흔들렸다. 그리고 소은지의 눈빛은 더욱 엄숙하게 변했다.소은지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난 그 사람을 사랑해!”소은지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 감정이 없이 아주 차갑게 내뱉었다.하지만, 이 세글자가 소은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영은 살며시 조심스럽게 소은지를 자기의 품속에 안았다.“내가 다 안배해 뒀어. 오늘이면 바로 파리를 뜰 수 있어.”“이유영.”“됐어. 제발 그런 사나운 말투로 날 대하지 마.”이유영은 억울하다는 듯이 웅얼거렸다.소은지가 어떤 사람인지 이유영이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미 엔데스 명우를 건드린 이상 지금 아무리 나서서 해명을 해봐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유영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지금 상황이 이렇게 난장판이 된 이상, 이유영은 자기가 손해를 볼 수 없었다. 이때 누가 뭐라고 해도 이유영은 소은지를 파리에서 떠나게 해야 했다.소은지는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숨이 막혔다.그녀의 모든 위장과 강인함은 이유영의 억울한 말투 때문에 무장 해제되었다.“유영아.”소은지의 뻣뻣한 몸은 순간 이유영의 아담한 몸에 휘늘어졌다.이유영의 몸에 기대자마자 소은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아무리 소은지 같은 강인한 여자라고 해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쁜 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좋은 곳을 찾아 의지하고 싶어진다.“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졌어.”이유영은 작은 손으로 소은지의 여윈 등을 살살 토닥이었다.소은지는 소리조차 떨리면서 말했다.“그 남자는 아주 무서워.”“응. 나도 알아.”“유영아, 너 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너 입 다물어!”이유영은 화를 냈다.“하지만 난 진짜...”“내가 다 안배 시켜놨어. 루이스가 널 안전한 곳을 모실 거야. 이후의 일은 다 내게 맡겨줘. 응?”이유영의 말투 속에는 강렬한 달래는 느낌이 있었다.“...”정말이지 소은지도 엄청나게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가 아침에 자기한테 한 말들을 생각하면 그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나 미워하는데 정말 자시를 놓아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소은지는 떠나면 안 되었다.만약 소은지가 정말로 떠난다면 그녀는 정씨 가문과 이유영까지 연루시키게 되는 것이었다.“유영아, 날 믿어줘. 내가 더 정리할 수 있어.”“난 설신비라는 여자가
이미 강이한 때문에 암흑의 세상에서 오랫동안 갇혀 지낸 이유영을 자기 때문에 또다시 악마 같은 사람이랑 혼인을 맺게 하려니, 소은지는 도무지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아니야. 너 무슨 그런 말을 하냐?”“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당연하지.”“...”“됐고 얼른 차에 타기나 해.”소은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유영은 바로 소은지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소은지는 차에 탄 후 바로 창문을 열고 걱정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눈시울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나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랬다!”“네, 네, 네. 얼른 가.”이유영은 아주 편안한 척 연기를 했다.하지만 이런 이유영의 모습을 보고도 소은지는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금 아무리 이유영의 배후에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해도 소은지는 그저 걱정되었다. 엔데스 명우는...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다.마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서로 맞바꿀 수 없는 그런 무서움이어서 소은지는 진심 이유영이 정말 그 남자 때문에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소은지가 탄 차가 시야에서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드디어 다 끝났네.’엔데스 명우랑 소은지 사이가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이유영은 생각했다....별장으로 돌아오니 정국진이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이유영 얼굴에 생긴 빨간 손자국을 보며 정국진이 물었다.“누가 때렸어?”그의 말투에는 위험한 기운이 몇 푼 들어있었다!정국진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거의 까먹을 뻔했다. 그녀는 자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내심 소은지의 손이 정말 맵다고 생각했다.“참으로 드센 계집애야!”이유영은 한마디 중얼거렸다.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정국진의 눈빛은 조금 어두워졌다.필경 이유영이 정국진의 곁에 돌아온 이후, 정국진은 다른 사람이 이유영을 해치게 놔두지 않았다.그리고 이번 일이 아무리 배후에 그렇게 중요한 이익 관계가 있다고 해도 정국진은
정국진은 이유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여섯째 도련님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이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정국진을 바라보았다.분명한 건 정국진도 사실 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이 보기엔 엔데스 명우는 정말 하루 이틀 나쁜 그런 악질적인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외삼촌이 그 사람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하니, 이유영도 조금 호기심이 났다.“그럼, 예전의 여섯째 도련님은 어떤 사람이었는데요?”“침착하고 내성적이며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주변의 인간관계도 깨끗했어!”‘깨끗?’이유영은 마지막 단어랑 그 남자를 전혀 연상시킬 수 없었다. 74번... 