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자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임소미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녀는 문득 정유라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동공이 커지면서 얼굴색도 더욱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강이한은 유골함을 갖고 청하로 돌아왔다.이정은 그가 청하로 돌아온 후, 유골함을 적절한 장소에 묻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홍문동으로 가지고 왔다.사람이 사는 집안에 유골함을 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었다.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진영숙은 식탁 오른쪽에 유골함을 놓고 밥을 먹고 있는 강이한을 보고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미친 거야?”진영숙은 이유영이 살아있을 때도 자기 아들을 힘들게 하다가 죽어서까지도 괴롭힌다는 생각에 식탁에 놓여있는 유골함을 엎지르려고 했다.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면서 차갑고도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유영이가 살아있을 때도 손찌검을 하시더니 그녀의 유골함에까지 손을 대려고요?”진영숙은 강이한의 차가운 시선에 순간 멍해졌다.이유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던 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서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진영숙은 강이한의 강렬하고 차가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다.“이한아, 그 애는 이미 죽었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안 그래?”그녀는 아직도 이유영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 송장처럼 지내는 강이한이 안타까웠다.강이한은 진영숙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면서 말했다.“유영이가 저한테 시집오고부터 그동안 쭉 괴롭히셨잖아요, 죽었으면 놔줄 때도 됐잖아요, 왜 계속 이러시는 거예요?”“...”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강이한의 직설적인 말은 그 어떤 비난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이한아, 엄마는 다...”“그만해요!”강이한은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은지 진영숙의 말을 끊어버렸다.진영숙은 아들이 유골함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화는 사그라들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기만 했다.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들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겠는가.“유영이가 너
진영숙은 강서희가 구치소에 끌려간 데다가 강이한까지 여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니까 머리가 아팠다.밖에서는 지금 강씨 집안이 뒤죽박죽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게다가 강서희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돌면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이한아, 서희를 계속 구치소에 계속 두는 건 집안 이미지에 좋지 않아.”진영숙은 강서희에 관한 증거가 모두 강이한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그가 강서희를 놓아주기를 바랐다.그러나 강이한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조용히 앞에 있는 와인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진영숙은 강이한의 태연한 행동에 급해졌다.“서희가 네 친동생은 아니더라도 함께 자랐잖아, 근데 어떻게 여자 때문에...”“유영이는 남이 아니에요!”강이한은 이런 상황에서도 강서희를 감싸고 도는 진영숙에게 실망했고 이유영이 자기가 곁에 없을 때 당했을 수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났다.“이한아,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그럼 뭔 데요? 유영이를 어떻게 생각한 건데요?”진영숙은 강이한의 계속되는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강서희의 일 때문에 사정하려고 온 그녀였지만 그의 강경한 태도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진영숙은 홍문동에 유골함을 계속 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말을 꺼냈다.“아무리 그래도 유골함은 땅에 묻어야지 여기에 두는 건 안 돼!”“묻을 거예요.”강이한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진영숙은 이유영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자기의 삶까지 포기할 것 같아 문득 불안해졌다.“이한아...”강이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홍문동에 들어온 후부터 강이한은 줄곧 지금의 식탁 위치에서 밥을 먹었었고 이유영도 그의 옆에 앉아 우아하게 밥을 먹었었다.그는 이유영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가 좋아하던 갈비를 골라서 그녀 자리의 접시에 덜어줬다.진영숙은 강이한의 행동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무거운 마음으
구치소에 갇혀있는 며칠 동안 강서희는 계속 강이한만 찾았다.“오빠를 만나게 해주세요.”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했다.“지금 모든 증거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이러셔도 소용이 없습니다.”“오빠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강서희는 모든 증거가 입증이 되었다는 경찰의 말을 듣는 순간 며칠간의 고생이 수포가 된 것 같았다.몇 년 동안 그녀가 아무런 나쁜 짓을 해도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았다.게다가 이유영이 살아있던 동안 강서희가 그녀를 아무리 괴롭혀도 다들 모른척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들이 자기를 심문하기 시작하고 엄마와 오빠까지 보러 오지 않자, 강서희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런 적 없어요, 전 아니에요!”총명한 강서희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구해주기 전까지 모든 질문에 부인만 한다면 쉽게 나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서희 씨, 저희가 묻는 건...”“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강서희는 계속되는 추궁에 소리쳤다.그녀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지금은 화가 나서 모른척한다고 해도 화가 가라앉으면 자기를 구치소에서 빼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모든 일에 같이 참여한 한지음이 수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빠져나가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기다림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강서희는 자기가 며칠 동안 구치소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도 몰랐다.전에 이유영이 구치소에 들어왔을 때 확실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지만, 강서희가 들어온 지 보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강씨 집안 사람들이 날 도와줄까?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을까?’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감을 잃어갔고 점점 절망감만 쌓여갔다. 드디어!보름 후, 누군가가 강서희를 만나러 구치소로 왔다.그녀는 강이한이 자기를 용서하러 온 줄 알고 기대감에 접견실로 향했지만, 마주한 사람은 강이한도 진여욱도
