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만져보니 시간이 꽤 돼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얼굴을 보니 아마 한 20대쯤 같아 보였다.‘그때 박연준과 강이한 두 사람은 이 정도로 친했나?’“너 뭐 봐?”이유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당시, 뒤에서 갑자기 정국진의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렸을 때 이유영의 손에는 여전히 사진을 들고 있었다. 정국진은 손에 쥐어있는 사진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안색이 변했다.앞으로 다가와서 이유영 손에 있는 책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사진도 같이 가져왔다.“외삼촌, 그 사진은 언제 적 사진이에요?”이유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녀는 줄곧 직설적인 아이였다!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궁금한 게 있으면 꼭 물어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비즈니스 판에서 2년이나 굴러서 이 버릇을 조금 고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 가족 앞에서는 여전히 예전과 같이 꾸밈이 없었다.“어제 금방 받은 거야.”정국진이 답했다.“어제 연준 씨랑 서재에서 얘기를 나눈 게 이것 때문이에요?”이유영은 원래 지극히 총명한 아이였다. 의문점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었다.정국진은 옆에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서랍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서 불을 피우고 세게 두 모금 빨아드렸다.미간에는 쉽게 가시지 않는 심란이 그려있었다.그건 아마 자기랑 박연준 때문이라는 걸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연준 씨 뭐라고 하던가요?”침묵을 지키는 외삼촌을 보고 이유영은 말 길을 돌려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다.정국진은 결국 이유영을 보며 말했다.“네가 보기엔 연준이가 뭐라 했을 것 같냐?”이유영은 외삼촌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연준 씨가 뭐라고 했을까?’전에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 있을 때도 그렇고, 박연준과 사이가 좋은 지금도 그렇고 이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상대방이랑 사이가 좋다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사진으로 봐서, 두 사람 얼굴에 있는 순진한 웃음을 봐서라도 두 사람은 절대로 원수 또는 낯선 사람일 리가 없었다.그럼
정국진의 말을 들은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 2년 외삼촌이 박연준에 대한 인정은 다소 그녀에게 부담이 되었다.외삼촌의 말대로, 이유영은 상처받은 적이 있다…!아직도 마음속에는 많은 사물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다. 심지어 저촉, 배척하기도 한다…!사람들도 그 일이 이유영의 상처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상처를 꾹 누르고 다시 발병하지 않는 걸 봐서 이유영도 그 일을 내려놨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지만 내려놨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었다는 것은 아니다.그녀한테도 시간이 필요했다.“외삼촌 고마워요.”이유영은 정국진을 보며 말했다.정국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이유영 손에서 가진 책을 다시 도로 그에게 건넸다.“이 책을 찾았어?”“네.”이유영은 책을 건너 받았다.2년 동안 책을 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오늘 어쩌다 일찍 돌아와서 그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그럼, 외삼촌 저 먼저 나가 볼게요.”손에 든 책을 살랑살랑 흔들고는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아까까지는 책을 볼 흥미가 있었지만, 오늘 저녁에 두 사람 사이 선명한 변화를 알아차린 이상 책을 볼 기분이 아니었다.“쾅!”책을 책상에 내동댕이치고 핸드폰을 들며 창가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사람 좀 알아봐 주세요.”“누구를 알아봐 드릴까요?”“박연준…”“…”이런! 이유영의 말이 끝나자, 상대방은 숨소리조차 조금 거칠어졌다. 잠시 후, 상대방은 빠른 속도로 답했다.“죄송합니다. 의뢰를 받을 수 없습니다.”“십억!”이유영은 바로 최고가를 불렀다!외삼촌과 박연준은 좋은 친구였다. 처음부터 쭉.하지만 오늘 저녁 식사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외삼촌 서재에서 나온 그 사진, 이유영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알아야 했다.항상 자기 곁을 지켜준 사람 그리고 외삼촌의 신임을 받은 사람이 지금은 뭔가 단순한 사람 같지 않다고 할까?박연준과 외삼촌 둘 다 말 안 해주지만 이유영은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박연준이 파리에서 이
