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이 저 사람은…! 이유영은 잠깐 멍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가에는 싸늘한 기운이 드리웠다. 2년! 꼬박 2년이 지났다.저 사람은 청하시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아 맞다. 어제 그 행사!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니.“대표님.”루이스도 한눈에 앞에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강이한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검은색 트렌치코트에 깔끔한 빡빡이 머리, 날카로운 얼굴 실루엣, 특히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매, 2년 전과 선명하게 달라 보였다.이유영한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강이한을 보고 루이스는 차에서 내려 강이한을 막으려고 하였다.하지만 강이한 옆에 있던 이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억지로 루이스 앞을 막았다.“이 대표님, 우리.”강이한을 보고 조민정도 깜짝 놀랐다.요 2년 동안, 이들도 이유영과 함께 모두 파리에서 지냈다. 이유영이 간혹 외국으로 출장을 간다지만 그래도 근 2년간의 생활 궤적을 청하시에 있는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이유영은 원래 담담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가끔 청하시 감옥에서 수감 중인 강이한이 지금 이런 상황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근데 꼬박 2년 동안, 이유영의 삶에는 강이한이 전혀 없었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강이한이 이유영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모른 채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이유영이 점점 잘 나가고 이룬 성과들도 점점 많아져서 각 경제 뉴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심지어 국제 비즈니스 강연에도 초대될 만큼 성장할 지 아무도 몰랐다.특별히 지금 강이한의 출현은 그제야 이유영 주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하지만 지금…!‘쾅.’자동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엄청 차갑고 강렬한 아우라가 풍겼다.“이 대표님.”옆에 있던 조민정도
좁은 차 안의 분위기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할 정도로 쌀쌀했다.‘찰싹!’또랑또랑한 뺨 맞는 소리를 듣고 앞에 앉아 있던 이시욱도 깜짝 놀랐다.강이한 편인 사람들은 지금 당연히 이유영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다.강이한이 왜 2년이나 감옥에 있었는지. 설령 동교와 정유라 일 때문일지라도 그 일에는 강이한이 한 게 아닌 것도 있었다.배후의 누군가가 사건을 부채질할 때… 강이한이 여전히 감옥에서 나오기 싫어한 건 다 이유영 때문이었다.아무리 동교와 정유라 일 때문이라도, 강이한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죄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었다!그렇게 2년.감옥에서 꼬박 2년이나 지냈다. 하지만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다고? 정말 사람 미치겠네.이유영은 자유를 얻었다.옆에 앉은 채, 쌀쌀한 말투로 앞에 있는 기사님한테 말했다.“차 세워 주세요.”“당신 편 사람이 아니야!”강이한 역시 쌀쌀하게 대꾸했다.‘이 사람들이 자기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구네? 왜 네 말을 듣겠어?’2년 동안 이유영에게 일어난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말 변한 게 느껴졌다.2년이면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대꾸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다음, 강이한은 이유영을 들어 자기 품에 안았다. 이유영이 발버둥 쳤지만, 너무 세게 강이한한테 질곡 당했다.“뺨 한 대 더 맞고 싶어?”강이한은 날카롭고 재치 있는 눈빛으로 품 안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나중에 같이 청산해.”그 말인즉. 둘 사이에 아직 청산할 게 더 남았다는 건가?참 뻔뻔하게!?이유영은 바로 강이한의 뺨을 한 대 때렸다. 하지만 강이한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이유영이 만들어낸 이 선명한 얼얼함, 그건 눈앞의 사람이, 이유영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였다.강이한은 머리를 이유영의 손바닥에 맞댄 채 그녀를 꽉 잡고 꼼짝도 못 하게 했다.이유영은 결코 너무 작았다. 강이한은 한 손으로도 이유영을 공제할