이게 무슨 수자를 의미하는지 이유영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알았다.지금까지도 이유영은 엔데스 명우를 떠올리기만 하면 그 사람이 소은지한테 했던 치욕적인 일들이 생각나서 치가 떨리곤 하였다.“그 사람이 바뀌게 된 시작점이 바로 청하시의 그 여자 때문이었어.”“설신비?”“응.”이유영의 가슴은 조금 무거워졌다.이렇게 보니 엔데스 명우랑 소은지 사이에 도대체 왜 그런 원한이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엔데스 명우의 입장에서 보면 설신비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소은지가 양심에 어기는 재판을 해서 그 재판에서 졌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진실은 과연 그런 것일까?“예전에 너한테 말하지 않았던 건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과 그 애 사이의 원한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지금 일시적으로 그 애를 도울 수는 있어도 평생 도울 수는 없어!”“...”안색이 안 좋던 이유영은 외삼촌의 말을 듣고 마음이 더욱 말이 아니었다.‘그런 거 보면 엔데스 명우랑 은지 사이는 그러면 한 쪽이 죽지 않는 한 끝이 나지 않는 건가!?’여기까지 생각한 이유영은 골치가 아파 나는 것 같았다.“마음속으로 제대로 미워하는 게 아니면 어떻게 엔데스 가문의 사람인 여섯째 도련님이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소은지를 찾아왔겠어?”“전...”이 순간,
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온몸이 굳어버렸다.어머니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크게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다.마음속에서 요동치던 불안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간절함은 이 순간 잠잠해지며 차분함이 찾아왔다.“아가씨.”“우지 씨, 물 좀 가져다주세요.”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우지는 서둘러 나갔다가 금방 물을 들고 돌아왔다.강이한은 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 안이 차분해진 모습을 보며 강이한의 눈에 안도감이 비쳤다.역시, 익숙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상황이 달랐다.지금 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것이 강이한을 가장 답답하게 했다.하지만 지금은 우지와 우현이 함께 있으니, 이유영도 차분해진 것 같았다.비행기가 유천에 착륙했다.그 순간, 마치 공기까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리와 서주의 날씨는 좋지 않은 날이 많았지만 유천은 달랐다.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불리며 은퇴한 사람들이 여생을 즐기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었다.독특한 지역 문화를 담은 공항의 건축 양식을 바라보며 강이한은 그곳에 한눈에 반한 듯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이유영은 강이한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그가 느끼는 편안함을 감지하고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는 이곳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유영도 과거 유천의 특별한 매력을 들었을 때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유영과 강이한은 늘 긴박한 환경 속에서 지내왔기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유영아, 조금만 얌전히 있어. 여긴 낯선 곳이니 내 옆에 있는 게 안전해.”강이한은 이유영이 어둠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민감해도 지금 있는 이곳은 완전히 낯선 환경이었다.그가 기억하는 지난 생애에서 이유영이 시력을 잃은 뒤 거의 홍문동을 벗어나지 않았다.그곳에서는 기본적인 생활은 어느 정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
한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갈등이나 의견 차이가 있을 때마다 둘 사이의 아름다웠던 기억들에 기대어 버텼다.이유영은 자신과 강이한의 만남은 아름답고 추억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아무리 아름다웠던 기억도 이유영의 마음을 지탱해 주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그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를 일찌감치 떠나온 것을.만약 아직도 미련을 붙잡고 있었다면, 가장 소중했던 추억들이 거대한 음모 속에서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유영은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도 이유영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다른 건 모두 네 뜻대로 해도 돼. 하지만 유천에 가는 건 반드시 내 말대로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조심스레 침대 위로 눕혔다. 지금 강이한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은 너무나 강압적이었다. 이유영은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그 감각은...이유영의 마음을 한없이 불안하게 했다.이유영은 깨달았다. 마치 자신이 지난 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시절, 이유영은 너무 오랫동안 어둠 속에 머물며 어둠에 대한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그리고 그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이유영의 머릿속으로 몰려들었다.강이한이 방을 나갔다.잠시 후, 우지와 우현이 방으로 들어왔다.“아가씨.”우지가 이유영의 곁으로 다가왔다.우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유영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우지 씨,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아가씨… 혹시, 눈이...”