강서희가 진영숙에게 묻자 왕숙이 언짢아졌다.진영숙만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그녀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부인께서 요즘 바쁘십니다.""오빠는요?"강서희가 차갑게 웃었다.이 웃음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인지, 그녀가 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조롱하는 것인지 몰랐다.'바쁘다니, 뭐가 바쁘다는 말인가. 그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인가?'왕숙은 강서희를 보고는 억눌린 어조로 말했다."도련님의 상태도 요즘 걱정됩니다.""우리 오빠가 왜요?"강이한의 상태가 걱정이라는 말에 강서희의 말투가 긴장되기 시작했다.그녀는 정말 자신과 함께 자란 이 오빠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강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그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이한이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듣기만 하면 그녀는 걱정됐다.강서희가 강이한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왕숙은 가뜩이나 답답했던 마음이 더욱 화가 났다."그들이 어떻게 아가씨를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그야말로 강씨 가문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이었다.왕숙은 분노로 가득 찼다."……""부인께서는 요즘 회사 일로 바쁘십니다. 도련님, 도련님은..."강이한 얘기가 나오자 왕숙이 굳었다.강서희는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기다릴 수 없었다."말해봐요."왕숙은 그녀가 그동안 외부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강서희가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은 의심할 것 없이 강이한의 소식이었다.왕숙은 그녀를 쳐다보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죽었습니다."그 여자가 죽었어, 죽었다는 건 강서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왕숙, 지금 무슨 뜻이지?'"도련님은 매일 그 여자의 유골함을 가지고 홍문동에 가셔서 문도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회사도 상관하지 않습니다.""…""부인은 지금 바빠서 아가씨를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가씨도 강씨 집안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가족으로 지냈는데 어떻게 아가씨를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왕숙은 말할수록 화가 났다.이번에 강서희를 데려왔을 때,
왕숙이 나갔다.강서희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정신이 아찔했고 온통 머릿속은 홍문동의 모든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미치도록 이유영을 질투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죽은 사람을 질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질투했다."하하, 졌어.”자신을 조롱하며 웃다 보니 눈물까지 나왔다.'어쩐지 요즘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더라니. 가장 신경 쓰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지.'진영숙의 사랑은 항상 이기적이었고 그녀를 입양하더라도 그녀를 무시했고 잘해준 것도 그녀가 예뻐서, 이용할 가치가 있어서였다.지금 그녀는 여기에 갇혀 계속 나갈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그녀의 악명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렇게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은 진영숙에게도 사용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었다.그러면 강이한은... 그녀의 모든 희망은 그에게 있지만 지금 그녀의 모든 희망도 그로 인해 깨졌다.그녀는 정말 졌다. 다시 재판하게 되었을 때, 강서희가 말했다."저, 한지음을 만나겠어요.”결국 말을 바꿨다. 전에는 항상 강이한과 진영숙을 만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한지음을 만나겠다고 했다.이 말을 할 때, 그녀는 마치 천지가 뒤집힌 후 모든 것이 평온해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감정도 예전만큼 격해지지 않았다.상대방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마침내 그녀의 요구를 만족시켰다.두 시간 후, 한지음이 왔다. 응접실에 있던 그녀는 미심쩍은 듯 손으로 부채질을 했고 보이지 않아도 강서희의 낭패를 볼 수 있었다.강서희는 그녀의 이런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는지 신경이 흐트러졌다.그녀는 지금 이렇게 낭패한 데 반대로 한지음을 보면...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한지음을 처음 보았다.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깨끗하고 거룩해서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모습을 보면 측은함을 금할 수 없었다.'지금 그 깨끗한 모습으로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웃기네!'"말해봐, 대체 어떻게 한 거야!"강서희가 흰 천을 두 눈에 뒤집어쓴 한지음을 보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그녀는 강
"한지음!""만약 네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나를 찾는 거라면 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우리의 시간을 지체할 뿐이야.”"분명히 너도 참여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모른 척 할 수 있지? 너만 깨끗한 척!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해!”강서희는 무조건이라는 듯이 말했다.'그래, 한지음의 배후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어.'눈앞의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한때 자신과 협력했을 때, 그녀는 이 여자가 자기를 통해 강이한의 곁에 붙어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차근차근 자신을 대신하고, 자신을 뛰어넘어 이유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모두 대신해 강이한의 곁을 지키게 됐다. 자기가 업신여기고 이용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여자가 말이다.강서희는 한지음을 보고 너무 놀랐다. 특히 그녀의 입가의 야릇한 미소를 보고 말이다."너..."강서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슨 말을 하려다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한지음을 만난 목적도 잊었다.힌지음이 일어나 손을 뻗어 흰색 치마를 정리했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우아해 보였다.이 우아함은 마치 한때 높은 위치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만 같았다.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비열해 보이지 않았다.특히 그녀의 숨김없는 우아함은 마치 일부러 인정하듯이, 전에 그녀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한지음, 너 이래서는 좋은 결말이 없을 거야!"좀 지나서야 강서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모든 사람을 속인 건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 거지?'강서희가 기만, 분노, 원한을 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한지음의 목적을 간파하지 못했다. 