옆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정국진이 드디어 입을 열고 이유영에게 말했다.이유영이 어제저녁 잠을 이루지 못한 원인이 아마 어제 서재에서 본 사진 때문이라는 것을 정국진은 알고 있었다.당연히 정국진도 처음 사진을 봤을 때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그 누구도 박연준과 강이한 두 사람이 그런 사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비록 어제 박연준이 서재에서 자기한테 설명했지만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그 사진이 나타남으로 하여 정국진이나 이유영이나 다 박연준에 대해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저도 알아요.”이유영은 정국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소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두 사람이 무슨 비즈니스 얘기하는 줄 알았다!임소미는 그저 이유영을 걱정하며 말했다.“어찌 됐든 넌 지금 몸조리를 잘해야 해. 밤새는 건 몸에 엄청나게 안 좋아.”“알겠어요. 외숙모.”외숙모의 관심 어린 말을 들으니, 이유영은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얼른 임소미가 준비해 놓은 아침을 다 먹었다.아침 식사가 끝나고 보니 루이스랑 조민정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배웅했다.“점심에 우지한테 네 약을 보낼 거니까 꼭 다 마셔야 해. 아직 회복 중이니까 조심해야 해.”“네, 명심할게요.”“그리고…”이유영이 차에 타려고 하는 순간 임소미는 이유영의 손을 잡고 목에 있는 흉터와 손목에 있는 흉터를 살폈다.이유영은 임소미의 눈길을 따라 자기의 손목을 보았다.그건 2년 전 화재 때 남긴 흉터였다. 아주 흉했다.입가에 미소를 띠며 손을 빼내려던 때 임소미가 말했다.“수술받을 거지. 응?”“…”“여자애 몸에 흉터 남기면 안 좋아.”임소미는 바짝 긴장하며 설득했다.이 흉터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얘는 그때 어떻게 참고 이겨낸 거지? 심지어 그렇게 큰불 속에서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다행히 사람은 크게 안 다쳤는데 이 흉터들 어쩌면 평생 얘한테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이유영은 임소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시간 안배해 볼게요
어떻게?이 저 사람은…! 이유영은 잠깐 멍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가에는 싸늘한 기운이 드리웠다. 2년! 꼬박 2년이 지났다.저 사람은 청하시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아 맞다. 어제 그 행사!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니.“대표님.”루이스도 한눈에 앞에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강이한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검은색 트렌치코트에 깔끔한 빡빡이 머리, 날카로운 얼굴 실루엣, 특히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매, 2년 전과 선명하게 달라 보였다.이유영한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강이한을 보고 루이스는 차에서 내려 강이한을 막으려고 하였다.하지만 강이한 옆에 있던 이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억지로 루이스 앞을 막았다.“이 대표님, 우리.”강이한을 보고 조민정도 깜짝 놀랐다.요 2년 동안, 이들도 이유영과 함께 모두 파리에서 지냈다. 이유영이 간혹 외국으로 출장을 간다지만 그래도 근 2년간의 생활 궤적을 청하시에 있는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이유영은 원래 담담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 곁에 있는 사람들은 가끔 청하시 감옥에서 수감 중인 강이한이 지금 이런 상황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근데 꼬박 2년 동안, 이유영의 삶에는 강이한이 전혀 없었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강이한이 이유영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모른 채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이유영이 점점 잘 나가고 이룬 성과들도 점점 많아져서 각 경제 뉴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심지어 국제 비즈니스 강연에도 초대될 만큼 성장할 지 아무도 몰랐다.특별히 지금 강이한의 출현은 그제야 이유영 주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하지만 지금…!‘쾅.’자동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이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엄청 차갑고 강렬한 아우라가 풍겼다.“이 대표님.”옆에 있던 조민정도
좁은 차 안의 분위기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할 정도로 쌀쌀했다.‘찰싹!’또랑또랑한 뺨 맞는 소리를 듣고 앞에 앉아 있던 이시욱도 깜짝 놀랐다.강이한 편인 사람들은 지금 당연히 이유영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다.강이한이 왜 2년이나 감옥에 있었는지. 설령 동교와 정유라 일 때문일지라도 그 일에는 강이한이 한 게 아닌 것도 있었다.배후의 누군가가 사건을 부채질할 때… 강이한이 여전히 감옥에서 나오기 싫어한 건 다 이유영 때문이었다.아무리 동교와 정유라 일 때문이라도, 강이한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죄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었다!그렇게 2년.감옥에서 꼬박 2년이나 지냈다. 하지만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다고? 정말 사람 미치겠네.이유영은 자유를 얻었다.옆에 앉은 채, 쌀쌀한 말투로 앞에 있는 기사님한테 말했다.“차 세워 주세요.”“당신 편 사람이 아니야!”강이한 역시 쌀쌀하게 대꾸했다.‘이 사람들이 자기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구네? 왜 네 말을 듣겠어?’2년 동안 이유영에게 일어난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말 변한 게 느껴졌다.2년이면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대꾸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다음, 강이한은 이유영을 들어 자기 품에 안았다. 이유영이 발버둥 쳤지만, 너무 세게 강이한한테 질곡 당했다.“뺨 한 대 더 맞고 싶어?”강이한은 날카롭고 재치 있는 눈빛으로 품 안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나중에 같이 청산해.”그 말인즉. 둘 사이에 아직 청산할 게 더 남았다는 건가?참 뻔뻔하게!?이유영은 바로 강이한의 뺨을 한 대 때렸다. 하지만 강이한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이유영이 만들어낸 이 선명한 얼얼함, 그건 눈앞의 사람이, 이유영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였다.강이한은 머리를 이유영의 손바닥에 맞댄 채 그녀를 꽉 잡고 꼼짝도 못 하게 했다.이유영은 결코 너무 작았다. 강이한은 한 손으로도 이유영을 공제할