우지는 이유영의 두 눈을 보고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조차 초점 없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우지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이유영은 예상하지 못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여기로 데려온 것도 모자라 반산월에서 우지까지 데려올 줄은.“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이유영은 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미칠 듯 서글펐고 동시에 눈물까지 흘러내릴 만큼 절망적이었다.“유영아...”강이한은 이유영의 웃음에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돼서는 안 됐다. 왜 꼭 이런 지경까지 와야만 했을까? 그리고 이렇게까지 오게 된 게, 과연 누구 탓인가?이유영은 광기가 폭발하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평온을 되찾았다.하지만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이유영의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강이한은 그 떨림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강이한, 네 인생에서 나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아.”한때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전생의 기억까지 모두 떠올랐다...사람들은 말했다. 이유영은 복 받은 여자라고. 강이한에게 아낌없이 사랑받으며, 그저 강씨 가문의 작은 부인으로 편안히 지내기만 하면 되는 인생이라고.강이한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선택하든, 항상 강이한이 결정했고 이유영은 강이한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혼자 선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제 와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을 때, 강이한 역시 깨달았다. 자신이 이유영의 삶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 잡았는지를.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그래서 무엇이든 그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이유영의 삶을 세세히 돌보는 데도 강이한의 성격이 드러났다.작은 것 하나까지 강이한의 뜻에 따라야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이유영은 그에게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게 되었다.“유영아...”과거, 모두 이유영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알아?”“...”이유영이 계속해서 강이한에게 상기시켰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이 다시금 이혼 이야기를 꺼냈
우천시?그곳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유영이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유영이 언젠가 강이한에게 시간이 나면 꼭 데려가 달라고 했던 곳이었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잠시 머물러 그곳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정서를 느껴보고 싶다던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날... 집으로 보내줘!”단호한 목소리의 이유영에게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이유영은 우천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영이 지금 원하는 것은 그저 이 남자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특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무력감에 휩싸인 채 그와 함께 있는 건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이유영은 지금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강이한의 곁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단 한 순간도.“조금만 더 견뎌.”강이한은 이유영 옆으로 다가가 얼음처럼 차가운 이유영의 손을 잡았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단번에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강이한이 손에 힘을 주며 단단히 붙잡았다. 이유영은 결국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온몸이 떨렸다.강이한도 이유영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유영아.”“내 손… 놓으라고 했잖아!”이유영의 목소리 역시 떨렸다. 그 떨림은 이 남자에 대한 완전한 거부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뚜렷이 느꼈다. 그 거부감은 강이한의 마음을 더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절대로 널 놓지 않을 거야.”강이한의 목소리는 무겁고 쓸쓸했다.그래, 놓지 않겠다고.“...”놓지 않겠다고?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뿌리치려 안간힘을 썼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을 완전히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강이한이 팔에 힘을 주자 이유영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강이한!”“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이유영의 몸이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강이한의 가슴을 더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눈을 뜬 이유영은 곧 이상한 점을 느꼈다. 침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상황을 확인하려고 눈을 떴다.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이유영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휙’ 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유영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러나… 어둠뿐이었다. 