끝내 강이한은 천천히 이유영을 놓아주었다. 처음에 이유영이 살아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으로부터 지금 차가운 이유영을 보니 강이한은 마음이 찬물을 맞은 것처럼 시렸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뼈가 시린 느낌이었다.“당신 눈에는 내가 지금 연기하는 것처럼 보여?”이유영은 입을 열고 아주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지금 내가 이유영한테 한 것들을 어떻게 연기라고 말할 수 있지?'이보다도 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없었다.강이한은 냉정하고 차가운 이유영을 보고 몹시 서글펐다. 하지만 이유영의 태도는 여전히 차갑고 담담했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강이한의 품속에서 벗어나 옆자리에 앉았다.옷깃을 한번 정리하였는데 그 옷을 터는 동작은 마치 강이한에 대한 불쾌함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이유영의 눈빛에는 차가움과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자극받은 강이한은 이성을 잃고 바로 미친 듯이 이유영을 뒷좌석에 눌렀다.“이유영!”이를 악물고 이 세 글자를 뱉어냈다.이유영은 자기를 누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입가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야!?”“내가 어떻게…”“이 2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아냐고?“강이한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무덤덤하게 그의 말을 이었다.한없이 차갑고 무덤덤했다.강이한은 마음이 시려 났다.강이한은 손끝으로 살금살금 이유영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심지어 이 순간 손도 자기 모르게 떨고 있었다.‘왜? 어디로 갔을까?’‘예전에 자기를 바라볼 때, 항상 따뜻하고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고 부드럽게 자기를 바라보던 사람은 왜 없어졌을까?’‘예전에 분명 맑고 청량했던 두 눈이었는데 지금 자기를 바라보는 눈은 왜 이리도 차가운가?’‘잃어버렸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잃어버렸어.’전생에, 강이한은 이 두 눈의 부드러움과 맑음을 다 망가뜨렸다. 이번 생에 아직 두 눈은 그대로 있으나 강이한은 이유영이 자기에 대한 애틋함을 다 깨뜨렸다.“유영아.”강이한은 부드럽게 살랑 이유영의 이
“어찌 됐든 당신이 살아있으면 됐어!”강이한은 입을 열었다. 딱딱한 말투에는 조금의 부드러움이 녹여있었다.이유영은 '풉-' 웃음을 참지 못했다.살아있으면 된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했다.“당신의 천만 가지 괴롭힘과 그런 수단에도 내가 안 죽었으니 참 실망 많았겠네?”강이한은 말문이 막혔다.이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자기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수단, 괴롭힘!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가져다준 기억들이 이런 단어들로 구성될 정도라면 이유영이 강이한을 이토록 미워하는 데는 충분히 이해되었다.이유영을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에는 이상한 침착함이 드러나 있었다.하지만 눈빛이 이유영의 옷깃에 가려 보일락 말락 한 화상 상처들에 닿은 순간, 강이한은 되찾은 이성이 다시 한번 무너져 버렸다.단번에 이유영의 옷깃을 잡고 힘써 옷을 확 찢어 버렸다. '찍-' 소리와 함께 원래 협소했던 공간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이런 갑작스러운 행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성이 부서지고 말았다.손을 들어 바로 강이한의 뺨을 향을 내리쳤지만, 손목에는 다른 힘이 느껴졌다.손을 올려 치켜드는 순간, 원래 새하얗던 팔에 그려진 화상 흉터들은 마치 개미처럼 그의 팔에 잔득했다.강이한은 이 모습을 보고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목에도 있고 팔에도 있고, 그리고 또 다른 곳에도 있는 걸까?“이 흉터들 모두 그때 생긴 거야?”이렇게 잔득하게 있는 흉터들을 보고 강이한은 목이 메서 겨우 입을 열었다.동공이 축소되고 그 후에는 충혈되는 것처럼 빨개졌다. 가슴에는 마치 커다란 두 손이 심장을 꽉 쪼이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힘차게 자기의 손을 강이한의 손으로부터 뿌리쳤다.그리고 자기의 옷깃을 정리하며 목과 팔에 있는 상처들을 옷 안에 숨겼다.“유영아.”“당신 옆에 있는 대가가 이런 거야. 어때? 당신 맘에 드는지 모르겠네.”이유영은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투는 아까보다 더 차가웠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눈이 더 빨개졌다!이유영은 고개
로열 글로벌에 들어온 이유영을 보자마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민정은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이유영에게 다가왔다.이유영을 위아래 훑어보고는 찢긴 옷깃을 보고 마음이 철컹 내려앉았다.“강이한 씨가 어떻게 대표님한테 그럴 수 있습니까?”조민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말투에는 온통 분노로 가득 찼다.조민정은 말을 하면서 바로 자기의 외투를 벗어 이유영한테 걸쳐주었다.이 모습으로 회사에 나타나면 또 직원들의 이유영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갈 것이다.이유영은 차분하게 답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그리고 조민정의 외투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이유영의 차가움 때문에 직원들도 그의 옷깃을 보고 그저 놀랄 뿐이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조민정은 조마조마하게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아까 강이한 차에 끌려간 후, 다시 돌아온 이유영은 몸에서 뿜기는 기운마저 예전보다 몇 배 더 차가워졌다.해서 조민정 보기에는 두 사람 설마 또 한바탕 싸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회의 준비는 다 되었나요?”이유영이 조민정한테 물었다.갑작스러운 말소리에 조민정은 깜짝 놀라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네 다 준비되었습니다.”