끝내 강이한은 천천히 이유영을 놓아주었다. 처음에 이유영이 살아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으로부터 지금 차가운 이유영을 보니 강이한은 마음이 찬물을 맞은 것처럼 시렸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뼈가 시린 느낌이었다.“당신 눈에는 내가 지금 연기하는 것처럼 보여?”이유영은 입을 열고 아주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지금 내가 이유영한테 한 것들을 어떻게 연기라고 말할 수 있지?'이보다도 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없었다.강이한은 냉정하고 차가운 이유영을 보고 몹시 서글펐다. 하지만 이유영의 태도는 여전히 차갑고 담담했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강이한의 품속에서 벗어나 옆자리에 앉았다.옷깃을 한번 정리하였는데 그 옷을 터는 동작은 마치 강이한에 대한 불쾌함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이유영의 눈빛에는 차가움과 불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자극받은 강이한은 이성을 잃고 바로 미친 듯이 이유영을 뒷좌석에 눌렀다.“이유영!”이를 악물고 이 세 글자를 뱉어냈다.이유영은 자기를 누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입가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야!?”“내가 어떻게…”“이 2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아냐고?“강이한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유영은 무덤덤하게 그의 말을 이었다.한없이 차갑고 무덤덤했다.강이한은 마음이 시려 났다.강이한은 손끝으로 살금살금 이유영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심지어 이 순간 손도 자기 모르게 떨고 있었다.‘왜? 어디로 갔을까?’‘예전에 자기를 바라볼 때, 항상 따뜻하고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고 부드럽게 자기를 바라보던 사람은 왜 없어졌을까?’‘예전에 분명 맑고 청량했던 두 눈이었는데 지금 자기를 바라보는 눈은 왜 이리도 차가운가?’‘잃어버렸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잃어버렸어.’전생에, 강이한은 이 두 눈의 부드러움과 맑음을 다 망가뜨렸다. 이번 생에 아직 두 눈은 그대로 있으나 강이한은 이유영이 자기에 대한 애틋함을 다 깨뜨렸다.“유영아.”강이한은 부드럽게 살랑 이유영의 이
“어찌 됐든 당신이 살아있으면 됐어!”강이한은 입을 열었다. 딱딱한 말투에는 조금의 부드러움이 녹여있었다.이유영은 '풉-' 웃음을 참지 못했다.살아있으면 된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했다.“당신의 천만 가지 괴롭힘과 그런 수단에도 내가 안 죽었으니 참 실망 많았겠네?”강이한은 말문이 막혔다.이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자기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수단, 괴롭힘!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가져다준 기억들이 이런 단어들로 구성될 정도라면 이유영이 강이한을 이토록 미워하는 데는 충분히 이해되었다.이유영을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에는 이상한 침착함이 드러나 있었다.하지만 눈빛이 이유영의 옷깃에 가려 보일락 말락 한 화상 상처들에 닿은 순간, 강이한은 되찾은 이성이 다시 한번 무너져 버렸다.단번에 이유영의 옷깃을 잡고 힘써 옷을 확 찢어 버렸다. '찍-' 소리와 함께 원래 협소했던 공간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이런 갑작스러운 행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성이 부서지고 말았다.손을 들어 바로 강이한의 뺨을 향을 내리쳤지만, 손목에는 다른 힘이 느껴졌다.손을 올려 치켜드는 순간, 원래 새하얗던 팔에 그려진 화상 흉터들은 마치 개미처럼 그의 팔에 잔득했다.강이한은 이 모습을 보고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목에도 있고 팔에도 있고, 그리고 또 다른 곳에도 있는 걸까?“이 흉터들 모두 그때 생긴 거야?”이렇게 잔득하게 있는 흉터들을 보고 강이한은 목이 메서 겨우 입을 열었다.동공이 축소되고 그 후에는 충혈되는 것처럼 빨개졌다. 가슴에는 마치 커다란 두 손이 심장을 꽉 쪼이는 것만 같았다.이유영은 힘차게 자기의 손을 강이한의 손으로부터 뿌리쳤다.그리고 자기의 옷깃을 정리하며 목과 팔에 있는 상처들을 옷 안에 숨겼다.“유영아.”“당신 옆에 있는 대가가 이런 거야. 어때? 당신 맘에 드는지 모르겠네.”이유영은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투는 아까보다 더 차가웠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눈이 더 빨개졌다!이유영은 고개