눈앞은 온통 깜깜했다.손을 뻗었지만, 손끝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었다.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아무리 어두워도 시력이 있다면 손그림자 정도는 보인다고. 그러나 지금 이유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이 이런 상태로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동안, 강이한이 움직임을 느꼈다.다가가 보니, 이유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눈은 공허하고 생기를 잃은 채 텅 비어 있었다. 강이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눈이 저토록 생기 없이 죽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리고 지금 이유영은…“유영아…”가슴이 답답하고 아프기까지 했다. 입을 열었을 때, 강이한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목소리를 듣고 몸이 더욱 긴장했다. 그의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보려는 듯했다.설마…“너…”설마 지난 생으로 돌아온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대체 무슨 일이야?”강이한이 앞으로 다가와 이유영을 단단히 끌어안았다.이유영은 창백한 얼굴로 귀신이라도 본 듯 강이한을 밀어냈다. 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과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진정은커녕 점점 더 불안해졌다. 마치 폭풍처럼 이유영의 신경과 이성을 휘몰아쳤다.“여기가 어디야?”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유영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이 답했다.“비행기 안이야.”비행기?이유영은 지난 생을 떠올리려 애썼다. 강제로 수술을 받은 뒤로 강이한이 이유영을 홍문동 밖으로 데리
“국진 씨, 제발 유영이를 꼭 데려와 주세요!”임소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반드시 빨리 찾아와야 한다. 절대로 강이한 곁에 남겨둬선 안 된다.현재 서주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강이한이 서주에서 가진 특별한 신분을 생각하면 이유영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그 순간,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임소미는 재빨리 여진우에게 다가가 물었다.“진우야, 소식 있어? 설마 서주로 간 건 아니지?”서주!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처음 떠올린 건 서주였다.지금 서주의 상황을 보았을 때 강이한이 이유영을 서주로 데려갔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그런데 서주의 상황 자체가 이미 그리 좋지 않은데 강이한이 하필이면 지금 이유영을 데려갔으니... 임소미는 이미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여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이 답변은 모두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아니라고? 서주로 간 게 아니라고?“강이한과 함께 파리에서 온 이정은 돌아갔지만, 강이한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이 말을 듣자, 임소미는 완전히 기운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서주의 상황이 지금 이상하긴 하지만, 만약 강이한이 이유영을 서주로 데려갔다면 최소한 목적지가 있어 이유영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강이한은 자신이 데려온 사람을 되돌려보냈을 뿐, 이유영을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유영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사람과 엮인 걸까!”임소미는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였다.정국진도 임소미와 마찬가지로 긴장된 상태였다.이 소식은 그들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상황을 모를수록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기 쉽다.게다가 그들은 이미 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 희생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그것은
엔데스 명우는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소은지에게 철저히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백산 별장 쪽 상황.아침부터 백산 별장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백산 별장은 이유영의 실종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유영이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없어졌다. 그런데 그 편지의 글씨는 이유영의 필체가 아니었다.정국진이 편지를 들고 살펴본 뒤 이 글씨는 강이한 것임을 확신했다. 편지 내용은 단 한 문장이었다.“무사한 상태로 데려올 겁니다.”“무사한 상태? 무사한 상태라는 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 건가?”분명한 것은, 임소미도 이 편지가 누가 쓴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어제 강이한이 여기 나타났고 오늘 아침 이유영이 사라졌다.백산 별장의 모든 보안 시스템을 무사히 뚫고 사람을 데리고 나가다니, 강이한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했다.그러나 강이한의 이런 능력은 사람들의 이를 갈게 만들었다.정국진의 눈빛 역시 날카로웠다.“국진 씨, 반드시 유영이를 데려와야 해요. 반드시...”임소미는 이미 감정이 북받쳐 올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상태였다.많은 일이 벌어진 뒤였다.임소미는 이제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재앙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와 함께 있는 한,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유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일 정도였다.“알겠어.”정국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정국진의 눈에도 살기가 번뜩였다.이유영은 지금 누구보다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수술을 앞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이유영을 데려가다니.다른 때는 마음대로 날뛰어도 괜찮다 쳐도, 지금은... 여진우의 사람들까지 이유영을 찾으러 나갔다.그 순간, 반산월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집사가 전화를 받은 뒤, 엄중한 표정으로 다가왔다.“사모님, 선생님!”“무슨 일이야?”“반산월 쪽에서...”여기까지 말하고 집사가 잠시 머뭇거렸다.“반산월에 무슨 일이야?”이미 충분히 긴장한 상황에서 반산월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더욱 긴