‘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유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곧바로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비서실 사람들은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하지만 이유영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에 드리운 차갑고 살벌한 기운을 느끼고는 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마저 일을 하였다.이유영은 바로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여벌 옷이 있었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난 후에야 전화기를 들어 백산 별장으로 전화를 걸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정국진의 전화번호였다.전화를 걸려던 전화기를 내려놓고 걸려 온 핸드폰 전화를 받았다.“외삼촌.”“강이한이 돌아왔다면서?”전화 반대편의 정국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보아하니, 정국진의 갑작스러운 말 한마디에 이유영은 정말 많이 놀란 것 같았다.2년 전, 강이한은 강서희와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 주변의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들을 주었다. 심지어 지금 실종된 소은지마저도 그 속에 연루되었다.특히, 정유라는 그 속에서 아주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2년이나 지났는데도 이유영은 아직도 정유라에 대해 미안함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하지만 지금 외삼촌의 말씀은… 심하준 그 일이 강이한이랑 상관이 없다고?정국진은 다시 한번 답했다.“그래.”“그럼…”“난 바빠서 이만, 먼저 끊을게.”정유라의 일에 대해 정국진도 긴 얘기하기를 꺼리는 것 같았다.이유영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전화 반대편의 정국진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근 2년 동안, 항상 정유라의 얘기만 나오면 외삼촌과 외숙모는 모두 얘기를 꺼리며 화제를 돌렸다.지금과 같이, 외삼촌이 강이한이 심하준의 일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도, 더 이상의 긴 얘기는 피해 하셨다.그저 이렇게 한 마디만 남긴 채, 더 자세한 건… 얘기하지 않았다.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뚝- 뚝-” 소리를 들으며 이유영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버렸다. 몸에는 심지어 소름이 돋았다!‘심하준 일이 강이한이랑 상관이 없다고?’‘어떻게 그럴 수가!?’‘정말로 상관이 없다면…!’이유영은 안색이 변했다. 머릿속은 이미 뒤집어졌고 머리가 하얘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드디어 평정심을 되찾았다!“후…”이유영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고 머릿속의 혼난 속에서 벗어나려 했다.‘상관이 없으면 없는 거지 뭐!’이유영은 생각을 정리했다.‘상관이 없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유라의 일과 상관이 없다고 해도 강이한이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그리고 그가 동교, 크리스탈 가든에 한 짓들, 심지어… 2번의 생에 자기한테 한 짓들!?’그것들을 생각하면 정국진이 전화에서 이유영한테 한 얘기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루이스가 들어왔다.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이유영을
2년이란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은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파리에서 갑자기 사라진 거고, 왜 꼬박 2년이나 나한테 연락이 없는 거지?’매번 소은지에 대해 떠올리면 이유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목구멍에 차오르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정말로 겁이 났다!마음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은지가 꼭 무사하기를 기원했다.루이스가 나가자, 사무실에는 이유영 혼자만 남게 되었다. 팔을 내밀자, 옷깃은 자동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이유영 손목의 상처들을 드러냈다.차가운 손가락으로 울퉁불퉁한 화상자국이 남은 피부를 만졌다. 그때 당시, 높은 온도로 벌겋게 다루어진 철 몽둥이들이 그의 팔에 내리쳤을 때, 그 순간… 이유영은 아직도 그때 피부가 타는 찍-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아직도 그때의 그런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기억에 생생하였다.‘쿵!’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밖에 있던 사람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문은 벽에 맞히면 아주 천둥소리를 냈다.깊은 사색에 잠겨있던 이유영마저 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었다.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문 앞에 서있는 박연준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에 있는 진귀한 차림도 그의 차가운 아우라를 감추지 못했다.