로열 글로벌에 들어온 이유영을 보자마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민정은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이유영에게 다가왔다.이유영을 위아래 훑어보고는 찢긴 옷깃을 보고 마음이 철컹 내려앉았다.“강이한 씨가 어떻게 대표님한테 그럴 수 있습니까?”조민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말투에는 온통 분노로 가득 찼다.조민정은 말을 하면서 바로 자기의 외투를 벗어 이유영한테 걸쳐주었다.이 모습으로 회사에 나타나면 또 직원들의 이유영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갈 것이다.이유영은 차분하게 답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그리고 조민정의 외투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이유영의 차가움 때문에 직원들도 그의 옷깃을 보고 그저 놀랄 뿐이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조민정은 조마조마하게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아까 강이한 차에 끌려간 후, 다시 돌아온 이유영은 몸에서 뿜기는 기운마저 예전보다 몇 배 더 차가워졌다.해서 조민정 보기에는 두 사람 설마 또 한바탕 싸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회의 준비는 다 되었나요?”이유영이 조민정한테 물었다.갑작스러운 말소리에 조민정은 깜짝 놀라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네 다 준비되었습니다.”‘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유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곧바로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비서실 사람들은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하지만 이유영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에 드리운 차갑고 살벌한 기운을 느끼고는 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마저 일을 하였다.이유영은 바로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여벌 옷이 있었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난 후에야 전화기를 들어 백산 별장으로 전화를 걸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정국진의 전화번호였다.전화를 걸려던 전화기를 내려놓고 걸려 온 핸드폰 전화를 받았다.“외삼촌.”“강이한이 돌아왔다면서?”전화 반대편의 정국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두 사람은 차갑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소은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하시에서도 오직 이유영만이 유일한 존재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이유영이 소은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이유영의 삶은 늘 혼란스러웠다.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은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영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야 했다.파리에 온 이후, 소은지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을 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지금...“흥! 현우야, 앞으로 네가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지켜볼게.”엔데스 명우는 비웃듯 말하고는 매섭게 돌아섰다.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소은지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요?”“당신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게 웃겼어요.”두려움? 그렇다.조금 전, 엔데스 명우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짜내 맞서 싸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그 순간, 소은지는 진심으로 두려웠다.그리고 엔데스 명우가 떠난 뒤에도 소은지의 등에선 여전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형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란 걸!”소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미친 사람이죠.”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어떤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 번 도망쳤다가 결국 어떻게 붙잡혔는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현우를 만난 뒤에야 소은지는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모든 것을
한껏 완화된 긴장감은 소은지의 한마디로 다시 불이 붙었다.소은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롱과도 같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독기를 풍겼다.소은지는 분노로 붉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생생히 드러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담담히 말했다.“병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죽음도 끔찍했겠네.”소은지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후벼팠다.설유나는 죽기 직전까지 엔데스 명우에게 애원했다. 설유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온갖 수단과 계략으로 쟁취한 모든 것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하지만 설유나가 신처럼 여기던 엔데스 명우조차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선 누구도 설유나를 구할 수 없었다.그렇게 설유나는 엔데스 명우의 눈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고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는 설유나를 구할 방법이 있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이유는... 소은지 때문이었다.“이게 진짜...”남자는 이를 악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설유나는 시작일 뿐이야.”