“소은지, 네가 그 사람과 정말 오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 사람 마음속에 네 자리는 없어. 언젠가 너는 버려질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그때쯤이면, 여섯째 도련님, 네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실컷 봤겠지. 너의 모든 추한 꼴을 확인했으니 나는 손해 볼 게 없어.”“...”말이 끝나자, 남자의 분위기는 한층 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소은지는 단순히 다루기 어려운 상대를 넘어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난공불락의 존재였다.결국, 엔데스 명우는 화를 억누르며 소은지를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지금의 소은지는 그야말로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엔데스 명우가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제안했음에도 소은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이런 태도는 엔데스 명우에게 증오와 답답함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차 안에서.옆자리에 있던 배천명이 어색한 공기를 감지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은지 아가씨 쪽에서 여전히 거절이신 건가요?”‘아가씨’라는 호칭은 엔데스 명우의 측근들 사이에서 소은지를 지칭하는 통상적인 표현이었다.과거에, 누군가 그녀를 ‘일곱째 사모님’이라 불렀다가 엔데스 명우에게 바로 응징당해 입에 피를 흘리며 쫓겨난 일이 있었다.이런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관계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소은지의 완강한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배천명의 물음에, 엔데스 명우는 한 손으로 짓눌리듯 아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이 여자를 너무 쉽게 본 것 같다.”이 말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엔데스 명우가 처음 소은지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소은지를 굴복시켰던 걸까?분명한 것은, 소은지가 끝내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은지의 눈 속에 담긴 강인한 고집은 언제나 선명했다.수년간 얼마나 많은 여자가 그에게 몰려들었는가? 그들이
언제 조건을 말했다는 건데?도대체 언제였다는 걸까?눈 내리던 날, 설선비의 추락 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며 반복적으로 항변했던 그때를 말하는 걸까?‘넌 나를 이렇게 대할 자격이 없어.’라고 했었던 말을 가리키는 걸까?그 모든 말 속에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에게 내건 조건들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결과는?결과는 뻔했다.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청하시 사업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소은지의 명성을 어떻게 철저히 짓밟았는지.청하시에서는 패배를 모르는 전설적인 변호사 소은지의 진짜 얼굴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떠들썩했지만, 그 기사를 본 소은지의 마음은 고통과 분노로 폭발 직전이었다.“과거에 나를 파멸로 몰아넣을 때 그토록 신속하고 냉혹하더니, 여섯째 도련님도 감정에 얽매일 때가 있다니 놀랍군.”소은지의 말은 점점 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워졌다.그랬다.그날,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에게 모든 진실과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전했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소은지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조건을 듣겠다니! 소은지의 삶에는 더 이상 조건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설령 소은지가 내건 모든 조건이 하나하나 충족된다고 해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그건 소은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나는 항상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나아가는 사람이야.”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네가 나한테 주는 보상들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설령 같은 사회적 위치를 되찾아준다 해도 그것은 소은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이 모든 것을 소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어떤 보상도 소은지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게 지금의 소은지였다.“정말 잘난 척하는군. 스스로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 사실 너도...”“맞아, 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해. 하지만 예전에 내 대단함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