이런 모습을 한 박연준을 본 이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비서는 박연준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대표님, 이분께서…”“먼저 나가서 일 보세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은 그의 말을 가로채고 일어서서 박연준한테로 다가갔다. 마음속에는 은근히 조마조마함을 지니고 있었다.이와 동시에, 박연준한테서 뿜어져 나오던 차가운 기운들도 점점 사그라졌다. 이유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무사한 이유영을 보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웬일로 왔어요?”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박연준이 한창 바쁠 시간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손을 잡고 한편으로 와서 자리에 앉았다.이유영의 말에 대답도 안 한 채 그저 물었다.“그 사람이 당신을 해치진 않았나요?”이유영은 말이
하지만 그래도 입장을 밝혔다.“어떤 일은 그래도 제가 꼭 직면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이유영은 외삼촌 서재에서 봤던 그 사진이 떠올랐다.순간 그녀의 눈에는 진한 빛이 반짝였다!그리고 박연준이 입을 떼기 전에 먼저 입을 열고 물었다.“연준 씨는 전에 그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이유영은 항상 직설적인 사람이었다.비록 이렇게 바로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박연준이 아마 대답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꼭 물어봐야 했다!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박연준도 순간 멍해 있었다.“유영 씨는 저랑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저는 당연히 몰라서 연준 씨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요.”이 말을 할 때도 이유영의 눈길은 시종 박연준의 얼굴에 있었다.이유영은 박연준의 얼굴에 있는 그 어떠한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난 그 사람이랑 별로 안 친해요!”결국 이유영의 뜨거운 시선하에 박연준은 이렇게 한마디만 남겨 놓았다.‘안 친하다고?’‘하지만 그 사진을 보면, 특히 두 사람만 찍혀 있는 사진이었는데 안 친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말이 안 되잖아.’“그럼, 유영 씨도 별일 없어 보이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이유영이 마저 물음을 제기하려고 하던 때에 박연준은 이미 일어섰다.그래서 이유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들을 그저 삼켜 버렸다.박연준이 문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유영은 몇 발짝 다가가서 그래도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박연준은 걸어 들어갔다.이유영이 입을 열었다.“조심히 운전하세요.”“네, 저녁에 데리러 올까요? 같이 저녁 먹으러 가요.”“그래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에 응했다.박연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까지 보고서야 이유영은 몸을 돌려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필요한 문건을 들고 회의실로 갔다.강이한이 돌아온 것에 대해 이유영이 신경을 쓰든 안 쓰든 이미
그녀가 청하시에서 일할 때라면 직업적인 감각으로 이상함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절히 대처했을 것이다.“자책하지 마. 내가 말했잖아. 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애초에 나를 노리고 있었어.”소은지는 이유영의 마음을 읽은 듯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손을 더 강하고 단단하게 잡았다.이유영은 붉어진 눈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고 소은지는 이유영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조용히 말했다.“의사가 지금 울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은지야.”“됐어, 너는...”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감정이 예민하다는 것은 이유영의 마음이 그 모든 경험으로도 완전히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좋은 일이었다.사람은 어떤 일을 겪더라도 결코 선량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내가 대처하지 않으면 분명히 일이 생길 거야.”“정말 그를 막을 수 있어?”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이유영은 그 질문을 던지며 불안한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한순간 침묵했다.막을 수 있을까?사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이미 엔데스 가문의 핵심을 파악했다. 그리고 엔데스 가문의 남자들이 가문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지 알고 있었다.그 권력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신이 그 안에서 어떤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도.그 순간, 소은지는 결심했다. 엔데스 명우가 엔데스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그는 소은지의 세상을 망쳤다. 그러니 소은지도 그를 파리에서 몰아내야만 했다.그래서 그녀는 엔데스 현우와 협력할 기회를 찾았다.그를 막을 수 있을까?그 질문은 소은지가 깊이 고민한 적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질