소은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도 엔데스 명우에게 닥칠 일이 더 많을 텐데, 벌써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는 어쩌려고?소은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도발하듯 엔데스 명우를 바라봤다.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엔데스 현우가 설유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형제 관계가 아무리 냉랭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시나, 엔데스 현우가 이곳에 나타났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엔데스 현우는 한걸음에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소은지를 빼내 품에 안았다.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형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걸 잊었나 보네.”엔데스 현우의 목소리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아.”강이한은 따스하면서도 아린 눈빛으로 온전히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두 사람의 과거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이미 아물어가는 흉터를 억지로 다시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다시 스며들 뿐이었다.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네 눈이 나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결국 삼켜버렸다.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당장 의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강이한의 말처럼, 그 의사는 정말 괴짜일지도 몰랐다.결국 오늘도 헛걸음이었던 건가?점심 식사 자리에서.“도와줄게.”이유영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유영 앞에 있던 컵이 손이 닿자마자 뒤집혀 버렸고 컵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우지와 우현이 서둘러 다가와 물잔을 정리했다.그 사이, 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유영은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은 순간, 이유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강이한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유영아.”이유영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던 이유영도 여전히 어둠은 공포였다.사실, 어둠 속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살아가길 원하니까.다양한 색채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유영 역시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의 기억 속엔 지난 생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느꼈던 절망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의 강이한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강이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소문으로만 듣던 ‘염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그 시간 동안 우지와 우현은 휴대전화를 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강이한답게 이미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 나갈 때부터 강 선생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했어요.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둘러싼 모든 외부 연락을 완벽히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 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우지가 이유영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아가씨.”“네?”“적어도 부인께는 아가씨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임소미를 말하는 것이었다.우지와 우현은 임소미가 이유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이유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아이를 잃은 뒤로, 임소미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리고 현재 이런 상황까지 겹쳤으니, 임소미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할지는 뻔한 일이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네.”이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이한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그 남자는 끝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밖에 비가 아직도 오고 있나요?”“네.”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우천시의 비가 얼마나 지독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빗소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강이한이 돌아왔을 때, 이유영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우지가 걸쳐준 망토를 두른 채, 조용히 비가 오는 풍경과 녹아든 모습이었다.강이한의 몸에서는 축축한 빗물 냄새가 났다.강이한이 다가오자마자 이유영은 그 냄새를 감지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