단지 이 여인이 이렇게 무섭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이유영을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지금 강이한 곁에 있는 건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된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모든 것이 강서희를 둘러싸고 있어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나는 눈이 먼 사람일 뿐이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한지음은 더듬거리며 안에서 나왔다.밖에 나가자 접대받았다. 강이한이 옆에 배치해 준 사람이었다. 유씨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한지음을 부축하여 차에 태우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도련님께서 방금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했습니다."그 말을 듣자 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마음속의 공포가 머리 위로 치솟아 한지음을 부들부들 떨게 했다."어디요?"한지음이 차갑게 물었다."하울 승마장입니다."그녀는 원래 창백한 얼굴인데 안색이 더욱이 하얘지고 호흡마저 원활하지 않아졌다."지금 강이한이 청하시에 있는데, 괜찮겠습니까?"그녀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유씨 아주머니의 안색이 변했고 그녀의 눈빛에 음험함이 스쳤다. 한지음도 느꼈다.그래서 유씨 아주머니가 입을 열기도 전에 대답했다."가요."...강이한이 미쳤다.그는 진영숙의 눈에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가 유골함을 가지고 홍문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소문이 나지 않게 막았다.하지만, 그래도 소식은 밖으로 새나갔고 청하시 전체가 떠들썩했다. 강씨 집안의 양녀가 강이한의 아내를 악랄하게 괴롭혔다고 말이다.또한 강서희와 강이한에 대한 불륜설도 시끌벅적한 모습으로 청하시를 뒤흔들었다.진영숙은 이런 소식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강이한은 줄곧 홍문동에 있었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지금 회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나 해?"진영숙은 소파에 앉아 있는 강이한을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그는 밤낮으로 그 작은 유골함을 안고 온 세상을 품은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회사가 발칵 뒤집혔고 여론이 들끓으면서 회사 주식도 덩달아 하락하고 있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강이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수년간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고 지금 처리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다들 강이한이 정신을 좀 차리길 바랐다.그러나 강이한은 퇴폐적이었다.그는 기다리는 것 같았다."이대로 가다간 동쪽 교외의 일이 언젠가는 너에게 돌아갈 거야. 당신은 그것이 무슨 결과인지
"정말 미쳤구나!”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영숙의 광기에 직면한 강이한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이면서 조용히 말했다."이 결과를 난 받아들일 거야."이유영은 연속 두 번의 인생에서 모두 불타는 고통을 겪었다. 전생에 그가 그녀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그녀는 모든 감각을 잃었고 의사가 그녀가 살아 있다고 말한 것 외에는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그는 매일 그녀와 마주 보며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면서 그는 그녀가 깨어나기를 매일 기다렸다. 그는 그녀를 위해 최고의 성형외과 의사까지 찾았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 고통을 받는 게 마음이 아파서 수술하지 않았고 그녀가 새로운 고통을 겪지 않는 한평생 그녀를 지켜주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다.심지어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깨어나서 자신이 못생겨진 얼굴을 보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살아 있는 한, 그는 그녀의 곁을 평생 지켰지만 결국 악몽이 찾아왔다.식물인간인 그녀는 간암 말기에 걸렸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그녀는 떠났다. 고통을 맛보게 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원히 그녀와 함께할 기회조차 없어져 버렸다.하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이 생에서 그가 그녀에게 한 짓이 더 개망나니라는 것을. 여기서마저도 그녀로 하여금 '강이한'이라고 불리는 고통을 받게 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그는 그녀의 악몽이었고, 그도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었다.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준 모든 고통을 감수할 것이었다. 한때 그가 그녀에게 했던 것들을 이젠 그가 모두 감수할 차례였다.심지어 그녀보다 더 아플 수도 있었다.진영숙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너, 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니?"'미쳤어, 진짜 미쳤어! 그동안 상관하지 않았던 게 그 사람들이 자기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야? 지금 그 대가를 치르겠다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두 사람은 차갑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소은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하시에서도 오직 이유영만이 유일한 존재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이유영이 소은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이유영의 삶은 늘 혼란스러웠다.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은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영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야 했다.파리에 온 이후, 소은지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을 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지금...“흥! 현우야, 앞으로 네가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지켜볼게.”엔데스 명우는 비웃듯 말하고는 매섭게 돌아섰다.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소은지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요?”“당신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게 웃겼어요.”두려움? 그렇다.조금 전, 엔데스 명우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짜내 맞서 싸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그 순간, 소은지는 진심으로 두려웠다.그리고 엔데스 명우가 떠난 뒤에도 소은지의 등에선 여전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형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란 걸!”소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미친 사람이죠.”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어떤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 번 도망쳤다가 결국 어떻게 붙잡혔는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현우를 만난 뒤에야 소은지는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모든 것을