그런 걱정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소은지는 이유영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유영의 차가운 손을 조용히 잡았고 아무 말 없이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너무 힘들었어.소은지는 파리를 떠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있었지만 그녀가 어둠 속에서 얼마나 절망했을지, 우천시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소은지만이 알 수 있었다.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고 식당의 도무미들이 식탁을 정리를 시작하면서 곧 차를 가져왔다.“네가 과일차 좋아하는 거 알고 준비했어.”“응.”이유영은 과일로 우려낸 차를 정말 좋아했다.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익숙한 향이 입안을 감쌌다.소은지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만든 것만큼 맛있진 않지?”“그야 당연하지.”“나도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소은지는 감회에 젖은 듯 조용히 말했다.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그 순수했던 시절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을 진정 그리워하는 사람은 소은지뿐일지도 모른다. 이유영에게 그 시간은 착각에 불과했다.강이한과의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유영은 끝까지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을 붙잡고 버텼다.그러나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지금 엔데스 가문은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어. 넌 괜찮아?”이유영은 걱정스럽게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엔데스 가문의 인장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그 때문에 전기봉의 중요성은 일시적으로 희미해졌지만 만약 인장이 다시 나타난다면 엔데스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이유영은 소은지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소은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영향은 있지만 내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야.”이유영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라니.“엔데스 명우 때문이야?”우천시에서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소은지를 걱정했다.특히,
예전에 강이한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소은지를 찾아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어때?”“맛있네. 모이산 요리사, 실력이 좋네.”이유영은 음식의 맛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청하시의 맛도 살짝 느껴졌다.“요리사가 청하시 출신이야?”“어떻게 알았어?”사실, 현우가 데려온 요리사였다.현우는 소은지가 파리 음식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고 그녀가 엔데스 명우의 압박 속에서 힘들어할 때마다 직접 요리를 해 주었다. 덕분에 소은지는 최근 살이 많이 붙었다.현우가 청하시에서 요리사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소은지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청하시 음식은 내가 다 먹어 봤는데. 아마 원씨 집안 요리사일 거야. 맛이 너무 비슷해.”“그래, 너 안 가본 데가 어디야?”소은지는 이유영을 흘겨보며 말했다.강이한... 그 남자는 정말 짜증 나는 존재였지만 연애할 때만큼은 이유영을 극진히 아꼈다.그녀가 맛있게 식사할 수 있도록 청하시의 유명한 레스토랑은 거의 다 찾아다녔다.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의 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다. 아무리 정성껏 먹여도 소용없었다.“그만 얘기하고 맛있게 먹자.”이유영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순수하고도 맑았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현우는 좀 먹었으니까, 너 많이 먹어.”“아직도 입맛이 그렇게 없어?”“응.”소은지는 이유영의 세심함에 마음이 흔들렸다.청하시에 있을 때, 둘이 함께 식사하면 소은지는 늘 이유영의 식습관을 세심히 관찰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에게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후, 소은지의 식욕은 현저히 줄어들었다.비록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이유영은 그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은지야.”“왜 안 먹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잔뜩 준비했어. 다 담백하고 지금 너한테 딱 맞는 음식이야.