한껏 완화된 긴장감은 소은지의 한마디로 다시 불이 붙었다.소은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롱과도 같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독기를 풍겼다.소은지는 분노로 붉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생생히 드러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담담히 말했다.“병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죽음도 끔찍했겠네.”소은지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후벼팠다.설유나는 죽기 직전까지 엔데스 명우에게 애원했다. 설유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온갖 수단과 계략으로 쟁취한 모든 것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하지만 설유나가 신처럼 여기던 엔데스 명우조차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선 누구도 설유나를 구할 수 없었다.그렇게 설유나는 엔데스 명우의 눈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고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는 설유나를 구할 방법이 있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이유는... 소은지 때문이었다.“이게 진짜...”남자는 이를 악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설유나는 시작일 뿐이야.”소은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도 엔데스 명우에게 닥칠 일이 더 많을 텐데, 벌써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는 어쩌려고?소은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도발하듯 엔데스 명우를 바라봤다.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엔데스 현우가 설유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형제 관계가 아무리 냉랭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시나, 엔데스 현우가 이곳에 나타났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엔데스 현우는 한걸음에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소은지를 빼내 품에 안았다.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형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걸 잊었나 보네.”엔데스 현우의 목소리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아.”강이한은 따스하면서도 아린 눈빛으로 온전히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영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두 사람의 과거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말로 꺼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이미 아물어가는 흉터를 억지로 다시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다시 스며들 뿐이었다.하지만 피할 수 없었고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네 눈이 나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결국 삼켜버렸다.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당장 의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강이한의 말처럼, 그 의사는 정말 괴짜일지도 몰랐다.결국 오늘도 헛걸음이었던 건가?점심 식사 자리에서.“도와줄게.”이유영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강이한이 이유영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유영 앞에 있던 컵이 손이 닿자마자 뒤집혀 버렸고 컵 안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우지와 우현이 서둘러 다가와 물잔을 정리했다.그 사이, 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유영은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안은 순간, 이유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강이한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유영아.”이유영은 여전히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지난 생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던 이유영도 여전히 어둠은 공포였다.사실, 어둠 속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찬란한 햇빛 아래서 살아가길 원하니까.다양한 색채를 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유영 역시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강이한의 기억 속엔 지난 생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느꼈던 절망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의 강이한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강이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소문으로만 듣던 ‘염 선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그 시간 동안 우지와 우현은 휴대전화를 빌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강이한답게 이미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아침에 나갈 때부터 강 선생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했어요. 외부 사람들과 연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우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이 이유영을 둘러싼 모든 외부 연락을 완벽히 차단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이유영은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 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우지가 이유영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아가씨.”“네?”“적어도 부인께는 아가씨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임소미를 말하는 것이었다.우지와 우현은 임소미가 이유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이유영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아이를 잃은 뒤로, 임소미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리고 현재 이런 상황까지 겹쳤으니, 임소미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할지는 뻔한 일이었다.이유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네.”이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이한에게 할 말은 이미 다 했지만, 그 남자는 끝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밖에 비가 아직도 오고 있나요?”“네.”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우천시의 비가 얼마나 지독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빗소리는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마저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강이한이 돌아왔을 때, 이유영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우지가 걸쳐준 망토를 두른 채, 조용히 비가 오는 풍경과 녹아든 모습이었다.강이한의 몸에서는 축축한 빗물 냄새가 났다.강이한이 다가오자마자 이유영은 그 냄새를 감지했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런 자신의 반응이 너무 싫