이유영은 아이를 꼭 안은 채 창밖으로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며 전에 없던 만족감이 밀려왔다.분명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지금은 달빛 아래에서도 시야가 또렷했다. 그녀의 눈을 집도한 의사가 얼마나 신중하게 치료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날 밤, 이유영은 딸의 향기 속에서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유영은 가장 먼저 소은지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그녀는 곧바로 모이산 뒤편으로 향했다.소은지는 우천시를 떠난 후 이유영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최근 파리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소은지가 그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했다.차에서 내리자, 현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트렌치코트를 멋스럽게 걸친 현우는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가문의 깊은 역사가 그의 태도에서 자연스레 드러났다.과거, 이유영이 그의 곁에 있을 때도 이 기품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주부에서 직장 여성으로 변신하는 동안 주변을 세심히 살피지 못했던 것일까?맞아, 분명 그랬을 것이다.현우는 가까이 다가와 이유영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깊고도 반짝였다.“이제 볼 수 있나 보네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거실 창 너머로, 소은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를 보살피던 왕 아주머니는 소은지의 뒤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왕 아주머니는 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가문의 여주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와 그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왕 아주머니.”“네.”“모두 담백한 음식이죠?”소은지는 차분하게 물었다.왕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걱정 마세요. 다 말씀해 신 대로 준비했습니다.”“네. 유영이는 수술을 마친 직후라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안 돼요.”“알겠습니다.”소은지는 왕 아주머니에게 말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속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아빠?”“아니야, 가서 쉬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정국진의 눈에 스친 망설임을 이유영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파리와 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이 말했다.“그럼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응.”이유영이 서재를 나서자 정국진만 남은 공간에는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서주에서 박연준이 돌아왔다.그리고 강이한은...정국진은 사람을 보내 그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강이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는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췄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조차 지워버린 듯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수술 후에는 이유영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이유영을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방으로 돌아오자, 유 아주머니와 월이가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이유영을 보자 바비 인형을 월이에게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아가씨.”“네.”“잠시만요.”이유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그 사람, 몇 번이나 왔어요?”강이한을 물어보고 있었다.이제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두 번 왔어요.”두 번.즉, 우천시에서 돌아온 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이유영은 강이한이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이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 세상에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일단 나가보세요.”“네, 아가씨.”유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이유영은 조용히 월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임소미는 이유영을 꼭 끌어안으며 마치 텅 비었던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유영이 돌아오기 전, 임소미는 이미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진우가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수술 전까지 모두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그 소식은 임소미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엄마, 숨 막혀요.”이유영이 투덜거렸다.“얘가...”임소미는 그녀를 품 안에서 놔줬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었다.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임소미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에 결국 텅 빈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정말 볼 수 있는 거 맞지?”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했던 임소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 볼 수 있어요. 엄마, 오늘 검은색 원피스 입으셨네요.”“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이유영이 옷 색깔을 정확히 맞추자 임소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도 그 말을 듣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보이면 됐어.”“아빠.”“밥 먹자.”이것이 바로 가족이었다.언제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이 기다리고 있는 곳.여진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을.정국진과 임소미 앞에서 그도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참 좋았다.재벌 가문에서 이렇게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가진 곳은 드물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식탁에는 여진우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준비된 담백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이유영은 기꺼이 그 음식을 받아들였다.“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월이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을 만나기 전,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순수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앗아갔다. 계산해 보면 그는 이유영을 2년 동안 지켜왔고 5년을 연애했으며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이유영은 그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온 마음을 다해 화답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모두 거짓이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끝없는 사랑을 선물했지만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보호를 제공했다.한 명은 사랑을 주었지만 보호는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보호를 제공했지만 사랑은 없었다.둘 중 누구든,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알겠어요.”배준석이 씁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예요.”“...”“하지만 그들은 저에게...”이유영은 말을 멈췄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끝내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배준석 씨.”“네?”“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생사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유영은 어땠을까?그녀가 손에 쥔 모든 것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그것은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그는 이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어요.”배준석이 이유영이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비웃음만 나왔다.진심이라고?그 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가 누구에게 끝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한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과거의 자신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순간, 배준석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영원히 용서하
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희미했다.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마침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눈앞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이유영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지와 우현은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두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만약 그녀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터였다.“이유영 씨.”“보여요.”배준석은 이유영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자,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배준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이 긴장했고 심지어 공포감에 휩싸였었다.의사는 평소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존재다. 환자가 되는 순간, 결국 그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유영아.”여진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온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제는 익숙했다.그래서 여진우가 자신을 안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하지만 이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각에만 의존했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정말 보여?”여진우는 그녀를 품에서 놔주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보여.”진짜였다. 정말 볼 수 있었다.여진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보여? ““파란색.”“...”“됐어. 너 수염 난 것도 다 보여.”태연한 이유영의 말에, 여진우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아침 면도를 깜빡했는데 그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병실 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수술은 성공했다.붕대를 풀고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